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요코(佐野洋子)는 그녀의 책의 제목만 보아도 뭔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평범한 보통 사람은
잘 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뭔가 냉소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느껴서 사본 책입니다만 저의
성격으로는 쉽사리 따라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생관은
매력이 있습니다.
사노요코는 1938년에 태어나서 2010년 72세라는 나이에 몰(歿)합니다. 그녀의 대표작인
그림동화 『백만 번 산 고양이』는 전세계에서 300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림동화
작가이자 수필가이면서 숨질 때까지 39년 동안 173권을 출간했으며 평균 1년에 4.4권을 쓴
셈입니다.
그녀의 성격이 요조 숙녀 타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혼을 두 번 했는데 첫 번째 남편과는
폭력 때문에 이혼을 했고 두 번째는 일본의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다니카와슌타로
(谷川俊太郞)와 6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범상치 않은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유방암에 걸려서 항암치료를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그녀의 말에 의하면 항암제를
거부했다고 했습니다만) 그 암이 재발되어 뼈에 전이가 된 모양입니다. 말년에 통증으로
고통 받는 모습을 적어놓았습니다.
‘바늘 1000개를 다발로 만들어서 뇌를 찌르고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느낌이었다. 두통은 2년 반
동안 한순간도 사그러지지 않았다. 밥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에도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몸의 왼쪽이 저려왔다. 그 때문에 나는 다리를 절뚝거렸다. 이번에는 몸속에 작은 화약이
설치되어 여기저기서 탁탁 터졌다. 그 다음에는 뱃가죽이 아팠다. 그 다음에 찾아온 증상은
간헐적인 갈비뼈 통증이었다. 이때는 죽으려고 했다. 갈비뼈를 장작처럼 끊임없이 쪼개는
고통이 찾아오면 가운 끈으로 내 몸을 기둥에 동여매었다.
이런 말기암의 고통에 허덕이던 사노요코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사노요코는 더 살려고 투병기를 쓰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책의 제목이
그녀의 사생관을 말해줍니다. ’죽는 게 뭐라고‘ 사실 이 제목은 번역자의 의역입니다.(의역이
더 멋있습니다만) 원제목은 ’死ぬ気まんまん(죽을 의욕에 가득차 있다)‘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죽는 거 별 거 아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집안의 가정교육에도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가훈으로 ’돈과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암 재발
선고를 받은 날 사노요코는 보통 사람처럼 낙담하여 풀이 죽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매장에 들러서 잉글리시 그린의 재규어를 삽니다. 암에 걸렸다고 해서 담배를 칼 같이 끊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변함없이 종일 담배를 피웠습니다.
사노요코는 ’훌륭하게 죽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의외로 사무라이의 무사도 정신이
나옵니다. 사무라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충성과 명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수치를 당하면 할복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목숨에 집착하여 미련을 가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노요코는 자신의 아버지 말씀처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그런 죽음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할까요? 태어날 때는 우리는 태어난 사실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생명이 성장하여 인지(認知)가 축적이 되면 죽음에 대해서 사고하게
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하나는 죽음 이후를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죽음 다음에 존재의
세상이 있는 것인지 그저 자연의 원소로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고 자신의 존재가 소멸된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족과 친지들과 떨어져 혼자가 되는 고독이 무서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고통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면서 정신적으로
특히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봅니다. 여기 사노요코도
유방암의 재발로 끔찍한 고통 속에서 지냈습니다. 이러한 죽음의 존재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고 그것을 수용하여 품격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훌륭한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사노요코가 죽음 다음의 세상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 세상을 믿지
않는다. 저 세상은 이 세상의 상상의 산물이다.” “나는 종교심이라는 걸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맹세컨대 하느님도 부처님도 믿은 적이 없다. 지금도 믿지 않는다.”
그녀의 이런 주장은 뭔가 쫓기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깊이 사유해서 다음 세상을 믿지 않는 이유를 말해야지 설득력이 있지 그냥
다섯 살 난 아이처럼 나는 무조건 싫다는 식으로 던져버리는 건 그녀의 무게에 맞지 않는
느낌이 듭니다.
우주 전체의 기본이 되는 것을 물질로 보는 유물론적 견해와 (그것을 정신으로 보는 관념론적
견해가 있지만 이것은 일단 제외하기로 합니다) 우주의 근본 원리를 정신와 물질의 두 가지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전자를 대표하는 사상가가 마르크스이고 후자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플라톤, 데카르트라고 합니다.
여기서 철학적인 고차원적 고찰은 제 능력을 넘는 것이고, 그냥 단순히 생각하면 죽고 나서
저 세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인류 이래로 천착해 온 것이기에 쉽사리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저의 천박한 생각으로는 일원론적인 사고가 우선은 가장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물질에서 생명이 생기고 정신이 거기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담고 있는 생명이 죽으면 정신은 소멸할 것이며 물질은 자연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유한한 인간의 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그런 생각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합리적 논리를 뛰어넘는 사고의 비약이 요하게 됩니다.
저 세상이 요구된다는 이 생각은 칸트도 말한 바가 있습니다. 인간의 ’최고선‘을 위해서는 신이
요구된다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정답은 없는 것이고 각자의 신념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는 사노요코가 신경과 의사인 히라이 다쓰오와 대담한 내용이 제게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같은 의사로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견해가 공감이 가기도 하고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기본적으로 그의 견해는 유물론적입니다.
우선 히라이 선생은 인간을 관념이 아니라 생물학적 견지에 봅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데가 어디에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나 자신‘은 몸의 어느 부위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양쪽 눈도, 양쪽 팔다리도, 위장이나 심장도 아니고 소뇌나 뇌간도
아닙니다. ’나 자신‘은 대뇌피질의 복잡한 신경회로 속에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이곳에 고장이
나면 치매나 식물인간이 되어 ’나 자신‘이 없어집니다. 다시 말해 대뇌피질의 신경회로 속에
인간의 감성과 지성과 이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뇌피질은 체온을 높이거나 혈압을 조절하거나 장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뇌간이나
간뇌 그 주변의 뇌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은 대뇌피질의 신경회로 속에 있으나 신체는
60조의 세포로 이루어진 유기물의 집합입니다. 다시 말해 대뇌피질의 신경회로 속에 있는 ’나 자신‘은
신체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자신의 수명만큼 신체를 빌리고 때가 되어 신체가 서서히 산화되고
쇠약해진 끝에 죽을 때가 되면 몸을 지구 즉 자연에게 돌려줍니다. 다만 대뇌에 저장한 지식을
자손에게 전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남깁니다.
그 다음에 생물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다른 생물과 거의 같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종족 보전이
생물의 가장 큰 존재 이유입니다. 히라이 선생에 따르면 유전자가 재대로 힘을 발휘해 주는 것은
쉰다섯 살 정도까지라고 했습니다. 쉰다섯 살 이후 종족 보존이 끝나면 생물학적으로는 필요없는
존재가 된다고 합니다. 결국 생식하고 죽는 게 생물의 근본입니다. 다만 인간은 대뇌피질이 있기
때문에 식욕과 성욕 등 근원적인 본능 이외에 지식욕, 창조욕 등의 고차원적 욕구의 발휘에 의한
업적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물학적으로 본 사람의 일생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출생하고
부모에 의해 양육과 교육을 받으면서 대뇌피질 속의 신경회로 속에서 ’나 자신‘을 확립해 나가면서
본능인 생식(生殖)에 힘쓰고 사회 속에서 자신이 꿈꾸던 성취를 이루어나가다 보면 어느덧 신체는
노화되어 소멸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순환은 신이 혹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생물로서 자연의 섭리에 맞추어 열심히 살고 죽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히라이 선생은 강조합니다. 히라이 선생도 사노요코처럼 이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서 투병하며 분투하는 것이 적절한가 의문을 남깁니다.
사노요코처럼 ’죽는 게 뭐라고‘ 하는 식으로 당당하게 죽음에 대해 맞서는 것이 그녀의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목숨에 그렇게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이 인생 중 가장 행복하다.
일흔은 죽기에 딱 적당한 나이다."
첫댓글 김명서 수필가님의 사노요코 저서 (죽는게 뭐라고 ) 심도있는 독후감 잘 읽었습니다.생과 사 사후문제 인간사중에 영원한 숫테마가 아니겠습니까.님의 글을 읽고나니 다시생각나는 것은 노자의 상선약수라는 다소진부하면서도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는 도가의 가르침입니다.품위와 지성을 갖춘 김 수필가님의 글 올리심에 감사드립니다.
너무 과찬하여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수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