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영은 일찍이 신탄상회 부사장, 보건구장, 인천상업회 부회두 등의 큰 일을 시작하기는 하였으나 일은 거의 동생들이 하였고 그가 하는 일은 거의 주변의 유지 들이나 만나 여흥을 즐기는 일이라 그를 보기 위하여는 용동 근처에 가서 찾아야 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도 풍류를 꽤나 즐겼나 보다. 사실 집안의 윗 사람들은 서화에 모두 뛰어난 실력들을 갖고 있다. 우리 집에서는 나만 그림도 글씨도 서툴다. 형제 들은 분가하여 일을 나누었다. 둘 째는 내륙을 주요 시장으로 했고 막내(조부)는 연안을 시장으로 했다. 큰할아버지(정순영)은 주식투자로 재산을 탕진했다 한다. 그 뿌리를 찾아보니 이 양반이 미신(米信)친목회의 평의장이 되었다. 1923년의 일이었다.
율목리 237번지(현 기독병원) 집을 홀 여사에게 팔고 나서 뚜렷이 사업을 하지 않았다.
집안 어른 들의 얘기를 들으면 주식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심지어는 선산까지 담보로 잡혔다 한다. 이 이유가 형제가 헤어지는 이유 중에 하나다.
1921년에는 미신친목회가 설립되었다. 그 성격을 보면 모던보이들의 모임으로 다소 호탕한 인물들의 모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정순영은 1923년의 평의장을 지냈다. 그리고 정태익은 아마도 정흥택의 아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모임의 큰 활동은 미두 취인소에서 투기를 하는 일이었다.
당시 미두취인소의 역사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으니 부연을 하지 않는다. 이 당시 이 곳에는 300여명의 조선인이 근무했다고 하는데 미신친목회는 이들을 통하여 투기를 하여 돈을 벌었다고 하나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 밖에 노는데 좀 일가견이 있는 듯 하다. 아마도 그들은 주무대가 용동이었을 것이다.
지금 시대였다면 흥행 기획사나 연애 기획사를 했을 법하다.
인천의 사람들은 미신친목회의 사람들을 미두취인소의 직원으로 오해를 하기도 했다 하는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한용단(경성으로 통학하는 조선학생 야구단)과 야구시합이 있었는데 조선인들은 미신회를 미두취인소 직원이라 하여 한용단을 응원했다. 그런데 미신회가 이기자 심판의 편파 판정이라하여 소동이 일어 났다.
그 당시 꽤나 큰 사건이었나 보다. 인천은 스포츠에 크게 열광하였다.
21년도 미신친목회 발기에 대하여 21년10월11일 동아일보는 이렇게 전한다.
"지난 8일 하오 7시 시내 중화루에 임시총회를 개하고 회장 박창한씨 사회로 …. 참석자는 이용, 김원식, 백주수, 나중현, 최상훈, 이광주, 이규기, 정태익 등"
이들의 속성은 활동적이고 운동이나 예술 문화 활동에 적극적이라 체육 활동이나 음악활동에 후원을 많이 했다. 일단 정규 행사가 끝나면 용동권번은 그들의 차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워낙 현금을 많이 굴리던 사람들의 모임이다. 총회도 화월관 같은 화려한 곳에서 할 정도였다.
이 때 반복창이 나타났다.
1922년 반복창이 미신친목회에 평의원이 되어 브로커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정순영은 23년 초에 평의장이 되었다. 23년 여름에는 하와이 교포들이 인천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미신친목회는 이런 종류에 항상 열성적이었다. 25년 큰 규모의 인천음악회가 있었다. 목적은 기근구제의 목적으로 당시 인천의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한 모양이다. 미신친목은 거기까지였다. 26년에는 반복창의 폐해가 많이 드러난다. 짧은 시간에 35만원을 번 반복창을 따라 제2의 반복창이 되려는 사람들이 많았나 보나. 그리고 반복창의 유가증권 사기 사건도 있었다. 아마도 인천에서 "반복창같은 놈"하면 최고의 욕이었을 것이다.
정순영도 부나비처럼 미두취인소를 드나 들며 결국은 큰 재산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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