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초 선생님 사건으로 가슴이 뻐근한 날들이 지나고...원망하고 비난하고 개탄하는 말들을 너머서 교사들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을 직면해야 한다.
내 마음에 일어나는 질문들.
왜 이 지경이 되도록 교사들은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걸까? 왜 교사 개개인이 고립된 채 홀로 이 문제를 끌어안고 정신과 상담으로 버티고 있었을까? 교사들은 왜 가르칠 권리를 침해받는 이 상황을 참고 견디고만 있었던 걸까? 교사들은 지식인들이고 엘리트둘이다. 왜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고 을이 되어 죽음까지 내몰려야만 했나? 대체 이 무기력에 어떤 원인이 있는 것일까?
교사들의 연대의 구심점은 교원 단체다. 특히, 교직원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 향상이 일차적 과제고 존재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소속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이 이렇게 악화 되도록 아무런 문제 제기도 대안도 실력 행사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이 무감각의 원인은 무엇일까?
진보 교육감이라는 이름으로, 진보 교육의 이념으로 달려온 종착점이 왜 이 지경인가? 진보 교육은 무엇을 위한 진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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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 집회에서 자유 발언하는 선생님들의 뜨거운 목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참지 않겠다. 내가 참아서, 내가 침묵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서이초 선생님의 죽음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 내가 죽였다." 그리고 아동학대범으로 몰렸던 사례들을 쏟아낸다. 그렇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다행입니다.
인생 살아보니 느끼는 거... 누구도 대신 싸워주지 않는다. 스스로 싸우지 않으면 누구도 내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지도 내 권리를 지켜주지도 않는다. 지하철에서 쇠사슬에 몸을 묶고 장애인 이동권 확보를 위해 수십 년째 싸우고 있는 전장연의 투쟁을 보라. 왜 교사들은 그렇게 절실하게 싸우지 못했는가? 교사는 그렇게 싸우면 고결성이 손상되는가? 고결성에 발목이 잡혔던가? ....
이렇게 물으면 바보인가? 야멸찬 건가? 첩첩이 교사를 무력화하는 법적 현실을 몰라서 그러는 건가? 그래도 물어야 한다. 주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스스로가 해결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원위치.
-교사들이 체제순응적으로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길들여지거나 혹은 손발이 묶인 데는 교사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혹은 우리 사회가 교사들을 규정하는 정체성의 밧줄이 한몫한 것은 아닌가?
-연대하고 함께 싸우는 교사 공동체가 파괴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신뢰와 친밀성의 역량이 점점 떨어져 가는 우리 사회의 경향성과 궤를 같이하는 현상인가? 혹시 내가 무능한 교사로 보이면 어쩌나 하는... 경쟁의 논리가 연대의 논리를 압도하고 있는 건 아닌가?
-교직원 노동조합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이 있거나 아니면 교사들이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라는 신뢰를 상실한 것이 아닌가?
-진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수요자 중심 교육이라는 신자유주의 교육의 지향을 하나도 극복하지 못했거나 오히려 심화시켜온 것은 아닌가? 학부모의 표를 의식해서 교육의 영역에 보육과 돌봄 노동까지 끌어들이면서 공교육의 위상과 역할을 잠식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교육의 주체로 교사를 고려하고나 있는 것인가? 그 진보 교육이라는 정치적 수사에 교사들도, 노동조합도 투항해 버린 것은 아닌가?
혹자는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권이 추락했으니 학생 인권을 주장한 전교조가 원흉이다, 그러니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진영적 논리다. 학생과 교사의 인권은 충돌하는 권리가 아니다. 모두 동등한 인권이다. 인권 신장은 제로 섬 게임이 될 수 없다. 학생도 인간이고 교사도 인간이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는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하고 신장 되어야 한다.
혹자는 교사를 노동자라고 규정한 전교조 때문에 교권이 추락했다고 한다. 터무니 없는 소리다. 오히려 가르치는 일을 하는 노동자라는 의식이 부재했기 때문에 생긴 비극이다. 일례로 전화 응대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폭언이 사회문제가 되자 노동자의 노동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통화가 녹음 되고 진상 고객은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되었다. 그런데 왜 학교엔 진상 고객인 학부모의 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부재했는가?
그건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를 바라보는 너무나 다양한 시선이 복잡하게 엉켜서 이도 저도 아닌 채로, 교권이라는 애매모호한 수사로 이 지경까지 떠밀려 왔기 때문이다. 교사는 슈퍼맨, 인격자, 친절하고 인내하고 모든 책임을 기꺼이 감수하는 존엄한 스승, 특별한 권위를 지닌만큼 특별한 희생도 마다않아야 하는 자. 이런 허위의식을 떨치지 못한 탓이다. 교사의 노동권을 전화 응대 노동자와 동등하게 보장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한 탓이다.
전 인격으로 응대하면 전인격이 취약해진다. 모든 시간과 모든 영혼을 요구하는 건 봉건적 노예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근대적 의미의 노동자란 하루 왼 종일이 아니라 계약된 노동 시간 동안만 전인격이 아니라 노동력만 제공하고 그에 따른 임금을 받는 이를 말한다. 교사가 노동자임을 부인하면 개인정보까지 다 제공해서 밤낮으로 전화하고 카톡 보내고 모욕하고 폭력을 일삼아도 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교사 노동의 특수성에 대해서, 고려해야 할 점이 많은 걸 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나 많은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유지되어 온 건 담임 제도가 기여한 바가 컸다고 생각한다. 미성년 국민들에게 있어 담임 제도는 일종의 사회 안전망이었다. 전 인격을 갈아 넣어 버텨왔지만 혐오 사회, 모욕 사회의 흐름 앞에서 이젠 한계에 봉착했다.
사교육에 많은 지분을 빼앗기면서 그나마 생활 지도, 전인 교육의 명분으로 유지하고 있는 공교육의 현실에서... 교사 노동의 특수성이 늘 제기된다. 이 문제는 교육의 본질과도 연결되는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한 문제라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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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이 국가에 채용 되어 일정한 임금을 받고 학교에서 부여된 업무를 하는 이상 그 업무의 성격이 어떠하든 노동자임이 분명하다. 이걸 인정하고 다른 직종에서도 당연히 적용되는 권리를 요구하자. 전교조는 “교사는 노동자다.”라는 출발점의 선언에 천착했어야 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노동자의 노동조합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일해야 한다.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개선안을 도출해서 단체 협상을 하고 그도 안될 때는 돌파해야 할 지점을 설정하고 투쟁해야 한다. 그 투쟁이 절실하고 정당할 때 교사들은 연대해야 한다. 모든 교사노조가 함께 연대해야 한다.
당장 급한 문제는 ...
교사들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민원인을 직접 응대하지 않게 해야 한다. 민원란을 학교 홈페이지에 열고 실명으로, 서면으로 민원을 접수하고 응답하면 된다. 그 결과 전화 통화를 할 때는 학교 전화로, 통화는 녹음해야 한다. 면담은 사전 예약해서 업무 시간 내에, 녹음과 녹화가 되는 민원상담실에서 해야 한다. 수업 중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은 다른 학생의 수업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수업하는 교사가 상대하지 않고 미국에서 그렇듯이 교장실로 보내거나 다른 전담 인원을 고용한 부서로 보내야 한다. 아니 교장실이 좋겠다. 교장실로 보내고 교장이 학부모 상담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모든 문제를 쉬쉬하면서 담임교사가 해결하라고 외면하는 교장들에게 부담을 지우고 이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될 수 밖에 없게 다그치려면 그 수 밖에 없어 보인다.
더 길게는 파업권도 따내야 한다. 유럽은 그렇게 하고 있다. 이 길이 교사 노동의 특수성을 고민할 수 있는 토대라도 보호하는 길이며 법조인 부모를 두지 못한 기댈 곳 없는 서민의 아이들의 교육 받을 권리를 지켜내는 첫걸음이다. 진보교육감을 세우면 대신 해결해 주던가?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나 절실하게 보고 있다.
질 높은 공교육을 지켜내고, 그 공교육의 힘으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숱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면.... 교사들의 바램일 것이다. 공교육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주체로 다시 서야 한다. 교육 노동자의 특수성은 그 고민과 실천의 주체라는 점에서 특수하다. 영합하지 않고, 양도하지 않고, 비굴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지 않고, 주체로, 닥쳐온 싸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런게 사는 거고, 그런 게 현장이더라...
후배 교사들에게 또 싸움을 권하는 퇴직 교사의 심정은 미안하고... 그래도 원래 사는 건 그런 거라는 말 밖에... 피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말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