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장군
1898.09.23~1980.08.08
-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 -
평안북도 용천 출생,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중화민국으로 망명
1920년 구이저우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후 중국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
이후 중국 관내의 항일단체 활동을 지휘(북만주 군비단, 대한의용군 사령관 등)
1932년 한인애국단원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제작하여 지원
※ 백범일지에서 한인애국단의 거사를 지원했다며 언급한 중국인 '왕웅'이 바로 이분
1933년 국민혁명군 제 2로군 총지휘부 상교참모에 임명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군수설계위원으로 재직
1938년 우한전역에서 국민혁명군 102사단을 맡으며 만가령 전투에서 일본군 106사단 궤멸, 성공적인 지연전 수행
▶ 이후 중화민국의 정부 부처와 산하 민간인들은 충칭으로 안전히 퇴각
1939년 국민혁명군 육군 소장(★)으로 진급, 제 19 집단군(야전군) 참모처 처장으로 제수
1941년 제 19 집단군 19사단장 대리로 일본군(33사단, 34사단)과의 샹가오회전(上高會戰)에서 승리
1945년 5월 중국 중앙군 중장(★★)으로 진급, 6월 한국광복군사령부 참모장 역임
광복후 3년이 지난 1948년 귀국, 12월 국군 입대후 육군 준장(★)으로 임관
1949년 1월 육군사관학교 교장, 3월 육군 소장(★★) 진급(대한민국 육군 최초)
1950년 6월 10일 육군참모학교장 부임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부임(한강 방어선 전투 지휘)
▶ 국군의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한강선에서 밀려오는 북한군을 '1주일간' 방어
※ 당시 미국은 '3일간'의 지연작전만을 요구
1950년 7월 5일 육군 제 1군단장으로 임명
1) 수도사단, 1사단, 2사단을 지휘, 미군과의 협조로 진천-음성-청주 전선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수행
2) 낙동강 방어선에서 포항-기계(杞溪)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반격작전의 기틀 마련
1950년 7월 24일 육군종합학교 교장
1951년 3월 2일 육군 중장(★★★) 진급
1951년 3월 20일 육군 중장 예편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 당시 외무부 장관 임명
▶ 김홍일은 군사정변의 주역인 육사 8기생들의 재학 시절 육군사관학교장이었고,
당시 후보생들에게 엄청난 존경을 받았던 이유로 외무 장관으로 위촉된 게 정설
▶ 이때 박정희가 민정이양의 약속을 어기고 민주공화당을 창당,
이후로도 대선에 출마한데다가 한일협정까지 맺자 빡쳐서 박정희와 결별
1965년 한국독립당 재창당 : 이후 군소정당화 되어 신민당으로 흡수
1967년 제 7대 국회의원(신민당) 당선
1969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참여
1971년 신민당 당수
1977년 광복회 회장
중국 국민당군으로서 단 별 '2개' 와 국군으로서 단 별 '3개' 를 합쳐서 '오성장군'으로 불렸던 인물
그리고 박정희 정부의 독재에 항거한 소신있던 야당 정치인
한국 독립과 정부수립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독립장) 수여
한국전쟁 공로로 을지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수여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충근(忠勤)·대수운마(大綬雲摩)·대수경성(大綬景星) 등의 훈장 수여
- 한줄요약 -
일제치하 독립운동가 + 6.25 국군영웅 + 유신 독재하 반유신 정치인 + 존잘
※ '국방개론' 관련 논문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02029
첫댓글
사실상 대한민국 국군의 대부
정말 대단하신 분!
이런 사람이 존경 받아야 되는데 현실을 ㅅㅂ 백선엽 같은 새끼가 존경 받음...
백선엽같은 사람이 아니라 이런분이 진짜 국군의 대부이죠
기억하겠습니다
ㄷ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