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은 내가 먹을 테니 편하게 뛰어라”
선수들과 대화하며 장점 살리는 데 주력…
스타 출신이지만 코치진 전문성 철저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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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 첫해에 팀을 우승으로 이끈 삼성 라이온즈 류중일 감독.
업계 2위의 기업이 있었다. 지난해 아쉽게 1위를 놓칠 정도로 탄탄한 회사였다. 사장은 사원 시절부터 그 바닥에서 ‘전설’로 불리던
거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이 회사를 떠났다. 후임은? 바로 당신이었다.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찾아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조직을 꾸려나갈 것인가.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류중일(48) 감독이 그랬다. 2010년 12월 30일 선동열 삼성 감독이 전격 사퇴했다.
선수 시절 ‘국보 투수’로 명성을 날렸고 감독으로도 6년 새 우승을 두 번 하며 지도력을 인정받은 그다. 지난해에는 준우승을 했다.
계약 기간도 4년이나 남아 있었다.
삼성 구단이 곧바로 발표한 후임 사령탑은 주루 · 작전코치였던 류 감독이었다.
그의 첫 인터뷰는 이랬다. “미안합니다. 준비를 전혀 안 해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떤 야구를 펼칠지에 대해서도 할 말이
전혀 없습니다.”
2위를 하고도 감독이 바뀌었다. 구단이 원하고 류 감독이 이뤄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우승밖에 없었다.
3개월 뒤 2011시즌 개막에 앞서 전문가들은 삼성의 순위를 8개 구단 중 중위권으로 예상했다. 지난해에 비해 삼성의 전력 보강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새내기’ 류 감독이 얼마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물음표가 붙었다. 3월 29일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류 감독은
“올해 목표는 우승, 우승이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다들 초보 감독의 패기 정도로 생각했다.
급하게 바꾸지 않는다
4월 2일 정규시즌이 막을 올렸다. 삼성은 개막 후 6경기에서 2승4패로 부진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삼성은 탄탄한 마운드를 바탕으로
초반 위기를 잘 넘겼다. 5월 13일 5위로 바닥을 친 뒤 5연승하며 본격적인 상승을 시작했다.
이후 팀 타선까지 폭발하면서 6월 28일 시즌 첫 1위로 올라섰다. KIA와 엎치락뒤치락하던 선두 싸움은 7월 말부터 삼성의 독주체제로
전환됐다.
삼성은 두 달여 1위를 지킨 끝에 9월 27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두산을 꺾고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했다.
2005년 선 전 감독이 그랬듯 류 감독도 사령탑 데뷔 첫해에 한국시리즈 직행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대부분의 신임 감독은 취임하자마자 자신의 스타일로 팀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류 감독은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의 힘을 굳이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프로’다웠다. 받아들일 것과 바꿔야 할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철저하게 그에 따랐다.
전임 감독의 장점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색깔을 더했다.
명투수 출신의 선 전 감독은 삼성의 팀 컬러를 ‘지키는 야구’로 탈바꿈시켰다. 타자들이 점수를 적게 뽑더라도 투수들이 실점을
최소화해 승리를 지키는 전략이다. 마운드 운영의 무게중심은 선발보다 구원투수진에 뒀다. 선발투수가 5~6회까지 리드를 잡아
주면 중반부터 불펜진을 가동해 승리를 마무리했다.
류 감독은 ‘지키는 야구’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정현욱 권혁 · 안지만 · 권오준의 중간투수진과 마무리 오승환의 위력은
‘류중일의 삼성’에서도 변함없이 막강했다. 선 전 감독 시절처럼 삼성은 올해도 역전패를 거의 당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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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변형은 있었다. 구원투수진의 전력을 유지하면서도 선발투수가 조금 더 오래 던질 수 있게 했다.
“(선발투수를) 5회까지는 내리고 싶지 않다”는 게 류 감독의 소신이다. 선발 투수들에게 투구 이닝이 늘어난 만큼 쉬는 날을
더 주기 위해 6선발 체제를 운영했다. 그만큼 불펜 투수들의 부담도 줄었다.
삼성 투수들은 충분히 휴식하고 마운드에 올랐다. 덕분에 올 시즌 삼성에는 부상선수가 비교적 적어 선두 질주에 큰 힘이 됐다.
류 감독은 선수로 13년(1987~99년), 코치로 11년(2000~2010년) 등 올해까지 25년간 삼성 유니폼만 입었다.
그는 “초보 감독이라고 해서 선수단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삼성에서 오래 있어 나도, 코치·선수들도 서로를 잘 안다.
선수들의 장점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고 했다.
삼성 선수단은 류 감독의 ‘맏형 리더십’이 시즌 내내 큰 힘을 발휘했다고 평가한다. 김재걸 삼성 수비코치는 “시즌 초반 승률 5할을
왔다 갔다 할 때다.
경기에 진 뒤 감독님이 선수들과 맥주 한두 잔을 함께하며 ‘내일은 이깁시다’라고 한마디 남겼다. 올 시즌 세 번 정도 그런 자리를
가졌는데 정말 침착하고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정현욱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훈련하게 해주시니 성적도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외국인 투수 저스틴 저마노(미국)는 “투구 내용이
안 좋을 때도 ‘던지고 싶은 대로 던지라’고 한다. 미국 스타일에 가깝다”고 말했다.
믿고 맡기며 귀를 연다
선수들과의 의사 소통에도 적극적이다. 베테랑 투수 배영수는 “코치 시절과 다름 없이 선수들과 농담하고 소통한다”고 했다.
중심타자 채태인은 “타격이 부진할 때는 ‘너 왜 그런 것도 못 치느냐’며 구박을 주신다. 그러나 얼굴에는 미소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류 감독은 “감독이 된 뒤 사람이 바뀌었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선수들에게 ‘욕은 내가 먹을 테니 너희들은 편하게 하라’고
주문한다”고 말했다.
류 감독은 선수 시절 명유격수에 타격 솜씨도 좋았다. 하지만 감독이 된 뒤에는 코치들의 전문성을 철저히 존중했다.
초보 감독들은 대개 의욕에 넘쳐 직접 가르치고 권위를 앞세우려 하지만 류 감독은 스스로 한발 뒤로 물러섰다.
감독의 가장 큰 권한 중 하나인 투수 교체는 오치아이 에이지 투수코치에게 일임했다. 류 감독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니까
도움을 받는 것이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소신 있게 해보라고 주문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전공인 타격과 수비에 대해서도 해당 코치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다. 경기 초반 희생번트 대신 강공을 지시하는 것은
“화끈한 공격 야구를 하겠다”고 천명한 류 감독의 색깔이다. 대신 타격의 기술적인 지도는 전적으로 김성래 타격코치에게 맡겼다.
경기 중에는 뚝심 있게 타자들을 믿고 공격적인 야구를 펼쳤다. 시즌 초반 부진한 외국인 타자 라이언 가코에 대해 ‘나믿가믿
(나는 믿을래, 가코 믿을래)’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선수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선수들을 믿기에 번트를
줄이고 적극적인 타격을 주문했다.
삼성의 중심 타자들은 0-3의 유리한 볼카운트에서도 공격적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그 결과 팀 내 4번 타자 최형우는 올 시즌
홈런 레이스를 주도하며 지난해 타격 7관왕 이대호(롯데)를 위협하는 최고 타자로 성장했다.
2009년 입단한 배영섭도 프로 3년째를 맞아 만개한 기량을 뽐내며 톱타자 임무를 완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