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골집을 다녀왔다. 아버지는 뜬금없이 여순사건 이야기를 꺼내셨다. ‘여순사건특별법’ 통과 1년이라는 보도가 나와서 그랬나보다.
1948년 봄을 매우 매우 정확히 기억하셨다.
산 사람들이 집 근처 산밑에 만들고 밥을 요구해 할머니가 밥을 해줬던 일, 그 일이 누군가가 발고해 큰아버지가 지서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던 일, 산 사람 셋 중 한 명이 장흥 유치로 도주하고 2명이 체포된 일등을 상세하게 기억하셨다.
다행히 여순사건 전이라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여순사건이 발발하고서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하셨다. 6.25 전쟁과 여순사건 이전에도 고향 마을도 좌익활동이 매우 활발했나 보다.
제주4·3사건 진압을 명령받은 14연대가 출항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때는 그해 10월 19일, 사실상 무방비 상태와 다름없던 여수는 쉽게 함락되었고, 순천을 함락시키고 불과 1주일도 안되어 전남 동부 지역의 6개 군을 장악했다.
각 지역마다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우리 노동면 소재지에도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어 토지개혁, 식량배급 등 이런저런 활동을 했던 거 같다 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0일부터 토벌은 시작되었고 며칠 뒤 보성이 수복되었다. 하지만 군경에 밀린 반란군이 패퇴해 물러간 후 비극이 시작되었다.
부역자 색출에 나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명봉역 앞 산마루에서 14명이 총살형에 처해졌는데 그 현장을 목격하셨단다. 14명 가운데 마을 친척들이 6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급한데로 가마니로 들것을 만들어 교대로 시신을 운구했는데 길 따라서 핏물이 흘렀다고 하셨다.
나무하러 다녀오는 길에 잡힌 사람, 결혼한 지 3일 만에 끌려간 사람, 지서가 불탔다는 사실도 모르고 끌려갔다가 고문에 못 이겨 동조했다고 자백한 사람 등 한명 한명 가슴 저린 사연이 안타깝다. 죄목은 ‘빨갱이’
젊은 날 서울에서 조직운동 할 때 쫓겨 다녔고 몇 번을 들락거렸다. 그들의 눈을 피해 차를 몇 번을 갈아타고 고향집을 찾아도 아버지 성화에 밥도 못 먹고 돌아섰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집안 말아묵을라고 어디서 할 짓이 없어 빨갱이 짓을 하고 다니냐?’며 타박하셨다.
“그때도 그랬고 6.25 전쟁 터지고 우리 진원 박가들이 많이 죽었제! 지금이사 시상이 좋아졌응께 인자 말하제 어디가서 말 한자리 할수 있었간디?”
그건 공포였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아버지의 공포를...... 그 징한 세월을 어찌 견디셨을까? 더 늦기 전에 조사해서 기록으로 남겨야 할 숙제를 떠안는다.
아버지에게 여순은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