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2. 9. 18(주일) - 성령강림절후 열다섯째 주일- (2022년 38주)
제목; “말씀을 행하는 온전한 경건”
성경; 약 1:17-27 (신약 371면) (시 40:16-17, 459<514>, 218<369>, 3)
<예배의 부름> (시 40:16-17)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숙과 결실의 달 9월 둘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화, 위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라는 야고보서 말씀을 통하는 “말씀을 행하는 온전한 믿음”, 곧 ‘행함이 있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실제적인 삶으로, 아름다운 인생과 경건한 삶을 보여주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을 시작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먼저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며, 초대 대통령으로, 세계 최초로 임기가 정해져 있었던 최고 지도자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의 어머니 ‘메리 보울’ 여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씀을 시작합시다. (☞ 사진 보며)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대통령이 된 후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했을 때 일입니다. 보통 어머니 같으면 집도 수리하고 음식도 장만하여 큰 잔치를 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싱턴’의 어머니인 ‘메리 보울’은 평소와 다름없이 소박한 옷차림으로 문 앞까지 마중 나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조지, 정말 잘 왔다. 너에게 주려고 지금 맛있는 과자를 만들고 있단다.”
반갑게 아들을 맞이한 어머니는 빵가루 투성이의 손을 닦으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워싱턴’의 수행원들은 너무도 놀랐습니다. 그러나 장본인인 ‘워싱턴’은 더없이 기쁜 듯 주위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나의 어머니께서 맛있는 과자를 만들어 주신답니다. 자, 사양 말고 안으로 들어가 맛있게 많이 먹읍시다.”
잠시 후 ‘워싱턴’은 조용히 어머니에게 다가가 말하였습니다.
“어머니, 이제 직접 일을 안 하셔서도 됩니다. 이제는 어려운 일은 하인을 시키시고 그저 쉬시면서 감독만 하십시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니다. 조지야, 대통령이 나온 마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나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내가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나는 하나님을 대할 면목이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조금씩이라도 더 일을 해서 수입을 늘려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도울 생각이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멋있지요? 우리의 정치인들은 권력만 잡으면 돌변하고, 특권 의식으로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은퇴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온갖 일들을 벌이는데, 조지 워싱턴은 당시 영국과 같이 왕(王)이 되어달라는 말을 단호히 거부하고, 인류 최초로 임기가 정해진 최고 지도자가 되고, 그 약속대로 2번의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의 자리를 내어주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평범한 보통 사람의 삶을 살아간 조지 워싱턴과 같은 인물이 그리워지는 것은 저 만의 마음일까요?
II.
오늘 본문 말씀(약 1:17-27)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야고보서 1장의 제일 중요한 대목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장과 인격적인 성장’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에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고, 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말하므로, 참되고 온전한 경건이 말씀을 행하는 실천적인 경건인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1:17-27)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 17-18절 : 변함없이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 19-21절 : 성내기를 더디하라
- 22-25절 :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 26-27절 : 온전한 경건
성도의 신앙 생활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신앙 생활에 대해 권면하고 있는 오늘 본문 말씀은,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는 절름발이 신앙이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온전한 경건이 무엇이며, 이에 기초한 참된 신앙의 모습과 참된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1. 온전한 경건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주어집니다(17-18).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7-18)
17-18절은 시험에 관한 두 번째 말씀(12-18) 안에 있는데,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지(14) 하나님이 일부러 시험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하나님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17)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17절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와 선물’,곧 ‘성령의 은사’를 가리키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가 아니라, ‘도시스’(δόσις)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은사”(도시스)와 “선물”, ‘도레마’(δώρημα)는 ‘주다’라는 동사 ‘디도미’(δόδωμι)에서 파생된 낱말입니다. 야고보는 의도적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은사”(도시스 아가데, δόσις ἀγαθὴ)는 직역하면‘선한 은사’인데, 이 말은 일반 은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선물”(도레마 텔레이온, δώρημα τέλειον)은 성도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영화로운 상태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위를 의미하는 포괄적 개념입니다. “빛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나님은 해, 달, 별 등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이와 같이 빛들의 아버지, 곧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온갖 좋은 것들과 온전한 선물을 주십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마귀의 유혹과 내적 욕심에 이끌리는 시험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 곧 ‘진리를 통하여 확증된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낳으셨습니다’(18).사람의 경우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습니다’”(15). 사람도 낳고 하나님도 낳지만, 낳는 결과물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23도 우리의 거듭남이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1:21에서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가 아니라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사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셔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뤄진 일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19). “첫 열매”나 ‘첫 번째 소산’은 모든 열매와 소산을 대표합니다.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기에 첫 열매는 하나님께 드립니다(출 34:22, 레 23:10). 야고보서의 독자들, 곧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으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열매입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온전한 경건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갖고, 악한 사탄의 세력과 싸워 이기고, 이 험악한 세상에 도전하며, 승리의 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2. 온전한 경건은 말과 혀를 제어하는 능력입니다(19-21, 26).
오늘 본문 말씀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19-20)고 말하고,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을 조심하고 혀를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 온전한 경건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살기 원한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세 가지 길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 “듣기는 속히 하고”, 둘째, “말하기는 더디 하며”, 셋째,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19).
① “듣기는 속히 하고”에서, “속히”(타퀴스, ταχύς)는 본래 ‘신속한’, ‘재빠른’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은유적인 의미의 ‘준비된’, ‘즉석의’라는 개념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성도들이 자신의 욕망이나 계획에 재빠르게 따라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준비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듣고 행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② “말하기는 더디 하며”에서, “더디 하며”(브라뒤스, βραδύς)는 ‘서서히’, ‘서두르지 않는’이란 뜻으로, 이것은 단지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계속하여 말하거나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논쟁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을 성급하게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③ “성내기도 더디 하라”에서, “성내기”(오르겐, ὀργήν)는 ‘정신적 충동, 화, 진노, 분개’를 뜻하는 말로써, 이것은 일반적으로 분노, 증오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완전히 자신의 감정에 내어맡기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은 그 순간을 참고 넘겨 어리석음을 나타내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왜냐하면 감정의 격분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의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20)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에르가제타이’(ἐργάζεται)는 ‘일하다’, ‘행동하다’라는 뜻으로, 믿음의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의도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1절에서 결론지어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내버리고”가 맨 앞에 나와 강조하고 있는데, ‘내버리다’(아포티데미, ἀποτίθημι)라는 ‘벗어 버리다’, ‘벗어나다’라는 뜻으로, 마치 우리가 매일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된 성도는 모든 “더러운 것”(뤼파리아, ’ρυπαρία, 2:2에서는 “남루한 옷”, 즉 ‘더러운 옷’으로 번역됨)과 “넘치는 악”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파산)과 “넘치는”(페리세이안), 이 두 단어는 인간이 얼마나 죄악으로 가득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 마음에 ‘더러운 것과 악’이 가득 차 있을 때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한 ‘진리의 말씀’(1:18)으로 ‘생명을 구원한 말씀’입니다(M. Luther). 그리고 “온유함”(프라위테스, πραῧτης)은 능숙한 조련사가 야생 동물을 길들인다는 뜻으로, 거칠고 모난 나를 말씀으로 길들여주시도록 바라는 겸손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성도들이 생명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책임 있게 응답하며 실행해야 함을 강조한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의 의를 이뤄가야 할 성도들의 온전한 경건 생활에 대한 교훈으로 제일 먼저“말”에 관해서 말합니다. 왜냐하면 말은 사람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기도 하며,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대부분 교회 문제 역시 말로 인해서 발생합니다. 성도의 교제란 무엇입니까?교제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며, 서로 얼굴을 대하는 것이요, 말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뜻입니다. 탈무드에는 “지혜의 울타리는 침묵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삼간다는 뜻입니다.
“말을 많이 하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3:19)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 17:28)
3. 온전한 경건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입니다(22-25).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고 말씀하시면서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이 없는 사람을 거울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23-24), 다시 말하면 ‘말씀을 듣고 행함이 없는 사람은 마치 자기 얼굴을 거울에 잠시 동안 비춰보았다가, 곧 돌아서서 그것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는 말입니다.
옛날의 거울은 오늘날의 거울처럼 유리로 된 것 아니어서, 밝지도 않았고, 분명하게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돌이나 구리를 반들반들하게 갈아 비춰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거울을 잘 닦아 보아야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고전 13:12)고 말합니다. 거울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비추는 것입니다. 진실을 밝혀줍니다. 성경이 바로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추어줍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도 알게 됩니다. 나의 실존, 나의 사명, 나의 가치를 성경이 모두 비춰줍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가서는 곧 잊어버렸다고 말합니다(24). 우리가 거울을 보듯이 성경을 읽을 때는 결심도 하고 다짐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 밖으로 나오면 곧 깨끗이 잊어버립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가운데 깨달은 진리만이 내 삶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듣고 읽어도, 행함이 없으면 그 참 뜻을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그 말씀을 실천해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으면, 당장 나가서 이웃을 사랑해 보십시오. 그래야 이웃 사랑의 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은혜가 따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 없이는 말씀의 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25절에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에 관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직역하면 ‘완전한 율법이요 자유의 율법’이란 뜻으로, 완전하지 못하고 사람을 속박하게 하는 구약 시대의 모세의 율법에 대조되는 “믿음의 법”(롬 3:27), “생명과 성령의 법”(롬 8:2)등으로 불리는 “그리스도의 복음”(고전 9:12)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복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복음’을 통해 자유를 누리는 성도는 그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로 이런 사람이 그 행하는 일로 복을 받게 됩니다(25).
그럼 자유를 주는 온전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27).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2:8)는 주님의 지상 명령에서 자유를 주는 온전한 율법은 완성됩니다. 야고보의 편지에서는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서 하나로 통전(統全)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이를 대하는 세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①말씀을 귀로 듣는 것에서 그치는 신도가 있고, ②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신도가 있고, ③그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신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를 가르쳐주는 로마서에서도 율법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예수님께서도 행함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성숙하고 온전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행하는 온전한 경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복음을 실천하므로 참 자유를 누리고 복 받는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4. 온전한 경건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사랑과 자기를 지키는 절제입니다(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
야고보 사도는 말 조심하고 성내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복 받는 성도가 되라고 권면하면서, 마지막으로 참된 경건의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고 흠이 없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온전한 경건입니다.
먼저 야고보 사도는 26절에서 앞서 언급했던 말에 대한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여기서 앞에 나오는 경건과 뒤에 나오는 경건이 조금 다른 말입니다. 먼저 앞에 나오는 “경건”(드레스코스, θρησκός)은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종교적 또는 신앙심 깊은’이란 뜻이며, 뒤에 나오는 “경건”(드레스케이아, θρησκεία)은 ‘기도, 예배 참석’ 등의 ‘종교 준수 의식’을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26절은 ‘만일 누가 자신을 종교적 또는 신앙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삼가하지 않고 남을 비판하며 비방하고 다닌다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기만적 행위로 그의 종교 행위는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26절은 예수님께서 가장 경계하셨던 신앙적으로 외식하는 자들에 대해 주의 깊은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
온전한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로 상징되는 ‘공동체 안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자선의 대상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돌보다’(에피스켚테스다이, ἐπισκέπτεσθαι)는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보다’, ‘(위로와 안심을 주려고) 찾아보다’는 뜻의 동사 ‘에피스켚토마이’의 현재 중간태 부정사로, 이는 억지로 돌아보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돌보고 배려하며 사랑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남을 돌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종교적인 측면의 외적 경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실천적인 의미에 있어서 부지런히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고 말씀하셧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즉 참된 온전한 경건의 배후에는 예언자들의 사회정의 사상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변의 소외된 사람들을 돌봄을 통해서 우리는 이웃과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보잘 것 없고, 힘도 없고, 연약한 사람도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 내 몸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삶, 사회적 차별이 지양된 평등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다름 아닌 온전한 경건 생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온전한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으로부터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27).
경건한 자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여기서 “세속에”(아포 투 코스무)란 말은 직역하면 ‘그 세상으로부터’이며, “지켜”(테레인, τηρειν)는 ‘간직하다’(고전 7:37), ‘굳게 붙들다’(엡 4:3)란 뜻의 동사 ‘테레오’의 현재 능동태 부정사로 ‘자기 스스로를 계속 지켜 세상으로부터 물들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들지 않는”(아스필론, ἄσπιλον)은 ‘흠’을 뜻하는 ‘스필로스’와 부정접두어 ‘아’가 결합된 형용사로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상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참된 경건이란 스스로를 계속 돌아보아 이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오염됨이 없는 온전함을 굳게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로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는 것은 어쩌면 실천하기가 가장 힘든 경건의 항목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방어적 자세로 자신을 지키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수행함으로 세상을 이김으로써 참된 경건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속, 즉 코스모스는 그리스도교인이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할 그 무엇입니다. 그것이 ‘오염되지’ 않은 경건이며, 철저한 ‘자기 관리’가 경건의 요건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우리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하여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행하는 온전한 참된 경건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해고, 구체적으로 말 조심하고, 고아와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가난하고 포로되고 눈물 흘리는 우리의 소외된 이웃들을 보살피며, 참된 온전한 경건을 참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합시다.
III.
가을로 접어들면서 한 여름에 미뤄두었던 자녀들의 결혼 소식을 많이 받게 되는데, 최근에 한 선배님께서 자신이 참석했던 결혼식 주례사를 보내주었습니다.
“잊지 못할 주례사”란 제목의 글인데,
얼마 전에 결혼식에 친구와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친구의 말에 의하면, 선배가 결혼에 이르기까지는 마치 한 편의 연애 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사연이 많았단다. 선배 집안의 반대가 엄청났었다고 신부는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주례 선생님은 나의 대학 은사이자 선배의 은사이기도 했다. 머리카락이 몇 올 남지 않은 선생님의 머리는 불빛을 받아 잘 닦아놓은 자개장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이윽고 선생님의 주례사가 시작되었다.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검은 머리가 저처럼 대머리가 될 때까지 변함없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 순간, 식장 안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어지는 주례사는 신랑 신부와 하객들에게 재차 웃음을 던져주었다.
“제 대머리를 한문으로 딱 한 자로 표현하면 빛 광, 즉 광(光)이라고 할 수 있지요. 신랑 신부가 백년해로하려면 광나는 말을 아끼지 말고 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의 세 치 혀입니다.”
하객들은 모두들 진지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키라는 빛 광(光) 같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보, 사랑해. 당신이 최고야!’라는 광나는 말은 검은 머리가 대머리가 될 때까지 계속해도 좋은 겁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얀 장갑을 낀 선배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선배는 신부에게 수화(수어, 手語)로 선생님의 주례 내용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눈물이 맺히는 건 나 뿐이 아니었을거다.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광나는 말씀으로 주례사를 마치셨다.
“여기,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신랑이 가장 아름다운 신부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군자는 행위로써 말하고 소인은 혀로써 말한다고 합니다. 오늘 저는 혀로써 말하고 있고 신랑은 행위로써 말하고 있습니다. 신랑 신부 모두 군자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두 군자님의 제2의 인생에 축복이 가득하길 빌면서 이만 소인의 주례를 마치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과 신랑 신부를 보며 힘껏 박수를 쳤다. 예식장은 하객들의 박수 소리에 떠나갈 듯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멋있는 주례사, 멋진 결혼식이죠! 말을 하고 듣지 못하는 농아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 주례사를 수어로 신부에게 통역해주는 신랑의 모습이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참된 온전한 경건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항상 말 조심하고, 성내지 않고, 내 주변에 있는 고아와 과부 같은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행동으로 돌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실천적인 온전한 경건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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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8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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