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관한 시모음 44)
12월 /최금진
그해 겨울 우리는 이불을 덮어쓰고 잠만 잤다
TV에서 돋아난 털이 바닥에 수북이 쌓였지만 벽 위의 오래된 낙서처럼 즐거웠다
창밖에 소문처럼 몰려오는 눈을 집어타고 우리가 눈 속에 일부러 잃어버린 손수건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한없는 가벼움을 부풀려 그 힘으로 날아가는 눈송이들을 좇아 길을 잃어도 좋았다
귓속으로 동공으로 따뜻한 신음을 쏟는 눈 졸린 햇빛을 불러 아무 때나 잠 속을 들락거릴 수 있었다
우울도 불안도 금세 순한 길가의 밤이 되었다
꿈속에선 베개들이 강물 우리를 떠다니다가 얼어붙었다
품속에 저혈압의 뻐근한 머리를 묻으면 찬찬히 깨지는 살얼음 몽롱한 아침 속에서 우리는 간밤의 꿈을 캐어 억지로 해몽하기도 했다
용서해야 할 일과 용서받아야 할 일들이 빨래처럼 자꾸 쌓여갔고 벽지에 번지는 곰팡이라도 정을 주며 키우고 싶었다
애벌레처럼 딱딱한 아침을 조금 갉아먹으면서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월급날 슈퍼에서 라면 한 박스를 사고,
담배를 사고 따로 돌아누워 콜룩거렸다
가끔은 그렇게 두 개의 불 꺼진 방이었다
스위치가 없는 화장실에 앉아 몰래 흐느끼기도 하면서 행복하다,
행복하다,
사라지고 없는 얼굴을 씻고 또 씻었다
노년의 12월 /문장우
온종일 햇살 속 헤맨
내 자취도
어두운 밤은 침묵 안에
가두는 것
우리의 일상은 늘
어떤 색깔로 다가와
가슴에 모닥불 지피다
꿈을 짓다 말고 떠나는 걸일까
삶의 여정을 넘어온 빈 가슴도
일상에 목줄을 묶은 시계바늘 앞에
저항할 수 없는 존재로
캄캄하게 저무는 것이라면
분하고 억울하다
세월은 이제
하나둘 잊히는 이름들을 부르며
내 앞에 어둠을 앞질러 가고
가볍게 흩날리는 낙엽들은
구석진 모서리에서 숨만 죽이는데
쓰러질 듯 힘겨운 시간과 벗할 때
얼굴 하나 그려봐도 힘을 얻게 하는
대상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왠지 가슴이 시려오는 걸 보니
벌써 한 해의 마지막
송년의 12월인가 보다
12월의 열매 /박명숙
감사와 긍정의 마음은
오랜 습관에서 얻어지는
아름다움인 것을
우리의 일상이
감사의 조건들로 고백 되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돌아보니
일 년의 삶에 슬픔도, 기쁨도
예고 없이 찾아온 고난에도
언제나 사랑이 있었다는 것
사랑이 아니었다면
어찌 견디고
헤쳐 나갈 수 있었을까
한 해의 열매에
가장 으뜸은 사랑이었음을
춥고 황량한 겨울
붉은 열매처럼 따뜻한 마음
나누는 사랑의 열매로
희망의 디딤돌이 되었으면.
12월의 첫날 /배정숙
어제는 가고
하루가 문을 여니
한 달이 달려오고
황금으로 살수도 빌릴 수도 없는
지금이란 즐거운 시간을
당신께 드립니다
덤으로 받은 선물(달력)
2023년 일 년 365일
금고 속에 시간 벽장에 걸어 놓고
당신과 함께 가는 인생 여행길
엔도르핀이 솟는다
같이 가요 내일로.
12월을 보내며 /白松(백송) 정연석
눈 내리는 12월 어느날
전망 좋은 Cafe에 앉아
꿈 많던 어린 시절로
추억여행을 떠난다
중년이 되도록
수많은 12월을 마주했지만
올해는 무슨 까닭으로
아쉬움이 커지는지 모르겠다
年初(연초)에 하려던 일들
절반도 이루지 못했지만
긴장감도 없이
여유를 부리는 자신이 얄밉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고
후회의 늪에 빠지는 어리석음
12월을 보내며
새해에는 나쁜 습관을 버려야겠다
벽에 걸린 2023년 새 달력을 바라보며
12월의 기도 /박명숙
겨울밤 얼었던 마음 한 조각
절절한 울부짖음에
가슴이 녹아내린다
찬란한 태양을 맞이하며
감사와 평안으로 무릎을 세우고
하룻길 내딛었던 날들
한 해도 열심히 일한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12월은
일 년을 돌아보고
후회 속에 감사를 엮는 달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
누군가를 위해 눈물 흘리는 아름다움
모두가 사랑이 아니고서야
담을 수 없는 것을
서로 사랑하며 사는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이며
소망의 불빛을 밝히는 것을.
나의 불빛이 평화로운 까닭은
어둠과 함께 돌아갈
울타리가 있기 때문이다.
십이월에 서서 /高松 황영칠
임인년 정월 초하루 일출 앞에 서서
여민 옷깃에 두 손 모으고
가슴 떨린 간절한 새해맞이 기도
십이월의 막다른 길목에서
발자국에 고인 흔적을 살펴 본다
봄 햇살 내려앉은 텃밭에서
사랑 담은 씨를 싹 틔웠던
봄 날의 수채화
널찍한 마당에 멍석 펼쳐 놓고
까만 이빨 드러낸 빨간 수박 입술에
새겨둔 달콤했던 입맞춤
여름 밤 한바탕 웃음소리가
모기장 틈새로 날아간 날갯짓의 흔적들
붉은 단풍 물 그림자 일렁이며
가을 바람에 춤추었던 잎새들의 오색 날개
빨갛던 아내의 두 볼에 새겨둔 입맞춤의 흔적
이젠 주름 사이로 흐르는 하얀 미소가 안타까워
너무 아프지만
그래도 사랑스런 님의 가을 추억이 좋다
앙상한 맨몸으로 12월에 서서
이제 무엇이 더 필요할까
이제 무엇을 더 바랄까
사랑 익은 고운 님의 손길이 있고
친구의 구수한 이야기와
다정한 이웃의 미소가 여기 있으니
그저 이만치 서서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임인년 한 해를 추억 하면서
곱게 익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12월 /조명래
12월은 교도소 담장 안의 느림보시계가 월담하는 달이다
12월은 노처녀 한숨의 달이요
쪽방촌과 고시촌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달이기도 하다
12월은 처음과 끝이 만나고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초입에서 들숨과 한숨이 교차하는 달이다
올 12월도 민망한 얼굴로 보내야겠다
12월의 나무 /정연복
한 잎도 남김없이
다 떨치고
알몸의 기둥으로
서 있는 12월의 나무
참 단순하다
참 간결하다.
긴긴 겨울 너머
새봄이 찾아와서
연초록 새 잎들
돋을 그 날을 준비하며
모든 것을 텅 비운
저 결연한 모습.
12월의
나무들 앞에 서면
나도 문득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다
겉치레 없이
순수한 본질만으로 남은.
12월 오후 회암사지 /박미산
비탈 따라 누워있던 절터
지층을 켜켜이 드러내자
수백 년 숨어있던 주춧돌, 석축, 계단이
옹벽 쌓듯 팔짱을 끼고 있다
그녀가 주저앉아
석벽 틈새 삐져나온 풀뿌리를 바라본다
주춧돌에 달라붙어 사는
이름 잊은 뿌리, 너 거기 있었구나
불에 타거나
세간의 이목이 난도질해도
발견되거나 발굴되는 그녀
시간의 지층을 견뎌 낸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차다
쇄골이 훤히 드러난 채
내몰리는 눈동자와
바람에 얹힌 새들 발소리가
석양이 물든 그녀 몸으로 옮겨온다
노을의 목덜미를 잡고
붉게 묻어나는 시간을 따라 어디든 갈 수 있겠다, 이제는
한기로 옹송그리던 그녀를
겨울 저녁놀이 곁을 내준다
스러져 가는 빛 속에도 또 다른 절정이 있다
12월 /이영선
한바탕 꿈이라도 꾸었는가
시든 꽃 나른한 얼굴들이
길섶에 누워있다
안으로 안으로
못다 이룬 꿈들을 아직도 궁글리는지
지그시 감은 눈 낮은 어깨 너머로
흙먼지는 풀풀 날리는데
까슬한 꽃대궁 한 움큼 잡으니
가벼운 저들의 생애가
내 손아귀에서 바삭 부서진다
세찬 바람에 흔들리며
내리꽂는 빗줄기 등판에 박으며
아아 한 시절 환한 꽃이었을
죽음이여
꺾이는 것은 한 순간이라고
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들녘을 가로질러 가던 겨울이
내게 한 수 일러준다
12월의 곰사냥 /이용한
초목이 난립한 덤불숲은 순진한 괴물로 가득하다
질척거리는 하늘에
나는 12월의 곰사냥이라고 썼다
그게 뭐냐고, 키 큰 물푸레나무가 착한 마누라처럼 묻는다
이를테면 네가 들고 있는 흑백사진 같은 거지
달팽이와 자동차가 지나간 정류장은 벌써 가랑잎에 묻혀서
우글거리는 벌레들의 간이역이 되었다
웅덩이마다 끈적하고 낡은 시간이 고여 있었고,
내가 먹어치운 빵 부스러기 같은 길들의 자취가
어느 새 배고픈 골짜기를 일으켰다
나는 킁킁거렸고 으르렁거렸으며 헐떡이고 미끄러졌다
멀리서 사냥꾼 짖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고,
온 몸에서 충동과 야만이 돋았다
이제 12월의 곰사냥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늑대 새끼를
차도에 몸 던진 취객으로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고 보니,
정작 핸들을 잡고 있지 않다는 황망한 사실을
나는 신갈나무숲에 묻어야 했다
사실 난 용감하지도 않고, 방아쇠를 당길 줄도 모른다
내가 문 열고 나온 골목은 언제나 인색한 추억이 난무했다
어린시절의 도깨비를 몽둥이로 쳐버린 우매한 악마성은
풍경의 연민에 불 탄 배처럼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여기가 심연의 고래 뱃속일지라도
어느 날 고래 한 마리가 이 숲의 나무를 다 먹어치우고
바닷속으로 영영 사라진다 해도
12월의 곰사냥은 기어코 숨찬 협곡을 건널 것이고,
기꺼이 계곡이 다한 자궁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섭씨 5도의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혹은 가지 칠 수 없는 괴물들이
숲에는 가득하고,
진부한 출근의 방식으로는 이 울창한 시간을 기록할 수 없다
차라리 나는 가볍게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순간 12월의 곰사냥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꽃과 저녁과 잎과 입이 얽히고 설킨 여기서 나는……
이제 막 변신을 시작한 반인반수의 꼬리를 힘껏 흔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