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23. 주일오전예배 설교
마 21:1-11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여러분,
한 제약회사에서 예년같으면 지금쯤부터 시작해서 7월까지 대학생을 대상으로 국토대장정을 했습니다. 20일 안팎의 기간동안 우리나라 남쪽 끝 해남에서 걷기 시작해 북쪽 임진각에 이르는 행사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로 올해까지 몇 년간 그 국토 대장정도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그 국토 대장정이 있었던 기간에 공중파에서 처음 해남부터 마지막 임진각까지 동행촬영한 것을 방송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다 사흘 나흘이 지나면서 발이 까지는 사람이 나오고 10일 지나면서 이 걷기를 계속해야하는가 주저하고 망설이는 사람 특히 여성들이 늘어납니다. 그때 동료들이 같이 가자고 독려하면서 도와 줍니다. 이제 마지막 임진각이 코앞이고 있는 힘 없는 힘 다 해서 걷습니다. 그 시각 최종목적지인 임진각에는 이미 행사에 참여한 지인들과 친구들, 가족들로 꽉 차 있습니다. 그들이 도착하기만을 목빼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디어 아들, 딸, 친구들이 몸은 지쳐있지만 해냈다는 기쁨의 만개한 웃음으로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임진각이 보이고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 걸음을 뗌니다. 막 도착했습니다. 이미 임진각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한 곳에서는 헹가래를 치기도 하면서 기쁨을 만끽합니다. 기다리던 가족과 친구들은 꽃다발과 박수로 이 긴 여정을 마친 친구와 아들 딸들을 환영합니다. 마지막 국토 대장정의 순례의 종착지의 모습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도 예수님의 순례의 마지막 종착지 예루살렘에 도착하시면서 맞이하는 환영식을 다음과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 입에서 나오는 찬미로 원수와 보복자들을 잠잠케 하신다
예수님이 자신을 왕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심
2. 어린아이와 젖먹이 입에서 나오는 찬미로 원수와 보복자들을 잠잠케 하심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 목적은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키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 해당되는 여정이 아닙니다. 모든 유대인이라면 각지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걷습니다. 마태복음 27:32을 보시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가게 된 시몬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구레네 사람입니다. 구레네가 아프리카 지역입니다. 사도행전 2장은 예루살렘에 모인 지역을 열거했습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흩어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순례자들로 예루살렘은 넘쳐 난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그 순례자 무리 중 한 무리였습니다. 이제 그 순례의 끝인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입니다. 국토 순례로 말하면 임진각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지금까지 행보와는 다른 행동을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여러 기적과 표적을 보여주셔서 병든 자들을 고친다든지, 귀신을 쫒아 내신다든지, 수많은 사람을 적은 음식으로 먹이셨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그들이 병 나은 것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먹이신 후에는 한적한 곳으로 조용히 떠나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까지의 행보는 조용한 행보, 드러내지 않은 행보였습니다. 대중에게 자신이 드러나는 것에 극도로 주의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 때는 지금까지의 조용하고 숨겨진 이미지와는 달리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존재의 위치는 왕입니다. 자신이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탓도다”
시온의 딸은 하나님과 언약한 이스라엘 백성전체를 의미합니다. 네 왕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런데 이 왕이 너의 왕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증거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나귀라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그분을 시온의 딸이 볼 때 그분을 왕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이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왕과 나귀의 관계는 창세기 49:10-11절을 볼 때 더욱 명확합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멜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야곱이 그의 아들 유다에게 죽기 전 유언하면서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유다는 통치자가 될 것이고 그 상징인 규라는 지팡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유다에게서 나온 그 사람에게 모든 백성은 복종할 것입니다. 그 통치자가 타고 갈 짐승은 나귀인데 암나귀 새끼입니다. 바로 왕과 나귀, 유다는 다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을 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본문을 우리가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본문의 구조를 한 번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왕으로 등장하니 사람들이 그를 높여 찬양합니다. 그렇게 되니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하면서 이가 누구냐? 합니다. 그때 무리들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합니다. 어디서 많이 본 세트구조입니다. 어디 세트와 비슷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처음 이 땅에 왔을 때와 비슷합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시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있느냐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23절에 보시면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여기 예수님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태어난 줄 알고 왔다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소 하니까 뭔일인가 하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 거주하게 되면서 나사렛 출신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지금 21장에서도 보는 것입니다. 왕(5절), 소동(10절) 나사렛에서 나온 (11절)
이것은 다시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확인시키는 것입니까? 왕이심과 사탄의 공격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났을 때도 예루살렘은 소란스러웠습니다. 온 성이 소동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마지막 여정을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도 온 성이 소란스럽고 소동했습니다. 예수님이 아기로 태어났을 때도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을 소동케 했고, 마지막 여정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도 왕으로서 예루살렘을 소동케 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소동케 한 원인은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이 왕이라는 것에 소동한 무리들은 처음에는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마2:3)이라면 마지막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는 예루살렘 온 성(21:10)이 소동했습니다.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묻던 무리들이 이제는 이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왜 왕이 온 예루살렘을 소동케 하는 원인입니까? 그리고 왜 예수님은 처음과 마지막 예루살렘에 왕으로서 등장하십니까?
이것은 첫 사람 아담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사탄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한 이유가 하나님과 같이 될까 봐 그랬다는 식으로 유혹했습니다.(창 3:5) 사탄은 아담에게 네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하나님이 돼봐. 한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처럼 왕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얻은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사탄의 종이 되어 죽음으로 망하고 사탄을 왕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사탄의 종이 된 사람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이 없으니 자신 스스로 왕이 되어 자신이 스스로 주인처럼 살았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죄지은 사람에게 심은 속임수의 정점입니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 내가 스스로 왕이니 누군가의 도움이나 구원은 필요없어. 난 내 힘으로 살면된다. 나의 주인은 나야, 라는 거짓확신을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이 속임수의 전략은 대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과 왕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허망하고 헛된 것에 빠져 우상을 섬기고, 스스로 자신을 우상화하여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의 힘으로 구원할 수도 구원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이며, 이것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섬기지 않는 사람들, 즉 사탄에 매인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 사탄의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위기에 처했습니다. 예수님이 아기로 이 땅에 오심으로 진정한 왕이 이 땅에 임한 것입니다. 거기다 이 왕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첫 사람 아담과는 전혀 다르게 겸손하게 그리고 구약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들어오고 있으니 얼마나 사탄이 두렵고 무섭고 자신의 지금까지의 속임수가 다 탄로나겠습니까? 그러니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탄이 난리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처음과 마지막 예루살렘에 자신을 왕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겸손한 왕,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성취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왕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요 왕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21장 11절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는 말이 예수님을 폄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말일지라도, 마 2장의 예수님이 헤롯가문의 핍박을 피해 가신 지역이 나사렛이어서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러졌을지라도 마태복음 2장과 21장의 구조가 동일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결정적 말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촌 동네 나사렛 선지자가 아니라,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신 왕이시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시점과 마지막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 시점에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는 것은 사탄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 사탄과 사탄의 수하에 있는 이 무리들의 불안감은 이 예수님을 왕으로 알고 경배하고 찬양하려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더욱 고조됩니다. 마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님은 탄생하신 후 자신을 예루살렘에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드러내셨습니다. 이런 소동과 예수님을 왕으로서 알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를 경배하고 찬양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탄생 때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요, 지금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했습니다. 9절의 내용은 시편 118:25-26절을 인용해서 찬송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호산나라는 뜻은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인 여호와의 집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환영을 받습니다. 마치 국토 대장정의 최종 목적지인 임진각으로 오는 대원들을 축하하며 박수로 환호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 21장의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여정을 마치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들어와서 이런 환대와 환영을 받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이 그 앞에 종려 가지를 펴고 나귀에 겉옷을 올려 안장을 올리고 앞뒤에서 호산나 호산나 하는 찬송은 순례자가 마지막 종착지에 도달했을 때 하는 다양한 행동 중에 하나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왕으로 여기고 왕이 행차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그 다양한 환영하는 행태중에서도 좀 독특하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만, 어찌되었든 순례의 마지막에 그 순례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집인 성전에 오는 자에게 복을 빌고 축복하는 것은 특별한 행동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루살렘으로 주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집에 들어오는 예수님의 찬송이 다른 여타의 지금까지 동일한 환호와 찬송과 다른 것은 이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이 지금까지 축복하고 복이 있다고 한 그 찬송의 내용을 온전히 성취하실 왕,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호산나 즉 Please save us를 성취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기 위해 순례의 길을 거쳐 오고 가면서 호산나라고 찬송과 환호와 축복을 받았을지라도 그들을 구원할 왕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 예수님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온전히 호산나 찬송과 축복의 환영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 8절의 “무리의 대다수” 그리고 9절의 “무리”가 누군가 하는 점입니다. 보편적 해석은 이스라엘 전체 무리들, 거기에 모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인 순례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 찬송으로 환영한 부문을 설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다 환영했다 그런데 그들의 환영은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위한 환영이었기에 예수님이 나중에 재판을 받고 자신들의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판명되었을 때, 같은 입으로 다른 소리 바로 예수를 죽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인식 즉 왕에 대한 인식이 자신들의 필요와 군사적 정치적인 이스라엘의 해방으로서 왕으로 예수님을 인정하고 환영했는데, 그 정도의 지도력을 가진 선지자나 왕으로서 우리를 모세처럼 구원해 줄 것으로 여기고 호산나 찬양을 했던 사람들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 돌변하여 같은 입으로 다른 말 즉 예수를 죽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변죽이 심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찬송해야 한다라고 적용할 수 있고, 사람의 변덕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을 잘 보시면 8-9절의 무리와 10-11절의 무리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8-9절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과정에서 찬송한 무리들이고, 10-11절은 그 찬송으로 온 성이 진동하니 그에 대한 반응을 보인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 21장의 구조가 2장의 구조와 비슷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8-9절의 무리들은 2장의 동방에서 온 박사들과 대응이 되어야 하고, 그에 반해 10-11절의 예루살렘 성 안에 있어 이가 누구냐 라고 묻고 답하는 무리들은 헤롯을 비롯한 온 예루살렘 즉 헤롯에 속한 무리들로 대응함이 타당합니다. 그러니까 한 무리는 순수하게 예수님을 찬송한 무리들이고 한 무리들은 나중에 예수님을 대적한 사탄의 수하의 무리들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들로서의 무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개연적으로 적용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그 호산나 하면서 찬송한 무리들을 성경은 지시해서 가르쳐 줍니다. 이 호산나 하면서 찬송한 무리들이 분명히 21장에 나오는 데 그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15-16절을 읽겠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주의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순례의 여정의 종착점인 예루살렘 들어올 때 호산나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집에 오는 사람을 축복하며 찬송한 무리들이 모든 사람이 아닌 어린이들이였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물론 이것이 여기 성전에서 소리질렀다고 했으니 예루살렘성전 안에 들어와서까지도 찬송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고, 여전히 나중에까지 어린이가 찬송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찬송한 무리가 어린이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이 다시 “어린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다”는 시편 8편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2절)
여기 시편 8편에 어린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이 왜 의미가 있는가 할 때, 그들의 찬송은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 대적자인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이 예수님은 사실은 사탄의 소굴로, 강도의 소굴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주의 대적들과 원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을 것입니다. ‘저 자가 누군가? 바로 나사렛출신 아닌가? 저 자가 왜 나사렛출신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가? 원래는 베들레헴 출신아닌가? 그런데 그가 태어났을때도 내가 영아들을 다 죽인다는 말을 듣고 애굽으로 도망쳤던 자가 아닌가? 거기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못 돌아온 이유도 내 수하의 충실한 종들이 두려워서 별수 없이 쫒겨서 나사렛이라는 변방으로 도망친 자 아닌가? 이미 내가 그가 태어났을 때 승리를 맛봤던 그 존재 아닌가? 그때야 어떻게 용케 살아남아서 다시 이곳 예루살렘에 왔지만 이 예루살렘은 이미 내가 접수한 내 소굴이니 이번에는 네 목숨 확실히 끝을 봐주겠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주의 대적과 원수들은 예수님을 그런 존재로 여겼고 그것을 마태복음 2장의 동일한 구조로 말씀을 전개함으로서 사탄이 다시 승리하고 주의 대적과 원수와 보복자들이 개가를 부르는 것처럼 기술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로 두지 않을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치 마태복음 2장에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오실 때 경배하지 않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저 멀리 이방 땅에서 온 박사들이 경배했듯이, 여기 예상치 못하게 어린이들 그것도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사탄은 이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을 내가 다 통제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살벌한 예수님의 원수와 대적자들 앞에서 찬송이 울렸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당신이 구원자입니다. 당신이야말로 주의이름으로 여호와의 집에 오시는 구원자입니다.’ 라는 재잘거리는 찬송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사탄은 어린이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원수들앞에서 찬송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침묵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방해 공작을 무위로 돌리셨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구원의 찬송이 들린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셨지만 분명히 왕이신데, 그 왕은 겸손하지시만 모든 전쟁을 끊으실 분이라는 것, 즉 역설로 드러날 것입니다.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을 끊으리니” (스가랴 9:9-10) 예수님은 원수들 앞에서 그의 어린이들을 통해 원수들이 찬송하지 않고 죽음을 모의하는 대적질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천국은 큰 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자의 것이라고 했는데, 진실로 가장 작은 자인 젖먹이들의 입을 통해서 원수들이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어린아기와 젖먹이들의 찬송에 권능을 세워주셨습니다. 권세를 주셨습니다. 원수들과 보복자들인 예수님의 대적자들을 잠잠케 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입니다. 가장 낮은 자, 작은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원수와 그 무서운 대적자들을 잠잠케 하는 권능을 세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적은 무리이고 세상의 평가를 생각할 때 하잖고 미약한 존재일지라도 우리들의 찬송이 원수를 잠잠케 하는 권능인 것입니다. 우리들같이 하잖고 미약하고 작은 자라도 찬송하는 직분을 주셔서 원수들을 잠잠케 하는 권세와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움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우리의 찬송으로 원수들을 이기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탄과 그 수하들을 잠잠케 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사탄을 잠잠케 하고 이기는 것은 어떤 대단한 일을 하거나 대단한 업적을 내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볼 때 저 무리들은 우리가 감시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는 어린이와 젖먹이 같이 미약한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으로 된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우리교회는 어린아이와 젖먹이 같이 연약하고 미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찬양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주님을 찬송합니다. 왕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때 사탄을 위시한 주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은 다 잠잠해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원수들 앞에서 찬송을 받으셨습니다. 나사렛 예수쯤이야 생각한 원수들 앞에서 찬송을 받으셨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고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우리의 구원자이시오, 왕이시오, 가장 높은 곳에서 찬양 받으신 영광스러운 제 2위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겸손하게 구원의 일을 행하시는 주님께 우리는 찬송합니다. 호산나 호산나. 오직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다윗의 이름으로 어린이들의 찬미를 온전케 하신 그 주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는지 확실해졌습니다. 구원자가 되셔서 원수들과 대적자들을 잠잠케 하기 위해서 왕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그 왕이신 예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원수를 잠잠케하신 예수님, 어린이와 젖먹이들의 찬미를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찬송합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