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수필)은 인간 삶에 대한 해석이다.
인간의 삶이 수행되는 현실을 하나의 텍스트로 본다. (텍스트의 뜻은 의미를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이다.) 이 말을 알기 쉽게 풀이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의미를 가지고있다. 문학(수필)은 이 의미를 찾아낸다는 뜻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삶을 꾸려간다. 삶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대상을 마주치면서(체험하면서) 나타내는 반응들이 연속하는 것이다. 반응은 행동으로도, 감정으로도, 사상으로도 나타난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인생을 만든다. 즉 현실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문학이고, 수필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삶은 일상으로 구성된다. 일상은 매일 반복되는 삶이다. 일상이란 무의미한 반복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문학은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에서 의미를 찾아내거나, 해석을 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소설도, 수필도 문학이므로 삶에 대한 해석이라는 데는 같다. 그러나 수필은 나 자신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 직접 체험한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해석한다. 소설은 허구의 삶에서도 찾는 것이므로 소설과 수필은 다르다.
우리의 삶은 문학에서 이야기의 소재가 된다. 수필을 이야기 만들기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바로 수필의 소재이고, 삶을 이야기로 표현하는 것이 수필이다.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진행하는 사건의 나열로서 줄거리를 가진다. 일상의 삶을 가지고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로 만들어 낸다.
이야기 만들기는 과거의 일을 현재의 의미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일 즉 경험을 항상 해석함으로 가공되어서 기억으로 보존된다. 우리는 지나간 경험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가공된 해석 또는 이미지로 과거형이라는 언어 형식을 빌려서 이야기한다. 과거의 사건과 행위를 그대로가 아닌, 구성하여 표현한다. 이것이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소설 형식으로 구성하면 완결된 서사가 되지만 화자가 끼어들 틈이 좁아진다. 수필은 소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야기이면서도 화자의 정지된 순간의 사유와 감정이 함께 표현됨으로 자화상의 모양이 된다.
나의 하루가 일상이고, 이 일상이 이야기의 소재라고 하면 나의 하루를 되새김질 해보자. 나이 탓인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많이 빨라졌다. 꼭 해야 할 일이 없어서 어정거리다가 아침식사를 한다. 출근을 하지 않으니 또 하릴없이 밍기적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점심때가 되어도 배가 고픈 줄 모른다. 그래서 나의 하루는 점심식사는 넘기는 일이 많다. 그리고, 그리고. 이것이 나의 하루인데 어떻게 이야기로 가공한다 말인가. 젊었을 때와 달리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을 소재로 나를 드러내는 이야기로 만들 수는 있을까?
시지프의 신은 최고 신으로부터 바위를 산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다. 바위가 산 꼭대기에 닿으면 저절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러면 다시 밀어 올려야 한다. 끝없는 반복이다. 이것을 인간의 일상으로 비유했다. 인간의 일상은 바로 신의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까뮈는 돌을 산 꼭대기에 올려놓고는 하는 일 없이 무료히 시간을 보내게 했다면 그것이 벌이다. 반복하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라고 해석했다. 일상은 신의 축복이다.
그렇다. 우리는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얼마든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삶에서는 무수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서로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 때는 사건의 취사선택에서 줄거리 만들기까지 모든 과정에 작가가 관여한다. 따라서 수필쓰기는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이야기 만들기를 하는 작업이다. 즉 작가는 이야기라는 방식을 통해서 삶의 조각들을 선택하여 퍼즐을 맞추듯이 하여 해석(의미 만들기)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고호는 농부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서 흙이 더덕더덕 묻어 있고, 너덜너덜한 구두를 자기 그림의 소재로 가져왔다. 하이데커는 이것을 두고 농부의 고달픈 삶의 실체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고호는 농부가 살아가는 실제의 삶을 그리지 않고 농부의 삶에서 구두라는 한 조각을 선택하여 의미를 담았다.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일은 이야기와 의미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만들어 낸 이야기가 무의미한 언어의 나열로 끝나버려서는 수필이 될 수 없다. 고호의 구두가 구두 자체를 그리는 것으로 끝나버려서는 예술성이 있는 작품이 될 수 없다.
수필에서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부적합할 때는 대체로 작가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거나 사유세계를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많다. 이럴 경우는 의미가 이야기 속에 담겨있지 못하고 작가의 관념적인 언어가 이야기 밖에서 떠돈다. 작가는 이야기에 의미를 담아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작가의 말로 직접 전달하려고 한다. 철학이라면 가능하지만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를 따져보면 수필작가가 의미 전달에 너무 매달리다 보니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수필을 교술성이라고 할 때 이미 비문학성이 그 안에 내포되어 진다. 그런데도 우리의 머릿속에는 수필은 교술문학이다 라는 관념이 너무 깊이 각인되어 있어 수필쓰기를 할 때 그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재기는 그렇다고 하여 문학성 때문에 완전히 형상성으로 가면(이야기 위주가 된다면) 주제 의식이 약화된다고 했다. 이야기 만들기에 부정적인 언급을 한 것이다. 나는 이에 반대한다. 이야기를 만들면 이야기는 속성 상 내용을 가지기 마련이다. 내용은 의미에 다름 아니다. 관념적인 언어를 생경하게 드러내는 것보다 이야기를 통하면 우선 재미를 주어야 하고, 재미 뒤에 의미가 숨어 있어야 한다. 문학이 예술이라면 재미(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필을 재미있게 쓰자는 것은 나의 일관된 주장이다.)
작가가 인간의 삶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낼 때는 의미는 이야기 속에 내포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 만들기를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머뭇거릴 때를 냉정히 생각해 보자. 나의 해석이 아닌 독자의 해석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에 포함되는 의미는 작가가 인간의 삶에 내린 해석이다. 독자가 아닌 나의 해석인 것이다. 독자가 공감을 하는 것은 다음의 문제이다. 작가의 죽음을 주장한 현대 문학이론에서는 작가는 독자가 공감하도록 독자의 눈치를 살피자고 한다. 이 말은 시대 성향에 귀 기울이자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더라도 작가가 이야기 속에 의미를 담는다는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독자의 공감은 독자의 독서 행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작가의 권한 밖이다. 작가가 독자를 위해서 자기의 주장마저 버린다면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죽음이란 독자의 선택이 작가와 다르더라도 독자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의 읽기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편이 조각, 조각으로 연속된다. 무질서하게 조각이 나 있으므로 삶을 사진 찍듯이 옮겨와서는 문학의 형식으로, 이야기의 형식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 그러나 수필쓰기는 우리 생활 중의 한 부분을 떼어내어 액자에 담는 작업이다. 다만 이야기를 만들어서 이야기 속에 의미가 내포되도록 만들어서 액자에 담는다.
뒤샹은 일상의 생활 용구인 변기를 미술 전시에 가져다 놓을 때는 변기가 아닌 의미를 가진 미술품이 된다고 했다. 생활용구에서 의미가 있는 미술품으로 바뀐 변기를 ‘오브제’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부분을 떼어내어(의미가 없어 보이는 단순한 삶의 한 조각) 작가 나름으로 의미를 담아서 수필로 만들어내면 역시 오브제인 셈이다. 수필을 오브제 형식으로 만들어 보자. 왜냐면 우리는 일상을 의미가 없는 반복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상에 의미를 담아 ‘오브제’로 만드는 작업이 수필이 아닐까?
미술의 경우를 보면 삶과 예술을 직접 연결시킨 운동이 벌써부터 일어났다. 플럭서스 운동을 일으킨 요셉 보이스는 빗자루로 마당을 쓸거나, 건축의 폐자재를 모아 두거나 하는 일상의 일을 직접 하면서 미술작품이라고 했다. 퍼포먼스라고 했다. 뒤샹이 생명이 없는 변기를 오브제로 사용하여 전시실에 전시하였다면 이태리 화가 쿠렐리스는 열 두 마리의 살아있는 말을 전시장에 메어두고 작품이라고 했다. 말은 끊임없이 꼬리도 흔들고 머리도 이리저리 돌리면서 움직였다. 이것을 시간이 들어가는 4차원의 작품이라고 했다. 이것을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일지, 않을지는 둘째로 치고, 뒤샹에서 조셉 보이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시도를 하는 역사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쿠렐레스의 말 열 두 필이 예술이 된 것이다.
나를 만들어가는 것은 하루, 하루를 사는 나의 일상이다. 내가 사는 일상의 삶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수필 속의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나의 삶을 사는 나이다. 따라서 수필에서 표현하는 나는 나의 일상 속에 있는 나이다.
수필가라면 어떻게 하면 일상을 수필로 가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도 수필이냐’, ‘이건 수필도 아니다’라면 실험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을 매도해서도 안 된다. 매도가 무서워서 새로운 이론으로 수필쓰기를 회피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수필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작가가 해석한 의미를 전달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독자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플롯을 짜야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한 것을 생경한 그대로가 아니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구성하는 이유도 독자와 함께 공감하는 방법이기 때문이 아닐까? 새로운 방법들을 시도해보는 것이 미술과는 조금 다른 측면일 수도 있지만, 수필가가 감당해야 할 몫이 분명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