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수레바퀴
글/ 구자선
육 년을 함께 산 반려묘 대일이가 집을 나갔다. 하루 종일 내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잤는데 밤이 되어도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면 득달 같이 달려오곤 했는데, 이제 내 목소리를 듣는 지, 마는 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어 모두가 눈만 껌벅이며.
“무슨 일이래? 왜?”
항간에는 바람이 났다는 말도 있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거라는 말도 있지만 대일이가 집을 나간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어떤 놈이랑 잘 돌아다니더라는 소문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다.
그럴 때 있다. 어느 날 문득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을 때 있다.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쟤가 갑자기 왜 저러느냐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는 곳으로. 모습이 갑자기 달라져도, 행동이 갑자기 이상해도 나의 어떤 모습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을 때 있다.
그래서 떠났다. 지금의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떠났다. 외롭지 않았다. 그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 외로움 따윈 없었다. 오직 그와 나 둘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뭐든 할 수 있어 좋았다.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건 내 짝을 잃을 이유가 없으니 더 좋았다. 그 또한 나밖에 없으니 서로가 전부였다. 오직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만 바라보았다. 그가 떠나기 전까지는.
시간은 많은 것을 데려오기도 하고, 뺏어가기도 한다. 그때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지만 떠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서로의 길을 터벅터벅 걸어갈 뿐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기다림과 슬픔과 한숨이 보태져야하겠지만 결국엔 다 놓아야 한다는 걸 안다. 그리곤 운명이라는 말 속에 모든 상처를 구겨 넣는다. 그렇게 시간은 과녁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서른을 훌쩍 넘긴 아들이 제 방에서 혼자 뒹굴 때 엄마는 잔소리를 한다.
“이제 그만 나가주면 안 되겠니? 독립을 해야지. 독립!”
어떤 아들은 들은 체도 않을 것이고, 어떤 아들은 다음 날로 짐을 쌀지 모르겠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이름을 갖다 대면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다 정해진 일이라 한다. 내가 그닥 점궤에 의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살아보니 운명이 나와 상관없는 일도 아닌 것 같다. 스무 살에 받았던 사주가. 서른에 받았던 사주가 그리고 마흔에 받은 점괘가 하나씩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아니라는 말은 못하겠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살아.
대일이가 돌아왔다. 예전처럼 내 옆에 둥지를 튼 것은 아니지만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울타리 안에 터를 잡았다. 바람불면 바람막이를 해 주고, 해가 들면 해를 피할 그늘 막도 드리워주고,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드나드는 쥐똥나무 밑에 터를 잡았다. 야생 고양이들은 진즉에 제 터를 마련했을 테지만 이제야 사람 품을 떠나 제 터전을 마련한 것도 대견하다. 그래도 살아온 날들이 이곳이라는 것을 아는지 울타리 안에 터를 마련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 틈에서 쓴 소리 듣지 않아도 되니 스트레스가 좀 덜 하려나? 아침저녁으로 밥 챙겨 갖다 주고, 물도 떠다주면서 서로의 곁을 내주고 있다. 한번 맺은 인연. 그것이 비록 사람이 아닌 동물일지라도 한 세상 인연이 되었으니 서로 잘 보살피며 마음 따뜻한 날들 보내기를 바라본다.
한때는 왜 태어났을까? 고민한 적이 있다. 하지만 왜 태어났을까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할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운명은 내가 바꿀 수 없다 하나 내 의지가 확실하면 한번 바라는 대로 바꿔봐야 하지 않을까? 결국엔 운명의 수레바퀴에 눌려 벗어날 수 없다 해도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다. 그 길 위에 나에게 힘이 되는 내 편의 신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첫댓글 제가 보는 선밴 잘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