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는 에밀리아로마냐 주 파르마현에서 1813년 10월 10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주로 행상들을 상대로 조그마한 여인숙 겸 잡화상을 경영하였다. 소년 시절의 베르디에게는 이른바 천재 소년다운 에피소드는 아무것도 전해져 있지 않지만 시골에서는 다소 그 음악적 재능이 눈에 띌 정도였다. 1832년 5월 18세 때 고향을 떠나 밀라노로 가서 밀라노 음악원의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실패했다. 음악원의 판정은 첫째로 음악원의 입학 자격 연령을 4세나 초과한 것, 둘째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르디의 음악은 서투르고 소박하다 하였다. 결국 베르디는 밀라노에서 개인교수를 받아 작곡공부를 시작했다.
이듬해 베르디에게 기회가 왔다. 밀라노 악우협회(樂友協會)가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연주했을 때 베르디는 대리 지휘자 역할을 했는데 이 때의 역량이 인정되어 악우협회로부터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은 것이다. 이리하여 최초의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가 작곡될 예정이었으나, 1834년에 베르디는 취직 차 일단 귀향하였고 1836년 아버지 친구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 동안에도 밀라노의 화려한 오페라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어 1839년 처자를 데리고 밀라노로 이주하였다.
이 해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가 밀라노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되어 다소의 성공을 거뒀다. 26세 때의 일이었다. 유명한 악보 출판업자인 조반니 리코르디가 이 오페라의 출판을 신청해 왔고, 스칼라 극장에서도 3편의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해 왔다. 전도가 양양하였으나 아들과 처를 차례로 잃어버리고, 더욱이 스칼라 극장이 오페라 부파를 작곡해 줄 것을 요구했기에 구상을 변경해서 <하루 만의 임금님>을 작곡했으나 무참히 실패하여 자신을 잃은 베르디는 한때 작곡을 단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친구들의 원조나 조언으로 베르디는 이 위기를 극복하여 1842년부터 1850년에 걸쳐 14곡의 오페라를 썼다. 이러한 작품 가운데에는 <제1회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1843), <에르나니>(1844), <잔 다르크>(1845), <레냐노의 전쟁>(1849) 등 애국적인 독립정신을 구가한 작품이 특히 뛰어났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나 프랑스의 압박하에 있어 완전한 독립국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물론 이탈리아 독립 운동의 외침도 점차 높아졌으나 베르디의 오페라는 그러한 이탈리아인들의 기분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베르디는 오페라에 애국주의를 주입함으로써 오페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시기의 베르디는 이탈리아인으로서 참으로 애국의 상징이었다.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국외로부터도 초청되어 런던이나 파리에서 자작을 상연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적 작곡가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 이 오페라들은 베르디의 대표작으로는 생각되고 있지 않다. 사실 19세기 중엽의 이탈리아인들을 열광시킨 것은 사실이나 베르디가 참으로 원숙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모습을 보인 것은 1850년 이후의 일이다.
1850년 37세의 베르디가 40일 동안 단숨에 작곡해낸 <리골레토>는 이듬해 3월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어 오페라 사상 드물게 보는 영광을 불러일으켰다. 베르디도 다소 자신을 가졌던 듯하며 특히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은 초연 전에 거리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무대연습 때에도 가수에게 악보를 주지 않고 초연의 전야 겨우 악보가 주어졌다고 한다. 베르디의 생각대로 이 아리아는 일세를 풍미한 명가가 되었고 그의 명성은 더욱더 상승했다.
<리골레토> 이후의 베르디는 그의 독특한 선율미와 극적 구성력을 마음껏 구사하여 여러 가지 인간감정, 등장인물을 정확히 묘사하여 여러 가지 걸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일트로바토레>(1853), <라 트라비아타>(1853), <돈 카를로스>(1867), <아이다>(1871), <오텔로>(1887), <팔스타프>(1893) 등이 그 주된 작품이다. 이와 같은 작품에서 전과 같은 애국주의는 후퇴하고 어떤 정황, 또는 환경에서의 '인간 그 자체'의 표현이 의도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인간성'을 오페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아마 모차르트와 비견할 만한 최고봉이라 하겠다.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 모두가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명작으로 된 <오텔로>는 비극 오페라의 최고봉이다. 셰익스피어가 쓴 인간성을 이만큼 훌륭히 오페라화할 수 있었던 작곡가는 아직까지 없다. 같은 셰익스피어로 된 <팔스타프>는 베르디의 유일한 희극이다. 여기에는 오페라 부파의 정신 승화, 고답적인 웃음의 교묘한 음악화가 보인다.
오페라 사상 이와 같은 불멸의 작품이 작곡된 시기에 베르디의 신변에도 잡다한 변화가 일어났다. 1859년 재혼하고 1861-1865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국회의원이 되는 등 음악 이외의 일로 나날이 바빠졌다. 한편, 오페라 이외의 작품도 착수하였는데 최대 걸작은 이탈리아의 애국시인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죽음을 애도하여 쓴 <레퀴엠>이다. 부와 명성에 둘러싸인 베르디는 1901년 1월 27일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향년 88세의 일생을 마쳤다. 이탈리아 오페라 사상 우뚝선 이 거장, '소리'를 위하여 일생을 건 이 거장의 죽음을 슬퍼하여 장례식에는 20만이 넘는 대군중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출처:이동활의 음악정원]
[정치인 베르디]
베르디는 통일 전후 이탈리아에서 그 누구보다 사랑을 받았던 정치인이었다. 베르디는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파르마 공국의 대표로 추대되었으며, 통일 후에는 이탈리아 초대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2년 만에 정계를 은퇴하고 다시 작곡가의 삶을 살았다. 사심이 없는 사람이어서 일까. 정계를 떠난 후에도 그는 대중들에게 늘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었고 통일 이탈리아의 첫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 의해 종신 상원의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베르디가 처음부터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정치에 눈을 뜨게 된 과정은 오히려 우연에 가깝다. 그 시작은 베르디가 28세에 작곡한 오페라 ‘나부코’였다. 오페라 ‘나부코’는 사랑과 배신에 관한 내용이었으나 청중들은 베르디의 작곡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이 작품에 열광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었던 이탈리아인들이 노예로 전락한 히브리 백성들의 처지에 격하게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국을 그리며 부르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꿈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가라’는 이탈리아인들 속에 잠자던 저항 의식을 깨워 그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고, 이후 이탈리아 통일 운동 리소르지멘토를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다.
‘나부코’는 베르디가 이전 작품의 실패와 자식과 아내의 잇따른 사망으로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어렵게 마음을 다잡고 만든 곡이다. 하지만 무명에 가깝던 베르디의 ‘나부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데에는 그 시기 최고의 프리마돈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의 도움이 컸다. 그녀가 ‘나부코’에서 아비가일레 역을 선뜻 맡아주었기 때문이다. ‘나부코’를 통해 예기치 못한 대성공을 경험한 베르디는 이제 본격적으로 애국적 주제의 대본을 골라 작곡하기 시작했다. 1차 십자군을 소재로 한 ‘롬바르디인’, 잔 다르크 이야기인 ‘조반나 다르코’를 비롯하여, 이때 베르디가 무대에 올린 ‘에르나니’, ‘알치라’, ‘아틸라’, ‘군도’, ‘해적’ 등은 모두 애국적 작품들이다. 날로 뜨겁게 타오르던 이탈리아인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에 기름을 붓는 효과를 냈고 베르디의 인기도 크게 치솟았다.
그리고 1848년. 유럽 전체가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을 때 밀라노에서도 민중봉기가 일어나 오스트리아군을 도시에서 몰아내는 이른바 “영광의 5일”, 친퀘 조르나테가 이루어진다. 이때부터 베르디는 이전에 사용하던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서사를 버리고 애국적 감정을 격정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중들은 더 뜨겁게 베르디에 열광했다. 로마에서 초연된 ‘레나노 전투’는 리허설 때부터 이미 관객들로 객석이 가득 찼고, 극 중에서 “신성한 조약으로 이탈리아의 모든 아들이 하나로 뭉칠 것이다”라고 서약하는 장면에서 청중의 감동이 절정으로 치달아 “베르디 만세, 이탈리아 만세”를 외쳤고 공연장은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제 베르디는 단순한 작곡가가 아니라 정치가로 인식되었고, 그의 오페라에 대해 검열이 시작되어 대본 수정을 요구당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 투쟁에 직접 나섰던 것은 아니다. 그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 파리에 머물고 있었고 “영광의 5일” 때에 한 번 밀라노에 왔지만, 밀라노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다시 점령당하자 바로 파리로 돌아갔다. 당시 베르디는 파리에서 스트레포니와 살고 있었다. 과거 최정상급의 가수였던 그녀는 잦은 출산과 무리한 출연으로 건강과 목소리를 잃었고 파리에서 살롱을 출입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베르디를 만나 연인 사이가 된 것이다.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베르디는 그녀와의 관계를 못마땅해 하는 가족 친지들로부터 냉대를 받았지만 두문불출하며 오직 작곡에만 전념했고, ‘라 트라비아타’를 비롯해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시칠리아의 저녁기도’와 같은 걸작들을 쏟아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에서는 애국적인 요소가 빠진 대신 등장인물 개개인의 복잡한 성격과 심리가 세밀하고 낭만적으로 묘사되었고 관객들에게 내면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청중들은 베르디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의 작품들은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그는 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어진 듯 보였다.
그러나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법. 10년 만에 군중은 베르디를 다시 정치적 무대로 소환한다. 1859년 2월 로마에서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초연이 있었는데, 환호하던 관객들이 일제히 비바 베르디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오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로마 시내 곳곳에 비바 베르디라는 벽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베르디의 이름 다섯 자 VERDI는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만세’라는 뜻의 Viva Vittorio Emanuele Re D’Italia의 첫 글자와 같아서, 베르디를 연호하는 것 자체가 곧 통일 운동의 선봉장이었던 에마누엘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하자는 외침이 되었다.
따라서 통일 후 이탈리아인들이 베르디를 영웅으로 추앙한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베르디 자신이 정치가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오래전부터 존경해 오던 카부르 수상의 “이탈리아를 건국하려면 국민들의 상상력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베르디의 예술적 천재성이 필요하다”는 간곡한 요청을 물리치지 못했을 뿐이다. 국회의원이 된 베르디는 통일 전쟁의 희생자를 위한 모금 활동에도 열성적이었고 의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도 했었지만 카부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정치를 할 의미도 인내심도 없다며 정치계를 떠났다.
음악계는 베르디의 귀환을 환영했다. 즉시 공연 요청이 쇄도했는데 공백 기간이 무색하게도 몇 달 만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제 극장에서 이루어진 ‘운명의 힘’ 초연에서 큰 환호와 함께 알렉산드로 2세로부터 훈장과 거액의 하사금까지 받았다. 이듬해 파리와 런던에서는 처음 도전하는 그랑 오페라 장르인 ‘동 카를로스’를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렸다. 이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대작을 내놓았는데, 바로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하여 이집트 부왕이 위촉한 오페라 ‘아이다’였다.
이집트 왕실에서 예산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아이다’의 무대는 웅장하기 그지없었으며 의상과 배경은 화려함을 넘어 환상적이기까지 했다. 카이로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둔 ‘아이다’는 밀라노 라 스칼라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가는 곳마다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심지어 나폴리 공연에서는 열광한 청중들이 베르디를 태우고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 성공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아이다식 성공’이란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70세가 된 베르디는 ‘아이다’의 놀라운 성공을 뒤로하고 농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16년 만에 이탈리아 오페라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걸작 ‘오셀로’를 들고 나와 세상을 다시 놀라게 했다. ‘오셀로’를 초연한 라 스칼라의 객석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예술계, 문화계의 저명인사들로 가득 찼고 극장까지 가는 모든 길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이 베르디가 묵고 있던 호텔로 몰려가서 그가 발코니에 나올 때까지 갈채와 환호를 보냈으며 새벽까지 떠나지를 않았다. 그 이후 자전적 성격의 오페라 부파 ‘팔스타프’를 내놓는 노익장을 과시한 후 베르디는 88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베르디의 장례식은 그의 유언에 따라 검소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밀라노 시민들 모두가 거리로 나와 운구 뒤에서 ‘노예들의 합창’을 따라 부르며 베르디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그는 천생 예술가였고 어쩌다 정치가였다. 두 모습 다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니 그 성공의 비결이 궁금하기만 하다. 아마도 우리네 정치가들에게 부족하다고 하는 진정성과 공감 능력 때문이 아닐까.
[출처: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