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7. 주일오전예배 설교
마 21: 12-17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여러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 우리나라 최초의 부녀 대통령, 우리나라 최초 직선제 민주적 투표 과반득표, 우리나라 최초 미혼 대통령 등 최초라는 수식어를 훈장처럼 달고 대통령이 된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또 다른 최초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탄핵을 당한 대통령이 그것입니다. 지역적 기반과 아버지의 후광으로 견고할 것 같았던 정권은 채 5년이 되기 전에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과반을 득표한 최초의 대통령이었음에도 그 마지막은 처참한 몰락이었다는 것이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가장 유능하고 가장 잘 할 것처럼 보였던 대통령은 가장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낙인을 받으며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대통령 뒤에는 대통령의 의사결정을 하는 한 다른 여자가 있다는 비선실세 논란이 탄핵의 도화선이자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탄핵에 작용했을 것입니다. 제가 정치 평론가는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비선실세를 한 자리 공식적인 자리를 만들어서 대통령의 특임보좌관 정도로 했으면 탄핵까지 이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혀 임명받지도 선출되지도 않은 한 여성이 임명되고 선출된 공식직함을 가진 사람을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면서 더 권세를 부리고 대통령까지 흔들어대니 국민들로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된 것입니다. 임명되지 않은 사람이 임명받은 사람을 지시하는 형국이 된 것입니다. 그 정권에 남겨진 끝은 정권의 몰락과 구속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으로 다음과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하신 일은 그 안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을 분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들을 내쫒으셨습니다. 거기에 더해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의아합니다.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 아닙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겸손하여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이 성에 들어오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로마군인이나 로마의 황제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는 성경 구절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행동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방민족 그것도 지금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지배세력인 로마인들에게 해야 할 행동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의 첫 번째 하신 이 일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예수님의 성품과 맞다고 보십니까? 보편적으로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면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 성품이 온화한 사람,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자기 감정을 억제하여 모든 문제를 부드럽게 해결하는 사람, 특별히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거나 으스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드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찬송을 받고 들어오셔서는 지금까지 이스라엘백성이 노상 해 오던 일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을 부정하듯이 다 뒤 엎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이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이나 돈 바뀌는 사람들이나 비둘기 파는 상을 뒤 엎은 것이 성전 안에 있는 잡상인들을 쫒아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제사를 부인한 것이요, 그 제사를 관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제사를 부인함으로 이스라엘이 제사하는 하나님을 부인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부인한 것 이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을 어겼다고 주장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의 행동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대한 일차적 반응이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이상한 일을 하니 그 안의 종교지도자들의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노했습니다. 분개한 것입니다. 몹시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처럼 이상한 일을 예수님이 하시네? 뭔 짓을 하는거야 이 사람이? 하면서 화가 치밀어 오르십니까? 이 예수님의 일을 이상한 일이라거나 이것으로 화가 나서 예수님이 잘못했네 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이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이상한 일이라고 하고 몹시 화를 내었을까? 하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왜 우리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할까? 하는 점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 보니 이런 잡상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하면 그만 아닙니까? 여기는 성전입니다. 거룩한 곳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할려면 성밖에서 하세요. 우리식으로 하면 예배당 안까지 들어와서 물건을 파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배당 바깥에서 좀 이런 것은 하십시오? 이렇게 잘 안내해 주면 되지 않습니까? 거기다 예수님이 이런 말까지 꼭 해야합니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누가 이 집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고 했습니까? 누가 여기서 장사만 합니까? 여기서 하나님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그 때 기도하지 않습니까? 성전에서는 오직 기도만 합니까? 제사도 하고 그러러면 제물도 필요하니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성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제물을 파는 것인데, 꼭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해야 합니까? 거기에 더해 진짜 이렇게 까지 말씀해야 합니까?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이것은 좀 전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과 차원이 다르게 들립니다. 여러분 이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실을 언급한 것이라면 강도의 소굴은 주관적 견해인데 그것을 너희들에게 적용했으니 그들의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온유하고 겸손한 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좀 타일러서 들으면 좋고 아니면 어쩔수 없다 하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이상한 일을 벌이는 사람이네 라는 소리도 듣지 않고 좀 좋지 않겠습니까? 여기가 장사하는 곳은 아닙니다. 오늘은 설령했더라도 다음부터는 하지 말라든지, 아니면 당국자에게 말해서 보기 좋지 않으니 여기 성전안에서는 하지 말라고 하도록 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니요? 이게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저도 이 말씀을 읽을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이 이상한 일을 하시네 라고 생각이 듭니다. 굳이 뭐하러 저렇게 까지 하셔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것이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고 너무 심한 것 아니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조금후에 이 시대의 상황과도 한번 생각해 보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왜 성전안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그 안에 이런 여러 가지 매매하는 자들이 있고 돈 바꾸는 자들이 있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매매했는가는 나오지 않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비둘기 파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 매매하는 사람들이 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비둘기가 제사에 쓰이는 물건이기 때문에 제물을 매매했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이나 각 절기에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에 들어가 제물을 바쳐서 제사해야 합니다. 특별히 유월절과 같은 가장 큰 명절에는 이스라엘 내국인 뿐 아니라, 아프리카를 비롯해 사방도처에 퍼져 살던 유태인들이 다 모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먼 곳에서 여기 예루살렘까지 제물을 가지고 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흠없는 제물을 가져와야 하고 멍에 메지 않은 새끼를 가져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본인들 식수뿐 아니라 짐승의 식수까지 챙겨야해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설령 그 짐승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왔다고 해도 제사장들이 이것이 흠이 없는지 있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오는 길에 죽은 짐승의 사체를 부지불식간에 만질수도, 그 길을 걸을수도 있고, 더러운 이방인이나 생리하는 여성과 접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본인은 흠없는 것이라고 해도 확인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일 좋은 방법은 예루살렘 성내에서 제사장들이 공인한 제물을 사서 오면 운반하는데 소용되는 비용이나 수고를 덜할 수 있고, 흠이 없다는 것을 제사장들로부터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도 허용될 수 있는 것이 구약의 부정한 자가 고침을 받았을 때 그가 정결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증하고 공인받을 수 있는 것은 제사장에게 보여서 그가 정결하다고 하면 부정한 자가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사장들이 공인한 제물을 사서 제사제물로 사용하는 것은 정결한 제물을 드리기에 가장 확실한 수순일 수 있습니다. 돈 바꾸는 것도 여러 나라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오다 보니 매매가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한 돈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환전소가 필요한 것입니다. 환전하지 않으면 그 타지에서 온 돈도 흠이 없다는 충분한 증거를 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공인된 돈 즉 환전소에서 바꿔 제물을 사는데 쓰는게 가장 정결하다는 확실한 보증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안에 이런 매매하는 사람과 환전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모를 리 없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고 하신 것은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다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여긴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추석이나 설날 명절이 가까워지면 평상시보다 물가가 오르지 않습니까? 수요가 많으니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그 가격을 올린 사람들을 강도라거나 도둑이라고 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께 흠없는 제물을 드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들 나름의 합당한 이유와 타당한 성경적 근거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한다는- 로 율법 해석상의 타당성이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요즘에도 교회에 보면 식당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톤으로 하면 이런 식입니다. 제가 예수님의 말씀의 방식으로 한번 말씀해 보겠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여기가 무슨 식당이냐? 요즘 우리나라 예배당 건물에 유행하는 것이 과거에는 식당이었는데, 이제 식당으로는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이 밖에서도 식당에서 밥먹으면 어디에 갑니까? 카페에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신축 건물에는 카페가 다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처음 들어가면 예배당으로 딱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홀이 있고 옆에 카페가 있습니다. 작은 교회도 카페는 있어야 한다고 해서 카페를 멋지게 차려놓고 식당도 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지 밥먹고 수다떠는 곳입니까? 요즘은 교회건물 본관에 더 확장되어서 문화센터, 과거에는 교육관이라고 해서 주일날에 학생들 예배공간이었지만 이제는 지역주민과 함께 한다고 해서 도서관도 만들고 여러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문화센타가 있습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지 도서관 책 빌려주고 주민 프로그램하는 공간입니까? 요즘 교회가 대형화 되다 보니 일주일에 이렇게 큰 예배당 공간을 주일 하루 쓰기는 아깝다 그러니 문화예술 공연공간으로 활용하자 해서 강단의 무대장치와 조명과 음향을 문화공연이나 음악회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지 문화공연하는 곳입니까? 교회가 비영리 종교단체이다 보니, 유치원이나 노인복지를 합니다. 무료로 하는 것이 아니지요. 돈이 왔다 갔다 합니다. 여기가 기도하는 집이지 강도의 소굴입니까? 교회성도들 직업도 창출하고 어려운 목사님의 생활비도 충당 할 수 있다고 해서 지역아동센터나 미혼모를 위한 사회복지 활동도 합니다. 여기도 돈이 왔다갔다 합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지 강도의 소굴입니까? 목사님이 설교한 것을 현관 앞에 녹음테이프로 해서 판매하고 목사님의 책을 판매합니다. 교회안에 도서관이 있어서 책을 빌려주기도 하지만 판매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책빌려주고 테이프 사고 파는 곳입니까? 교회가 강도의 소굴입니까? 교회안에 학생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농구대도 설치하고 축구대도 설치합니다. 어떤 대형교회는 실내에 농구장을 설치하기도 한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지 농구하고 축구하는 곳입니까? 선교비와 건축비를 마련한다고 농산물을 판매하고 가난한자를 돕는다고 바자회를 합니다. 이런 때는 일반적 가격보다 몇배가 비싸지 않습니까? 때론 교회이름으로 불우이웃돕기 한다고 바자회나 일일 후원회 해서 식당이나 찻집을 빌려서 비싸게 팔지 않습니까? 그렇게 팔아서 이익을 남겼다고 해서 그 사람을 강도나 도둑이라고 합니까? 교회가 기도하는 곳이지 물건을 매매하는 강도의 소굴입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전 안에 들어가서 한 행동을 우리 시대에 이런 식으로 적용하면 올바른 것입니까? 이 본문을 가지고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만 강조하면 지금 현대 교회들이 하는 것은 기도하는 집으로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끝내면 이 본문을 잘 해석한 것입니까? 지금 모든 교회도 그들 나름의 타당한 근거와 이유가 있어서 다 이렇게 교회안에 여러 가지 시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하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것이 기도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면 이 본문이 진정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지금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고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고 그들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씀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을 찾는 것이 이 본문해석의 핵심이지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안에서 하신 일의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안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찾는 것이 오늘 본문의 진정한 해석이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느정도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이런 행동들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행동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인용한 구절이 구약의 말씀입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은 이사야 56장을 인용한 것이고, 강도의 소굴을 만든다는 것은 예레미야 7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56장에서 왜 이사야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는지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56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이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는 내용입니다. 구원이 가까이 왔으니 정의와 의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정의와 공의가 무엇이냐 하면, 이사야는 안식일을 지키는 등 언약을 굳게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특이하게도 그 언약을 굳게 지켜 여호와와 연합한 두 부류의 사람을 예로 드는데 그들이 바로 이방인과 고자들입니다.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과 고자들은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이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라”(사 56:7)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라고 하는 이 내용은 이미 선택된 백성 즉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라, 그들을 배제한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과 고자 -실상 그들은 선민인 유대인들에게는 성전과 전혀 관련이 없고, 하나님의 복과는 관련없는 자들- 들이 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서 번제와 희생을 드리고 그 제물을 내가 기꺼이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방인과 고자는 이사야의 표현대로 “이스라엘의 쫒겨난 자”(8절)입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모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이 성전에서 예배할 자는 여호와와 연합한 자들이고, 언약에 충실한 자들이지 혈연적 이스라엘 백성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버렸으니 이제 이 예루살렘 성에 예배할 자들을 이스라엘에 쫒겨난 자들, 언약에 소망이 없던 자들 즉 이방인과 고자들로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구원이 가까이 왔는데도 이 상황을 알지 못하고 독주를 잔뜩 마시면서 내일도 오늘같이 크게 넘치리라고 하는 벙어리 개같은 이스라엘의 파수꾼인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사하고 있지만 그들은 언약을 굳게 지키지도 않고 여호와와 연합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를 알고 깨우쳐야 할 이스라엘의 파수꾼인 종교지도자들은 벙어리 개가 되어 당장의 탐욕에 빠져 술에 취해 사리분별을 못하고 있음을 이사야는 분명히 직시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올 진정한 여호와와 연합한 자들을 모아서 그 언약백성안에 속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56장의 내용은 이미 언약을 받은 선민 유대인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자신을 대신해 이방인과 고자들이 그 자리 즉 언약백성의 자리를 하나님과 연합한 진정한 백성으로 채우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즉 만민을 위한 성전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이사야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고, 이 본문을 예수님이 인용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7장도 보겠습니다. 이 본문을 보시면 왜 예수님이 막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강도의 소굴이라고 했는지? 왜 들어가시자마자 장사와 관련된 자들을 다 내 쫒으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레미야 7장 2절부터 보겠습니다.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 문앞에서 서서 이 말을 선포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자마자 성전의 매매하는 자들을 쫒아내시고 예레미야 7장을 인용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레미야의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선포한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길과 행위가 참으로 바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웃에 대한 정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와의 집에 들어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서 성전에 와서는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하면서 즉 여전히 여호와의 성전은 여기에 있으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고 그러니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전을 보면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다 성전이다 하는 것은 우리는 구원을 받은 백성이고 우리는 영원토록 이땅에서 평안하게 복을 받으며 살것이다라고 하는 식입니다. 이런 속임수에 스스로 속고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이 있으니 우리가 이 땅에서 계속적으로 살 것이라는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 자신들은 전혀 언약백성으로 살지 않으면서 성전이 있으니 이 땅이 멸망하지 않고 계속 살 것이고 자신들은 다 구원받았다는 거짓말에 속아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레미야가 예수님이 인용한 말을 한 것입니다. 7-1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 예로서 이방인과 과부와 고아를 압제한 것(6절)과 다른 신 즉 바알에 분향한 것(9절)을 예로 듭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실로처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로는 하나님의 법궤가 처음에 엘 리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법궤를 빼앗겼고 그것으로 인해 엘리의 집이 다 망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 너희들이 여호와의 성전을 보면서 지금 구원을 받았다 조상 때처럼 이 땅에서 영원히 살겠다고 하면서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하는데 이 속임수 때문에 결국 실로에서 엘리의 집이 망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배경 안에서 예레미야가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받았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11절)
자 그러면 이제 이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말씀이 왜 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성 안에서 행한 일과 연관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먼저 언약을 저버린 예로서 과부와 고아를 압제한 것을 들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비둘기 파는 사람의 상을 엎은 것에서 드러납니다. 비둘기는 제물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들이 바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여기 와서 살 돈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집에서 그 제물을 가져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일률적으로 다 그곳에서 사도록 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마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과부나 고아들 즉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은 것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거기다 우리는 이 사건 바로 이어서 나오는 무과화 나무에서 잎사귀만 있음을 보시고 말라 죽게 하신 것을 통해 그들이 열매가 없는 즉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함이 없는 돈에 배부르고 종교 행위에 잔뜩 도취된 이사야가 언급한 포도주에 취한 개들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이 이제 다 무너지고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하심으로서 이방인과 고자들 즉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정결의 관점에서)에서는 언약에서 배제된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한 것은 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시킨 것이 아니라, 이 성전은 이제 멸망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어떤 설교자들의 설교처럼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니 기도해야 합니다. 는 기도를 강조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그렇게 하면서도 앞에서 말한데로 그들도 교회안에서 여러 기도외의 다른 것들을 위한 건물이 있지 않습니까? 앞뒤가 안 맞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런 뜻으로 이사야가 한 말이 아닙니다. 그 성전에서 종교활동은 하지만 진정으로 여호와께 연합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과 고자들이 그 성전에 속해야 한다는 의미로 너희들이 신성시하는 성전은 없어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더욱 명확하게 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도둑의 소굴입니다. 여기 예레미야서의 도둑의 소굴의 도둑은 무엇인가를 훔친 행위로 도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문맥을 통해 읽으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성전이 너희들에게는 도둑의 소굴 -여기서 도둑은 어떤 물건을 강탈한 행위에 앞서 속임수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강탈한 것이 우선입니다만- 로 보이느냐 했는데 예수님은 더 강하게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 라고 했습니다.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너희들 바로 이렇게 종교행위하면서 나는 구원받았다. 여기 여호와의 성전이 조상적부터 있었으니 계속 여기서 우리는 살것이라고 안심하면서 그 거짓에 속고 있는 것이 마치 강도들에게 속아 넘어가서 자신의 것을 다 강탈당하는 것과 같다 이 말씀입니다. 너희들 스스로가 강도의 소굴, 도둑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 너희들은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제사하고 부정한 것으로 드리지 않으니 이 성전에서 바르게 제사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가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꼴이다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 스스로 지금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스스로 지금 속아서 스스로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속임의 정점은 너희들이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른다"는 것에서 분명히 입증되었다는 것 입니다. 이 성전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듯 하지만 실상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속고 있으니 이것이 속여서 강탈하는 도둑과 같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훔쳤거나 돈을 비싸게 받아서 훔쳤다기보다는 사람의 영혼을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속여서 따르게 했다는 것이 예레미야가 도둑의 소굴이라고 한 핵심내용입니다. 여러분 강도의 소굴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탕해야지 않습니까? 강도의 소굴은 다 소탕해서 없애버려야지 그래야 거기서 다시 강도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도 사실은 예루살렘 성전의 소탕 멸망을 말하는 무서운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어둠가운데 있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이상히 여깁니다. 이렇게 제사를 잘 지내고 있는데 무슨 문제냐는 식입니다. 어떻게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그 말씀을 인용할 수 있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어둡고 그들이 드리는 제물이 부정한지를 잘 드러내는 것을 먼저 예수님이 맹인과 저는 자들을 성전에서 고쳐주신 것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맹인은 보지 못하는 자이고, 저는 자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안에서 그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지금 이 성전 안의 상태, 이 성전안에 있는 어두움과 부정함을 드러내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거기다 이 어둠과 부정함을 고쳐주시는 분이야말로 참 빛이시고 진실로 정결한 분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본문에 대한 설교를 마치면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그들이 매매하는 것을 다 쫒으시고 엎으신 것이 단순히 그들이 강도짓해서, 기도하는 집을 다른 용도로 사용해서 그런것이냐?하는 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제가 말씀드린데로 교회의 카페 식당, 운동장, 문화시설, 유치원, 요양원 등이 교회 안에 있는 셀 수 없는 교회들은 다 강도의 소굴이라는 말인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지 밥 먹는집 커피 먹는 집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것도 다 문제 아닙니까? 그리고 또 하나 남은 문제가 예레미야에서 다른 신을 섬겼다고 했는데, 그래서 도둑의 소굴이라고 했는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정결하게 예배하자고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멸망을 예언한 말씀을 인용한 것이 진정 가당키나 한 것입니까?
분명히 이사야는 구원이 가까이 왔다고 56장에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이 지금 아주 가까이 왔습니다. 그 구원을 이루실 분이 예루살렘 성전안에 오셨고,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간에 그가 구원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소동하면서 이는 누구냐 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이미 마태복음 2장의 헤롯의 말과 같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편에 서서 내쫒긴 나사렛 선지자 예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이상히 여기고 오히려 예수님을 찬양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분노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그들이 유월절에 제물로 바치는 그 제물은 무엇을 예표합니까? 무엇을 내다보고 있습니까? 유월절이 이집트에서 나온 것을 기념하여 지내는 절기 아닙니까? 유월절은 구원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절기 아닙니까? 그렇다면 진정한 구원자, 진정한 유월절의 어린양이 지금 여기 눈 앞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지몽매한 대중들은 못 알아본다 해도 지금까지 이 유월절을 관장한 종교지도자들은 깨달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어린이들이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 이 사람이 진정 우리가 지금까지 천년 넘게 제사한 유월절의 원형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사야 56장이 예언한 짖지 못하는 개, 무지한 벙어리 개 아닙니까? 잠자기를 좋아하면서 탐욕에 빠졌으면서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몰지각하게 지금 성전에서 제사 제물로 이익이나 챙기는 포도주에 취한 길들여져 매여서 집주인의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도 제 할 일을 하지 않는 개들이 아닙니까?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왜 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야 하고 그 자리를 하나님과 연합한 이방인과 고자들로 다시 모여야 합니까? 바로 앞에 있는 진정한 유월절 어린양이시오 구원자이신, 유월절의 첫 이스라엘의 장자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열심 으로 자기 종교를 세우는 이 예루살렘 안에 있는 자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스스로 속고 속이는 도둑들 같은 이 사람들의 소굴이야 말로 소탕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상을 섬기지 않았다고 할지 몰라도 진정한 주인, 진정한 구원자, 유월절의 원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같은 예루살렘 성전안의 종교 행위는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예언한대로 멸망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함과 죄악들,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지 못한 그들에 비해서 예수님을 찬양한 어린아이들은 대조됩니다. 또 하나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마 21: 16절입니다.
“어린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여기 온전케 하셨다( κατηρτίσω , 카테르티소)는 단어는 영어로 온전하다는 뜻의 perfect 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그런식으로 번역했습니다. 다른 번역으로도 가능한데, 준비하셨다는 의미의 prepare 로도 번역할 수 있고, 미리 정하셨다는 ordain 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번역은 준비되었다는 prepare 와 미리 임명하여 정하셨다는 ordain입니다. 우리개역개정판의 온전케 한다는 번역은 킹제임스버젼을 따른 것입니다. 이것을 준비하셨다거나 미리 정하셨다고 번역하면,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미리 정하셔서 준비하게 하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리 말 성경 온전케 하다로 번역된 미리 정하여서 준비하셨다라고 번역할 수 있은 이 원어는 다른 곳에서는 온전케 하다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하여서 준비하셨다는 의미로, 특별히 준비하셨다는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서 10: 5,6절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 하시나니”
여기 예비하셨다 할 때 예비(준비)가 마 21장의 온전케 하셨다는 단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과 젖먹이 입을 예비하사 찬송하게 하셨듯이,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셔서 더 이상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미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을 한 것인데, 그 때 언급하지 않고 지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분내는 것을 보시고 이 말씀을 하심으로서 예수님이 왜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뀌는 자들과 비둘기 즉 제사물건들을 다 엎으셨는지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 말처럼 교회가 장사를 한 것 때문에, 또는 이익을 얻을 일을 해서 또는 기도하지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한 몸 바로 참 제물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임명하여 정하여 준비하신 그 예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예비하신 것은 벌써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두 번이나 나왔습니다. 먼저는 나귀와 나귀새끼를 가져오라고 할 때 그것들을 이미 하나님이 예비하셨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도 어린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찬송을 하나님이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미 이 두 가지 것을 통해서 예비해 두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 바로 예수님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시편 40편 6-7절에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여기 오신 나는 바로 하나님이 예비(준비)하신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22:13-14절을 보시면 13절 하반절부터 보시면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기 오늘 핵심구절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여호와의 산에서 예비하신다,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예비된, 준비된 분이 바로 시편 40편의 예수님이십니다.
아까 예비하다는 말은 prepare의 뜻도 있지만 ordain(이미 정해서 임명하다) 과 perfect(온전하다)라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연결하면 하나님이 준비하여 미리 정해서 임명한 것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서 유월절 제물로 미리 정해서 임명한 바로 예수님이 온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불법을 행하는자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자신들 마음대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그들의 허락을 받아 장사하고 환전하며 이익을 취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임명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준비하시고 미리 정하시고 임명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분만이 온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준비하신 예수님은 못 알아보면서 자신들이 임명하고 예물을 준비해서 드린 제물을 정결한 예물로 온전하다고 하니 예수님이 보실 때 어떻겠습니까?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가만히 두어야 합니까? 불법으로 돈을 벌고 불법으로 자신들이 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도둑들 아닙니까? 돈만 벌었습니까? 진정한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한 것이 아닙니까? 예레미야의 예언이 맞지 않습니까? 사람들을 속였지 않습니까? 이것이 가장 큰 도둑질 즉 속임수의 핵심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강도의 소굴이다 한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왜 이 일을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만이 합법적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미리 정하여 임명하신 온전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본문이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예비하시고 미리 정하신 온전한 제물이신 한 몸 예수님이 왔는데, 아직도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불법의 제물들을 정결하다면서 완전한 정품 딱지를 붙여 팔면서 제사하고 있으니 예수님이 보실 때 얼마나 화가 나시겠습니까?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해서 불법을 눈감아야 합니까? 정품이 왔는데 짝퉁이 정품노릇을 하고 있으면 정품이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를 인용하시면서 이 도둑의 소굴은 딱 하나밖에 없다. 그곳을 다 소탕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의 참된 중보자 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되시고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만을 의지해 예배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시고 임명하신 온전한 중보자가 계시며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속전하시고 구원하실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바로 구약에서 하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께 온전히 연합해야 합니다. 이사야서 가르친 대로 구약에서는 여호와로 명명된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한 이방인인 우리들, 이스라엘 밖에 있어 마른 나무와 같던 고자인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참된 성전인 한 몸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모여 그분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럽고 감사하며 기쁜 은혜요 사랑입니까? 우리는 이 예수님을 온전히 알고 믿고 찬송합니다. 그분을 높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 예수님을 찬송합니다.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이여, 하나님이 미리 정하여 임명하시고 우리의 화목 제물로 준비하신 온전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우리를 위해 완전한 제물로서 이땅에 오신 그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찬송과 경배를 올립니다~이방인이었고 고자였던 우리를 주의 백성 삼아주시고 주께 연합되어 새생명 주신 예수그리스도께 영광 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