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대입구역 6번출구로 나와서
삼선감리교회쪽으로 올라간다
꽤 가파르다
높은 지대의 풍경도 눈에 확 들어온다.
성북구민회관쪽으로 계속 걷는다.
여기서 잠시 쉬고 도봉산과 북한산 감상을-,.-
힘들었쏴;;
좀 쉬다가 이 메타세콰이아가 늘어선 길을 걷는다.
하늘 한마당에 도착하면 양쪽갈래가 나오는데
왼쪽은 팔각정으로
오른쪽은 정릉쪽으로
정릉쪽으로 길을 따라 내려왔다.
이런 오래된 놀이터도 보이고
너무 오래되서 저렇게 막아놨다보다.
누군가 빨래를;;
정릉 도착
입장료는 1000원
정릉
사적 제208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산역을 시작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동에 자리를 정하게 되었다.
능이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진 것은 1409년(태종 9)이며, 이것은 오로지 태조가 제8왕자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태종의 사감에서였다. 태종은 능을 옮긴 지 한달이 지나자 정자각(丁字閣)을 헐고 석물을 모두 묻어 없애고, 광교(廣橋)에 있던 흙다리가 무너지자 십이신상(十二神像) 등의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능을 옮긴 뒤 수백 년간 정릉은 왕후의 능이라기보다 주인 없는 무덤에 불과하였다. 1669년(현종 10) 송시열(宋時烈)의 계청(啓請)으로 비로소 종묘에 배향하고 능묘로 봉심(奉審)하기로 하였으며, 이경석(李景奭) 등의 계청으로 능을 수리하고, 재실을 중건하여 수호군을 정해주기에 이르렀다. 능 관리를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었다.
동네분들이 바람 쐴겸 많이 찾는듯하다.
정릉을 나와 아리랑 고개로
정릉쪽도 개발이 많이되어서
아파트도 많이 들어서고 여기저기 한참 공사중이다.
정릉쪽이 건축학개론을 찍었던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다.
아리랑 고개
춘사 나운규가 여기서 영화 아리랑을 찍었다고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저기 보이는 건물은 영화관이라고 한다.
성신여대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보면
이런 동판으로 바닥에 붙여져 있다
당대의 한국 영화 포스터가 말이다.
아리랑 테마공원도 있다는데 보질 못했다;
어디에 있던겨;;
텅비어버린 골목동네
안타깝다.
흥천사 일주문
태조가 신덕왕후의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사찰이다.
흥천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이다. 1395년(태조 4) 왕이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능지를 정릉에 조영(造營)하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6년 창건하기 시작하여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이 완성되었다. 창건과 함께 조계종의 본산이 되었고, 승당을 설치하여 항시 선(禪)을 주관하는 참선 도량으로 발전하였다. 1398년 왕명에 따라 절의 북쪽에 사리전을 세웠다.
1410년(태종 10) 절의 탑을 보수하고, 1416년 기신재(忌神齋)를 지냈다. 1429년(세종 11)에는 왕명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고, 1437년에 다시 사리전을 중수하면서 이 절을 관아 건물처럼 정기적으로 보수·수리하도록 법제화했다.
이처럼 흥천사는 창건 이후 억불의 시대적 조류 아래에서도 왕실의 지원과 장려를 받으며 꾸준히 법통을 이어갔다. 왕실의 제사나 왕족이 병들면 치병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졌고, 가뭄에는 기우제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성종 이후 왕실의 지원이 줄면서 퇴락하기 시작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화재가 일어나 전각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사리전만이 화재를 면했는데 당시는 연산군의 악행과 폐불이 자행되던 때라 복구하지 못하고 불상과 기물만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檜岩寺)로 옮겼다. 1510년(중종 5)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절터는 대신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뒤 1569년(선조 2)에 왕명으로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로 절을 옮겨 짓고 신흥사(神興寺)라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에는 승려 성민(聖敏)·경신(敬信) 등이 새롭게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846년(헌종 12) 구봉화상(九峰和尙)이 칠성각을 세우고, 1849년 승려 성혜(性慧)가 적조암(寂照庵)을 창건하였다.
1853년(철종 4)에는 법당을 중수하고 1855년 명부전을 새로 지었다. 1865년(고종 2)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요사를 짓고 절을 중창한 뒤 다시 흥천사라 하였다. 1885년 대방을 중수하고, 1891년에 42수(手) 관음상을 봉안하였으며, 1894년에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근대에 들어와 새롭게 전각이 들어서면서 가람이 크게 확장되었다. 1933년 독성각이 불타자 이듬해에 재건하였고, 1942년에는 종각을 새로 지었다. 1959년에 칠성각을, 1967년에 용화전을, 그리고 1970년에는 연화대를 중수·신축하였다.
사찰 내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5세 때 쓴 글씨가 남아 있고,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일주문·종루·대방(만세루)·연화대·명부전·용화전·북극전·독성각과 노전 등이 있다.
암자같은 느낌의 산신각
돈암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