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에 대한 열광으로 시작된 한류열기가 여전히 뜨겁다. 몇 년 전 한류는 한국문화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었는데, 요즘의 한류는 이보다 깊어 중국인의 의식주 속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려 있다. 중국 백화점에는 한국 의류 브랜드가 즐비하고 거리를 걷다 보면 한국 음식점이 자주 눈에 띈다. 한국 제품을 취급하면서 성장한 중국 기업도 많다. 그 대표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베이징 청촹허(誠創和)의류유한공사의 션둥르(申東日) 이사장이다.
션 이사장은 한국 의류 브랜드의 중국 대리상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중국 의류업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업인이 됐다. 한국 의류의 중국진출 대표 성공 케이스로 꼽히는 ‘랑시(LANCY)’신화를 만들어 내면서 8년 만에 굴지의 사업가가 된 것이다.
“사업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의류 분야에도 문외한이었어요. 한국 제품을 처음 접한 건 1998년경이었죠. 동대문에서 물건을 사입(옷을 사들이는 일)해 둥쓰, 시단 등지의 로드 숍에 납품하기 시작했어요. 사입한 물건만 팔다 보니 문득 브랜드 사업을 하고 싶었어요. 브랜드 사업은 잘되면 대박이지만 실패 가능성도 커요. 의류업을 정석으로 배우지 못한 저는 리스크가 컸죠.”
브랜드 사업을 할 만한 한국 브랜드를 찾다가 우연히 랑시와 인연이 닿아 랑시 제품의 중국총판을 맡게 됐다.
“2000년 4월에 베이징 옌샤백화점에 랑시매장 1호점을 열었을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해요. 제품도 좋았지만 한류가 막 시작되는 시기라 시류도 잘 탔어요. 매장 수가 급격히 늘었죠. 베이징, 상하이, 텐진, 서안 등 대도시에는 직영점 위주로, 2급 도시는 대리점 위주로 매장을 넓혀 가고 있어요.”
중국에 있는 랑시 매장 내부. |
션 이사장은 말주변이 없다며 쑥스러워했는데,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패션업계라 개성 있는 사무실을 상상했으나 필자가 방문한 사무동은 말 그대로 일하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실용적이면서 튀지 않는 분위기, 션 이사장의 인상과 비슷했다.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한 그는 대학에서 재무를 전공했다.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한 중국교포 중에는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이 꽤 많다. 중국교포 3세인 그도 그중 한 명이다. 랑시는 한국보다 고가전략으로 중국시장을 공략해 성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의류에 문외한이던 그가 8년 만에 거성으로 우뚝 선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포기하지 말고 버티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잘라 말한다.
랑시로 기반을 다진 그는 사업 규모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한국의류산업협회를 통해 대현과 연결되어 ‘주크(ZOOC)’의 대리상도 맡은 것. 랑시 진출 4년 만의 일이다. 최근 한국의 유명 수제화 디자이너 브랜드인 ‘슈콤마보니’도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 중 랑시는 가격경쟁력을 위해 제품의 상당 부분을 현지생산체제로 돌렸다. 한국 브랜드의 중국 총판업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자기 브랜드를 단 사업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2006년, ‘라임(LIME)’을 론칭했다. 이후 라임은 주렁주렁 매달린 라임열매처럼 풍성한 성과를 기대하면서 지은 ‘라임 플레어(LIME FLARE)’라는 이름처럼 중국 전역에 55개 매장을 둔 거대 브랜드로 성장했다.
한국 디자이너 채용해 자체 브랜드 론칭
“준비 과정만 2년이 걸렸죠. 한국에 디자인 사무실을 내고 한국 디자이너를 고용해 꼬박 2년을 투자했습니다. 지금도 팀장급 이상은 한국인이에요. 여러 브랜드 총판사업을 하며 어느 정도 기반을 다졌기 때문에 순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브랜드를 만드는 건 또 다른 일이었어요. 제가 중국교포이다 보니 중국과 한국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죠. 우여곡절 끝에 론칭하게 된 건 딱 하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힘 덕분인 것 같아요.” 그때 이후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무조건 버티자는 고집이 생겼다며 웃었다.
중국에 있는 랑시 매장 내부. |
션 이사장은 “양국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 있고, 사업 경험 풍부한 저도 상당한 수업료가 필요했다”며 중국에서 사업하려는 외국인을 위해 조언했다.
“중국에 들어온 한국기업 중에는 경쟁력 있는 기업이 많습니다. 한국의류는 손맛이 좋지요. 옷에 힘이 들어가 있다고 할까요? 옷 만드는 감각이 훌륭해요. 원단도, 부자재도 중국산보다 우수해요. 하지만 중국 소비자에 대한 이해 없이 제품경쟁력만 믿고 시장에 뛰어들면 십중팔구 실패합니다. 중국인은 원색 계통을 좋아하고 디자인이 대담하지요. 한마디로 유럽 스타일이에요. 이에 비해 한국의류의 디자인은 아기자기하고 파스텔톤 의상이 많습니다. 한류 때문에 한국의류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한국풍’이 대세인데, 여기에 중국 소비자의 취향을 가미하면 중국에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션 이사장은 자체 브랜드 라임의 한국과 중국 사무실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중국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한국 직원은 디자이너를 포함해 30명에 이른다. 션 이사장은 한 달에 한 번꼴로 한국을 방문한다.
그가 이끄는 회사의 2007년 매출실적은 5억5000만 위안(한화 825억 원 상당). 중국 의류업계에서도 전국을 통틀어 드문 실적이다. 2006년엔 랑시가 베이징 10대 패션 브랜드로 선정됐고, 션 이사장의 청촹허 의류회사는 왕푸징백화점이 선정한 최고 매출업체가 됐다.
‘슈콤마보니’ 행사에 참여한 탤런트 박은혜 씨와. |
회사 이름은 ‘성신’, ‘창조’, ‘인화’의 앞 세 글자를 따 만든 것.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지만 회사가 제대로 커 나가기 위해서는 회사 고유문화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내년까지는 확장도 중요하지만 내실 다지기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잘되는 회사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인화(人和)’라고 본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제품을 만들고 소비자에게 신뢰로서 다가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직원들 간의 신뢰와 화합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에게 앞으로 계획을 들어봤다.
“당분간 패션 쪽에 집중할 생각이에요.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습니다. 취급 브랜드도 프랑스 등 구미로 넓혀 갈 계획이에요. 중국에도 명품을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습니다. 명품 대부분이 중국에 입성해 있지만 중국에 알려지지 않은 명품 브랜드도 아직 많지요. 브랜드 사업도 계속할 것이고 제가 만든 라임도 더 키워 갈 겁니다. 중국에는 전국을 휩쓰는 의류 브랜드가 적은데, 제가 취급하는 브랜드를 모두 최고 자리에 올려놓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