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제 한글날이 공휴일인 덕에 쉬는 대체휴일이다.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셨다. 술도 깨울 겸 아침에 신천둔치를 걷는다. 날씨가 완연한 가을이다. 바람이 제법 분다. 둔치에 핀 꽃들이 바람에 흥겨워 춤을 춘다. 경대교를 지나 도청교와 성북교로 걷다 보니 지난번 폭우로 쓰러졌던 풀들이 제법 곳곳이 서 있다. 물에 잠겼던 거북이 등껍질 같은 희멀건 바닥도 속을 드러내고 있다. 그 속살을 드러낸 바닥 위의 온기를 비둘기 군상이 들이마시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칠성교를 지나 경대로 쪽 막 들어서는 길목에 이임영 작가의 시와 그림으로 채워진 「시계, 시간의 길」이란 동시 연작이 전시되어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이임영을 경북 영천 출신으로 아동문학을 전공하는 분으로 소개한다. 칠성교 부근은 시장이 있어서 다소 혼란스러운 곳이다. 이곳에 맑은 동시로 걷는 이의 마음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작가의 배려가 고맙다. ‘시계’라는 주제의 동시가 30여 개가 넘게 전시되어 있다. 시계를 시간의 길로 은유하는 것도 재밌다. ‘시간’이란 주제로 동시를 쓰는 게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닌 것 같다.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매우 추상적이라 그렇다. 시간이 무엇인가? 난이 동시 연작을 스케치하면서 시간이란 추상적 개념을 동시로 구체화하는 화자의 맑은 마음을 엿듣는다.
현재란?
여기/ 여기/
가리키다
지나가버리는 초침처럼
현재라는 시간은
미처 느끼기도 전에
사라지고
또 나타납니다.
긴 시간은/ 오직
과거와/ 미래뿐
그러나/ 현재에 사는 것
멈춰버린 시간
시계는 언제나
현재만 가리킵니다
과거를 가리키는 시계는
죽음을 뜻합니다
죽은 것들이
모두
과거 속으로 사라져갔듯.
난 이 두 편의 시가 마음에 들어왔다. ‘현재’란 무엇인가? 정의하려면 도망간다. 왜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현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고 말하면 이미 지금은 아니다. ‘정오’(正午)라고 하는 순간 정오는 지나가 버린다. 과거로 흘러가 버린다. ‘현재’의 신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을 신비롭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일 아무도 나에게 시간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시간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내가 그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그것을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만큼 시간이 무엇인지를 말 수 없는 신비인 것 같다.
과거는 작가의 말대로 이미 죽은 것이다. 하지만 현재를 살지만, 과거와 미래를 함께 산다. 과거는 이미 죽은 것이 아니다. 항상 현재 속에 들어와 침전되어 있다. 현재를 사는 나의 의식은 항상 과거를 지향한다. 지향이라는 말은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과거를 의식에 현전화(現前化)하는 것이다. 미래 역시 그렇다. 아직 오지 않는 미래로 가는 게 아니다.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현재로 소환한다. 물론 이 경우 지향도 미래로 가는 게 아니라 미래를 현재로 불러온다. 그래서 미래는 도래(到來)이다.
나의 의식은 시간을 구성하는 의식이다. 의식은 ’현재’라는 상자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지난 과거로 그리고 다가올 미래로 자유롭게 흘러간다. 나의 의식은 몸과는 달리 공간적으로도 자유롭다. 몸은 여기 있지만, 나의 의식은 과거에 다녀왔던 터키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에 이미 가 있다. 그리고 내년 초에 갈 딸이 사는 파리에 이미 가 있다. 이처럼 의식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여행한다.
우리가 현재를 살지만, 사실은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여 살고 있다. 시간의 길을 안내해주는 시계는 그야말로 하나의 물리적-기계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나이가 70이 되었지만, 오늘이 가장 젊다. 나의 ’오늘‘ 속에는 과거와 미래의 앙상블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져 있다. 우리는 현재를 산다. 현재가 가장 행복해야 항상 행복하다. 과거도 미래도 다 현재의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오늘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이다. 오늘 이임영 작가의 동시를 보면서 시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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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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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