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언제나 또래에 비하여 책을 많이 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부분 외국문학을 읽어왔습니다.
한국문학을 아예 안 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상이 좋았습니다. 김승옥이 좋았습니다. 기형도가 좋았습니다.
최근에 활동하는 작가도 몇몇 읽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 편견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그 편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카뮈, 셰익스피어, 조이스... 등등
무수히 많은 외국인 작가와 버금갈만한 한국 작가는 아직 없다.
아아 그러나 저는 저의 편견에 크나큰 위기가 와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독서실격.
박상륭이란 작가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높이 평가된다. 작품이 어렵다고 한다. 고작 이 정도였습니다.
<죽음의 한 연구>가 그의 작품이란 것도, 책방에서 왠지 간지나보이는 책제목을 발견할 때 알았습니다.
그의 어떠한 작품도 읽어본 적 없었고, 왠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죽음의 한 연구>를 구입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목이 간지나보이고, 돈은 남고, 한국문학도 읽어봐야될 것 같아서, 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이유도 없이 그저 끌리는데로 책을 구입한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만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구입했을 때였습니다.
그 때가 저로 하여금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만들어준 첫번째 책이었으며, 제가 읽어본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작품이었습니다.
박상륭 작가의 책을 살 때, 왠지모르게 도스토예프스키가 떠오른 것은 일종의 운명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시작된 것은 보기 드문 긴 문장이었습니다.
아아 그러나 그것은 시적이었습니다.
이 요사스런 첫문장에 저는 흠뻑 빠졌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무척 재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독서에 관해서는 쾌락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제 스스로 재미가 없다고 느끼면, 어떤 책이든 바로 중단합니다.
<죽음의 한 연구>를 읽는 동안의 이 기분을 저는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어릴 적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흠뻑빠져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읽었던 그때 그 시절 추억의 느낌 그대로,
저는 박상륭 작가의 <죽음의 한 연구>를 읽어나간 것입니다.
약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대작을 읽는데 정확히 얼마나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조금씩 음미하며 읽었으므로, 대략 일주일 정도 소비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책은 유리와 읍에 관한 이야기이며, 죽음과 삶에 관한 이야기이자, 어느 인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리'라 불리는 젊은 중. 그는 <죽음의 한 연구>란 제목답게, 여러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여러 차례의 구도적 살인과 친부살인을 통하여 유리의 6조가 되고, 유리와 읍을 40일동안 방랑하며, 삶과 죽음을 완성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내내 이 주인공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인신과 닮았다는 생각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닮았다고 생각한 인신은 키릴로프였습니다.
'유리'는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인간적이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유리'의 40여 일동안의 죽음의 한 연구. 과연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는 단 한가지 사실은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 하나뿐입니다.
죽음 그 자체가 무엇인지, 그 너머에 무엇인가가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요.
고통받는 것은 언제나 산 자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것은 죽음이 곧 삶의 일부이며, 삶이 곧 죽음의 일부란 것입니다.
유리는 분명 현자입니다. 그는 일단 '중'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나 연금술 등 모든 분야에 통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그를 사랑하는 창녀와 촌장의 손녀딸도 있습니다.
그는 마른 늪에서 고기를 낚기를 시도하는 수도승이자, 촌장댁에서 선악과와 신의 죽음에 대하여 설교하는 차라투스트라이며, 40일 동안 고난받는 예수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유리의 법도대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서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 인신으로서의 자신을 완성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키릴로프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자살로 인신이 되기 위한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유리는 성공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유리의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죽음은 결국 삶의 일부이며, 유리는 죽었어도, 그의 정신은 남아있고, 상징적으로 그의 씨앗이 촌장의 손녀딸 안에 자라고 있습니다.
촛불승은 유리가 스승인 5조 촌장을 살해하고, 6조 촌장이 되었듯이, 유리를 '살해'하고 7조 촌장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분명 많은 것을 담고 있고, 박상륭 작가는 여러 박학다식한 지식을 통하여 그것을 풀어나가고 싶습니다.
그것에 대해 일일히 말하진 않겠습니다. 저 자신의 언어는 지금 제 생각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한계가 있고, 스스로 읽어보시는 것을 꼭꼭 추천합니다.
내용 자체를 떠나서, 문장을 계속 곱씹고 싶은 책입니다.
박상륭 작가의 다른 작품을 언제 읽을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전작주의 버릇 때문에 언젠가는 읽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박상륭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또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 기대하며 이 짧은 잡설을 마치겠습니다.
"헌데도 말이라. 이 집념 하나는 여태껏 여의지를 못하고 있는데, 글쎄 어디에다가든, 하나쯤,
흙 이겨 암자를 짓고, 내 여생을 한 번만 단단히 붙들어매가는 해야겠다는 이것이지. 이것이라.
내, 흘러다니느라 사유시방으로 퍼느렸던 혼들은 한 번은 다 긁어모아, 흙집 속에 쳐넣어놓고 졸면서 지냄시나, 글매 그럼시나,
어쩌다 내 암자 곁을 지나는 초부라도 하나 있다면, 그를 붙들어 토방에 앉혀놓고, 내 헤맨 것 그냥 옛애기삼아 들려주고,
그러다저러다 눈감고 싶은 것이지. 목이 타고 관절이 아프고, 발이 천번도 더 불어터졌다, 잡육(雜肉)으로 우거진 길을 염병을 앓으면서도 걸었던, 배고픈, 동행 없는, 길들, 길, 쓸쓸한 길들, 길, 부르는 손들, 그 길들을 걸으며 그 길에서 피어난 손들을 꺾어
한다발씩으로 엮었다 버린 애기들을, 들려주고, 그리고 그 길들이 무엇을 성취해주며, 무엇을 빼앗아버렸는가를, 아 그렇지,
어떻게도 거부할 수 없는 길들로부터, 아 그렇겠소, 이젠 정작으로 떠나봐야겠구먼. 헌데 스님은 몇 살이나 되셨댔소?
계집 좀 보채겠구먼, 설마 환속행(還俗行)은 아니겠지맹? 흐흐흐. 안, 안렝히. 자 안렝히, 성불합시우."
-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