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란 시인>>
<<진 란 시인의 양력>>
* 1959년 전북 전주 출생
* 2002년 『주변인과 시』 편집동인으로 작품 활동
* 시집 『혼자 노는 숲』
* 계간《주변인과 詩》편집위원 편집장 역임.
* 2009년 월간《우리詩》편집교정위원
* 2012년 계간《시와소금》기획위원
<<진 란 시인의 대표 시>>
오래 전에 불러보던 사소한 습관으로/진란
먼저 떠나야겠다
생각하니 붉은 꽃잎들이 실없이 졌다
백만 년의 사람, 간지러운 사랑은
백 일도 안 되는 말로 탑을 쌓아두고
먼 곳을 바라보던 그 눈빛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산다는 일이 그러려니 싶었는데
사라지는 것과 새로 오는 것의 사이에서 잠시
허둥거렸다
이쁘다며 지나가는 그림자들은
붉은 꽃만을 보았다
백만 년을 꿈꾸던 옛사람아
오래된 꿈을 물어 나르던 입술처럼 피어라
달싹이는 마른 꽃잎이라도 피어보아라
저 홀로 삼복 내내 피고지고 피고 지더니
시나브로 가볍게 몸을 날린다
그때, 어미 잃은 붉은머리오목눈이도 그랬으리라
서러움은 붉고 또 붉었으리라
그래도 살아봐야겠다는 쪽잠의 모색
목백일홍 흰 몸에 어룽지는 잠깐의 오수처럼
무겁게 걸려 올라오는 얼굴들
오래 전에 불러보던 사소한 이름처럼
퐁네프에 앉아/진 란
올해의 마지막 여행을 막 마치었습니다
내일, 어떤 해가 떠오를지 알 수 없지만
떠나는 사람의 등을 바라본 것처럼
오랫동안 허망하게 늙어가고
연애는 젊어가겠지요
당신을 만나고 온 날
불면에 시달리며
야윈 어깨 들썩이는 초승달을 봅니다
잊는 법을 배우지 못해
잠깐의 헤어짐도 낯설고 두려운,
아직은 당신을 보낼 때가 아닙니다
마시고 취하고 흠향하다
즐거운 의식을 접는 날에
보내겠습니다
이제 이 겨울에는
호올로 견디어야 합니다
타고 떠나야 할 기차는 올 것입니다
새로운 다리를 건너기까지
낡아진 채로 거기 있을겁니다
바다가 일어서서/진 란
취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런 것이 아니었었다
파란 그믐달이 날카롭게 빛나는
둥근 테두리,심장을 죄어드는 소란이었다
바다는 취해 만신창이가 되고
바닥에 가라앉은 부산물들이
해조를 삭이고 바위를 부식시키고
다른 세상에 옮겨가지 못해
혼의 긴 출렁임이 숨을 멈추고
단 한번, 달빛과 합환주를 나누기 위해
기포로 날아 오르는 것이 절명인 것을
어둠 안에서 눈뜨는 파도
일어서며 그대로 날아 올라
수평을 열어 보이는
산호색 아름한 빛살로 퍼지는구나
몸 안에 담긴 어둠을 툭툭 털며
섬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섬들은 더이상 가라앉지 않는다
와불 환타지/진 란
그대 눈뜰 때, 산당화
고단한 그늘에 눕혀야겠네
뜨거운 권주가라도 불러주시게
두려움 없는 잠 설레이며 들어갈 수 있게
붉은 가슴 안에서 심장 뛰는 소리
천근같은 눈꺼풀 바르르 떨리네
입술에 닿는 산당화 숨소리
훨훨 피어나거든, 가시라도 좋아라
고수레 한잔 드리고
숨에 찔려 누우려네
혼자 노는 숲/진 란
봄꽃들이 앞 다투어 피고지고
그렇게 후다닥 지나갔다
항상 가던 그 자리를 다시 걸어가며
산목련 함박 웃는 모습을 보렸더니
그새 지고 없어, 아차 늦었구나 아쉬운데
어디서 하얀 종소리 뎅뎅뎅 밀려온다
금천*길 푸른 숲 사이로 때죽거리며 조랑거리는 것들
조그만 은종들이 잘랑잘랑 온몸에 불을 켜고 흔들어댄다
순간 왁자해지는 숲, 찌르르, 찌이익, 쫑쫑거리는 새소리들
금천 물길에 부서져 반짝이는 초여름의 햇살, 고요를 섞는
바람, 나를 들여다보는 초록눈들이
환생하듯 일제히 일어서는 천년 비룡처럼
혼자 노는 숲에 혼자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숲에는 많은 것들이 혼자였다
내가 없어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들
고맙다
————
* 창경궁 홍화문을 지나서 춘당지로 가는 숲 속에 흐르는 물길. 옥천이라고도 한다.
혼자 노는 숲 1/진 란
-우울의 포지션
삶은 되돌이표가 없는데
나는 자꾸 되돌이표처럼 되돌아오고 되돌아가고
되돌이표를 자꾸만 물위에 띄워놓는다
앙금으로 가라앉은 것들이 부유되어 올 때까지
몽니를 부리듯 그 자리에 자꾸 되돌아가서는
날아가는 것들을 부러워하고
헤엄치는 것들을 샘내고
피어나는 것들을 기뻐하고
지는 것들에 대하여 경외하면서
내 몸이 땅 위로 부유하는 것이 더 쉬울 것만 같은
그런 기다림이 홀가분해 보이는 숲, 속에서 나는 왕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보는 재미
네가 없을 때 슬쩍 훔쳐보는 관능
그래보아도 되돌아오는 것은 없는데
애써보아도 되돌아가는 것도 없는데
어쩌자고, 난이도 낮은 이 곳에 앉아 기다리느뇨
그럼에도, 난이도 없는 저 곳에 서서 서성이느뇨
그들만의 요란법석/진 란
어느 순간,
세상의 모든 애인에게 한꺼번에 전화를 거는 사람
달이 떴다고 전화를 걸고
눈이 온다고 문자를 보내고
비가 온다고 온통 쓸쓸해하는
모든 세상의 길은 애인들의 전화선이다
한때, 서로에게 환한 등이었을 수다스러운 행각도
한때, 오직 한 곳만을 응시했을 뜨겁던 시선도
바람이 불고
풍경이 흐려지고
사람도 낡아지는데
보이지 않는 선을 걸어가는 모퉁이쯤에서는
어젯밤 쓸쓸한 가슴에 품었다 걸어놓은 너의 눈썹달이었고
새벽에 홀로 서 반대편의 반쪽을 생각하다 미처 지우지 못한 낮달이었고
다시는 붙일 수 없는 사금파리처럼 깨어진 조각달이었고
그대는 세상의 모든 전화벨이 한꺼번에 쏟아지라고
길을 열어놓은 사람, 부재중이었을 수도 있었을,
거절했을 수도 있었을,
스팸으로 등록되었을 수도 있었을,
여전히 바람은 불고
달이 뜨고
벨은 울린다
나비 효과는 없다/진 란
오늘 난, 나비와 접신을 하고 광장으로 간다
구겨진 춤과 음표를 끌고 광장으로 간다
꽃도 풀도 나무도 죽어버린 곳에서 너훌너훌 나비는
완고한 차벽이 겹겹이 쌓인 틈과 사이를 흘러서 간다
푸른 낙타의 발자국
붉은 달의 발자국
은빛 사막여우의 발자국
노란 나비 떼의 발자국
지구별 여행자의 땀에 밴 배후가 지워지기 전에
때늦은 꽃샘이 심술을 부리기 전에
까닭 없는 오아시스, 너희의 신기루가 아니길
환한 햇살의 금가루로 날리는 사월의 소풍과 가라앉은 세월
냉랭한 물대포에 날아가는 맨발의 어미들
등 푸른 목어가 되어 문 열라고 문을 열라고
제발 문을 열고 이야기 좀 하자고 제 속 두드리는 아비들
금요일엔 돌아오겠습니다 그런 금요일이 수백 번
기억하겠습니다 그런 날이 삼백육십오일
그네의 차도르에 앉은 가벼운 비명들이다
광장의 모서리에서 아무라도 끌어안고 싶은 실오라기
그 대오에 캡사이신이 뿌려진다
노랑나비 떼들의 함성과 희어진 날갯짓이 벽 안에서 절명한다
그만큼의 거리에서 나는 나비 그래 방
길 위에서 길을 묻다/진 란
길 위에 서있을 때, 나 또하나의 길이었다
꽃을 바라보고 그를 불러줄 때, 나 또한 꽃이었다
바람 밖으로 가열찬 마음을 밀어낼 때에도 난 바람이었다
햇살을 받쳐주던 푸른 잎새들이 내 머리에 머물 때
그 잎새 밖으로 난 길을 따라올라 구름으로 가벼워지고
먹장 구름 기대어 무거워질 때에는
함께 둥둥거리며 뜨거운 불볕, 그 하늘에서 시렁거렸다
한낮 반짝, 한번씩 소나기로 쏟아지기도 했었다
비워지고 가벼워지고 길 위에 다시 서있으면
어김없이 꽃들은 꽃 속으로 나를 숨어있게도 하였다
치렁거리는 이 기억도 한때는 설레게 하고
구석으로 우우우 몰리던 때이른 나뭇잎들도
꽃잎과 함께 바스락거리며 길 위의 바퀴처럼 눈부시다
어쩌다 난 길이 되어 있는지, 다시 누군가의
길과 맞닿아야 하는 수레의 흔적을 굴러가는지
길 위에서 길을 꿈꾸는 길치, 그 부림의 날을 바라노니
가멸한 마음으로 길을 가고 또 오고 또 가겠구나
저녁의 시/진 란
꽃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발바닥과 무릎과 종아리 목과 등과 팔뚝이 쑤시고 아파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귀인을 만난 날이라 심장까지 저미지 않는다
사람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쓸말은 하나도 없이 쓸모없이 주절거려 쓸쓸하다
사람꽃은 스치는 바람결같이도 상처를 남긴다
말없이도 웃고 속없이도 실컷 웃고
입술 끝이 귀에 걸리게 웃고 들어온 날
내 뒤를 따라들어와 끝내 울게 하는 것은
사람꽃 속에 함께 있던 바로 나, 내 그림자들이다
행여 지나치는 말로 과하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직설화법으로 말한다며 깊이 박히는 비수를 꽂지 않았을까
내가 받은 비수들을 뽑아내면서 어쩐지 나는
다음 생에는 꽃으로 태어나졌으면 싶은 것이다
꽃을 본다는 일
사람꽃을 본다는 일
꽃과 꽃 사이에서 질서를 지킨다는 일
말하자면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지 않고
잘 지켜주면서도 서로 행복해지는 일
시퍼런 갈기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무법자같은 말
향방없이 달려왔다가 달려갔다가 봄햇살처럼 뜨겁기도 하다
네가 나를 무시하면 그래 나도 너를 무시하면 된다
혼자 노는 숲의 독백이 깊어지는 시간
꽃과 사람꽃 숲의 길 잃지 않도록 귀 열어두는 일
홀로 피어나고 홀로 나부끼고 홀로 버티는 일
바람은 내 안 중심부터 소소하게 흔들리더니
꽃바람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회오리바람으로 몰아치기도 하고
내 귀가 바람의 중심이었다는, 그런 저녁이다
할미꽃/진 란
매화 피어나고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고, 여름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그 가을도 지나가고, 깊고 긴 겨울이 오고
사는 일이 매양 이렇게 계절의 꽁지를 물고 쫓아가는 일, 붉고 뜨거운 꽃잎 다 지고나면 백발만 오래도록 휘날리는 것
그리곤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버리는 것
안내방송/진 란
구월의 마지막 날이 되자 애정범람주의보가 울렸습니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 두어 시간만 지나면 시월입니다
지금은 가을의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가을역의 종점에 닿을 것입니다
잊은 것이 없으신지 빠짐없이 주변을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읽으시던 낭만주의보는 가슴에 잘 접어두시고요
콧등에 걸쳐두었던 돋보기는 안경으로 바꿔 쓰십시오
식어버린 커피도 들고 내리시고요
아, 이어폰 대신에 맑은 바람 한 점 귓바퀴에 걸어 두세요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평일이 바로 앞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행복한 하루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사랑한다고 옆 사람에게 나즉히 건네어도 좋습니다
함께 행운을 빕니다
가을이라는 시집을 읽는 시간/진 란
노을빛 든 수양벚 늘어진 잎새 사이로
스며든 저녁의 햇빛 아래 앉으니 눈물이 나네
세상에 있던 빛 중 가장 은근해지는 저물 무렵
해걸음 속 여전히 웅성거리는 사람들
잎새 바람에 꽃 피워 바시랑거리던
아득한 봄날의 한때는 언제였는지
꽃 핀다 꽃이 핀다 꽃잎 진다 꽃잎 진다
그러한 세월 위로 만화방창 흘러가고
다시 꽃피울 날 바라보면 아득해지는데
어제의 그 꽃 아니며 엊그제 너의 다정함 아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또 봄은 오고 그러는지
까르르 아이들의 웃음이 바람으로 흩어지는 차르르
주홍빛 서쪽 하늘과 주홍빛 알전구가 켜지는 시간
가을 저녁 무렵은 가난하게 기도하는 시간이네
빈손으로 천지신명께 마음 올리는 시간이네
지금은 모두 시인이 되는 시간이네
우주 미아/진 란
길을 걷다가 생각했다
세상과 괴리되어 먼 곳을 걷는 시인들은
스스로 고아가 아니었고
태생적으로 미아로 태어난 존재였을 거라고
바람을 보다가 생각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더는 가야 할 곳도 없어져서
천성적으로 헤매는 바람이 되었을 거라고
별을 보다가 생각했다
더는 돌아갈 곳이 없어 은하수를 도강하여
천년을 미친 듯 달려오는 빛이 되었을 거라고
그리하여 이제는 낯선 곳에서 오는 우주의 진공을
잡아먹는 거대한 식탐의 블랙홀이 되고
궤도를 이탈한 자끼리 꼭 붙잡고 서서 부들거리며
흔들어대는 저 우주의 아이들을 낳고
그래서 선천적으로 쓸쓸해지고
그래서 별과 우주 사이를 건너다니는 거라고
귀로/진 란
한때
불잉걸로 자작자작 타오르던 날 있었으리
푸른 잎사귀 차랑대는 오후의 햇살 속에 그대를 심고
잎사귀의 방울을 달고 싶었으리
내 속에 맺힌 그대여
숲으로 난 저 오솔길 오래도록 함께 소곤대고도 싶었으리
사람아
눈감고도 환한,
내게서도 네게서도 언제던가 한번쯤 열렸다가 닫혀버린 그 길
푸나무에 덮여 잃어버리기 전에
뜬금없는 기별이면 어떠리
먼발치서 화들짝 놀라 달아나는 노루처럼이래도 이 숲으로 오오
바람이 미끄러져 들어간 아무도 없는 숲
자작나무 초록의 잎에 그대 눈동자 슬어놓고 가오
나비/진 란
시방은
시치미 뚝, 떼고
계절이 내어주는 길을 굴러보련다.
햇살 한 점, 바람 한 점,
그 속에서 하늘거릴 꽃잎 한 점,
자장보살의 미소 한 점 콕, 콕 찍어서
니 가슴을 겨냥하고
희고 긴 강물을 만나면 시린 눈빛
한 점 물수제비로 날려버리고,
날아가다가 몸매 날렵한
은사시나무나 자작나무를 만나면
단단하고 흰 어깨에 슬쩍
기대고 잠들어도 보고
골목/진 란
눈 깊어진 당신이
귀 얇아진 당신이
지난 시간의 흔적을 밟아온 휘파람소리는
은회색의 저녁, 긴 꼬리를 끌어당긴다
사람꽃 져버린 자리,
온기 없는 골목이 슬그머니 미끄러진다
서쪽으로 밀린 구름들도 작당했는지
물끄러미, 서슬이 붉었다
나 없이도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이다
길들이기/진 란
외출하고 싶다, 누가 가둔 것도 아니다.
봄 꽃들이 花르륵 花르륵 피어나고 있으니,
잊어야 할 시간의 저 너머
꽃잎 피고 지는 저 순간의 스침을
하염없이 놓치고 있으니
오늘도 간절해라
어여뻐라,
화양연화의 찰라들을 못보다니
봄의 봄도 금세 지나가는 간이역같이
툭, 툭
지고 있다
봄의 화려한 눈물일 줄
누가 알랴
왜개연*/진 란
내 안의 바람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물그림자 물끄러미 바라보지만
바람은 슬그머니 수면만 흔들고 간다
거기에 바람, 빠질 수 없어
그 안에 바람, 숨길 수 없어
바람은 바람대로
바램은 바램대로
물속에서는 필 수가 없어
제 그림자만 들여놓은 꽃
*왜개연 : 연못이나 늪지에서 자생하는 수련과의 다년생 수생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