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아이들에게 패전의 역사를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패하였다"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 이 걸 사실로 믿고 삽니다.
그래서 국민들 중에 625에서 왜 연합군이 북한지역에서 중공군에게 패퇴당하였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625의 전황을 결정적으로 가른 큰 두개의 전투(작전)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고, 또 다른 전투가 바로 '청천강전투'(1950. 11.)입니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의 주력인 워커 장군의 미 8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연합군을 휴전선 이남으로 후퇴시킨(보통 1.4후퇴라고 하죠. 1951. 1. 4.) 원인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도 조금 아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천강전투의 결정적인 패인이 한국군에게 있엇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후, 미 8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은 1950년 10월 서부전선에서 북한군을 거의 신의주까지 몰아냅니다. 그런데, 이 때 중공군이 참전하게 되고, 신의주 아래 온정리라는 곳에서 처음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전황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유엔 사령부는 연합군을 청천강 선으로 물리게 되며, 방어를 위하여 부대를 재정비하고, 전선을 구축하게 됩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청천강 서부 지역에는 한국군 1사단, 미군 24사단, 제1기갑사단 등을 배치하고, 천청강 상류인 덕천군, 영원군에는 한국군 제2군단(덕천군-한국군 7사단, 영원군-한국군 8사단, 예비사단-한국군 6사단)을 배치합니다.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는 위와 같은 병력배치를 파악하고, 전혀 주저함이 없이 1950. 11. 24. 한국군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덕천과 영원을 공격하여,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라는 내용으로 공격을 지시합니다. (팽덕회는 참전 이래 한국군을 오합지졸로 평가했고, 주로 한국군 방어지역을 공략하는 전술을 사용합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7사단 및 8사단은 완전히 궤멸되었고(전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포로), 심지어는 연대장 3명이 생포되고, 1명의 연대장은 전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예비사단인 6사단을 이끌고 있던 한국군 2군단장은 6사단이 중공군을 직접 조우하기 전까지, 자신의 예하사단인 7, 8사단이 궤멸당한 사실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이 방어선의 우측이 무너짐에 따라 미군이 중국군에게 포위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는바, 워커 중장은 한국군 2군단의 붕괴 소식을 접하고, 미군 및 연합군에 평양까지 후퇴를 지시하게 되는데, 퇴각을 명할 시점 이미 중공군 38사단이 미군의 퇴로 차단에 나서게 됩니다.
이 중공군 38사단의 퇴로 차단에 맞서서, 터키군 여단이 미군의 퇴로 확보에 나섰고, 터키군이 용감하게 중공군을 차단하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미군은 겨우 평양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1950. 12. 23.에는 임진강, 한탄강에서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1951 설날공세를 막아내고 반격에 나선 연합군은 1951년 봄에는 휴전선 인근 지역까지 전선을 밀어 올립니다. 이 과정에서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워커 중장의 후임)은 새로 구성된 한국군 제3군단(보병 3사단, 보병 9사단)을 강원도 인제군 현리 지역에 지역에 배치합니다.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이 때에도 팽덕회는 연합군의 약점으로 한국군을 지목하고 한국군의 방어지역 공격을 선택합니다. 1951. 5. 16.부터 한국군 제3군단 수비지역인 인제군 일원에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중공군은 한국군 주력을 우회하여 한국군의 퇴로부터 먼저 차단한 후 공세를 시작함으로서, 한국군 3군단은 중공군에 포위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3군단장이 부군단장에게 지휘권을 위임하고, 부하들은 남겨 둔 채, 비행기를 타고 도주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당연히, 3군단은 중공군에 포위된 채 궤멸되었고, 병력의 60%는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머지 생존 병력도 무기를 버리고 개인별로 포위망을 뚤고 탈출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잡힌 국군 포로 중에, 그 유명한 '조창호 소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조창호 소위는 탈북하여 돌아 온 후 지속적으로 그 때까지 살아 있던 당시 3군단장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었답니다. 그러나, 3군단장은 끝끝내 조장호 소위의 요청을 거부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으로 상륙하여 연대장, 사단장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백전노장 밴플리트 장군은, 이런 한국군의 지휘부를 보고 황당하고 대경실색하여, 맥아더에게 연락하여 한국군의 작전권을 빼앗아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맥아더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연락하여, 한국군 지휘관들의 작전 및 지휘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으니, 지휘권을 연합군에 넘기라고 요구하였고, 이승만이 '장군의 요구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적은 각서를 맥아더에게 보내게 되는데, 이게 요즘 문제되는 '작전통제권 이양'이며, 이 시점 이후 한국군은 자기 부대를 통솔할 뿐, 작전도, 작전지휘도 금지되게 됩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잘 알지 못하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한국전의 분수령이 된 위 청천강 전투를 패전으로 이끈 한국군 2군단장과 현리전투에서 도망친 한국군 제3군단장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유재흥' 중장입니다.
유재흥 중장은 이렇게 한국 전사에 길이 남을 전설의 패전 2건의 주역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현리전투 패전이후, 밴플리트와 유재흥 사이에 전설의 대화내용입니다.
밴플리트 :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밴플리트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더 놀라운 일은, 이런 짓을 했는데도, 유재흥은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는 커녕, 이승만 밑에서 참모총장 대리까지 지내고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박정희가 구테다로 집권에 성공하자 박정희는 유재흥을 국방장관에 임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유재흥이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유재흥은 일본군 장교 유승렬(친일파로 분류)의 아들이었고, 유승열은 아들을 진정한 일본인으로 키우기 위하여 한국말 사용을 금지해서 유재흥은 한국말을 할 줄 몰랐으며, 한국인임에도 한국인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물론 유재흥도 일본 육사 출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였던 자이고, 친일파로 분류됩니다.
그런데, 이 것마저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2004년 노무현 전대통령이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예비역 군 장성 72명이 반대성명을 발표하는데, 그 성명의 대표자가 바로 유재흥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황당한 짓거리로 빼앗긴 작전통제권의 환수를 본인이 스스로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유재흥은 2011년 사망하였고, 현재 국립묘지에 뭍혀 있습니다.
한국은 놀라운 나라입니다.
첫댓글 한국이라서 별로 안 놀라움..
이제 막 편성된 신생군이 대장정에 국공내전까지 거친 역전의 용사들 상대로 안무너지면 그게 더 이상하죠. 수뇌부라고 해봐야 채병덕, 신성모, 유재흥, 이승만 등 능력치가 하나같이 폐급이라
2222
한국군 수뇌부가 노답인 것은 이승만빠가 아닌 이상 부정하지 못할 내용이죠.
하지만 병사는 물론이고, 장교도 부족해서 일본군이나 만주군에서 대위나 소령달고있던 사람들이 5년만에 별 달고 사단을 지휘하게 된 군대에 애시당초 제대로 된 전투력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무리.
더구나 상대는 일본상대로는 꿀빨던 놈들이라 비웃음이나 사지만 어쨌든 그 직후의 국공내전을 싸워서 승리한 놈들이니.
신생군이 연전연승한 사단/연대의 사례도 많이 있어요.
물론 그 지휘관은 전투경험이 없다시피한 30대 초반 2스타 군단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요.
@Diogenes 백선엽도 고작 만주군 중위였었죠(..) 소령이라면 당시 조선인에 대한 일본군 처우를 생각하면 거물급.
과연 렌야의 후계자!!
오오 (북한)국군의 명장!!
이거 사실?
와... 완전 믿어지지가 않네요. 충격.
어떤지 작전지휘권이 왜 미군으로 갔는지에 대해 내용이 좀 이상하더니만...
거짓입니다. 단언.
현리전투에 유재흥 중장의 책임이 상당하지만, 모든걸 그 사람 탓으로 돌릴 순 없죠. 적전도주쪽은 터무니 없구요. 저런 식으로 패전 하나하나씩만 따지면,
미군의 암제조자였던 알몬드 소장같은 사람도 마찬가지 잣대로 당연히 비판받아야겠죠. 마침 현리전투 오마치고개 뺏긴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게 저 양반이기도 하네요.
유재흥 저 양반 4.3 사태에선 막장으로가던 상황을 진정시킨 공로가 크고. 낙동강 전투 8월공세에서 영천지구쪽 방어(김일성도 여기 전투가 결정적이라 이야기했죠)도 성공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패전기록만 모아놓고, 깔거면 못깔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상승장군인건 아닙니다
저 상황에서 비행기 타고 간걸 "본부 복귀" 라고 변명했던 유재흥 변명을 그대로 믿어주기는 정말 힘듭니다
비행기타고 본부복귀와 대화가 원출처가 한명의 주장뿐이라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포위되지않은 상태에서 17일 군단전방지휘소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고, 포위된 현리로 경비행기로 들어가 3,9사단장을 모아 회의하여 양 사단에서 병력차출(1개연대씩) 및 퇴각로 확보를 지시하고 다시 군단지휘소로 와서 병력수습 및 미군과 협의해 공중보급을 한 것이 확인됩니다. 21일회의는 대상자도 아니었고 참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7일까지는 병력 약70%를 수습했습니다.
더불어 현리전투의 책임이 100프로 유재흥이라고 하긴 힘들지만 그렇다고 유재흥이 잘 한게 한가지라도 있나 물어보면 단 한가지도 제대로 대응한게 없다는게 분명합니다
책임회피는 힘들죠. 사실 졸장쪽에 가깝다 봅니다. 그래도 저렇게 패전기록만 늘어놓고 까는게 정당한 평가로 보이진 않아요.
@Hamilcar.barcas 뭔가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는것같습니다만.
- 적전 도주는 아니지만 자기 예하부대에 대한 통제를 완전 상실하고 어버버 해서 벤플리트가 빡돌아서 그 자리에서 해임한 것은 fact입니다.
- 알몬드가 주요 수송로를 통제하는데 실패하긴 했는데, 고작 1개 중대급 병력을 눈치만 보다가 증강을 허용했고, 1개 대대가 지키는 고개를 공격 실패해서 결국 군단 전체를 말아먹은 건 사실입니다.
- 까놓고.. 유재흥은.. 빈말로도 유능하다고 말해주긴 어렵습니다. 단지 4.3사태의 타이거 송 같은 개새끼가 저지른 학살극을 제대로 수습했다는 점에서 일단 점수는 깔고 들어갈 수는 있겠네요..
@어리버리 -현리전투 위치엔 명장이라고 추앙받기도 하는 김종오도 있었죠. 적전도주가 아닌 이상 급격한 붕괴는 인한 책임은 하급지휘관으로 갈 수록 커질건데 말입니다.
-알몬드 아재는 주요 수송로를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정도가 아니라, 수송로를 통제하려고 하는 국군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방해했죠.
-타임태이블 상 오마치 고개 탈취는 불가능했고, 설령 돌파했다 하더라도, 그 시간엔 그 남쪽 침교부근에 또 포위망이 형성되어서, 그 방향으론 도망 못갑니다. 사주방어 하거나(김종오 장군이 거부), 1군단이 막아준 방태산방면으로 튀는게 사실은 유일한 해결책...
-7사단이 박살나면서 상황전파를 안해준것도 크죠. 현실엔 맵핵이 없습니다.
줄친것 중 국방장관과 마지막거 빼고는 다 오류(거짓)
그렇군요.
유명한 북한군 명장 유재흥이군요
애초에 맥아더가 크리스마스 전에 끝내겠다고 무작정 북한에 들어가서 전선정리도 하지 않았죠. 중공은 그걸 노려서 약점들을 타격한 거고.
애초에 공세정말점을 넘어서 미친듯이 올라갔던것부터 이미 질수밖에 없는 싸움이였습니다. 그리고 신생군대에 너무 많은것을 바라면 안되죠.
유재흥은 한국전에서 비판받을 점이 많긴하나 제주도에서 보인 덕장으로의 모습이나 전후에 4.3 사태에 대한 진솔한 발언 등을 보면 마구 까일만한 인물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네임드라 할만한 사람의 서술이 아닌 이상에야 인터넷상 역사글은 우선 의심하고 보는게 옳긴 합니다.
그렇군요. 뭔가 좀 이상하긴 했음.
유재흥은 도주한적 없음. 그리고 현리전투가 있으나 영천전투, 4.3 사건도 있으니 마냥 까기 뭐한 인물입니다.
본 게시물은 자유게시판에서 이전되었습니다.
보니깐 이것도 페북글 같은데. 역시 sns는 인생의 낭비
발암덩어리 알몬드의 ㅂㅅ짓거리가 현리전투의 가장 큰 실수아니었던가요..
밴플리트와의 대화는 사실로 알고 있습니다만 (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백선엽 회고록에서 본 걸로 기억합니다) 나머지.. 특히 한국말을 할줄 몰랐다는 건 금시초문이군요
백선엽 회고록에서 5월21일 밴플리트장군과 머제트대령, 백선엽 장군과 로저스대령이 회의하였다고 합니다. 5월25일 강릉회의는 참석자는 밴플리트, 정일권, 이준식, 백선엽입니다.
유재흥은 21일까지 하진부리에서 이후는 삼거리남쪽 군단전방지휘소에서 있었습니다. 대화자체가 사실일수없지요.
전작권자체도 이미 50년 7월에 넘겨주었는데 위의 글은 기본적 오류가 너무 많아요. 찌라시입니다. 용량낭비군요.
한국말은 하는데 발음이 서툴렀다고합니다. 5살때 귀국했는데 통역이 필요하다는 말은 거짓말
@코쿠토미키야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군요..
현리 전투도 유재흥 장군만의 잘못 아니었고, 4.3 사건에서 보여준 모습을 감안하자면 인터넷에선 너무 편향되게 까이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왠 뜬금없이 친일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