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遷都)가 부당한 역사적 이유 2004/10/21 15:50 | 추천 0 스크랩 2 |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제 더 이상 천도(遷都)를 가지고 혹세무민하지 말아주십시오.
이제 더 이상 쓸데없는 오기를 지니고 버티지 말아주십시오.
이제는 민생을 생각해 주십시오.
서울이 서울인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정해진 일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바로 지배세력이면서
이념적으로 꾸며낸 '지배세력의 교체'를 노리는 단대(斷代)의 몇몇 철부지들 때문에
그렇게 허투루 달라질 수천년의 유구한 역사가 아닙니다.
지난달 9일 서울 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 학술대회
'한성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서
역사학자 한영우(韓永愚) 한림대 특임교수(서울대 명예교수)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웬만해선 남의 글 안 퍼오는데,
이번만큼은 좀 다릅니다.
각주는 뺐습니다.
한성백제와 서울의 역사
1. 머리말 서울은 지금까지 600년 왕도로 알려져 왔으며,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책자도 《서울육백년사》로 되어 있다. 서울의 역사를 조선왕조시대의 왕도에서부터 찾을 때에는 600년사가 당연하다. 그러나 한성시대 백제 500년 역사를 추가할 경우에는 2천년사가 된다. 또 고려시대 327년간 南京의 역사도 무시할 수 없다. 한성 백제와 남경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수도로 선정되었고, 조선왕조 수도의 전통 때문에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수도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서울은 지금 1천만이 넘는 인구를 포용한 아시아 굴지의 대도시로 성장했으며, 해방 후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대한민국의 기적적인 성장을 주도했다. 그래서 7천만 한민족의 심장부로 막대한 영향력을 국내외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오늘의 서울은 지나친 과밀화와 집중화로 국가발전에 미치는 역작용도 없지 않고, 그래서 수도이전 문제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늘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서울의 빛과 그늘을 균형 있게 살펴보고 이에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2. 한성시대 500년 - 백제의 전성기 서울이 자리 잡고 있는 한강유역은 큰 강과 큰 산, 그리고 넓은 들판이 어우러져 옛부터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 그리고 초기철기문명이 일찍부터 일어나고, 그 유적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서울사람들은 청동기와 초기철기문명을 바탕으로 城邑國家를 형성하고 馬韓의 일부로 있다가, 기원전 1세기경에 북쪽에서 내려온 부여족의 일파인 溫祚집단과 결합하여 새로운 聯盟國家를 형성했다. 그것이 百濟다. 백제의 수도인 慰禮城은 한강 북쪽과 남쪽에 있었으나, 주로 남쪽의 河南慰禮城이 중심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확정하기 어려우나, 하북위례성이 지금의 서울시 경역을 벗어나 있지 않고,1) 하남위례성도 지금의 風納土城 ‧ 夢村土城, 그리고 하남시 二聖山城과 春宮洞 일대가 유력한 후보지로 떠오르고 있어 서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2) 위례성은 漢城으로도 불렸는데, 이곳에서 500년 역사를 운영하는 동안 백제는 삼국 중 최강국으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 3세기 중엽의 8대 임금 古爾王 때에는 6좌평제도와 16관등제, 관료와 임금의 복색을 정하여 관료제도를 세련시키고, 4세기 중엽의 13대 임금 近肖古王 때에는 고구려의 平壤을 정복하고 故國原王을 전사하게 만드는 등 국력이 절정에 올랐으며, 남으로 가야를 정복하여 남해안지역을 장악하고, 일본과 중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 천리시 석상신궁에 소장되어 있는 七支刀는 근초고왕이 倭王을 諸侯로 보고 하사한 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의 요서 지방과 월주 지방 등지에 百濟郡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중국측 기록들을 볼 때, 백제의 대외무역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백제의 역사책인 《書記》가 편찬된 것도 바로 근초고왕 때이며, 漢山으로 移都한 것도 이때이다. 근초고왕에 이어 4세기 말 15대 임금 枕流王 때에는 불교가 공인되고(384), 사찰이 세워져 백제문화가 불교문화로 한 단계 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성시대의 백제 왕궁은 상당한 호화스러움을 보여주었던 것 같다. 4세기 말 16대 임금 辰斯王 때에는 穿地造山하여 신기한 꽃과 새들을 길렀다고 하는데, 인공적으로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든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또 王城 西門 밖에는 射臺가 있어서 수시로 군사들이 활쏘기를 익혔으며, 군대사열을 크게 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는 4세기 말 이후로 고구려에서 廣開土王과 長壽王이 등장하여 강력한 남진정책을 쓰면서 점차 그 힘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때 백제는 일본과 적극적인 동맹정책을 쓰기 시작하여 왕자들이 일본에 가 있다가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한성 백제가 가장 곤경에 처한 것은 5세기 중엽의 21대 임금 蓋鹵王 때였다. 강력한 남진정책을 쓰고 있던 장수왕은 백제를 군사적으로 공격하기 전에 내부 붕괴를 유도하기 위해 승려 道琳을 간첩으로 보내 개로왕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하도록 부추겼다. 도림의 말에 혹한 개로왕은 土城 ‧ 宮室 ‧ 樓閣 ‧ 臺榭 등을 장려하게 짓고, 욱리하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석곽을 만들고 父王을 매장했다. 지금 石村洞과 芳荑洞에 남아 있는 백제고분의 일부가 아마 이때 조성된 것이 아닐까. 개로왕의 무리한 토목공사로 國庫가 허갈되고 民生이 도탄에 빠져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는데, 이때를 이용하여 장수왕은 개로왕 21년(475)에 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 공격에 나섰다. 그리하여 7일 만에 北城을 함락하고, 이어 南城을 함락시켜 개로왕을 잡아다가 阿且山城으로 끌고 가 죽였다. 이에 개로왕의 아들 文周王은 475년에 부득이 도읍을 熊津(공주)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성왕 16년(538)에 다시 사비로 遷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사비 백제도 122년을 넘기지 못하고 660년에 문을 닫고 말았다. 백제 멸망을 놓고 金富軾의 《三國史記》는 백제인의 도덕적 결함을 멸망 이유로 들었으나, 조선후기 대학자 丁若鏞은 단연코 이를 부정하고, 천혜의 요새지인 漢城을 포기한 천도를 백제 멸망의 최대 원인으로 해석했다. 웅진과 사비는 수도로서의 적합성이 한성에 비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首都의 지정학적 위치가 국가의 흥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한성의 입지조건이 얼마나 좋은지를 茶山은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3. 327년간 高麗의 南京 - 漢城의 부활 백제가 漢城을 포기하고 南遷한 뒤 한성 지역은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6세기 중엽에 眞興王의 신라 수중에 들어가고, 신라는 이 지역 장악을 계기로 7세기 중엽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漢江을 장악하는 나라가 韓半島를 장악한다는 교훈을 보여주었다. 통일신라시대에 河北 漢城은 漢陽郡이 되고, 河南 漢城은 漢州로 되었는데, 한양군은 한주에 속했다. 하북 보다 하남의 위상이 더 높았다. 고려에 들어오면서 점차로 하남 漢州 보다 하북 漢陽郡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수도 開京을 가장 가까운 南方에서 받쳐주는 도시로 주목 받은 것이다. 이름도 楊州로 바뀌었다. 王建은 투항해 온 후백제왕 甄萱에게 양주를 食邑으로 주어 우대했다. 저 옛날 백제의 수도였다는 점도 고려되었던 것 같다. 10세기 말 成宗代에 이르러 楊州는 12牧의 하나로 승격되고, 여기에 左神策軍을 두어 右神策軍을 둔 海州와 더불어 開京을 좌우에서 방어하는 2輔의 하나로 삼았다. 말하자면 楊州가 정치 ‧ 군사적으로 광역수도권에 포함된 것이다. 성종 때에는 신라의 수도였던 慶州를 東京으로 승격시키기도 했는데, 태조 때 平壤을 西京으로 승격시킨 정책과 아울러, 고려가 옛 삼국의 수도를 우대 포용하여 민족통일의 밀도를 높이려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고려의 건국과 더불어 개경의 남방도시로 주목받던 양주는 11세기 중엽 11대 임금 文宗 21년(1067)에 이르러 牧에서 南京으로 승격되고, 재상급인 留守官이 파견되었다. 이로써 양주는 西京 및 東京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급의 부수도가 된 것이다. 문종은 南京에 宮闕 ‧ 樓亭 ‧ 苑囿 등을 건설하고 주변 군현의 인구를 이주시켰다. 문종대 南京으로 승격된 楊州는 11세기 말 ∼ 12세기 초 15대 임금 숙종 때에 이르러 遷都까지 내다보는 또 한 단계 비약이 이루어졌다. 특히 道詵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術士 金謂磾 등이 앞장서서 漢陽明堂說을 제시하고,3)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면 36국 혹은 70국이 조공을 바치고, 한강의 魚龍이 四海로 뻗어나가고, 四海의 神魚들이 한강으로 모여들고, 국내외 商客들이 보배를 갖다 바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고려가 세계의 중심국가로 부상하는 명당이 된다는 것이다. 김위제는 또 西京과 開京, 그리고 南京을 저울에 비유하여, 서경은 저울의 접시, 개경은 저울대, 남경은 저울추에 해당한다고 하여 이 세 가지를 갖추어야 국토가 균형을 이룬다고 했다. 김위제 등의 주장에 따라 숙종 6년(1101)에 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하고 尹瓘 등을 남경에 보내 남경의 경역을 확정하고, 궁궐 등을 새로 지었으며,4) 남경 주변의 여러 군현들을 남경에 예속시켰다. 그리고 나서 숙종은 몇 개월간 남경에 巡駐했다가 돌아왔다. 이처럼 남경이 고려중기에 크게 주목된 것은 풍수지리설의 영향도 컸지만, 그 이면에는 廣州의 王規(왕건의 장인), 坡州의 尹瓘, 衿川의 姜邯贊, 仁州의 李子淵, 利川의 徐熙 등 중요한 정치세력이 한강 연안에서 꾸준히 성장한 사실과도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南京明堂說은 심각한 자기모순에 부딛쳤다. 즉 漢陽의 주인공은 王氏가 아닌 李氏가 된다는 讖說 때문이었다. 여기서 李氏主人說의 근원은 五行의 相生說에 있었다. 즉 고려는 水德을 칭한 왕조이므로 그 다음에는 木德을 가진 木子 즉 李氏에게로 天命이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려는 이곳에 오얏나무를 심고 李氏를 尹으로 삼되 龍鳳帳을 매장하여 李氏의 氣를 누르려고 했다.5) 한양명당설의 자기모순 때문에 역대 임금들은 남경에 순주했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는데, 특히 恭愍王은 남경에 도읍하면 36국이 來朝한다는 승려 普虛의 말을 깊이 믿어 성곽과 궁궐을 다시 짓고 한때 천도하기도 했다. 그 후 禑王 8년과 恭讓王 2년에도 또 다시 천도가 이루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恭愍王 이후로 民心도 크게 동요하여 漢陽으로 짐을 싸들고 이사하는 사람들이 市場을 이룰 정도였는데, 이를 국가에서 막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미 민심은 開京을 떠나 漢陽으로, 王氏를 떠나 李氏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4. 519년 朝鮮과 大韓帝國의 수도 (1) 太祖의 漢陽遷都와 도시 건설 漢陽이 국가중흥의 명당으로서 이씨가 주인이 된다는 민중의 믿음은 결국 李成桂에 의해 달성되었다. 태조가 漢陽遷都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이미 한양에는 南京 시절에 건설한 궁궐이나 留守府의 官衙 등이 있었으므로 태조는 3년(1394) 10월 28일에 일단 천도한 후 도시정비에 들어갔다. 태조 때 건설된 주요 시설은 都城6) ‧ 景福宮7) ‧ 宗廟 ‧ 社稷 ‧ 官衙 ‧ 圓丘壇8) 등이었으며, 5部 52坊9)의 행정구역을 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漢陽을 漢城府로 고치고, 判尹을 두어 그 책임을 맡게 했다.10) 도시계획을 주도한 것은 鄭道傳으로서, 《周禮》考工記의 ‘前朝後市, 左廟右社’의 원칙을 따르되 조선의 현실에 맞추어 변용했다. 漢城의 도시구조는 開京과 비교하여 重城이 없고, 王宮이 산비탈에서 평지로 내려온 것이 특히 다르다. 태종 때에는 昌德宮(5년)을 건설하고, 지금의 청계천을 대대적으로 준설하여 開川이라고 호칭하고 木橋와 土橋를 견고한 石橋로 바꾸었다.11) 또 한성부의 중심인 종로에 800여 간의 市廛行廊을 건설하고, 시가지의 도로를 大路 ‧ 中路 ‧ 小路로 나누어 확정했다.12) 성종 때에는 大妃들의 處所가 부족한 것을 고려하여 昌慶宮(9년)을 건설했다. 이로써 서울에는 중요한 궁전이 세 개 들어서게 되었고, 왕은 이 세 궁을 왕래하면서 時御所로 삼았다. 조선전기 한성부의 인구는 대략 10만 명 정도였는데, 문무관원 ‧ 기술관 ‧ 시전상인 ‧ 수공업자 ‧ 노비들로 구성되었다. 무당이나 승려 등은 도성 안에 거주하지 못했다. 그리고 도성 밖 일정구역에는 四山禁標를 세워 나무 채취나 무덤을 쓰지 못하게 입산을 금지시켰다. (2) 왜란 후 궁궐 복원과 서울 實學의 발생 1592년에 발발한 壬辰倭亂은 서울의 도시환경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왜란 중에 궁궐이 亂民들에 의해 모두 소실되고, 주요 관아와 宗廟도 훼손되었다. 비단 건물만이 아니라 그 안에 소장되었던 귀중한 서적들, 예컨대 春秋館에 보관되었던 《實錄》이나 《儀軌》, 그리고 각 관청에 보관되었던 書冊 ‧ 御眞 ‧ 寶玩 등이 모두 소실된 것은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1593년 10월 의주에서 돌아온 宣祖는 지금 德壽宮 자리에 있던 종친의 집을 빌어 時御所로 삼고, 그 주변의 양반집과 民家들을 빌어 宗廟와 官衙로 이용했다. 그 후 昌德宮과 昌慶宮을 먼저 복원하여 광해군대에 완성하고, 이어 慶德宮(뒤의 慶熙宮) ‧ 仁慶宮 ‧ 慈壽宮 등도 새로 건설했으나, 인조대에 경덕궁을 남기고 모두 철훼시켰다. 景福宮은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후기의 시어소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심이었다. 조선후기 궁궐은 民國을 지향하는 사상계의 변동에 발맞추어 점차로 서민적인 궁궐로 변해갔으며, 학문의 발달에 따라 궁궐 안에 도서관과 학문연구소가 많이 들어섰다. 창덕궁 후원에 많은 亭子와 養蠶所 등이 세워지고, 사대부집을 모방한 집과 일반농민의 草家가 들어선 것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는 궁궐의 변화이다. 특히 왕조의 중흥을 가져온 정조대 이후로 창덕궁 안에 奎章閣과 각종 부속기관들이 건설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리고 창경궁의 弘化門은 임금이 漢城 坊民을 수시로 만나서 여론을 듣고 쌀을 하사하는 ‘民意의 廣場’이 되었다. 영조대 均役法도 여기서 民意를 청취하여 이루어졌다. 조선후기 궁궐문화를 선도한 것은 사실은 서울의 사대부들이었다. 17세기 초부터 창덕궁 옆의 枕流臺에는 장안의 文人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문화를 선도하는 그룹을 형성했다. 이들을 ‘枕流臺學士’ 혹은 ‘城市山林’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출세위주의 性理學을 虛學으로 비판하고, 修己治人과 國利民福의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진정한 성리학’을 창도했다. 그것이 바로 ‘實學’이다. 許筠 ‧ 柳夢寅 ‧ 李睟光 ‧ 韓百謙 등이 이 그룹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은 성리학을 正學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佛敎 ‧ 道敎 ‧ 天主敎 ‧ 陽明學도 修己에 도움이 되는 종교로 인정하여 포용하는 자세를 취했다. 서울에서 시작된 실학은 그 후 한강을 건너 남진하여 18세기에는 廣州 ‧ 楊州 ‧ 安山 ‧ 水原 등지에서 李瀷 ‧ 安鼎福 ‧ 禹夏永 ‧ 丁若鏞 등과 같은 대학자를 낳게 한 것이다.
(3) 조선후기 서울의 商業都市化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는 행정도시이자 양반도시인 서울을 상업도시 ‧ 서민도시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大同法 실시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전국적인 계층분화를 가져오고, 농촌에서 이탈한 流民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서울인구는 20만 ∼ 30만을 헤아리는 규모로 커졌다. 이 늘어난 인구는 대부분 양반이 아닌 상인 ‧ 노동자 ‧ 수공업자 ‧ 연예인 등 庶民層이었다. 이들은 모두 도성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고, 도성 밖에 ‘新村’을 형성하고 살았다. 서울인구가 많아지자 이들을 대상으로 한 市場이 곳곳에 세워졌다. 특히 한강을 끼고 장사하는 京江商業이 발달하여 한강 가에는 孔巖 ‧ 麻浦 ‧ 西江 ‧ 盤浦 ‧ 豆毛浦 등 많은 浦口와 마을이 새로 생겨났다. 17세기 전반 30여개의 市廛이 18세기말에는 120여개로 늘어나면서 市廛商人도 많아지고, 七牌(서울역 부근) ‧ 梨峴(동대문 부근) 등 곳곳에 亂廛이 생기면서 亂廛商人 ‧ 貢人 ‧ 中都兒 등 여러 종류의 상인들이 나타났다. 상업의 종류도 다양해져 종전의 시전물품 이외에도 고기를 파는 懸房, 얼음을 파는 제빙업, 서화 골동품 가게 등이 생겨나고, 여러 종류의 유흥업소도 생겨났다. 서민들이 모여들면서 산대놀이패도 등장하고, 청계천 다리 밑은 거지들의 소굴로 변했다. 정부에서는 거지들에게 깔개와 의복을 지급하기도 하고, 양반들은 이들을 수시로 연회에 초대하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나온 <한양가>에는 당시 서울의 상업과 놀이문화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흥미롭다. 서울은 이제 양반문화만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중인층과 서민층의 문화가 혼재하는 도시로 바뀌었다. 18세기 경부터 인왕산 ‧ 백악산, 그리고 청계천 일대에 中人들이 만든 詩社가 결성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인왕산 일대에는 壯洞金氏 일문의 문화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그 흐름 속에서 謙齋의 眞景山水가 탄생했음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4) 서울의 자주적 근대화 1876년의 개항과 더불어 서울은 근대화 바람이 불어오고 개화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개화와 근대화는 밖으로부터 강요되기도 했지만, 안으로부터 준비된 것이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이후 이른바 北學이 開化의 선구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준비된 개화는 자주적 근대화로 나타났다. 개화 초기의 ‘東道西器’와 대한제국기의 ‘舊本新參’이 표현은 다르지만 자주적 근대화라는 맥락은 서로 같았다. 전통과 서양 근대문화를 절충한다는 의미에서 자주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서울의 도시행정과 도시 외관도 바뀌어갔다. 서울에는 외국인 公館과 외국인 거류지역이 생겨났다. 일본인은 주로 南山의 남북 일대에 거주하고, 서양인들은 지금의 貞洞 일대에 포진했다. 1894년의 甲午更張은 서울의 행정체제를 바꾸어 놓았다. 漢城府 判尹은 정2품에서 3품 奏任官으로 격하되고, 左尹 ‧ 右尹 ‧ 判官 ‧ 主簿 등이 없어지고, 主事가 신설되었다. 五部는 五署로 바뀌고, 도성 밖에도 10개의 坊이 설치되어 漢城府 境域이 넓어졌다. 또 한성부가 행사하던 치안과 재판의 임무가 警務廳과 漢城裁判所로 이관되었다. 1897년의 大韓帝國 성립 이후 漢城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皇都로 승격되었다. 慶運宮이 皇宮으로 변하고, 황제만이 행할 수 있는 제천단인 圓丘壇이 설치되고, 황궁을 중심축으로 하는 방사선형의 도로망이 새로이 건설되었다. 런던과 파리가 그 모델이 되었다. 근대적 학교 ‧ 병원 ‧ 언론기관 ‧ 통신시설 ‧ 은행 ‧ 회사 등이 더 많이 들어서고, 京仁鐵道와 漢江鐵橋(1900)도 가설되었다. 인력거(1884), 자전거(1895), 전차(1899), 자동차(1903)가 차례로 등장하여 교통수단이 근대화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인 탑골공원(1896년 무렵)이 등장했다. 이 모든 변화는 황제의 자율권에 의해 추진되었다. 5. 統監府와 일제강점기의 타율적 변화 황제의 자율권에 바탕을 두고 자주적으로 근대화 하던 서울은 1905년의 통감부설치와 1910년의 국권침탈을 계기로 타율적 변화를 강요당하기 시작했다. 통감부는 京城理事廳을 설치하고 자신의 구미에 맞게 서울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먼저 황제권을 무력화시키고, 皇室 상징물을 파괴하는 일에 나섰다. 을사조약에 저항하는 高宗皇帝를 1907년 퇴위시키고, 先皇帝 高宗과 純宗을 德壽宮(경운궁)과 昌德宮으로 격리시키고, 창덕궁을 현대식 파티공간으로 개조했다. 자동차도로를 만들기 위해 많은 殿閣이 헐려나갔다. 昌慶宮은 더욱 처절하게 훼손되어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개조되고 벚꽃으로 뒤덮인 공원으로 변했다. 대비 처소였던 慈慶殿에는 일본식 박물관 겸 도서관으로 藏書閣이 들어섰다. 1911년에는 아예 昌慶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강점기의 서울은 더욱 철저하게 일본식 모델로 바뀌었으며, 天皇魂이 넘치는 작은 東京이 되었다. 景福宮 앞에는 總督府(1916∼1926), 경복궁 후원의 景武臺에는 총독관저, 皇宮 앞에는 京城府 廳舍(1926), 圓丘壇에는 철도조선호텔(1913), 慶熙宮에는 京城中學校, 南別宮에는 반도호텔, 역대 임금의 御眞을 모시던 永禧殿에는 중부경찰서, 乙未事變의 애국열사를 모시던 獎忠壇(1900)에는 伊藤博文을 위한 博文寺와 일본식 獎忠壇公園(1919)이, 木覓神祠가 있던 자리에는 日本神社가 각각 들어섰다. 서울의 행정조직도 물론 일본식으로 개조되었다. 여기에 말을 잃고, 개인의 姓氏와 이름까지 바꾸고, 역사마저 잃어버리니, 서울은 민족적 정체성을 잃은 일본의 한 지방도시로 전락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경부선철도는 釜山行을 上行線으로 불렀다. 왜냐하면 부산은 東京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었다. 6. 해방 후 서울과 미래의 과제 해방과 더불어 서울을 찾았으나 서울이 다시금 수도로 정해진 것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 이후다. 이어 북한정권이 세워졌으나, 북한도 서울을 수도로 삼고 平壤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600년간 각인된 서울의 역사적 상징성과 전통을 평양이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72년에 이르러 평양을 수도로 바꾸고, ‘민족의 심장부’ ‘주체의 도시’로 선전하기 시작했으나, 평양은 역사적으로 분열된 국가의 수도였을 뿐이다. 해방 후 서울의 공식 명칭을 ‘한성’이라 하지 않고 ‘서울’이라고 한 것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조선시대부터 국민들은 서울을 ‘한성’ 혹은 ‘한양’으로 부르기보다는 ‘서울’(徐菀)이라고 즐겨 불렀다. 이는 ‘徐羅伐’ 혹은 ‘徐伐’에서 온 말이다. 즉 ‘서울’은 ‘수도’라는 뜻의 일반명사다. 마음 속으로부터 한양을 나라의 심장부로 생각해 왔다는 증거다.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首都에 대한 불만이나 이전이 거의 논의되지 않은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광해군 때 풍수가 李懿信이 한때 交河遷都論을 들고 나왔으나 거센 반발을 받고 침몰했다. 正祖의 華城 건설은 遷都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은퇴도시로 건설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거의 모든 지식인들은 서울이야말로 전국 山水의 精氣가 모여 있는 明堂이라는 데 이의를 갖지 않았다. 비단 산수가 좋은 것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중앙성과 교통과 국방의 편리성도 서울을 능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서울이 조선왕조의 王都로 정해진 것도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李成桂에 의해 갑자기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수 백 년 간 준비되고, 民心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백제가 이곳에서 500년의 전성기를 구가한 것도 서울의 입지조건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수많은 수도가 있었으나, 모두가 분열된 시대의 수도였다. 고려의 開京도 국토는 통일되었으나 정신적으로는 통일되지 못해 신라 전통과 고구려 전통이 각축하던 시대의 수도였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국토 상으로나 정신적으로 최초로 통일을 달성한 조선왕조의 수도는 민족적 합의가 가장 큰 수도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500여 년간 서울은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지방문화와 지역주의를 융합하고 녹여내는 진정한 민족문화의 산실이었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수준 높은 유교문명을 꽃피운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중대한 상징성을 가진 서울은 해방 후 한동안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너도 나도 서울로 몰려들어 1천만의 대도시를 형성했으나,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위에 서양문화를 어설프게 받아들여 무질서하고 혼탁한 정체불명의 도시로 변했다. 그래도 서울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중심도시였다. 과도한 인구집중이 역작용도 가져왔으나, 정치 ‧ 경제 ‧ 문화 ‧ 교육의 중심지로서 갖는 시너지 효과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88올림픽을 치르고, 2002월드컵을 열면서 세계 만방에 대한민국의 성가와 브랜드를 높였다. 서울이 아무리 무질서하고 혼탁해도 漢江과 三角山의 위용은 여전히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고 있으며, 서울에 겹겹이 쌓인 2천년의 문화전통은 7천만 민족의 자랑이요, 전 세계 미래문명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최근 지역 균형발전을 이유로 수도 이전이 논의되고 있다. 서울과 서울권의 과밀화는 분명히 개선될 과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서울의 부작용을 고치려다 서울의 장점과 경쟁력까지 잃어버리는 矯角殺牛의 우를 범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서울은 우리 민족의 심장부로서 영원한 꿈과 희망을 안겨줄 곳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2천년 역사의 숨결이 되살아나는 역사 ‧ 문화 ‧ 환경도시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