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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24주일(2018-09-16) |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단호한 선언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으로 우리의 믿음을 드러냅시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릅시다. |
[금주의 말씀(요약)] : [제1독서 : 이사 50,5-9ㄱ / 제2독서 : 야고 2,14-18 / 복음 : 마르 8,27-35]
[제1독서 : 이사 50,5-9ㄱ] : 자기 동족에게 박해를 받은 예언자는 하느님께 자신의 변호를 맡긴다. 그는 하느님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러한 고난을 겪으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미움에서 해방되도록 불의를 받아 내셨다. 사랑은 무의미하고 어쩌면 가혹하게까지 보이는 십자가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우리의 사랑을 통하여 다시 살도록 그들의 미움을 받아 죽는 것이다. [제2독서 : 야고 2,14-18] : 야보고 사도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믿어 구원되지만, 참된 믿음은 그 결실로 드러난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미천한 이들에게 그가 베푼 자선이 그의 믿음을 입증한다. [복 음 : 마르 8,27-35] : 바리사이들의 적개심은 커 가고,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다. 세례자 요한은 참수당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도 예언자들의 고통스런 운명의 길을 가셔야 한다고 예언하신다. 그러나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러한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당시 사도들의 어려움은 여전히 우리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매번 우리의 삶을 혼란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바라는 것 중에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알게하는 핵심적인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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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24주일(2018-09-16) | 기도문 |
가난한 이들의 친구이신 주님, 살아온 곳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벽에 부딪힌 모방신부와 가난한 밥상과의 만남을 통해 결코 만나질 것 같지 않은 지점에서 당신을 통해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가 됩니다. 결국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는 단 하나의 지점은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를 때입니다. 주님, 서로 너무나도 다른 우리 모두가 당신의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감동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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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24주일(2018-09-16) | 말씀 묵상방 |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러한 질문은 언제나 제기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의문은 예수님께서 아직 이 땅에 계실 때부터 줄곧 사람들에 의하여 제기되어 왔다. 그분께서 지니신 권위에 탄복한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루가 4,22) 하고 의아해하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선동가로 보거나 논쟁가 또는 마귀 들린 사람으로 보기도 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분을 예언자로 여기기도 하였다. 베드로는 의심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이스라엘의 해방자이시며 구세주가 되실 것이다.
메시아! 그분께서는 과연 당신 백성에게 어떤 해방, 어떤 구원을 가져다 주실 것인가? 예수님께서 당신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항의하였다. 이에 베드로를 엄하게 꾸짖으시며 말씀하신다. "메시아에 대한 네 생각은 인간적인 것이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로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다리던 정치적인 메시아는 아니시다. 예수님의 행적은 그러한 인간적인 기대로는 바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분께서는 인류사를 빛낸 여러 성현들 중의 한 분이신가? 아니면 슈퍼 스타? 또는 잠시 사람들에게 각광받고는 사라지는 일시적인 영웅이신가?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도 물으신다. "너에게 나는 누구인가?" 예수님에 대하여 알려져 있는 일반적인 이해와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전혀 다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실존의 진리이다. 그것은 고난받는 종의 모습 속에 숨겨져 있는 메시아의 제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게 하는 기준이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고 그분과 참된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그분의 삶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그분께서는 고난의 길을 가신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소명 역시 그 길에 동참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 [주일묵상-1] : 그리스도는 행복의 스승 |
십자가는 세상에서 지고 가야 할 고통과 수난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십자가의 길 따르길
연중 제24주일에 주님 제단에 모인 우리는 말씀의 식탁에서 주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와 우정과 친교를 나누시는 그분의 정체성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행복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오늘 제1독서(이사 50,5-9)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올곧은 ‘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사명을 거부하지 않고, 매질과 모욕까지도 감수한다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도와주시기에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애원을 들어주시고 생명을 지켜주시니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화답송, 시편 116,1-9)고 찬미합니다. 죽음의 올가미와 저승의 공포가 덮쳐 고난과 근심에 사로잡혀 울부짖는 어린 양들을 구해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눈물을 거두시고, 발걸음조차 넘어지지 않게 지켜주시니 새 생기를 얻어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오늘의 제2독서 말씀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야고 2,17)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가 주님의 새 계명인 사랑을 말로서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성과 자유의지로 성실한 애덕의 실천이 교회의 사명에 밑거름이 됩니다.
복음 말씀의 묵상에 앞서 명예를 핵심가치로 여기는 지중해 문화를 소개합니다. 개인주의가 바탕인 서구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와 능력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습니다. 출생으로 명예를 얻는 중동지역 사람들에게는 ‘가족 우선’과 ‘가족 연대’가 소중하기에 한 가문의 연대기(족보)는 가보입니다. 그러기에 불효자의 경우는 돌에 맞아 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신명 21,18-21)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마르 8,27-30)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마르 6,3)로 여깁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남의 말만 들은 외부 사람들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기대와 생각을 알아보는 것은 명예를 지키고 사목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외부인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는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여긴다고 제자들이 전합니다. 이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한 내부 비밀을 철저히 지키도록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우리의 역할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그 분의 제자가 되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반대파에게 당할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마르 8,31-32) 으뜸 제자인 베드로가 인간적 생각에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예수님은 돌아서서 베드로를 호되게 꾸짖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불러 당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조건인 이 구절은 공관복음(마태 16,24; 마르 8,34; 루카 9,23)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제 삶을 크게 변화시킨 말씀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고자 세상 속에서 지고 가야 할 고통과 수난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자신을 버리라’는 말은 쉽게 이해되질 않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냐 세속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을 비하하거나 혐오하라는 뜻은 아니고, 자기중심적인 세속의 삶을 벗어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겸손의 덕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 하는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라 응답하셨습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작은 꽃’,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는 ‘하느님의 손에 몽당연필’,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하느님의 종들의 종’, 김 추기경은 ‘남의 밥’, 최민순 신부는 ‘두메 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저는 ‘단 샘의 두레박’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르 8,3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좁은 길이기에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십자가의 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명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믿고 고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은 행복의 스승이십니다. 나약한 인간이라 유혹에 걸려 숱하게 넘어지면서 깨달은 바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 앞에 나 중심의 삶은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요 ‘영혼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있고, 자비와 용서가 있으며, 지혜와 용기가 있기에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사랑의 실천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새롭게 다짐해봅니다................◆
[말씀자료 : 김창선(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가톨릭신문)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주일묵상-2] :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우리 |
저를 아는 신부님들은 저에게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조 신부는 미맹이야.”
맛을 모른다면서 이렇게 놀립니다. 제가 맛있다고 추천하는 식당에 가보면 늘 별로라는 겁니다. 신부님들의 말처럼 제가 맛을 잘 모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맛을 정확하게 구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습니다. 맛의 기준이 특별하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루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맛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자타공인 미식가인 친구가 강력하게 추천한 곳이었습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얼마나 칭찬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반찬들이 상 위에 차려지자, 식당을 추천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김치가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다른 식당과는 김치부터 다르다니까.”
그리고 곧바로 주인 아주머니께 “이 김치 직접 담그신 거죠?”라고 묻습니다. 이에 주인아주머니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죄송한데요…. 이 김치 중국산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미식가로 평가받던 이 친구를 누구도 미식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직접 담근 김치와 공장김치도 구별 못 하는 입맛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늘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판단 역시 항상 올바를 수 없습니다. 어느 분야의 전문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는 비전문가보다 조금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뿐이지, 이들 역시 실수나 잘못을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입니다. 완벽하신 분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늘 주님의 기준을 따르고 주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칭찬하셨지요. 이 때문에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됐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마태 16,18-19 참조) 칭찬받은 베드로는 자신만큼 주님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주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자, 주님을 꼭 붙들고서 반박합니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시죠.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주님의 뜻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으로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열심히 살지만, 종종 주님의 뜻이 아닌 제 뜻만 내세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뜻은 영광의 자리만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재물을 갖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기준으로 많은 것을 가져야만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십자가를 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뜻을 찾으면서 때로는 고통과 시련으로 보이는 자신의 십자가 역시 기쁘게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주님을 굳게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십자가가 무겁다고 불평한다면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뜻을 찾고, 뜻에 맞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데 이 세상에서 어떤 수치를 당하겠습니까?(이사 50,7 참조)...........◆
[말씀자료 : 조명연 신부(평화신문)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주일묵상-3] : 내게 주어진 십자가 |
자주 사람들은 바오로 서간은 믿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또 야고보 서간은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내용을 조금 자세히 본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바오로 서간은 지속적으로 ‘행업’을 통해서 인간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된다고 강조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무엇을 해서 그 결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선사받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표현으로만 본다면 이러한 바오로 서간과 반대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바오로와 야고보 서간이 말하는 것은 그리 달라 보이진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믿음을 통한 구원의 신적인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보상처럼 ‘내가 무엇을 했으니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그렇기에 구원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합니다. 야고보서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이미 실천을 포함합니다. 믿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더 이상 야고보서에서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또한 그 믿음을 실제로 살아가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야고보서는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라고 전합니다. 실천과 믿음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것은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삶이 구분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믿음일 것입니다. 믿는 것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바른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과 함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에 제자들은 그들이 들은 내용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에 제자들은 쉽게 답하지 못합니다. 단지 베드로만이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답합니다. 흠 잡을데 없는 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에 베드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분을 따르겠다고 말하지만, 우리 역시 자주 베드로처럼 ‘사람의 일’만을, ‘나’의 것만을 고집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걸으신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앞서 가거나 그분의 길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은 제자로서의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너무나도 익숙한 말씀이지만, 이것을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내게 있지만 내가 외면하고 싶은 어떤 것입니다. 이것만 없다면 편하겠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내게 주어진 십자가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게 있는 이런 어려움을 없애주십사 청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그것을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제자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놓여진 어려움을 없애 주시는 것이기 보다, 그것을 이겨내고 극복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십자가 없는 편안한 길을 구하기 보다, 십자가를 지고 갈 힘을 주시도록 청해봅니다............◆
[말씀자료 : 허 규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주일묵상-4] :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
올여름을 너무 힘들게 지냈습니다. 날씨도 무척 더웠고, 경제ㆍ정치 상황도 1997년 이후로 최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에 일어난 사회적 갈등, 예비군 사격 훈련장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사건, 새로운 신분 관계(갑과 을)의 현실, 메르스라는 바이러스의 공포로 서로가 믿음을 잃어버린 시간, 정치권과 정부기관의 부정부패ㆍ능력 부족(거짓 정보로 확인된 황병서의 숙청설 등), 민간인 사생활 사찰… 신뢰가 무너진 시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요즘의 중국 경제 위기는 더욱 힘든 시간이 닥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의 근본은 어디부터일까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소식으로 하루와 한 해를 시작하기가 그렇게 힘든 것일까요? 만나는 사람마다 “힘들다”는 이야기뿐입니다. 이런 어려움이 발생하는 근본적 이유는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용서하고 돕고 살아야 한다’는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개인주의적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즘 말로 ‘한창 잘 나갈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원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변의 평가를 이야기하며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평가를 접하시고는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진정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상과 이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리를 실천하고 따르는 삶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여러 관점에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면서 세상의 주인으로, 세상 창조사업의 협력자로 살아갈 때 인간으로서 존재 이유(창세 1,28)를 알고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에 반해 상대와의 비교(카인과 아벨)나 물질적인 풍요ㆍ특권(다윗과 솔로몬)을 지향할 때는 죄를 범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자비에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모상(image)으로서 실상(reality)인 하느님을 닮아가는 모든 행동과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인간의 일’은 ‘허상’인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추석을 준비하는 시골 어르신들은 정말 바쁘게 움직입니다. 자식들을 위한 선물도 준비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긍정적 평가를 기대하면서 한 해 노동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이목과 관점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괴로움을 겪기도 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신뢰와 용서 그리고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살았는지 되돌아보기보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과와 사회적 성공이라는 평가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자신의 소설 「좁은 문」에 등장하는 제롬처럼 ‘허위의 탈’ 속에 자신을 감추지 말고, 진리를 따라서 정당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하느님의 일’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멋지고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행복과 멋’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운동선수가 떠오릅니다. 한 사람은 축구선수 차범근입니다. 뛰어난 운동 실력으로 유명하지만 저는 1980년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자신에게 고의적이고 치명적인 반칙을 한 위르겐 겔스도르프 선수를 용서한 일이 먼저 생각납니다. ‘용서’라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인물은 핸드볼 선수 윤경신입니다. 지금까지도 독일 핸드볼 리그(분데스리가)에서 전설로 불리는 선수입니다. 그의 진정한 전설은 10여 년간 활약한 소속팀 ‘굼머스바흐’ 가 재정난으로 힘들어할 때 타 팀으로 이적하지 않고 모금 활동을 하고 자신의 집과 차를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구단을 살려낸 일입니다. 두 사람은 돈과 명예를 추구하기보다는 ‘용서와 신뢰’라는 하느님의 일을 행한 멋진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진정한 인간의 행복입니다. 행복하십시오. 교우 여러분!...........◆
[말씀자료 : 박재식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주일묵상-5] :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살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목숨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는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과 같이 소중한 일은, 비록 자기 목숨에 지장이 있어도, 과감히 추구하여 우리의 삶이 의미를 지니게 해야 한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세에 따라 흘러서 무사히 또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돈과 명예를 좇아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그분의 삶을 사는 데에 목숨을 잃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오늘은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북경에서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귀국한 것이 1784년이고, 그 이듬해인 1785년부터 시작된 박해는 조선 조정이 미국과 수호 조약을 맺기까지 약 백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순교한 분들의 수가 만 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분들은 온갖 잔인한 형벌을 다 받았고 비참하게 죽어 가셨습니다. 그 가족들도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가 되어 흩어졌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한국의 그리스도 신앙은 외국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 유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영입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뿌리도 채 내리기 전에 박해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연구하고 그것을 어렵게 국내에 도입 보급한 사실과, 초기부터 시작된 혹독한 박해에서 그렇게 많은 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놀랍게 보입니다.
천주교 관계 서적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이승훈이 세례를 받기 약 150년 전의 일입니다.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문으로 된 몇 권의 천주교 서적이 중국으로부터 흘러들어 왔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서학(西學)이라 불렀습니다. 그 시대 이 문서들을 영입하여 연구한 사람들은 실학파라 불리는 유교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교 국가를 표방하는 조선이 성리학(性理學)의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져 있을 무렵, 합리적이고 현실성 있는 학문과 사회 제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민족적 시련을 겪은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이 무렵 실학파가 연구한 천주교는 신앙이기보다는 하나의 세계관이고 사회관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조선 시대상을 어떤 저자(이이화, 「허균」 한길사 1997, 45-47)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무고로 죄 없는 사람들을 고발하여 감옥에 가게 하는 일이 많아서 백성은 불안하고 서로 믿지 못하는 풍조가 휩쓸었다. 벼슬 팔아먹기와 뇌물과 횡령이 판쳤다. 과거(科擧) 시험 문제가 사전에 유출되는 등 부정이 행해지고 벼슬아치들의 부정부패는 당연한 것으로 되었다. 무리한 토목공사들을 벌려 놓고 관리들은 공사 자재를 횡령하고, 민생고에 허덕이는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아서 매우 사치스럽게 살았다. 결국 임금으로부터 지방 수령에 이르기까지 자기 신분을 보호하기 바빴고, 그것을 위해서는 금력이 필요했다. 임금은 신하들로부터, 신하들은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는 길밖에 없었다.” 절망적인 그 시대의 모습입니다.
이런 여건에서 서학을 공부한 실학파 학자들에게나 후에 신앙을 영접한 초기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은 대단히 신선하게 보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군주(君主)가 절대적이 아니라 천주(天主)님이 계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법이란 왕이 자의로 만들어서 백성에게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느님이 질서 지어준 자연과 마음의 법, 곧 양심 법을 가르쳤습니다. 노예와 같이 법을 지키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 이치를 따라 행동하고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왕의 법은 무자비하고 그 시대 횡행하는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착취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무자비한 법과 제도에 한 마디 항의도 못하고 짓눌려 살다가 죽어 가는 그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정의와 자비와 사랑의 질서가 있고 그것은 우리의 죽음을 넘어서도 지속된다는 말은 현재의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는 기적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조상제사를 거부한 것은 그들을 박해하는 권력자들에게 큰 명분을 제공하였습니다. 조상제사는 그 시대 유교 가르침의 핵심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이 그것을 거부한 것은 유교 국가 체제의 근본 질서를 거부한 것입니다. 왕과 권력 구조의 절대성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축첩(蓄妾)을 거부하여 유교가 가르친, 남녀 차별의 철칙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사대부(士大夫) 중심의 계급의식도 거부하였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의식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습니다. 순교자들 중에는 백정 출신 황일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천당이 둘이다. 하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고 또 하나는 양반과 쌍것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똑같이 존중되는 이 세상의 천당이다.” 백정 출신으로 멸시 당하던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계급의 장벽을 넘어 모두가 같은 형제자매로 통하는 세상은 그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이런 새로운 세상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실망시키고 불행하게 만드는 왕과 벼슬아치들을 거부하고, 하느님으로 열리는 새로운 질서를 열망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을 거슬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뒤를 따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로마서 말씀과 같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로마 8,39)는 사실을 믿고 형벌당하고 죽어 가신 분들이었습니다 .............◆
[말씀자료 : 서공석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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