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05.206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낙천정 찾아간 명나라 사신
대마도 정벌, 조선의 위상이 달라지다
대마도 원정 승리는 태종의 정치적인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세종이 매일 같이 수강궁에 문안드리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고 대신들도 줄을 이었다. 대마도 정벌이 승전으로 끝나고 긴장이 풀려서일까? 태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더불어 대비 민씨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태종은 좌의정 박은과 우의정 이원을 불렀다.
“수강궁은 송나라 광종의 궁 이름인데 그 이름을 취해서 우리 궁의 이름으로 한 것은 무엇 때문이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더니 건강이 좋지 않으니 수강궁이 찍혔다.
“홍범(洪範) 서경(書經)의 편명에 수(壽)자와 강(康)자 한 글자씩 들어 있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 광종의 궁 이름이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송구한 듯 박은이 머리를 조아렸다.
“황족인 조여우와 외척인 한탁주가 영종을 황제로 옹립하자 어쩔 수 없이 황위를 양위한 광종이 격분한 끝에 병이 나서 수강궁에 6년 동안 피해 있다가 붕(崩)하였소. 이 일은 송감(宋鑑)에 있오.”
송감은 편년체로 쓴 송나라 역사책이다.
“대신 노릇을 하는 자는 마땅히 글을 널리 알아야 하는데 신들은 배우지 못한 탓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예조로 하여금 자세히 연구하여 고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고친다면 기국(氣局)이 좁아지는 것이니 고칠 것 없소. 액운을 당하면 피접할 곳이 있어야 하는데 두 번이나 송도에 행차할 때 폐해가 적지 않았소. 낙천정에 궁을 짓고 풍양에 이궁을 건축하도록 하시오. 또 ‘무악은 가히 도읍할 만한 곳이라’하였으니 궁을 지어 때에 따라 행차하면 왕래간의 폐해가 덜 할 것이오. 재목은 내가 이미 준비 했으니 국가에 폐될 것이 없을 것이오.”
도성을 벗어나고 싶다, 이궁을 지어라
수강궁을 중심으로 동서와 남쪽에 이궁을 지어 건강이 좋지 않을 때 피접하겠다는 뜻이다. 옛 사람들은 병이 나면 귀신이 달라붙어 해꽂이 하기 때문에 장소를 피해야 한다고 믿었다. 태종이 선공제조(繕工提調) 박자청과 병조당상관(兵曹堂上官)을 불렀다.
“백 칸을 넘지 않게 하고 사치하게 짓지 말라.”
장인과 군사를 동원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세 군데서 공사가 벌어졌다. 낙천정에 궁을 짓고 풍양에 공사판이 벌어졌다. 또한 하륜이 생전에 그토록 도읍지로 추천하던 무악산 아래 공사가 벌어졌다. 풍양은 오늘날의 남양주시 진접면 내각리이고 무악산 이궁은 연희궁이다.
병세에 차도가 없는 대비를 위하여 의산군(宜山君) 남휘의 집으로 이어(移御)했으나 별무 효과였다. 대비의 병세가 더욱 악화 되자 태종과 대비가 낙천정으로 아예 옮겼다. 모후가 병환으로 눕고 부왕이 낙천정에 기거하게 되자 세종이 낙천정에 문안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임금이 행차하면 유정현·박은·이원을 비롯한 삼정승과 조연·변계량·조말생·허조·이명덕·곽존중·원숙·조서로 등 대소신료가 배행했다.
마침내 사헌부가 낙천정에 나아가 우균이 함부로 자기 직무에 이탈한 죄와 윤곤·윤자당이 평안도에 명을 받들고 가서 군사를 조달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권력의 심장부가 낙천정으로 옮겨간 폐단이었다. 태종이 원하던 원치 않던 낙천정이 최고 통수권자의 집무실이 된 셈이다.
“일찍이 유사에 명하여 만약 나에게 아뢸 것이 있거든 먼저 주상께 아뢰어 나에게 전달하게 하였는데 어찌 갑자기 와서 소를 올리느냐? 병조는 어찌하여 이를 저지하지 않았느냐.”
태종이 역정을 냈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머쓱해졌다. 허나 해바라기는 해를 좇아가는 생리를 어찌하랴.
세종이 하루가 멀다 하고 문안을 가고 공비(恭妃)도 낙천정에 나아가 대비께 문안하고 이튿날 돌아오는 날이 잦아졌다. 왕실과 조정의 중요 인물이 번질나게 이동하게 되자 문제가 대두되었다. 임금과 왕비의 어가가 살곶이를 건너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영의정 유정현이 주청했다.
“상왕 전하와 대비마마께서 낙천정에 계시니 문안 길에 중량천을 건너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살곶이에 다리를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이오. 다리를 놓되 홍수에도 끄떡하지 않은 돌다리를 놓도록 하시오.”
창덕궁에서 출발한 어가가 흥인문을 빠져나와 전관원(篆串院)앞에서 중랑천을 건너려면 임금이 가마에서 내려야 했다. 당시 살곶이에는 섶다리 비슷한 흙으로 만들어진 다리가 있었다. 장마철이면 떠내려가 매년 새로 다리를 만드는 일을 반복했다. 이것마저 공사 중일 경우에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태종은 세종의 뜻을 가상히 여기고 이궁 공사에 여념이 없는 선공감 박자청으로 하여금 다리 놓는 일을 몸소 감독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다리가 살곶이다리다.
명나라 사신이 들어왔다. 대마도 정벌 이후 처음이다. 사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 명나라가 대마도 정벌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효령대군으로 하여금 서교에 나가 사신을 맞이하라 명한 태종은 좌의정 박은에게 술을 받들고 벽제역에 나아가 사신을 영접하여 위로하라 명했다.
벽제역에서 하룻밤 묵은 사신이 입성했다. 황엄이다. 비록 환관 출신이지만 태감(太監)이며 예부의 조선 담당 내사다. 조선에 들어오면 총독처럼 군림하여 임금과 조정 대신들의 심기를 괴롭혔던 인물이다. 예쁜 여자는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며 조선의 처녀들을 무더기로 끌어가 딸을 둔 아비들에게는 저승사자와도 같은 사람이다. 특히 태종과는 악연이 있었다.
꼬리를 내리는 명나라 사신 '황엄'
태종 즉위 초. 태종의 즉위를 윤허한다는 황제의 고명과 인장을 가지고 온 황엄이 연회 중 무례하게 굴자 태종이 연회를 중도에 파하고 면박을 준 일이 있다. 귀국한 황엄이 ‘조선왕은 고항(高亢)하여 굽신거리지 않는다’고 황제에게 고해바쳐 명나라와의 관계가 껄끄러웠던 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것을 윤허한다는 칙서를 가지고 왔다. 태종이 의장과 호위를 갖추고 태평관에 거둥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한양에 오신 뒤에 국왕이 예를 행하고 또 대례를 아직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다시 와 보지 못하여 실례되었노라.”
어투가 달라졌다.
“우리들이 마땅히 먼저 궁에 나아가서 행례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 하지 못하였으니 오히려 실례입니다.”
거들먹거리던 황엄의 고자세는 찾아 볼 수 없다.
“근자에 거처하는 집에 연고가 있어 강변에다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있는데 사신이 오시겠다는 말씀을 들으니 매우 기쁘구려. 그러나 길이 거의 15리나 되니 괴로움이 되실까 걱정이외다.”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왔사온데 비록 30리가 더 된다 하여도 어찌 감히 괴롭다 하오리까. 명일에 마땅히 나아가서 감사를 드리겠나이다.”
연회가 파하고 태종은 낙천정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황엄이 낙천정을 찾았다. 물론 임금 세종도 동행했다. 사신이 도성 밖으로 나가 상왕을 배알한다는 것은 외교 관례에 없는 이례적인 일이다. 대마도 정벌 후, 명나라가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사신을 맞은 태종이 낙천정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황엄과 사신 일행이 모두 참석했다. 조정의 대소신료들도 참례했다. 낙천정에 앉아 한강을 바라보던 황엄이 감탄했다.
“하늘이 만들어 주신 선경(仙境)입니다. 전하께서 한가함을 얻으시어 편히 수양하시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
태종이 사신들에게 술을 권하고 세종에게 서서 술을 내리니 임금이 부복(俯伏)하여 받았다. 임금이 꿇어앉아 술을 올리는데 상왕은 앉아서 받았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사신 조양(趙亮)의 눈에는 경이롭게 보였다.
“신왕(新王) 전하는 노왕을 공경하시어 충효가 겸전하십니다. 내가 사절을 받들고 제후 나라에 여러 번 갔으나 신왕 전하 같으신 어진 분은 처음 봅니다. 노 전하께서 세상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을 얻으시고 세상 밖에서 마음 편히 노니시면서 정신을 수양하시니 과연 지극하신 낙이라 하겠사옵니다. 신왕 전하는 위로는 황제의 권고(眷顧)하심을 받고 다음으로는 아버님의 사랑하심을 받자와 충성을 다하시고 효도를 다하심이 과연 듣던 바와 같이 흡족하오니 고금에 흔하지 않은 일이외다.”
술잔을 비운 조양이 태종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돈이 있어도 자손의 어짊은 사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신의 말씀을 듣고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행여 괴이쩍게 여기지 마시오.”
태종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콧물이 턱에 흘렀다. 자식 칭찬해줘서 싫어하는 부모 없다. 외교적인 수사이지만 아들 세종을 칭찬 해주니 감정이 복받쳐 오른 것이다. 덕담이라도 자신의 후계를 이어갈 아들이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감개무량했다. 성군 기질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하여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
맡아들 양녕과 갈등의 순간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택현은 옳았다고 생각하니 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때 서산에 해가 기울고 노을이 한강에 내렸다. 붉은 노을이 아름다웠다. 태종의 턱수염에 매달린 물방울이 노을에 반짝이고 있었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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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정리하는 태종
아들아, 너에겐 내일이 있다
승전보에 들떠 있는 사이 정종이 인덕궁에서 훙(薨)했다.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올랐으나 아우 방원에게 양위하고 물러난 이방과가 생을 마감한 것이다. 보위에 있었던 2년이 생애 가장 길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판한성부사 맹사성, 전 판서 최이, 경창부윤 우홍강을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에 임명한 태종은 도총제 여칭과 관찰사 이백지를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에 명하여 유훈에 따라 개풍군 흥교리에 산릉을 마련하도록 했다. 정종은 한양을 떠나 어머니 신의왕후 가까운 곳을 택한 것이다.
국장의 규모와 일정을 지시한 태종이 병조판서 조말생을 불렀다.
“이번 강무는 해주에서 실시한다.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
예년의 강무는 경기도 광주와 철원 등지에서 시행되었는데 해주라니 뜻밖이다. 강무는 군사훈련이다. 강무가 끝나면 사냥과 여흥이 있다. 명분은 군사훈련이었지만 태종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개성은 태종에게 꿈과 야망과 좌절의 쓴맛을 보여 주었던 고장이다. 청운의 꿈을 불태우며 스승 원천석에게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며 어여쁜 색시를 만나 장가를 들었던 고을이다. 태조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와신상담 세월을 낚았던 곳이다. 함흥에서 태어난 이방원에게는 제 2의 고향이었다.
세종을 대동한 태종이 도성을 벗어났다. 대소신료가 모화관까지 나와 배웅했다.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이 배행했다. 청평부원군 이백강, 도진무 연사종·최윤덕·이춘생, 병조판서 조말생, 병조참판 이명덕, 병조참의 윤회, 여량군 송거신, 내금위 절제사 이화영 등 12인과 사금 절제사 권희달 등 5인과 사옹제조 2인과 대언 6인이 호종했다.
임진강 나룻가에서 하룻밤을 묵은 태종은 사람을 보내어 송악산 신에게 제사를 드리라 이르고 개성에 들어갔다. 감개가 무량했다. 송악산을 바라보며 성리학에 몰두했던 일. 아버지가 위화도에서 회군했다는 급전을 받고 단기 필마로 급히 개성을 빠져 나가던 일. 형 방간과 서로의 가슴에 칼을 겨누고 전투를 벌였던 일 등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태종과 세종이 등산곶(登山串) 강무장 달달리에 막차를 정했다. 이 날 어가가 금강평(金剛平)에 머무를 때 태종이 매를 팔에 올려서 놓아 보내다가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지는 낙마사고가 있었다. 불길한 징조다. 이튿날 군사훈련은 간단하게 마무리했다.
강무를 끝낸 태종은 세종을 대동하고 홍가이산과 소이산에서 사냥을 즐기고 구월산과 홍해산을 구경하고 어인포(御仁浦)에 머물렀다. 시위한 재상들에게 향연을 베풀고 다시 발갑산(鉢甲山)에서 사냥을 구경하고 고읍상에 돌아와서 머물렀다.
신평산과 군장산 그리고 금굴산을 두루 유람한 태종은 이백강을 보내어 후릉(厚陵)에 제사 드리도록 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형님에 대한 예를 마친 태종은 제릉(齊陵)을 참배했다. 태종이 초헌(初獻)을 하고 세종이 아헌(亞獻)을 했다. 어머니 신의왕후에 대한 아들의 도리다. 부왕과 함께 할머니께 인사드린 세종은 별도로 계명전(啓命殿)에 제사드렸다. 또한 태종은 여흥부원군 민제의 무덤에 환관을 보내어 제사 지내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개성을 주유하고 돌아온 태종은 풍양 신궁에 머물렀다. 공사가 마무리 된 신궁에 아예 주저앉을 태세다. 낙천정에 기거하던 대비가 풍양 이궁으로 이어(移御)했다. 태종이 풍양에 머물게 되자 변계량과 홍섭 그리고 봉녕부원군, 익평부원군, 길창부원군, 의산군, 판한성치사, 지병조사가 문안하였다. 이어 대소신료들의 발길이 줄줄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부원군 이하는 교지를 얻은 뒤에야 풍양궁에 와서 문안할 수 있다.”
태종이 선을 그었다. 정사에 바쁜 신료들은 시간을 뺏기지 말고 국사에 전념하라는 것이다 풍양궁에 머물던 태종이 대비를 두고 낙천정으로 이어했다.
노왕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경거망동 하지 마라’
태종이 풍양에서 낙천정으로 떠났다는 전갈을 받은 세종이 부랴부랴 중량포에 나아가 영접했다. 태종이 목장 가운데에 이르러 말을 세웠다. 뒤따르던 병조판서 조말생과 지신사 원숙을 말 앞에 나오게 하고 꾸짖었다.
“사헌부에서 병조영사(兵曹令史)를 불러 나의 거동을 물었다 하니 이것이 무슨 예절이냐? 홍여방은 공신의 아들로 헌부의 장이 되어 거만스럽게 나의 거동을 묻고 주상에게 고하여 금지시키라고 하였으니 어찌 애경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 것인가? 그것이 나를 옛 임금으로 여긴다고 하겠는가?
또한 ‘갑사들이 양식을 싸 가지고 거둥에 따라 가는 것이 제 집에서 먹고 있는 것만 같을 수 있느냐.’ 하였다 하니 예전에는 한 정승의 행차에도 군사가 반드시 호종하였었다. 이제 갑사들이 양식을 싸 가지고 가는 것으로 말이 된다면 군사는 설치하여 무엇에 쓰려는가?”
원숙은 황공하여 부복하고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낙천정에 이르니 박은과 이원이 문안하고 아뢰었다.
“헌부가 매우 무례하였사오니 의금부에 하옥하고 국문하는 것이 의당하오이다.”“집의(執義) 박서생과 장령 정연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노왕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다시 얼어붙은 조정은 육조 당상관 각 한 사람씩 낙천정에 나아가 매일 문안했다. 낙천정에 머무르면서도 군사의 끈은 놓지 않았다. 군기감(軍器監) 제조 윤자당과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명령하여 새로 건조한 전함(戰艦)을 양화진에서 시험하여 그 결과를 보고하라 명했다.
낙천정에 머물던 태종이 세종을 대동하고 대모산(大母山)을 찾았다. 하륜이 잡아 준 수릉(壽陵)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자신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시름에 잠기던 태종이 세종에게 말했다.
“하(河) 정승 윤(崙)은 사람됨이 남의 잘하는 것은 되도록 돕고 남의 잘못하는 것은 되지 아니하도록 말리어 충직하기가 견줄 사람이 없었다. 전번에 내가 양녕에게 선위(禪位)하려고 할 때 윤이 나에게 고하기를 ‘만일 선위하려고 하신다면 신은 마땅히 진양으로 물러가서 쉬겠나이다’ 하면서 말렸는데 여러 민가(閔哥)들이 그런 것을 모르고 이간을 붙이려고 모략하였지만 나와 윤이 서로 알아주는 사이를 누가 이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조준을 아끼는 것이 윤을 아끼는 것만 못하니라.”
수릉을 살펴본 태종은 경안역(慶安驛) 아래들에 머무르며 이천 현감을 불렀다.
“농기구를 마련하여 양녕의 집에 넣어주고 농사에 종사할 일꾼은 그의 소원대로 주어 노비로 쓰게 하라.”
광주에 있던 양녕이 새로 집을 지어 이천에 옮겨와 있었다. 낙천정으로 돌아온 태종을 위환 잔치가 베풀어졌다. 탄신 축하연이다. 부름을 받고 이천에서 달려온 양녕대군과 효령대군·경녕군과 여러 종친이 참석했다.
조정에서는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과 이백강·조대림·권규·윤계동·유관·조연·박자청·정역·이화영·변계량·최윤덕·권영균·허지·허조·조말생·신상·이명덕·안순·한확·홍부·이교·원숙 등이 입시했다. 권희달·이춘생·유은지·황상·허해·윤회·김익정·유영·조서로·권도 등은 낙천정이 비좁아 바깥 대청에서 사찬했다.
세종이 내전에서 하례하는 예식을 행하고 안팎 의복과 안장 갖춘 말을 헌상했다. 공비와 명빈과 의화 궁주는 각각 체수박(遞手帕)을 헌상하고 각도 관찰사는 각기 그 지방 산물과 말 한 필씩을 헌상하였다. 연회에 입시하였던 여러 신하들이 각기 차례로 헌수하고 춤추니 세종도 일어나 춤추어서 헌수하고 태종도 춤을 추었다. 흥에 겨운 태종이 변계량에게 말했다.
“자식이 왕이 되어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니 기쁘도다. 그 아비가 되어 이처럼 누리게 되니 이와 같은 일은 고금에 드물 것이다.”
태종이 세종에게 손수 술을 내리고 정승들에게도 술을 쳐주었다. 지신사 원숙에게 술을 내리며 말했다.
“주상을 잘 보필하도록 하라.”“전하께서 정사를 보시는데 그 처결하는 것이 각기 사리에 합당하였습니다.”
“내가 본디 현명한 줄은 알았지만 주상의 노성함이 여기까지 이른 줄은 알지 못하였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태종이 좌정한 대소신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상은 참으로 문왕(文王) 같은 임금이다. 만일 부인의 말을 들었던들 큰일을 그르칠 뻔하였다. 내가 나라를 부탁해 맡김에 사람을 잘 얻었으니 산수 간에 한가로이 노니기를 이처럼 걱정이 없는 자는 천하에 오직 나 한사람뿐이려니, 중국 역대 제왕의 부자 사이도 나의 오늘과 같지는 못하였다. 고려 충숙왕과 충혜왕 사이에도 비평할 만한 것이 많으니 내 어찌 이 천하에서뿐이랴. 고금에도 역시 나 한사람뿐일 것이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허나, 아버지의 희색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슬픔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양녕은 잠시 혼란이 왔다. 흥겨운 잔치는 밤이 깊어서야 파했다. 효령대군을 시켜 대소신료들을 밖에서 전송하게 한 태종은 임금의 어깨에 의지하여 내전으로 들어가며 지신사 원숙에게 말했다.
“주상이 효양하는 가운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니 무엇을 근심하며 무엇을 구하겠느냐.”
아우 세종의 어깨에 의지하여 내전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양녕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부왕에게 큰 기쁨을 드린 지극한 효심의 눈물일까? 강안(江岸)에 부딪치는 물결소리가 유난히 철썩거렸다. 불효 막급한 참회의 눈물일까? 양녕의 속내를 알아주기라도 하듯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첫댓글 조선 제일의 성군을 발탁한 태종의 탁월함이 끝마무리까지 잘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