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대통령의 선견지명(先見之明), 3가지 예언 만대통령
이승만대통령 희귀(稀貴) 사진 1904년 11월 미국에 밀사로 떠나기전 가족사진. 오른쪽부터 박씨 부인, 이승만, 아들 태산, 아버지 이경선 옹 (뒤에 서있는 소년은 조카). 젊은 시절의 이승만과 그의 본부인 박승선. 박승선은 일찍 이승만과 사이가 멀어졌으나 이승만의 부친을 돌보았으며 이승만의 가계를 지키면서 평생 수절했다. 왼쪽사진은 이승만과 본부인 박승성씨 가운데사진은 이승만과 본부인사이에 태어난 아들, 오른쪽 사진은 두번째 부인 프란체스카여사 1903년 한성감옥에서 복역중이던 이승만. 정부 전복혐의로 체포돼 1899년에서 1904년까지 5년7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1903년 한성감옥에서 중죄인 복장이 이승만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김정식, 뒷줄 왼쪽 부터 이숭인(이상재의 아들), 유동근, 김린, 안국선 1910년 6월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의 박사정장. (우)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이승만의 박사 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주의 Neutrailty as Influenced by United States.
1934 년 프란체스카 여사 와 결혼 할 당시 의 이승만 박사 당시 임시 정부 외교 위원 으로 활동 했다 6·25전쟁 중 임시 수도 부산에서 환도하기 직전의 경무대 이승만대통령 관저. 일제 강점기 이 건물을 지었을 때의 공식 명칭은 그냥 ‘총독 관저’였다 윤보선, 대통령 관저 명칭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변경
당시 34살의 프란체스카여사는 가족의 반대를 무릎 쓰고 25살 연상인 이승만 전 대통령과 결혼해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1948년 초대 대통령 취임 1948년 7월 24일 이승만대통령의 취임식이 당시 중앙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취임식
연설모습이다 1950년 6월의 한국 전쟁 발발 직후, 김포 공군기지에서 한국 대통령 이승만에게 환영받는 연합군 최고 사령관 더글러스 7 1951년 9월 29일 서울 수복 기념식에서 울먹이며 맥아더의 손을 잡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이승만. 이승만, 브릭스 주한 미국대사, 변영태 외무장관, 테일러 미8군 사령관. 왼쪽 6 25 전쟁 중 이승만 이 귀와 뺨 을 가리는 방한모 를 쓰고 워커 장군 과 이야기 하는 모습 사진 오른쪽 미국 의 시사 주간지 타임 1950 년 10 월 16 일자 표지 인물 로 한복 입은 1950년 10월 31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국군 평양 입성 환영대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대한민국 정부기록사진집 자료사진 평양 방문 당시 단상의 이승만 대통령. 1950년 10월27일 열린 이 대통령 평양입성 환영대회에'우리의 영도자 이승만 대통령 만세'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을 환호하는 평양 시민(6⋅25 전쟁 때) 이승만 초대대통령 의전차량-캐딜락 플릿우드 62세단 - 2013년 6월부터 11개월 간 약 2억원의 예산을 들여 고속도로를 주행할 정도의 완전한 상태로 복원 하였다.사진 노획된 김일성 승용차. 소련제 ZIS-110 리무진.사진 반공포로 수용소를 시찰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들을 포로들이 만세를 부르며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미국과 세계여론의 반대에 불구하고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한 것은 제네바협정과 인권정신이 바탕이었다고 해석하고 전쟁기간 UN군에 의하여 포로가 된 북괴군 중에서 반공포로들을 이대통령의 명으로 석방시켰다. 이승만 대통령 암살 시도는 1952년 6월25일 부산에서 열린 '6·25 2주기' 행사 도중 발생했다. 일제 강점기에 의열단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유시태가 이승만 체제에 불만을 품고 권총으로 살해하려 한 사건이다. 사진 아래에는 '62세인 유시태가 이 대통령을 저격하려 하고 있다. 이번 암살 시도는 김시현 의원이 이끄는 12명의 반정부 조직이 선동했다'는 내용이 타이핑돼 있다. 유시태의 암살 시도는 권총 불발로 무위에 그쳤다. 이 일로 유시태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이후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된 데 이어 4·19 혁명 이후 석방됐다. 1952년 12월 2일 .. 앞줄 왼쪽 미국대통령 아이젠아워, 오른쪽 이승 대통령 트루만 후임으로 미국대통령에 당선 된 아이젠아워가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한국에 첫 방문을 합니다 아이젠아워는 먼저 광릉에 주둔한 한국군 수도사단을 방문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전한 이승만 대통령이 수도사단에서 아이젠아워를 만나는 사진 경무대에서 열린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을 지켜보는 이승만 대통령(뒷줄 가운데) 변영태외무장과 미국 덜레스 국무부장관이 한미방위조약에 사인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대한민국에 이승만이
남긴 최고의 유산(遺産) 벼랑끝 외교를 펼쳐 얻어낸 결과물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과 조선노동당 중앙위 서기 박정애가 둘러선 가운데 김일성이 휴전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이 협정으로 인해 6.25 전쟁이 정지되었고, 1953년 7월17일,남북은 국지적 휴전이 성립되었다. 1953년 7월 27일 문산에서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클라크 사령관은 판문점 조인식에 참여하지 않고 유엔 회담 대표 숙소가 있던 문산에서 따로 서명했다. 판문점 회담장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장면.(1953.7.27) 이승만대통령은 휴전협정반대를 외치며 한국군 단독을 북진하계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일 없는 정전 절대 반대 플라 카드 를 들고 시위 하는 시민들 1953년 9월 4일 3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휴전협정 뒤 돌아온 윌리엄 딘 소장(가운데)에게 이승만 대통령(왼쪽)이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오른쪽은 유엔군사령 클라크장군 제1공화국의 이기붕 일가. 왼쪽부터 장남 이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 이강욱.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후계를 꿈꾸던 이기붕(1896~1960)과 박마리아(1906~1960), 차남 이강욱(당시 연세대 2)이 1960년 4월 28일 장남 이강석(당시 24ㆍ육군 소위)의 45구경 권총에 맞아 숨졌다. 친부모와 형제를 쏴죽이고 자1살. 이승만의 양자, 이강석 1957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83회 생일축하 케이크를 자르는 이 대통령 부부의 사진. 맨 왼쪽이 양자인 이강석이다 아들 이강석이 권총으로 아버지 이기붕을 사살된 이기붕 시신 이승만전대통령내외분만송고이기붕국회의장일가장례식참석 1960년 이기붕이 부정 선거를 주도하다가 이승만 대통령까지 하야하게 된 4.19 혁명이 끝나갈 무렵인 4월 28일, 친아버지 이기붕, 친어머니 박마리아
4.19 혁명으로 하야한 이승만 전 대통령(가운데) 이승만은 결국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고, 1965년 7월 19일, 그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충주지역에서 55년 전 고등학생들이 학생의 정치 도구화에 반대하며 전국에서 세 번째로 뜨거운 함성을 외쳤다. 충주지역 학생의거는 1960년 3월 10일 충주고, 충주농고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이화장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이화장으로 돌아간 이승만대통령이 담장 사이에 두고 이웃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 이승만 대통령 1964년 마우나라니 요양 병원에 누워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아내 프란체스카(왼쪽)의 간병을 받으며 말년을 쓸쓸히 보냈던 이승만 대통령. 사진은 하와이 마우나라니 정양원 1965년 7월 19일 90세로 하와이에서 타계하여 이대통령의 시신을 서울 운구하여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건국대통령이며 대한민국을 살린 이승만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이
구름떼같이 모인 사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승만대통령의 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