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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리 ◆자유 게시판♧ 스크랩 큰 감동을 주는사연입니다 꼭 읽어보세료
좋은산(임덕기) 추천 0 조회 87 12.11.18 01: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거지에서 성자(聖者)가 된 실로암 안과병원 김선태 원장이야기"

 조선일보 & Chosun.com 이명원기자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지하 4층, 지상 8층 건물이 신축되고 있다. 원래 실로암 안과병원이 있던 자리다. 여기서 지금까지 3만2000명의 시각장애인이 개안(開眼)했고 40만명이 무료진료를 받았다.

 내년[2010년] 10월 새'아이센터(Eye center)'가 완공되면 이곳은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까지 빛을 선물하는 공간으로 바뀐다.

1986년부터 병원을 운영해온 김선태(金善泰·67·목사) 원장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겐 구세주 같은 존재지만 정작 스스로는 앞을 보지 못한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열흘 만에 부모가 북한군의 폭격으로 사망해 고아가 됐고 그로부터 20일 뒤 다시 수류탄이 폭발해 두 눈을 잃었다. 어렵사리 찾아간 고모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모와 매질을 당한 뒤 그 집을 빠져나온 그가 택할 길은 거리에서 동냥하는 것밖에 없었다. 서울, 경기도 이천·안성·여주, 충북 음성·진천, 대구, 경북 안동과 부산에서 그는 밥을 빌어먹다 거지생활 2년 반 만에 마침내 왕초거지까지 됐다. 맹인(盲人) 안마사를 거쳐 겨우 미군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하기까지의 세월 속에서 그는 짓밟혔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짓밟는 사람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돕고 인도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마침내 작년 막사이사이상(賞)  공공봉사 부문 수상자가 됐다.  

그 인생을 되짚어 본다.

 

▲ 김선태 목사가 종로구 연동교회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이명원 기자

◆천애의 고아
김선태는 1941년 9월 경주 김씨 가문의 3대(代) 독자로 태어났다.
서울 신당동에서 옷 장사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6·25전쟁이 터진 지 열흘째인 7월 4일, 놀러 나가는 그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선태야, 지금 전쟁 중이니 먼 곳에 나다니지 말고 위험한 장난하지 말아라." 그 말은 그가 이승에서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친구들과 놀다 돌아와 보니 집이 잿더미가 된 채 사라진 것이다. 부모의 시신은 찾을 길조차 없었다. 무학초등학교 4학년으로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친구들과 왕십리, 뚝섬 일대에서 콩 서리, 참외 서리 해먹고 들판에서 자야하는 신세가 됐다.

7월 18일 소년은 그날도 고아 친구 8명과 뚝섬 밭에서 참외와 수박을 주인 몰래 따먹고 있었다. 친구들은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뭔가를 열심히 만지고 있었다.
그 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정신을 잃었다. 수류탄 불발탄이 터진 것이다. 
사흘 만에 그는 한 농부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얘야, 너는 천만다행이구나. 네 친구 8명은 수류탄이 터질 때 다 죽었는데 너만 살아 남았다. 하늘이 너를 도우셨구나!" 그런데 조금 전까지 바라볼 수 있었던 파란 하늘과 푸른 들판, 흐르는 한강물이 보이지 않았다. 천만다행이라니….
▲ 김선태 원장이 실로암 안과병원에서 개안 수술을 받은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이명원 기자


◆환영받지 못할 자
손이 귀한 김씨 집안에서 어린 선태가 기댈 곳은 아버지의 여동생,
즉 고모가 사는 경기도 양주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고 주머니에 돈 한푼 없는 이 앞 못 보는 소년은 남의 짐 안에 숨어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20일 만에 100리 길을 걸어갔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맹인을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는 눈이 있어 일하고 개도 눈이 있어 집을 지키고 나중엔 잡아먹는데 너란 놈은 밥먹는 버러지에 불과한 놈"이란 욕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그에게는 '급살맞아 죽을 놈', '벼락맞아 죽을 놈'이란 말이 따라다녔다.

고모는 보기 싫은 소년을 가시가 잔뜩 돋친 아카시아 몽둥이로 매찜질하기 일쑤였다. 지금도 그의 몸에는 당시 맞은 상처 흔적 60여곳이 50년 넘도록 남아있다.

 

소년은 가족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어 부지깽이로 팔뚝을 지졌고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내려쳤다. 목침을 던져 귀머거리가 될 뻔도 했다. 나중에 그 돈은 그 집 큰딸이 훔친 것으로 밝혀졌다.

그 해 12월 23일 소년은 마침내 탈출을 결심했다.
그 전날 가족이 "저 녀석을 집에 둘 수도,
데려갈 수도 없으니 내일 아침에 평소보다 밥을 두 배 주면서 빨래하다 남은 양잿물을 밥 속에 넣어 죽여버리자"고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소년은 엄동설한의 피란길로 나서야 했다.

◆소년 왕초거지
그는 전국을 돌며 동냥을 하다 마침내 부산까지 내려왔다. 자갈치시장·영도다리·국제시장·부산역 앞을 전전한 지 4개월 만에 그는 부하 15명을 거느린 왕초거지가 됐다.

―거지도 서열이 있습니까?
"등급이 있지요. 왕초거지, 그 다음이 내초거지·
초초거지·신초거지·똘마니의 순서입니다."
―앞도 못 보면서 어떻게 왕초거지가 됐습니까?
"사람들이 저를 보면 불쌍하다고 밥도 주고 돈도 줬어요.
다른 거지들은 내쫓기기 일쑤였지요. 거지들이 쓰는 전문용어가 있어요. 쌀밥을 백모란이,고기를 왕건이, 아무렇게나 섞어주는 음식을 걸이라 하지요. 저는 그걸 저 혼자 먹은 적이 없어요. 다 고루 나눠먹었지요. 그러다 보니 저보다 나이 많은 거지들까지 제 부하가 됐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있었어요. 교회에 같이 가야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어릴 적 다녔던 교회가 제게는 천당같았거든요. 밥과 돈을 나누고 교회 가는 대가로 그들은 절 지켜줬고요."

―교회는 거지도 반겨주던가요?
"저는 교회에 갈 때는 왕자(王子)거지라는 심정으로 갔어요.
동냥받는 돈 중에서 가장 깨끗한 돈만 골라 헌금했지요.
개중에는 저를 동냥하러 온 거지인줄 알고 내쫓는 교회도 있었지요.  옻이 올라 온 몸에 진물이 줄줄 흘러내리면서도 교회에 갔을 때는 나병(癩病)환자로 오해받아 내쫓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다른 이웃교회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 천대를 어떻게 이겨냈나요?

"처음에는 지독한 증오심이 안 생길 수 없지요. 죽여버리겠다는 마음도 들고 그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누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고막이 터졌을 때 자연 치유된 게 그 분 뜻이 아니면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고모 집에서 학대당할 때 허리끈을 풀러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그 때도'죽지 마라! 네가 자라서 옛 이야기하고 사는 날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어요. 우물에 빠져 죽으려 할 때는 '참아라,
빨리 나오너라' 하는 목소리도 들렸지요."

―혹시 목사라고 하나님의 말을 들었다고 하는 건 아닙니까?

 

저는 47년 동안 온갖 신(神)에게 다 빌어봤는데도 그런 목소리 한번 들은 적이 없는데.  "절박하게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을 하십니다."    ―그 고모와는 다시 못 만났나요?

"못 만났습니다. 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지금도 그 사람들을 원망합니까?
"그 시절에는 집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그 집안이 망한다는 속설이 있었던 시절입니다. 집에서 고사(告祀)지내던 시절이지요. 전쟁이 안 났으면,
부모님이 살아 있으면 더 좋았겠지요.

그렇지만 고모님 댁에서 차별, 슬픔을 당하지 않았다면 저는 안마사나 침 놓는 사람, 점술가가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모든 것을 다 이해해주고 넘어가는 성격입니까?
"처음에는 내성적이었지요. 고생을 하면서 바뀐 겁니다."
◆유전(流轉)
거지사회에는 온갖 정보가 유통된다.
부산에서 왕초 노릇을 하던 그에게 부하들은 "서울로 가자"고 했다. 서울에 가면 미군부대도 많으니 얻어 먹기도 좋고 돈도 많이 번다는 이야기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왔다. 여러 번을 망설이던 김선태는 전쟁 중인 서울로 잠입했다. 한강을 건너려면 도강증(渡江證)이 필요한 시절이었지만 용케 피해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그 때 그에게 한 미군병사가 다가왔다. '플리즈 헬프 미'라는 소리를 들은 병사는 소년을 부대로 데려가 코코아도 주고 양말과 속옷까지 주더니 영등포 우신초등학교에 있던 이탈리아 병원에 입원시켜줬다.

―이제 고난의 끝이 보인 건가요?

"난생 처음 안락한 대우를 받았어요. 상처를 치료받고 음식도 푸짐하게 먹었어요. 치료가 끝난 후에는 삼애고아원에 데려다 줬지요."

―그곳에는 문제가 없었습니까?
"당시만 해도 장애인들은 사람 취급을 안 했어요. 삼애고아원에는 300명의 고아가 있었는데 정상인 고아들에게 매일 구타당하고 놀림을 받았지요. 한달 후에 그 고아원을 나왔습니다."

―어디로 갔습니까?

"다시 거지생활을 하다 미군 종군(從軍)목사님을 만났어요.
그 분이 용산 삼각지에 있는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으로 저를 보냈는데  그곳은 삼애고아원보다 더 형편없었습니다.
다시 천애원이라는 고아원을 갔다가 그곳 역시 똑같은 상황이어서 부산으로 내려갔지요."

―부산에 돌아오니 익숙했겠군요.

"당시 정부가 거지 소탕령을 내렸어요.
저는 국제극장 뒷골목에 있다 끌려갔는데 다행히 질(質) 좋은 거지로 분류돼 모범적인 고아원으로 배치됐어요.

더구나 그 고아원에서 라이트하우스(Light house)라는 초등학교 입학을 추천해줘 마침내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요."

◆면학의 길
―라이트하우스면 말 그대로 빛이 활짝 보이기 시작한 건가요?
"점자(點字)를 열심히 배워 4학년으로 편입하고 한 학기 뒤에 6학년으로 월반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선생님들이 문제였어요. 여학생을 성추행하고 장애인들을 마구 때리고… 안마까지 강제로 시켜 안마사가 돼보기도 했어요.  
1년6개월간 배우는 것은 좋았지만 고난을 체험했다고 봅니다."

―안마사까지 했습니까?

"1954년 어느 날, 저를 그렇게 미워하던 양 사감님이란 분이 유원지인 송도 근처에서 안마를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묻더니 대나무로 된 피리를 줬어요. 당시 맹인 안마사들이 대나무 피리를 불고 다니면 손님들이 '안마쟁이요' 하고 불렀지요. 그 때 어른들이 벌이는 안 좋은 모습을 알게 됐어요.


한 달 해보고 '절대 안마사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돈은 잘 벌었지만요."
―돈을 잘 벌었다면 안마 기술이 뛰어난 모양입니다.
"여자 분들은 어린이 안마사를 좋아해요. 편하게 느껴지니까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만일 초등학생이 안마하다가 맹인 어른에게 붙들리면 거의 반 죽여놔요. 그 세계의 불문율이에요. 저는 그게 무서웠어요."

―그렇게 보이지 않아 고통받았는데 눈을 떠 볼 노력은 한 적이 없나요?  "있었지요. 당시 박태선 장로라는 분이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수만 명을 모아
열흘 내내 집회를 했어요. 제 옆에 있던 여자분이 '박 장로에게 안수기도를 받으면 눈을 뜰 수 있다'고 했어요. 마침내 제 차례가 돼 용기를 내 '장로님! 내 눈을 보여주게 해주세요'라고 했지요."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그 분 팔이 기둥토막처럼 굵었어요. 그런데 눈을 뜨기는커녕 느닷없이 주먹으로 내 뺨을 내려치는 거예요. 하마터면 청각장애인까지 될 뻔 했지요."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온 게 1955년이지요.

"효자동 서울맹아학교였습니다. 그 곳에서도 구타는 계속됐지만 제 생애의 은인을 만났어요. 평양신학교 교장을 하신 곽안련 선교사의 아들인 곽안전(알렌 클라크) 선교사를 만나게 됐지요.

 

그 분 도움으로 중학 입시를 준비해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됐어요.  고등학교도 숭실고로 진학했습니다. 당시 학생 3000명 중에 앞을 못 보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는데 동급생·하급생들이 참 잘해줬어요. 후암동 버스 종점에 내리면 가방도 들어주고 팔짱끼고 교실까지 데려다 줬어요. '누구든지 김선태를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는 묵계도 있었어요. 비로소 학생 왕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대학진학 때 난관이 많았겠지요.

"제가 고3 1학기 때 5·16이 일어났어요. 당시 대입 국가고시가
필답고사 250점, 체력장 50점 합해 300점 만점이었는데 원서를 내자 갑자기 기각통보가 온 거예요. 당시 법으로 시각장애인은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지요."

―이번에는 어떻게 이겨나갔습니까?
"무작정 문교부 대학교육국장을 찾아갔어요. 하도 찾아가니 나중에는 제가 대학교육국에 들어서기만 해도 공무원들이 웃으며 '최 장학관님, 저기 또 반가운 손님 오십니다'라고 했어요. 그렇게 서른세 번을 찾아갔는데도  공무원들은 꿈쩍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줬나요?
"기적은 아니고 제가 식칼을 품고 갔지요. 국장에게 '당신 같은 사람은 대한민국을 후진국으로 끌어내리는 적(敵)이오. 차라리 나와 함께 죽음의 길로 갑시다'라고 외치며 칼을 휘둘렀지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던가요?
"겁이 나서 뒤로 도망쳤지요. 그런데 그 모습을 당시 문교부 출입기자들이 본 거예요. 다음날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됐어요. 그 덕에 저는 유명인사가 됐어요. 한동안 버스도 공짜로 타고 다니고 식당에서도 밥값을 내지 않았어요.

며칠 뒤 문교부장관이 시각장애인도 대학입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숭실대를 거쳐 장로교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목사가 된 뒤 미국 맥코믹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했지요. 대단한 집념입니다.
"제가 부산 라이트하우스에서 냉대를 당할 때 바다 앞에서 기도를 한 적이 있어요. 하나님께 물었지요. '제가 박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요.

그 때 '될 수 있다'는 답을 들었어요."

◆결혼
―이성교제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습니까?
"저는 당시 학비도 벌어야 하고 기숙사를 나오면 갈 곳이 없는 처지였어요.
그런 입장에서 연애는 사치스러운 것이었지요.

이성을 생각하면 미래계획이 다 무너질 것 같았어요. 대학 3학년 때부터 제게 편지를 보내 사귀자는 아가씨는 많았지만요."
―무슨 매력이 있다고 구애(求愛)하는 편지가 왔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편지는 정말 많이 왔어요."
―그런데 왜 처음 결심을 꺾고 결혼한 겁니까?
"신학교 동창들이 '우리 있을 때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을 했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도 옳을 것 같아 선을 보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아내(김정자)를 만났습니다."

―만난 지 세 번 만에 결혼을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 처지를 그대로 설명했어요. 가진 것도 없고 집도 없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삶에 대한 확신은 있다고요.
아내는 '돈이 부족하면 절약해서 쓰면 되고 하나님이 주는 대로 감사하게 쓰면 된다' 고 했어요. 제가 두 번째 질문을 했어요.


공산당이 공격해오는 상황이라면 신앙을 택하겠느냐, 공산주의를 택하겠느냐고요. 아내는 신앙을 택하겠다고 했어요. 그 두 마디로 끝이었습니다."
―신부 쪽의 반대가 심했겠지요.
"펄쩍 뛰었지요.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어요.
장모께서 급성 방광염에 걸려 제가 다니던 신학교 근처 병원에 입원했는데 꿈 속에 '앞 못 보는 목사 후보생과 결혼하는 일을 반대하지 말라'는 예수님 목소리를 들었다는 거예요. 결국 승낙하셨지요."

―그 말이 사실입니까?

"신부 쪽 집안이 남대문에서 옷 가게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결혼 하루 전날인 1968년 11월 22일 남대문시장이 전소(全燒)되는 큰 화재가 일어났어요. 저도 믿기지 않는데 제 집사람 바로 앞집에서 불이 멈췄어요.  그래서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지요."

―결혼식은 어땠습니까?

"회현동 성덕교회에서 했는데 축의금이 딱 5만1000원이 남았어요.
그 돈 가운데 4만원으로 수유리에 방을 얻고 밥상 하나, 밥그릇과 국그릇 2개, 수저와 젓가락 2개, 독 하나를 샀지요."

―신혼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겠습니다.

"웬걸요, 아내가 수유리에 있는 임마누엘 여성 시각장애원으로 여행을 가자는 거예요. 그날 저녁 아내와 저는 원생들과 함께 된장국에 보리밥을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세상에 빛을 나누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일한 게 1972년부터지요.
"그 때만 해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가 없었어요. 곽안전 선교사님께 상의를 드렸더니 영국에서 나온 선교사와 공동 사역(使役)을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남산 3호터널 입구에서 교회를 개척했지요.
그 교회가 창립된 게 1972년 1월입니다."

―그 때만해도 가난한 이들의 눈을 뜨게 해줄 여력은 없었겠습니다.
"1977년 평소 안면 있던 충북대 이정순 교수님이 찾아와 핸드백에서 돈 봉투를 꺼내는 거예요.


아들 결혼시키려 모아둔 돈인데 개안(開眼)수술비로 썼으면 한다는 겁니다.
그 때부터 개안수술을 시작해 1986년 실로암안과병원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개안수술을 시작했지요. 지금까지 개안한 분만 3만명이 넘고 무료진료 받은 환자들이 40만명이 넘습니다."

―개안수술비는 얼마나 듭니까?
"병원에서 하면 보험적용을 받아도 90만~100만원이 드는데 저희는 30만원 한도에서 합니다.

개안수술이 대개 백내장 수술을 말하는데 제일 좋은 렌즈를 눈 안에 넣지요. 가난한 분들이나 장애인들은 전부 무료로 해줍니다."

―개안수술비는 어떻게 모금합니까?
"교회마다 찾아 다니며 설교를 하고 모금을 하는 방식이지요.
가 다른 목사들께 인심을 잃지 않아서 이 교회 저 교회, 전국 방방곡곡 다니면서 모금을 합니다. 생일 기념으로, 결혼 기념으로,
자녀 입학 기념으로 모금해주는 분도 있고 일일찻집이나 자선음악회 수익금을 내놓는 분도 있어요. 평생 환경미화원을 하며 폐품 모아 판 돈을 전해주는 분도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하루에 1달러씩 모아 1년에 365달러씩 보내주는 분도 있지요."    ―실로암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연못 이름이지요. 예수께서 눈 먼 사람을 개안할 때 등장하지요.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중국 옌볜에도 실로암안과병원이 있다지요?
"1995년에 세웠습니다.

삼성 SDI에서 46인승 버스를 지원해줘 농촌·어촌·교도소·감호소를 찾아 다니며 안과 진료를 해주기도 하지요."
―실로암 병원은 어떤 계기로 만들게 된 겁니까?
"1981년이 세계장애인의 해였어요.
그 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음악회가 열렸는데 개안수술을 한 소녀가 나와서
감동적인 간증을 했어요.

그 자리에서 한국교회 창립 100주년인 1985년까지 실로암 안과를 세우자는
의견이 모아졌어요. 당시 장치혁 고려합섬 회장이 후원을 해주고 한경직(韓景職) 목사님이 고문을 맡으셨지요.

 

1982년부터 모금이 본격화됐는데 땅 문제가 생겨 예정보다 1년 늦게 병원을 열게 됐습니다."
―지금 실로암 병원을 헐고 아이센터를 다시 짓게 된 계기는 뭡니까?  "아이센터는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까지 돕는 희망의 등대가 될 겁니다. 사실 어려울 때 이 일을 시작했어요.
2000년에 제가 뇌가 부풀어올라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 때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의사가 '5년 살면 많이 사는 것'이라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 드렸지요. 제가 할 일이 많으니 살려달라고요."
―이번에도 응답이 왔나요?
"이번에는 안 왔어요.
그렇지만 5년이 지나도 살아있으니 제 소원을 이뤄지신 거죠."   ―언제 완공이 됩니까?
"내년[2010년] 10월입니다.

정인욱 복지재단에서 한 층을 기증해줬고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에서도 한 층을 기증해줬어요.

김건철 건축위원장도 한 층을 약속했고 방 2개, 3개를 기증하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벽돌 한 장에 1000원씩 모금을 받는데 다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드는 거죠."
―막사이사이상의 권위가 대단하지요.

가나안농군학교를 만든 김용기씨도 받았고 김활란·장준하·장기려씨 같은 분들도 수상자 명단에 있더군요.

"그 상은 제가 원한 게 아니고 주한필리핀대사관에서 조사를 해 추천한 겁니다. 상이 아주 까다로워요. 
아이센터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노벨평화상을 받을지도 모르지요."

 

[감동 글]미 백악관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의 아내
석은옥씨의 고백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 그의 뒤에는 한평생 그의 지팡이가 되어준 아내 석은옥씨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있었다.  (펀집자주)

석은옥씨가 직접 말하는 감동 인생.
“최고 엘리트라여겼던 내가 앞 못보는 남자와 결혼, 남편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온
  감동적인 인생  살이 사연”


이제 우리 부부는 인생 육십을 넘겼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의 인생을 뒤바꾼 한 맹인 소년과의 만남!

그 후 자원봉사자로 1년,  누나로 6년, 약혼녀로 3년,
그리고 아내로 34년을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

처음엔 고개를 젓던 사람들도 이젠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찬사 뒤에는 우리 부부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강영우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
우리의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그가 평생 단 한 번 걸스카우트를 방문한 그때, 나는 걸스카우트 신입회원으로 그를 돕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 하느님께서 내게,
저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맹인 중학생이 10년 후 나의 신랑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다면 나는 그대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때 그는 맹학교 중등부 1학년생이었고, 나는 여대생이었다.  가난과 실명의 고통에 찌든 모습을 상상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학생은 외모만 봐서는 전혀 맹인 같지 않았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 학생만 힐금힐금 쳐다보았다. 누군가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을 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내가 다녀오겠다”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학생의 손을 덥석 잡고 광화문 사거리로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숙대 영문과 1학년 석은옥이에요”라며
나를 소개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1학년 때인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 으로,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며 남편은 수년간 방황했다.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 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뒤
“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처음 만날 때는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게 아니어서  남편은 어렴풋이 나마 내 젊은 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불빛조차도 구별할 수 없는 완전 맹인이다.
그때부터 주말이면 맹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책도 읽어주고
안내도 해주는 일을 1년 정도 봉사하다 보니 정이 들어,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잘됐다 싶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당시 나는 그가 투병과 방황으로  여러 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학생과 중학생이라는 것만 생각해 부담 없이
그의 누나가 되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2년 정도 지나 그의 성적표에 있는 생년월일을 보고 한 살 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양친이 안 계신 동생이 생기니 누나로서 할 일이 정말 많았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가야 했고 빨래,
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동생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내게 기쁨이었다.
누나 동생으로 6년,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물론 아가페사랑이다.  당시엔 맹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맹인이 버스를 타려고 하면 차장이 밀어내기 일쑤고,
가게에서는 재수가 없다며 오후에 오라 하고,
식당에서는 구석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주위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  그와 만난 지 5 년째 되던 해,
그동안 혼자만 생각해온 유학 계획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는지, 그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지만,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결혼을 해서도 시각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할 텐데
더 늦기 전에 유학을 다녀와야겠다는 말에 결국 그도 동의했다.

나는 1967년 9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동안 정이 든 그와의 이별은 큰 아픔이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가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겹쳤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를

 

보내고
혼자 힘으로 다가오는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이 겹쳐 이별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내가 떠난 뒤 동생 영우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고  대학 입시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8년 연세대 문과대 교육학과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를 접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학원서조차 낼 수 없다니,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미국 땅에서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데 4주 정도 지나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영문과 교수 한 분이 대필 해 주어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교육과에 10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1968년 3월, 서울맹학교 고등부에서 연세대에 입학해
그동안 박박 깎은 머리를 기른 채 교복 대신 신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내주었다. 정상인들과 같이 공부하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첫 학기부터 장학생이 되었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나는 1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동안의 이별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1968년 12월 22일,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함께 연세대 백양로를 걷던 중 영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도 그를 무척 좋아한 데다 남은 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헌신하려고
준비해왔는데 그를 반려자로 맞으면 남편에게 맹인 동생을 이해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우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장래를 약속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을 올렸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른 딸을
맹인에게 준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친구들은 더 심했다.
어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며
“관상을 보면 팔자가 그렇게 센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느님이 해도 너무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학벌이 좋으면 뭐하니? 너는 좋아서 결혼한다 해도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을 생각해봐. 아버지가 장님인데” 하고 말렸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년 2월 26일, 대학생이던 약혼자를 졸업하기까지 만 3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난 다른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늦은 편이었고,
모두 판사, 의사, 약사, 대기업 간부의 부인이 되어 있을 때
연하인 맹인 학사를 신랑으로 맞은 것이다.
그래도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 하객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였다.
맹인 아내로서 내가 겪은 고통  1972년 8월, 우리 부부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LA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에는 장애가 해외유학의 결격사유에 속했다. 그 항목을 삭제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이 될 때까지 년 동안 겪은  마음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결국 피츠버그대학교 9월 학기 개강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한미재단총재와 연세대 총장이 공동으로 제안한 청원서에 문교부장관이
서명함으로써 미국 유학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LA에 도착해 여러 해 동안 그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 양부모님을
만나 일주일을 보내고 피츠버그에는 개강 전날 도착했다.
당시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서울을 떠나기 직전까지 맹인재활센터에서 일했고, 입덧도 심했다.
그러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돕지 않으면 강의실에도 갈 수 없어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하루는 남편을 강의실에 들여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녹음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강의가 끝난 지 30분 이상
지난 시간이었다. 온 힘을 다해 강의실로 뛰어가 보니 그는 불안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하고 부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며 화를 버럭 냈다. 나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항상 잘하다가 한 번 실수했는데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나 싶어 섭섭한 마음에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미국에 와서 처음 한 부부싸움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남편은 보행훈련을 받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혼자 강의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미루던
차에 결단의 기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행훈련을 받아도 자주 다니지 않은 곳이나 생소한 지역을  갈 때는 여전히 정안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보행훈련을 받아 나에 대한 의존도가 다소 줄어들 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안내해주어야 했다.
어린 두 아들을 남에게 맡긴 채 남편의 대학원 강의실을 향해 떠날 때,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남편의 강의가 먼저였다.
맹인 아빠에게 젖먹이 아기를 맡기고 도서관에 자료 심부름을 갈 때면
혹시 불이라도 날까 불안했지만 그의 눈이 되고 지팡이가 되는것이 먼저였다.  몸이 아플 겨를도 없이 매일 동분서주하는 고달프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후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수업료는 문제가 없었는데, 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이 만료된 것이다.
닥치는 대로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병원 청소원으로 겨우 취업이 되었는데 이민국에서 노동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민하던 어느 날, 캠퍼스 근처 공원에서 그네를 타는 한 맹인 
여성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다가가 한국에서 유학 온 맹인 학생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그네를 밀어주던 남자가 자신이 남편이라고 했다.  과부가 과부사정을 안다고,
우리 사정을 이해할 것 같아서 초면에 우리 형편을 털어놓았다.
그 부부는 우리에게 자기 집 3층을 내줄 테니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다. 대신 식사 후 설거지를 해주고, 두 내외가 외출할 때 어린 두 자녀를  돌봐달라고 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가족의 생계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 생각할 것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집에 살면서 매일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을 해도
행복하기만 했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머지않아 박사가 될  남편을 내조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주관 적인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남의 식모살이나 하는 처지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가 오히려 아파트에 살 때보다 더 행복했다. 우리와 처지도 같고 동년배라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를 배우는 계기도 되었다.
또 두 살 된 진석이도 네 살, 다섯 살이던 그 집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둘째 아이 진영이가 생겨 더욱 감사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절대 좌절하거나 울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맹인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 내외는 출세지향적이 아닌, 성취지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맹인이기 때문에 넘어야 할 물리적, 심리적, 법적, 제도적 장벽을 넘을  때마다 오히려 성취감을 느꼈다. 또 쾌락보다는 보람을 추구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할 때마다  승리감과 보람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다.  1976년 4월 25일, 남편이 드디어 피츠버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당국의 배려로 박사복을 입은 남편을 총장 앞으로 안내하면서 느낀 보람과 행복이란…. “마음껏 사랑하고 즐긴 것은 결코 잊히지 않으며, 자신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는 헬렌 켈러의 말이 생각났다.  물론 아무나 맹인의 아내가 되어 어려운 내조를 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때로는 희생을 요하는 힘겨운 내조를 
할 때도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취를 나의 성취로, 그의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록 학사복을 입었지만, 남편이 받은 박사학위가  나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느껴져 더 행복했다.

어려움이 닥치고 고난이 겹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편은 고국에 돌아가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해
무직자로 8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맹인이 어떻게 눈뜬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논문지도를 할 수 있겠느냐며, 어디에서도 남편을 채용하지 않았다.
무직자인 박사 남편, 아직 어린 진석이, 갓 태어난 진영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형편이었다.

장학금으로 지급되던 생활비가 졸업과 동시에 끊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만료된 유학생비자를 다시 살리기 위해 남편이 포스트 닥터럴 프로그램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오도가도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배수진을 친 남편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오히려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현재의 고난을 성공의 조건으로 
바꿔주실 테니 인내하며 좀더 기다려봐요.
부디 아무 걱정 말고 연구에 몰두하고 직장 찾는 노력이나 계속하세요.” 지금도 남편은 당시 자신의 고통을 함께하면서 그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줄 때가 가장 고마웠다고 말한다.
하루는 나의 격려가 통했는지 남편이 면접을 다녀오더니 취직이 되었다고  했다. 기적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면접을 보았지만 번번이 영주권이 없어 채용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일단 학생비자로 취직이 된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1월 3일 첫 출근을 하게 되어 서둘러 인디애나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인디애나에 도착해 남편의 첫 출근과 함께 나는 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30년이 흘렀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동안 무사고 운전으로 남편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인디애나 주정부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대학원에 출강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터리 클럽 회원으로 매주 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해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운전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병이라도 나서 내가 누워버리면 일상생활의 리듬이 깨질 텐데,
다행히도 그런 기억은 없다. 아마도 내조하는 기쁨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보람이 엔도르핀을 나오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대의 지팡이, 그대는 나의 등대 남편이 인디애나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2년 가까이 되던 1987년 9월, 유학을 떠난 지 6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 언론은 ‘우리나라 최초 장님 박사 탄생’, ‘한국 최초 맹인 박사  금의환향’
등의 제목으로 남편의 귀국을 대서특필했다.
그때 그 기사를 본 연세대 윤형섭 교수가 <조선일보>에 평균점수’라는
제하의 칼럼을 썼다. 내용인즉슨, 앞 못 보는 장님이 박사가 되었다기에 기사를 읽어보니 그 뒤에는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며 석사학위 교사까지 된 부인의 희생적인 사랑과 내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여성의  평균 점수를 올려주었다는 것이다.

1983년 6월 5일은 남편이 최초로 국제무대에 등단한 날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 로터리 세계대회에서 그가 연설을 한 것이다. 23년이 지난 오늘도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1만6000명의 세계 민간 지도자가 모인 단상으로 남편을 안내하는데,
연설자도 아닌 내가 극도로 긴장해 떨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군중의 시선을 볼 수 없어서인지, 그다지 긴장하지 않고  연설했다.  그리고 남편은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 연방정부 공무원은 450만 명에 달한다. 그중 2500명이 대통령의 임명을 받으며, 그중 500명은 상원 인준까지 받아
이름 앞에 ‘Honorable’이 붙는다.
먼 이국땅에 유학 와서 이민자로 정착한 지 사반세기 만에 남편은
‘Honorable’이라는 경칭이 붙는 연방정부 최고 공직자가 되었다.
대통령 직속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의 지팡이가 되어 부시 대통령 앞으로 그를 안내할 때 느낀 감회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불쌍한 맹인 중학생을 안내하기 시작한 지 40년,
이젠 명예로운 자리에 서게 되는 자랑스러운 남편을 안내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 부부는 서로의 강점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하나의 팀으로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게 되었다.
1972년 신혼부부로 미국 땅에 도착할 때 태중에 있던 진석이는
링컨 대통령의 장남 로버트 토드와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하버드대
동문이 되었다. 그리고 안과의사의 꿈을 이루어 듀크대학병원에 근무 중이며,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를 맞았다.
작은아들 진영이는 필립스 앤도버 아카데미 출신으로 부시 대통령 부자와  동문이다. 약관 27세의 나이로 연방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고문변호사이며, 아내 역시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이민자로 미국 땅에 와서 교육자의 꿈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교육인명사전, 미국여성명사인명사전에 올라 역사 속에 작은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지난 2003년 5월 29일, 내 생일에 아들 며느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 축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남편이 말했다.
“아들, 며느리 네 명의 박사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니 당신 정말 행복하겠소.”  
진영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잖아요.” 그렇다. 한집에 다섯 명의 박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지팡이가 되어 헌신적인 아내로, 두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며느리들까지 본 어머니로 살아온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이처럼 선명한 비전으로 내 인생을 인도해 신앙 안에서 명문가를 만드는  동반자가 되어준 남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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