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11.212:최종회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종로에서 펼쳐진 석전
외교는 외교다. 군사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명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 대륙 통일의 자신감이다. 국가를 창업했던 남경시대를 마감하고 북경시대의 개막이다. 총인구 5200만 명, 병력 330만, 가용병력 100만, 신성 로마제국의 병력이 10~15만 정도였고 오스만트루크 제국이 최대 35만 정도였으니 가히 군사대국이다.
명나라는 대륙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다. 팽창을 거듭하고 있는 명나라의 자신감은 곧 조선의 잠재적인 위협이다. 언제 밀어 닥칠 줄 모른다. 외교는 사대하지만 군사는 소홀히 할 수 없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국제질서 속에서 총 병력 15만 명의 조선은 명나라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위기가 닥쳐도 도와줄 나라가 없다. 북방의 여진족? 그들은 명나라의 말밥굽 아래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남방의 왜국? 명나라에 바짝 엎드려 있다. 오직 자력뿐이다. 수적인 열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정신력뿐이다. ‘군대는 사기를 먹고 자란다.’고 생각하고 있는 태종은 조선군의 정신력이야 말로 국토를 지키는 보루라 믿고 있었다.
태종이 병조판서 조말생을 풍양궁으로 불렀다.
“명나라가 북경으로 도읍지를 옮겼는데 무엇들 하고 있는 것이냐? 이러고도 군대라 할 수 있느냐? 외교는 외교고 군사는 군사다. 강무를 준비하도록 하라.”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과 총제(摠制) 이중지를 천도 진하사로 북경에 파견하라 명한 태종은 병조판서를 불러 질책했다.
“훈련 장소는 어디로 하오리까?”
“강도 높은 군사훈련은 험준한 산악 지형이 제격이다. 철원으로 하라.”
예년에는 평평한 구릉지역에서 군사훈련을 펼쳤는데 이번엔 다르다. 태종은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조말생에게 일렀다.
“주상이 거상 중에 있지만 짐승을 잡는 것은 아니니 나를 따라 강무에 참석하라 전하라.”
창덕궁에서 출발한 세종이 녹양원(綠楊原)에 미리 도착하여 기다렸다. 풍양궁에서 출발한 태종이 독바위(甕巖) 남쪽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세종이 행차를 돌려 상왕을 영접했다. 태종이 시위 군사와 거둥 때의 모든 일을 모두 생략할 것을 명했다. 날이 저물어 양주 동존(楊州東存) 들에 도착하여 야영했다.
때 아닌 겨울비가 장대비처럼 퍼부었다. 폭우로 냇물이 넘치고 길이 질퍽거려 철원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철원행을 포기했다. 경기, 강원, 충청도 군사들을 동원한 대규모 강무는 취소되었다. 돌아오는 길 양주 동쪽 왕숙천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할 정도였다. 가까스로 내(川)를 건넌 태종과 세종이 함께 풍양궁으로 돌아왔다.
온천에서 휴식하며 맏아들을 보고 싶다
태종이 감기 몸살이 났다. 겨울 날씨에 비바람을 맞은 것이 탈이 난 것이다. 대비를 여윈 세종은 겁이 덜컥 났다.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창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풍양궁에 머물렀다. 손수 모시고 친히 약을 받들어 보살폈다. 태종이 내전으로 병조참의 윤회와 지신사 김익정을 불렀다.
“내가 몸과 기운이 조금 미편하다고 주상이 여기 있으면 되겠느냐? 주상은 하루에 만 가지 정사를 보아야 할 것이니 도성으로 돌아가서 정사를 보아야 할 것이다. 곧 모시고 돌아가도록 하라.”
태종이 몸져 누워있는 사이 이방간이 병들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애증이 엇갈렸던 형이다. 태종은 중사(中使) 정원용을 홍주에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정치적으로는 미워했지만 혈육의 정으로 마지막 가는 길을 보살핀 것이다.
건강이 회복되지 않은 태종이 온천에서 휴양하고 싶었다. 이천으로 방향을 잡았다. 왕실 온천이나 다름없는 해주로 가지 않고 이천을 택한 것은 휴식 중에 양녕대군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태종이 거둥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데 세종이 풍양궁으로 달려왔다. 아버지를 모시고 이천으로 가기 위해서다.
“내가 몸이 불편할 때마다 주상이 예까지 거둥하니 정사에 차질이 있을 것이다. 내가 창덕궁 근처로 들어 갈테니 연화방(蓮花坊) 동구에 이궁을 건축하라.”
이천 온천에서 휴식을 취하고 돌아온 태종은 때 아닌 강우로 철원 강무를 취소한 것이 아쉬웠다. 칼과 군사는 갈고 닦아야 녹이 슬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을 불렀다.
“원행은 무리이니 도성 내에서 석전 훈련을 준비하도록 하라.”
척석군은 고려 때에 설치된 군사인데 건국초기 폐지했다. 무기를 잃었을 때 몸으로 맞부딪치는 석전의 전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 병조에서 예전 군졸을 모으고 새로 사람을 모집하여 조련하고 있었다. 석전(石戰)은 병장기가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전투다. 오로지 무예로 단련된 몸과 돌 하나로 적을 제압해야 하는 백병전이나 다름없는 격렬한 전투다.
태종이 종각에 거둥했다. 세종이 창덕궁에 입직(入直)한 군사를 거느리고 검은 옷에 오대(烏帶)를 띠고 우군의 뒤로 나왔다. 태종은 병조참판 이명덕에게 아패(牙牌)를 내려주며 임금에게 전하라 명했다. 임금이 즉시 말에서 내려 명을 받고 도로 말에 올라 군문(軍門)으로 들어갔다. 태종이 각(角)을 불게 했다. 각 소리와 함께 비로소 계엄이 해제되었다. 세종이 임금이었지만 군권이 없었기 때문에 절차가 필요했다.
태종이 친히 이원·조연·이화영을 삼군(三軍)의 장수로 삼아 직문기(織紋旗)를 내려 주었다. 드디어 종로에서 석전이 펼쳐졌다. 좌군은 방패(防牌) 3백 명, 우군은 척석군(擲石軍) 1백 5십 명으로 편을 갈랐다. 태종이 종루에 자리를 잡고 세종과 종친 그리고 총제(摠制)와 병조의 당상관, 육대언(六代言)이 누(樓)위에서 관전했다.
종로에서 펼쳐진 석전 훈련
양군 지휘부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좌군은 백색깃발, 우군은 청색깃발을 휘날리며 우르르 몰려나왔다. 군사들의 함성이 종로를 진동했다. 돈의문 방향에 포진한 척석군이 돌을 던지고 흥인문 쪽에 진을 친 방패군이 방어하며 교전이 벌어졌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방패군이 척석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물러섰다.
방패군을 지휘하는 총제 하경복·곽승우·권희달·박실과 상호군 이징석·대호군 안희복이 전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기마병을 거느리고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달아났다. 하경복은 돌에 맞아 얼굴을 상하고 박실은 여러 군사에게 공격을 당하여 줄행랑을 쳤다. 대마도 정벌의 맹장 박실이 망신을 당한 것이다.
“너희들이 내 옥관자를 보았느냐?”
옥관자(玉貫子)는 망건에 달아 당줄을 걸어 넘기는 구실을 하는 작은 고리이지만 관품과 계급을 나타내기도 했다. 1품은 만옥권이라 하는 옥환을 했고 2품은 금관자, 3품은 매화양 옥관자를 하였다. 즉 대장을 알아보고 집중공격을 하느냐는 볼멘소리다. 박실에 대한 공격을 멈춘 척석군이 이징석이 탔던 말을 빼앗아 태종에게 바쳤다.
전투는 장비가 우선이 아니라 사기가 중요하다
“경복의 무리가 크게 다치지나 아니하였는가?”
“비록 싸움은 패하였으나 많이 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하경복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누(樓)에 올랐다.
“공격다운 공격 한 번 못해보고 어찌하여 패했느냐?”
“저녁노을이 눈부시게 비쳐오고 바람과 티끌이 얼굴에 가득히 날아와서 돌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영을 바꾸어 겨뤄보도록 하라.”
태종의 명이 떨어졌다. 싸우는 방법도 달라졌다. 돌을 던지는 것을 금하고 몽둥이를 가지고 맞붙게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방패군이 척석군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섰다.
“나는 방패군이 건장한 보졸로 알았더니 실상 겁이 많고 용기가 없는 자들이구나. 척석군 40명을 뽑아서 방패군 편에 가담하게 하라.”
역시 결과는 똑 같았다. 앞장서서 싸우는 자는 척석군뿐이었고 방패군은 도망하여 숨었다. 도망하지 않은 자는 고함만 지르면서 성세(聲勢)만 도울 뿐이었다.
“맞아서 넘어진 사람은 다시 치지 말라. 죽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태종은 의원(醫員)에게 명하여 다친 자를 돌보아 치료하게 했다. 땅거미가 짙어지는 저녁 무렵에 강무는 끝났다. 전투는 장비가 우선이 아니라 사기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 한 판 훈련이었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12: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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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세상을 떠나다
오르는 길보다 내려오는 길이 어렵더라
연화궁이 완공되었다. 세종이 풍양궁에 나아가 태종을 모셔왔다. 정부·육조와 창녕 부원군 성석린·평양 부원군 김승주가 신궁에 나아가 문안하였다. 태종이 병조와 대언사(代言司)에 명했다.
“경녕군이 주상전(殿)에 무시로 나아가서 뵙고 한원군은 집현전에서 글을 배우고 있다 하니 옳지 못한 일이다. 총애함이 여러 아우들과 다른 것은 옛날부터 경계하는 바이다.”
경녕군은 효빈 김씨 소생으로 임금 세종하고는 배다른 형제간이다. 민씨 가문의 핍박을 받으며 태어났고 집중 견제를 당한 것이 측은지심을 유발하여 왕실의 총애를 받았다. 총애는 편애를 낳고 편애는 질시를 자극하니 자제하라는 뜻이다.
창덕궁에서 세자 책봉식이 거행되었다. 훗날 문종으로 등극한 원자 이향(李珦)이다. 세종이 면복(冕服)을 입고 인정전에 나와 원자(元子) 이향을 세자로 책봉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저부(儲副)를 세워서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 것은 국가의 규례다. 옛 일을 상고하여 이에 떳떳이 장전(章典)을 거행한다. 너 향(珦)은 의표가 준수하고 총명하여 국가의 신기가 돌아가는 바이다. 적자(嫡子)의 높은 자리는 여러 백성들의 심정이 귀속되는 바이니 좋은 날을 택해 왕세자로 하노라”
세종이 책문(冊文)을 읽어내려 가는 사이 태종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손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꿈같은 일이 현실화 한 것이다. 비바람 몰아치던 정상(頂上)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 평지에 내려온 느낌이었다. 하산 길을 택했을 때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이제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책봉식을 마친 세자가 종묘와 광효전을 알현했다. 차세대를 이어갈 왕세자임을 조상에게 고하는 의식이다. 공식절차를 마친 세종이 의정부에 유시했다.
“사람의 나이 8세가 되면 입학하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지금 세자 나이 8세이니 마땅히 좋은 날을 가려서 입학해야 할 것이다.”
세자가 의위를 갖추고 요속을 거느리며 성균관에 행차했다. 유복을 입고 대성전에 들어가 문선왕과 네 분의 배향위에 제사를 지내고 십철(十哲)과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술잔을 올렸다. 이어 박사에게 속수례(束脩禮)를 행하고 세자가 당(堂)에 올라 소학제사를 강(講)했다. 이제 비로소 세자가 학생이 된 것이다.
연화궁의 태종이 지신사 김익정을 불렀다.
“주상이 날마다 문안 오는 것은 좋은데 국사를 폐할까 염려된다. 그대가 주상에게 하루 걸러 오도록 아뢰어라.”
“주상께서는 매양 정사를 보시고 난 후에 문안드리며 또 일이 있으면 즉시 계달(啓達)하는 까닭으로 정사가 침체(沈滯)되지 아니 합니다. 주상께서는 항상 주나라 문왕이 날마다 세 번 문안하는 일을 본받지 못한 것을 송구스럽게 여기온데 어찌 하루걸러 문안하는 일로써 편안하게 여기겠습니까.”
“왕래할 때에 시위하는 군사가 괴로움이 없느냐?”
“시위하는 사람은 다만 입직(入直)한 군사뿐이오니 누가 감히 괴롭게 여기겠습니까.”
“과연 그대의 말과 같다면 나도 또한 안심한다.”
연화궁이 불편하다며 태종이 수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도성과 지방에서 큰 역질(疫疾)이 창궐했다. 치사율이 높은 질환이었다. 창덕궁 나인들이 감염되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깜짝 놀란 세종이 피방 차원에서 태종을 연화방으로 다시 모셨으나 불편하다며 천달방 신궁으로 옮길 것을 명했다. 천달방은 오늘날의 동숭동이다.
원경 왕후가 돌아간 뒤 의빈과 명빈이 있었으나 신녕궁주가 항상 궁안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사가의 안방마님 격이다. 궁주가 먼저 연화방에서 천달방 신궁으로 옮겨 갔다. 태종의 이어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비어있던 집을 수즙하여 준비가 완료되자 태종이 천달방 신궁으로 옮겼다.
세종이 천달방 신궁에 문안한 다음 부왕을 모시고 살곶이에 나가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 낙천정에서 점심을 들고 태종은 천달방 신궁으로 돌아오고 세종은 창덕궁으로 환궁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 태종이 고열에 시달리며 자리에 누웠다.
세종이 급히 신궁으로 나아가 부왕을 간호하며 밤을 새웠다. 급보를 받은 종친·부마·문무 2품 이상 관원들이 천달방 신궁으로 달려왔다. 종친은 궁중에서 유숙하고 병조와 대언사도 모여서 숙직하였다.
병석에 누운 태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의정부에서 도전(道殿)과 불우(佛宇)와 명산에 기도드리기를 청하니 세종이 각처로 사람을 나누어 보내 기도하게 하는 한편 전국 각지의 수령들에게 왕지를 내렸다.
“부왕 전하께서 여러 날 편치 못하시니 이죄(二罪) 이하의 죄인은 판결된 것이나 아니한 것을 막론하고 모두 석방하라.”
전국 각처의 형옥에 투옥되어있던 죄수들을 풀어 준 세종은 양녕대군 이제를 유배처에서 불러와 부왕을 간호하게 했다. 성산부원군 이직을 종묘에 보내 기도드리고 좌의정 이원을 소격전(昭格殿)에 보내어 기도드리게 했다.
태종의 병환에 차도가 없자 문안하는 신하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군대로 하여금 신궁 주위를 엄하게 호위하게 했다. 세종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유정현과 이원이 다시 신당과 불전 중 영험이 있는 곳에 기도하고 한양과 지방의 형옥에 갇혀있는 일죄(一罪)이하의 죄수를 석방시키자고 주청했다.
“신당과 불전에 비는 것은 그만두라. 모반대역과 부모를 때리거나 죽인 자, 처나 첩으로 남편을 죽인 자, 노비로 상전을 죽인 자는 이미 발각된 것이나 발각되지 아니한 것을 불문하고 모두 사면하여 석방하라.”
세종은 여러 위(衛)에 영을 내려 태종이 있는 천달방 신궁의 동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수직하는 갑사(甲士)의 수를 증원했다. 의정부와 제조(諸曹)의 현임과 전임 재추(宰樞)로서 문안 온 자는 궁 앞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각각 동구에 모여서 정부당상(政府堂上) 한 사람과 제조당상(諸曹堂上) 한 사람이 병조에 들어와 문안하고 물러가게 했다.
영험한 곳에 기도드리자는 유정현의 청을 물리친 것이 마음에 걸린 세종은 우의정 정탁을 흥천사, 곡산부원군 연사종을 승가사에 보내어 약사정근(藥師精勤)을 배설하고 판좌군도총제부사 이화영을 개경사에 보내어 관음정근(觀音精勤)을 베풀도록 했다.
호위하는 군사를 두개 번으로 나누어 번갈아 입직하게 하고 진무(鎭撫) 각 1명과 대졸(隊卒) 각각 6명을 더 보내어 동서남북 대문과 소문 등 도성문(都城門)을 나누어 지키게 하여 뜻하지 아니한 일에 대비하게 하였다.
태종의 병환이 조금 나았다. 세종이 부왕을 모시고 연화방 신궁으로 옮겼다. 병환이 위독하여 방위를 피하기 위해서다. 삼군의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통같이 연화방 신궁을 에워싸고 호위했다.
세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종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태종 나이 56세였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로부터 나라를 이어받은 태종은 왕통을 확립하고 세세손손 이어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건국 30년. 고려의 유민들이 아직도 저항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백성들도 고려 왕씨에 심정적인 연민의 정을 보내고 있는 현실에서 후사가 부실하면 만고의 역적으로 내몰린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로부터 나라를 물려받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한 자신이 역사에 오롯이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후대가 똑바로 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차세대가 똑바로 서기 위해서는 초석이 튼튼해야 하고 그 반석위에 똑바로 선 모습을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태종이 눈을 감는 모습을 아들 세종이 지켜보고 있었다.
첫댓글 오늘로그 태종 이방원 종료합니다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작년 12월 19일부터 84일간의 긴 여정, 힘든 일 끝까지 잘 마무리하셨습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본래 역사소설에 관심이 많았는데 본인에게 유익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좋은 역사소설을 올려주신 김동일 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신 세종대왕이 나오시기 까지의 배경을 좀 더 깊이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