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pcaso57.tistory.com/16881607
시창작이론-시와 표현기법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1. 시와 인간의 삶
인간의 하루는 낮과 밤의 교체이고, 나날은 그 반복이다. 그런가 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도 변화이자 순환이다. 즉 우리의 일상 생활은 어떤 생활 방식을 반복하는 행위이며, 노래 역시 반복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삶이나 자연의 법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노래는 따로 배우지 않고 듣는 것만으로도 가락이나 가사를 쉽게 익힐 수 있다.
따라서 노래하기로서의 시는 인간의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신의 신체 흐름에 맞는 리듬을 활용하는 것이 그렇고, 자연 대상이나 인간 관계에서 받는 느낌을 이미지로 대신 표현하는 것이 그렇다. 실제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쓴 소리를 직접 말하기도 하지만 돌려서 또는 비유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 점은 일상의 언어 생활과는 거리가 멀 것만 같은 시적 표현이 결코 일상어와 유리(遊離)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 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주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이 행위가 단순히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가 꽃말을 이해하고 있을 경우에는 꽃을 주는 행위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꽃의 이미지와 꽃이 상징하는 꽃말을 전달하는 것이며,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든 사랑의 감정이나 이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간접화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노래하기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이것이 구사된 문학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자신의 일상적인 삶과도 관련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즉 노래하기의 여러 표현 방식을 실천하는 활동은 곧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감상하는 활동이며,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표현하는 문학 능력과도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2. 시란 무엇인가
가) 마음의 표현
사랑한다는 것 - 안도현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 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풋, 사랑입니다 - 유하
새가 깃들이는 저녁입니다
그대의 불빛 닿지 않는 저문 강가에서
바람 속 풀잎처럼 뒤척이다보면
풋사과 베어먹는 소리를 닮은
풋, 그대의 웃음
어느새 가슴에 풀물로 번져옵니다
강물 위로 내리는 깊은 어둠처럼
난 오래도록 흘러왔지만
풋, 그대 앞에선
마냥 서툴게 넘어지는 풀잎입니다
그대의 불빛 미치지 않는 곳으로
물의 흐름처럼 몸을 낮추고 낮추는 밤이 지나고
푸른 새벽 깃털의 새들
눈 시리도록 숲을 박차오르는 시간에도
그새 바람 한 톨 스치면
풋, 그대의 향기에 풋풋하게 감싸여
난 서툴게 이슬 맺는 풀잎입니다
풋, 늘 그렇게
풋, 사랑입니다
나)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후꾸도-이시영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
흑석동 종점 주택은행 담을 낀 좌판에는 시푸른 사과들
어린애를 업고 넋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내
어릴 적 우리 집서 글 배우며 꼴머슴 살던
후꾸도가 아닐는지 몰라
천자문을 더듬거린다고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은 날은
내 손목을 가만히 쥐고 쇠죽솥 가로 가
천자보다 좋은 숯불에 참새를 구워주며
멀뚱멀뚱 착한 눈을 들어
소처럼 손등으로 웃던 소년
못줄을 잘못 잡았다고
보리밭에 송아지를 떼어놓고 왔다고
남의 집 제삿밤에 단자를 갔다고
사랑이 시끄럽게 꾸중을 들은 식전아침에도
말없이 낫을 갈고 풀숲을 헤쳐
꼴망태 위에 가득 이슬 적은 게들을 걷어와
슬그머니 정지문에 들이밀며 웃던 손
만벌매기가 끝나면
동네 일꾼들이 올린 새들이를 타고 앉아
상머슴 뒤에서 함박 웃던 큰 입
새경을 타면 고무신을 사 신고
읍내 장터로 서커스를 한판 보러 가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서울서 온 형이
사년 동안 모아둔 새경을 다 팔아갔다고 하며
그믐날 확독에서 떡을 치는 어깨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꾸려준 옷보따리를 들고
주춤주춤 뒤돌아보며 보름을 쇠고
꼭 오겠다고 집을 떠난 후꾸도는
정이월이 가고 삼짇날이 가도 오지 않았다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
천자문은 다 외웠는지 몰라
칭얼대는 네댓살짜리 계집애를 업고
하염없이 좌판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사내
그리움에 언뜻 다가서려고 하면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자를 눌러쓰고
이내 좌판에 달라붙어
사과를 뒤적거리는 사내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문학 특히 시의 창작 과정에는 시인의 상상력이 중요하게 작용하여, 문학의 형상적 완성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즉 시인이 자연이나 세계, 현실의 등의 용어로 정리할 수 있는 대상을 인식하고, 이를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시인의 창조적 상상력이 작용하고, 그것은 직관적이며 초월적인 계기를 통하여 작동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인의 기억이나 경험, 관념 등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시는 시인의 기억과 경험 속에 있던 자연 대상인 '갈대'가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먼저 이 시는 의인화(擬人化)된 '갈대'를 통하여 우리 인간들이 흔들림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파스칼(B. Pascal)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연상시키는 1연은, 자연 대상인 갈대가 인간의 삶과 관계를 맺는 자리, 즉 시인의 경험과 시인의 인식이 조우(遭遇)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인식의 대상인 자연이 의인화되면서 인식의 주체인 인간과 합일되고 있다.
2연에서 흔들림은 '울음'이라는 사실과 인간은 슬픔을 간직한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런 슬픔은 바람이나 달빛과 같은 타자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갈대' 자신이 잉태하고 있는 슬픔이다. 그러나 정작 흔들고, 흔들리는 자신은 이런 사실을 모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려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적 형상화 과정을 통하여 시인은 결국 인간 삶의 진실과 진리를 자각하는 존재, 즉 생각하는,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갈대)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결국 이 시에서는 시인이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자연 현상을 보며, 흔들림과 소리를 만나고, 이를 슬픔을 간직하는 존재라는 인간의 삶과 결부시키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때 '그'라고 표현된 갈대는 이미 자연 대상 그대로가 아니라 인간 또은 시인으로 전이되며, 이 과정에 시인의 창조적 형상화 능력인 시적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울러 서정시의 표현 방식인 선경 후정(先景後情)을 활용하여 물아 일체의 시적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실제로 시인이 이 시의 창작 과정을 밝힌 진술을 보면, 이런 시적 형상화 과정 또는 시적 상상력의 작동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내 고향 마을 뒤에는 보련산이라는 해발 8백여 미터의 산이 있다. 나는 어려서 나무꾼을 쫓아 몇 번 그 꼭대기까지 오른 적이 있다.
산정은 몇만 평이나 됨직한 널따란 고원이었다. 그 고원은 내 키를 훨씬 넘는 갈대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강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에 갈대들은 온몸을 떨며 울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갈대들의 울음에서 나는 사람이 사는 일의 설움 같은 것을 느끼곤 했었다.
이 「갈대」는 이 때의 산정 고원에서의 느낌을 시로 옮긴 것이다. 대학 2학년 때였다. 이 시를 쓰면서 나는 먼저 일체의 사실적인 서술을 피했다. 가파른 벼랑 밑에 흘러가는 새파란 강물, 멀리 굴참나무 밑에서 우는 뻐꾸기, 갈대밭에서 모여 우는 산바람, 고원을 뒤덮은 달빛(이것은 상상했을 뿐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느다란 한 줄기 갈대 속에 집어넣는다는 생각으로 이 시를 썼다.
이 진술에 비추어 앞의 시를 보면, 시인의 경험과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은 '사실적인 서술'로, 구체적인 시적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적 서술보다는 시인이 간직하고 있던 고향의 '갈대'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사실적인 내용 서술보다는 언어적 상상으로 재창조되고 있으며, 이렇게 재구성된 시적 공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내고 있다. 그래서 시에 나타난 '갈대'는 시인이 어렸을 때 본 자연 대상이 아니라, 시를 쓰는 순간에 시인이 새롭게 인식하게 된 대상으로 전이되고 있다.
여기서 자연물인 '갈대'에 대한 시인의 '생각'과 '느낌'은 인식 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의미 부여이며, 곧 시적 상상력이 작동한 결과의 산물이다. 그래서 인간은 슬픔을 간직한 나약한 존재라는 점과 이런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고 있으며, 이를 시적으로 표현하여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특히 일상적이고 쉽고 평범한 언어와 화려하지 않은 수사를 통하여, 이것이 자명한 진리임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는 자연, 사물을 통한 인생의 새로운 발견
애기똥풀 - 정호승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이시영 - 이슬
이슬은 한밤에 내려
초록 잎사귀를 한없이 물들인다
두 귀를 쭉 늘어뜨리고 생각에 잠긴 잎사귀는
자기를 물들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다가
아침 햇살에 반짝 정신이 들어
그것이 고통의 밝은 이슬이었음을 안다
라) 시는 시대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김남주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걷다 넘어지고 마는
미팔군 병사의 군화에도 있고
당신이 가다 부닥치고야 마는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에도 있다
가까이는
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짖어대는
네 이웃집 강아지의 주둥이에도 있고
멀리는
그 입에 물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 안 짓고 혼줄 나는 억울한 넋들에도 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낮게는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농부의 졸라 맨 허리에도 있고
제 노동을 팔아
한 몫의 인간이고자 고개 쳐들면
결정적으로 꺾이고 마는 노동자의
휘여진 등에도 있다
높게는
그 허리 위에 거재(巨財)를 쌓아올려
도적도 얼씬 못하게 가시철망을 두른
부자들의 담벼락에도 있고
그들과 한패가 되어 심심찮게
시기적절하게 벌이는 쇼쇼쇼
고관대작들이 평화통일 제의의 축제에도 있다
뿐이랴 삼팔선은
나라 밖에도 있다 바다 건너
원격조종의 나라 아메리카에도 있고
그들이 보낸 구호물자 속의 사탕에도 밀가루에도
달라의 이면에도 있고 자유를
혼란으로 바꿔치기 하고 동포여 동포여
소리치며 질서의 이름으로
한강을 도강(渡江)하는 미국산 탱그에도 있다
나라가 온통
피묻은 자유로 몸부림치는 창살
삼팔선은 감옥의 담에도 있고 침묵의 벽
그대 가슴에도 있다.
청산(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 - 양성우
청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3. 시의 이미지
이미지는 사전적 의미로는, 실제로 체험하지 않고도 언어에 의해 마음 속에 그려지는 감각적인 모습이나 느낌을 말하며 심상(心象)이라고도 한다. 시어로 형상화된 여러 형태의 심상은 우리의 마음 속에 감각을 재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시인은 심상을 통하여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거나 어떤 정서나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시적 상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심상은 시적 상황을 구성하여 상상력을 자극하고 미적 쾌감을 주는 역할도 한다.
가)지각적, 감감적 이미지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北靑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北靑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적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최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 김동환의 「북청물장수」
이 시에서 우리는 새벽잠을 깨우는 찬물이라는 촉각적 이미지와 물을 붓는 소리와 지게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같은 청각적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아직 꿈과 잠에 취해 있는 새벽을 깨우고 다니는 북청 물장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된 이미지는 이해의 측면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즉 이 시를 읽는 독자는 물장수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더라도 이 시에 표현된 북청 물장수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시에 표현된 상황 역시 새벽잠을 깨우는 어머니의 차가운 손이나 부엌에서 달가닥거리는 소리와 연결시킬 수도 있다.
이처럼 이미지는 언어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으로 독자에게 수용되는 과정에서 시각이나 촉각, 청각과 같은 구체적인 형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이미지는 작자가 표현하는 형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형상으로 작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임지가 시만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소설이나 수필 등과 같은 다른 장르의 문학 작품에서는 물론 일상의 언어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사진이나 그림, 음악, 인간의 행동과 같은 비언어적 표현에서도 이미지가 나타날 수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헤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향 수 - 정지용)
이 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 즉 향수를 감각적 심상으로 표현한 이미지즘 계열의 대표적인 시이다. 구체적으로 이런 향수를 나타내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1연에서는 '실개천'이라는 시각적 대상이 청각적 심상으로, 황소의 '울음'이라는 청각적 대상은 시각적 심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본래 시의 심상은 복합적일수록 그 기능이 강화된다. 시 자체가 직설적이기보다 포괄적인 것을 이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공감각적 심상은 '한 감각적 사실을 다른 것으로 옮긴 것'을 말하는데, 예컨대 윗 시의 '금빛 울음'이나 서정주의 '문둥이'에 나오는 '꽃처럼 붉은 울음' 등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적 언어는 시인이나 시적 화자의 정서를 직접 서술하거나 표현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심상이나 다른 표현법(비유나 상징 등)을 통해 간접화하여 극대화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시의 이런 심상은 시적 화자가 처한 상황이나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기도 한다.
나) 비유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는 비유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로서 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비유적 이미지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가 유사성이나 동일성을 바탕으로 비유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어 들리나니 大地의 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고은 <눈 길>
이 시에 나타난 핵심적 이미지인 '눈길'은 우리들에게 단순한 감각체험만을 재생시키는 정신적 이미지가 아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시적 의미, 관념, 주제 등을 빗대어서 표현한 대상물이다. 즉 '눈길'은 우리 독자들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짚어내야 할 시적 의미들을 표상하고 있는 비유적 이미지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눈은 그 새하얀 빛깔에서 오는 인상 때문에 순결함, 순수함, 정화, 신선함 등의 의미를 지니며, 겨울날 만상을 두루 덮으며 내리기에 포용과 너그러움, 관용, 포근함 등의 의미를 지닌다. 위 시에서도 눈은 이러한 의미들을 지니면서도 시의 화자가 오랫동안의 고통스런 방황과 갈등, 고뇌에서 벗어나 내면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무념의 명상적인 경지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온 겨울을 떠돌고" 왔다는 화자의 진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화자의 삶은 방황과 고통으로 채워진 것들이었다. 그 길고 숱한 방황의 끝에 서서 지금은 "설레이는 평화"라는 지극히 평온하면서도 감격적인 내면세계를 얻고 있다. 여기에서 화자는 마음의 눈으로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보고 마음의 귀로 '대지의 고백'을 듣는 지고한 정신 세계를 맛보게 된다.
이처럼 눈길은 지난 모든 날들의 고통과 갈등이 정화되어서 화자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고요함과 평화로운 경지를 나타낸 것이며, 인간이 지닌 희노애락애오욕의 번민에서 벗어난 무념무상의 내면적 세계를 표현한 비유적 이미지인 것이다. 이렇게 비유적 이미지는 시적 세계를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 상징적 이미지
상징은 어떤 대상이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부합되는 다른 의미나 관념을 표상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비둘기를 통해 '평화'를, 연꽃을 통해 '불교'를 소나무를 통해 '절개'를 떠오르는 태양을 통해 '희망'을 표상하게 되면 위에 나타난 대상물들은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둘기나 연꽃, 소나무, 태양은 우리의 감각적,지각적 대상이기 때문에 이미지가 되며, 이러한 이미지들이 상징으로 기능하므로 상징적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상징은 원관념이 생략된 은유로 보인다. '소녀들의 장미 동산에 있는 여왕 장미'하면 은유이지만, 시인이 단순한 사랑의 성질을 암시하기 위해 장미를 가리킬 뿐 비유적인 틀을 지시하지 않는다면 이때의 '장미'는 그 사랑의 상징물이 된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愛潾에 물들지 않고
熹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億年 非情의 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 <바 위>
이 시에서 시 전체에 흐르는 시상이 집중되고 있는 '바위'라는 대상은 그 이면에 어떤 의미들을 숨기고 있는 상징물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바위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나 시적 의미들을 통해 그것이 암시하는 바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바위는 그 견고함과 무게, 생김새 등으로 하여 무거움, 강인함, 신중함 등을 연상시키며, 혹은 감정의 기복, 변화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비유되곤 한다. 여기에서도 의인화된 비유는 이러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애련에 물들지 않"는 비정함과 노여움, 성냄, 기쁨 따위의 감정에 물들지 않고 비와 바람을 맞으면서도 그저 함묵한 채 자신을 지키고 견디며 안으로 더욱 강해지는 게 바로 바위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생명도 망각'하는 초월의 경지에 이르러 그 어떤 외부 자극에 흔들림이 없는 존재의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바위는 이러한 세계를 소망하는 시인의 강한 의지나 신념, 초연함, 초극의 경지, 달관의 세계를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또는 일체의 생명에 대한 허무의식을 상징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으며, 읽는 사람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해석에 따라서 또다른 다양한 의미들을 끄집어낼 수 있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상징적인 이미지들은 그 암시성으로 인하여 다양한 의미들을 창출해 내며 시 세계 전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2. 이미지의 기능
(1) 시의 구체화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구상의 언어들이기에 시인은 자신의 주관적인 정서와 새롭게 창조한 의미들을 이 이미지에 의하여 정확하고 구체적인 세계로 표현해 놓게 된다.
나는 떠난다. 청동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돌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 박남수 <종소리>
종소리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자유의 모습을 구체화시키는 이미지다. 특히 제1연에서 종소리는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의 새"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전이되면서 자유를 향해 비상하는 종소리의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고 선명하게 구체화시키고 있다.
제2연에서는 자유를 표상하는 종소리와 대비된 상황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울리지 않는 종을 '청동의 벽'으로 만든 '칠흙의 감방'의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억압과 고통이라는 관념을 시각적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제3,4연에서는 이러한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난 종소리(자유의 표상)의 모습과 지향하는 세계가 여러 이미지로 구체화된다. '자유'라는 관념과 자유에 대한 인간의 이상이 막연하고 모호한 추상성으로 떨어지지 않고 위 시가 하나의 구체적인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이미지가 만들어낸 구체성 때문이다.
이처럼 이미지는 "관념과 사물이 만나는 곳"이며 바로 여기에서 구체성이 생성되기에 한마디로 '이미지는 구체성이다'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2) 정서환기의 역할
시는 정서의 세계이며, 정서의 표현이다. 그런데 시 속의 정서는 시인의 노골적인 감정 진술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이미지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즉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정서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엘리어트는, "예술의 형태 속에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길은 객관적 상관물을 발견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하자면 특수한 정서의 공식이 되고 독자에게 똑 같은 정서를 환기시키는 일련의 사물, 정황, 사건"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객관적 상관물이 되는 일련의 사물, 정황, 사건은 바로 이미지다.
시인은 생경한 감정의 직접적 진술로써가 아니라 이미지들로써 시적 정서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슬픔의 정서를 자아내기 위해서는 시인은 '슬프다'라는 감정의 진술 대신 슬픔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사물, 정황, 사건 즉 이미지들을 제시해야 되는 것이다.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 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도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송수권<山門에 기대어>
이 시 전편에 흐르는 맑고도 뜨거운 슬픔과 그리움의 정서는 시인의 직접적인 감정 토로나 감정의 진술이 아닌 '객관적 상관물'에 의하여 형성되고 있다. 즉 구체적인 여러 이미지들을 통해서 시적 정서를 자아내고, 독자들의 마음 속에서도 이러한 정서를 불러일키고 있는 것이다.
(3) 주제와 시적 의미 제시
주제나 의미 역시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시적 의미들을 예술적으로 형상화 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이미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旗는
눈의 음악이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旗
보는 이 없는 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 김남조 <정념의 旗>
이 시에 나타난 '깃발'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이 시의 주제를 형상화한 주요 이미지다. 깃발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온갖 번민과 갈등을 표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지극한 평화와 순수함의 경지에 다다르고 싶은 내면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이미지들을 통해 자신의 관념과 테마를 육화시키는데, 이것은 브룩스와 워렌이 말한 '관념의 극화'를 이미지가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4) 시의 강렬함
이미지는 시 세계의 강렬함을 심어준다. 충격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강렬한 인상을 마음속에 제시하는 것이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봉건 <피아노>
이 시에서 시인은 생기로운 피아노 소리와 그 에 대한 느낌을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제1연의 "신선한 물고기가 /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라는 이미지는 손가락 끝에서 튀는 건반의 흰 음계, 검은 음계의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으로서 생동하는 빛의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해준다.
제2연에서도 "시퍼런 / 파도의 칼날 하나"의 이미지는 섬뜩하리만큼 대담하고 강렬해서 독자에게 충격과 경이감을 준다
4. 시의 비유
시인은 표현하려는 사상과 감정을 직접적인 설명만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자신이 표현하려는 바를 다른 사람이나 대상과 비교하여 나타낸다. 일상의 언어 활동에서도 넓은 아량을 가져 이해심이 많은 사람을 '하해(河海)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듯이 직설적인 표현 방식보다는 다른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가리켜 비유(比喩)라고 한다.
비유라는 말은 원래 희랍어의 metaphora에서 온 말이다. 이 중에서 meta는 운동 또는 변화를 나타내며, phora는 '운반하다, 이동하다' 등을 뜻하는 pherein의 변화형이다. 그러므로 비유라는 말에는 언어의 운동 개념 즉 전이(轉移) 또는 이월(移越)이라는 의미가 원래부터 담겨 있었으며,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동'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비유는 이질적인 요소를 서로 결합시키는 표현법이다. 원래 나타내려는 원관념을 보조관념과 비교하여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때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같이','∼처럼','∼듯이'와 같은 매개어로 결합하는 경우를 직유라고 하고, 매개어 없이 'A는 B이다'로 결합하는 형태를 은유라고 한다.
비유의 종류는 일반적으로 직유(直喩, smile), 은유(隱喩, metaphor), 감정 이입 또는 의인화, 제유(提喩: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거나 전체로 부분을 대표하는 예로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괭이'나 '호미'), 환유(換喩:어떤 사물을 그 속성이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명칭으로 대신 하는 것) 등이 있다.
비유법은 단어 사이의 비교를 통하여 이룩되는 단일 비유와 구절 사이의 비교로 이루어지는 확장비유가 있다. 단일 비유는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변영로의 「논개」)에서처럼 '분노'와 '종교', '정열'과 '사랑'이 단순 비교되는 예이다. 이에 비하여 확장 비유는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김영랑의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처럼 행과 행이 같은 차원에서 비교된다.
표현기법으로서의 비유는 시가 시일 수 있는 특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이다. 시인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비유를 통하여 형상화하고, 독자들은 이런 비유적 표현을 통해 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감지하게 된다. 따라서 시적 형상화를 위해서는 비유가 제대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유는 시의 품격과 시로서의 자질을 정해주는 잣대라고도 할 수 있다.
가) 죽은 비유와 살아 있는 비유
좋은 시는 우리에게 인지의 충격과 경이감을 던져준다. 우리의 체험과 삶을 활성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며 우리들 자신을 신장시켜 나가도록 만든다.
비유는 시인이 자신만의 독특한 인식과 상상력에 의해 미지의 사물을 우리 앞에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시적 원리이며 표현방법이다. 이 비유를 통하여 사물의 새로운 모습과 새로운 발견, 새로운 의미,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비유가 이러한 창조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비유를 이루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이 상상력을 필요치 않는 상식수준이거나, 습관화된 인식 속에서 나온 것이거나, 너무 낯익어서 진부한 것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세계와 사물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경이감과 충격을 자아내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비유를 죽은 비유라고 하는데, 즉 비유로서의 생명을 상실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 죽은 비유를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만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세월은 유수와 같다','세월은 쏜살 같다','앵두 같은 입술','인생은 아침이슬 같다','샛별 같은 그녀의 눈동자','사랑은 불꽃'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이 시에 나타나 있는 '꽃'의 모습을 보자.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아름다움, 정열, 사랑, 황홀 등 자동적, 관습적으로 받아들였던 꽃의 모습이 아니다. 시인의 눈에 의해서 발견된 '속삭임','울음','핏방울','정적','호심' 등의 비유는 우리가 예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꽃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의미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이때 솟아나는 정서적 충격과 황홀한 경이감이 우리들의 삶의 지평을 확대시키고 타성에 빠진 우리들의 시각을 깨뜨리게 한다. 이러한 현상, 이러한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당연히 시인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살아있는 비유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나) 은유 - 치환은유
치환은유는 지금까지 우리가 흔하게 보아왔던 은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정의처럼 한 사물에다 다른 사물의 이름을 전이하여 만드는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은유가 바로 이 치환은유에 해당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대상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미지의 대상인 원관념을 구체적인 대상(보조관념)으로 전이하여 의미의 확대 또는 변용을 가져오는 것이 이 치환은유를 만드는 방법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내 마음은 촛불이요
내 마음은 낙엽이요.(김동명- 내 마음)
이 시에서 내 마음은 원관념이요, 호수, 촛불, 낙엽은 보조관념이다. 원관념에 여러 가지 보조 관념을 결합시켜 비유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를 이루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각기 다른 이질적인 대상들이다.
다) 은유 - 병치은유
병치은유는 치환은유에서 보여주는 유사성을 배제한 은유이다. 서로 이질적인 대상들이 병렬과 종합의 형태를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킨다고 생각한 휠라이트는, 이 병치은유의 예를 에즈라 파운드의 시 <지하철역> "군중 속에 있는 얼굴들의 환영 / 검은 가지 위에 젖은 꽃잎들"로 설명하고 있다. 이 구절에 나타난 대상들은 서로 유사성의 인자 없이 병치의 상태로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휠라이트는 이처럼 아무런 모방적 요소, 유사성의 요소가 없는 대상들이 병치의 상태로 결합되더라도 여기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물'이라는 새로운 대상이 만들어진 것처럼, 서로 모방적 인자나 동일성을 갖지 않는 대상들이 그것을 선택하고 종합하는 시인의 독특한 심리과정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병치은유의 매력과 힘이 있는 것이다
라) 제유와 환유
제유는 은유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나 있는 한 부분(보조관념)이 안으로 숨어 있는 전체(원관념)를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드러나 있지 않은 전체를 그 사물의 일부분으로 대신 표현하는 방법인 이 제유는 대유의 일종이다. '푸른 눈'이 서양인을 의미하는 것이나, '약주'가 모든 술을 의미하는 것이나 '돛'이 배를 의미하는 것 등이 모두 이 제유의 보기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유는 직유나 은유처럼 시 속에서 그다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풍부한 시적 의미나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는 시 세계에서 제유는 이러한 기능을 하는 데 별로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독특한 창조성이 반영되지 않아서 독자로 하여금 특별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흠도 있다.
환유 역시 대유의 일종으로서, 어떤 사물을 나타내는 데에 그것과 관계가 깊고 가까운 다른 낱말을 빌려 표현하는 비유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 동네에 금배지가 왔어"라는 표현 속에서 '금배지'는 그것과 가장 관계가 깊은 대상, 즉 국회의원을 대신 말하고 있는 환유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표현하는 것도 환유이다. '별'이 장군을 의미한다든지, '백의의 천사'가 간호사를, '백악관'이 미국의 대통령을 의미하는 것 등이 모두 이 환유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제유와 환유는 한 개인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내는 비유가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의 전체적인 생활 속에서 오랜 동안의 경험이나 습관을 통해 형성되는 비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 의인법
가) 의인법-동화
세상의 모든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의인법은 세계와의 일체감, 동일감, 조화와 융화를 지향하는 서정시의 고유한 시정신에 바탕이 되어 주며, 세계와 합일에 이르는 통로를 마련해 준다. 사람이 아닌 사물이나 추상 개념에 사람의 모습이나 성질을 적응시켜 이해하는 이런 태도는 신을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무생물을 생물화하고 무인격을 인격화시키는 비유인 의인법을 만드는 데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동화와 투사의 원리이다. 동화는 사물이나 세계를 시인 자신 속에 끌어 들여서 대상을 인격화하는 것이다. 이 동화는 바로 '세계의 자아화'이다.
나, 잊지 못하리 그새 세월 많이 흘렀어도 우리 꿈 어찌 버릴 수 있으리 나, 기다릴 수 있으리 쑥구렁 속에서도 끝없이 가라앉는 절망 속에서도 지금껏 목메어왔거늘 누가 내 그리움 함부로 무너뜨리리 누가 내 서러움 감히 꺾어 없애리
햇무더기야 내 소중한 사람아
나, 포기할 수 없으리 그 많은 눈물 바쳤음에도 그 많은 피땀 흘렸음에도 길게 그림자나 늘이는 사람아 그림자로 웃기나 하는 사람아 그 그림자 속으로 나, 더욱 숨직일 수 있으리 그렇게 일어설 수 있으리. -햇무더기야, 이은봉-
'햇무더기'는 태양을 친근하게 표현해 본 것으로서, 일종의 빛무더기를 뜻한다. 햇무더기는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대상이며 세계로서, 시인의 주관적 자아와는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일 뿐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그 대상을 주관적으로 자아화하기 위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상과의 합일이라는 꿈을 끝끝내 포기할 수 없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시인인 것이다.
그 대상을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그와 융합함으로써 대립, 갈등, 부조화의 관계를 허물고 일체감을 형성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자아화'인 동화이다.
나) 의인법-투사
의인법의 한 원리인 '투사'는 동화와 반대로 시인 자신을 사물과 세계 속에 상상적으로 투여하여 대상을 인격화하는 것인데, '자아의 세계화'가 바로 그것이다. 객관적인 사물 속에 시인의 정서를 투사하여 미적 가공물로 시를 드러내는 '객관적 상관물'을 활용하는 기법도 일종의 '투사'라고 할 수 있다.
옥창에서 바라보이는 조각 하늘에
누집 아히가 날려보내는 고운 연이냐
푸른 하늘로 끝없이 깃더오르랴는 갈망
연의 마음도 한없이 자유가 그리운게다
미친 것처럼 떨며 내달아 솟아도
번번이 야문 실오리에 끌려내려와야 하는
연아! 너의 슬픈 몸부림을
자미롭다고 사람들은 바라보겠구나
얼마나 가고 싶으냐 새떼 마음놓고 지저귀는
구름과 바람이 번덕여 재롱떠는 하늘가
노을이 타서 피가 듣도록 타서
숲속에 마지막 종소리 울리는데
연아 달아나거라 끝없이
실끝 끊어 버리고 일사천리 끝없이 달아나거라 -연, 김상훈-
이 시에서 의인화된 '연'은 시의 화자가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고 있는 대상이다. 제1연의 "옥창에서 바라보이는 조각 하늘에"라는 첫 행에서 드러나 있듯이 시의 화자는 지금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시의 화자는 이 억압의 구속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유를 누리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화자의 처지와 마음의 갈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감옥에서 바라본 '연'이라는 대상이다.
그래서 시의 화자가 보기에는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연의 모습은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며, 아무리 솟구쳐도 끌려 내려와야 하는 연의 모습은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는 '연'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위 시는 감정이입에 의한 투사의 원리가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6. 시의 상징
상징(symbol)은 어떤 대상이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부합되는 다른 의미나 관념을 표상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비둘기를 통해 '평화'를, 연꽃을 통해 '불교'를 소나무를 통해 '절개'를 떠오르는 태양을 통해 '희망'을 표상하게 되면 위에 나타난 대상물들은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상징이라는 말은 '짜 맞춘다'는 뜻의 희랍어인 symballein에서 유래했으며, 그 명사형인 symbolon은 '부호, 증표, 기호'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단순화하여 말하면, 상징은 신표(信標)로 어떤 것을 대신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즉 상징은 현상의 세계가 아닌 불가시(不可視)의 세계, 정신의 세계를 가시(可視)의 세계, 감각·물질의 세계로 바꾸는 것이다.
또한 은유와 대비하여 말하면, 은유 중에서 원관념이 생략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의 요소로 생략된 하나의 요소를 대신하는 표현 방식이 상징이다. 그러나 상징과 은유는 원관념이 생략되었다는 점 외에도 ①심상 제시 방식에 차이가 있으며, ②지적 수준이나 사회적 약정의 성립 여부에서 차이가 있고, ③상징은 은유와는 다른 기능적인 심상 체계에 의하여 성립되는 표현법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7. 아이러니(irony)
"또랑또랑하게 생겼다."거나 "귀엽게 생겼다."는 표현은 이 말이 구사된 상항에 따라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즉 정말로 그 아이가 또랑또랑하고 귀여울 수도 있고, 이와는 달리 그 아이가 벼로 예쁘지는 않음을 돌려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중에서 후자의 경우처럼 실제로 발화되거나 표현된 그대로의 의미와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하거나 글을 쓰기도 한다.
이 같은 방식을 뒤집어 말하기 또는 뒤집어 글쓰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방식의 표현을 반어(反語, irony)라고 한다. 반어는 표현된 언어의 자의(字意)와 반대되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법이므로 이 경우에는 말한 내용보다는 그 말이 의도하는 바가 중요하다. 즉 말한 것(what is said)과 의미하는 것(what is meant) 사이의 긴장, 대조 혹은 갈등을 수반한다. 반어는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모순, 충돌하는 여러 요소들의 독자성이 인정되며, 그들을 기능적으로 한 문맥 속에서 엮어 내는 가운데 성립된다.
따라서 반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한 것(표현된 것)과 의미하는 것(숨겨진 것)의 관계를 심도 있게 추적하여야 한다. 즉 반어적인 시에서는 독자와 작자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기 때문에 양자 간에 기지(機智, wit)의 싸움이 벌어진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독자는 구조적 상층 관계를 발견하고 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분석적인 정신과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8. 역설(paradox)
역설(paradox)은 'para(초월)+doxa(의견)'의 합성어다. 즉 역설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말속에 일정한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을 말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표현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사랑을 사랑이라 하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아아 님은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외로운 황홀한 심사'
'찬란한 슬픔의 봄'
반어적 표현과는 달리 역설은 본질적으로는 진실하나 표면적으로 자가당착적인 진술을 말한다. 특히 돌려서 표현하기의 원리를 실천하는 역설은 그 작용의 원리면에서는 반어와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주로 말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바쁠수록 돌아가라."거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표현처럼, 진리와는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잘 생각해 보면 진리를 나타냄으로써 도리어 강조하는 예이다.
표면적으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실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진술로서, 표면적인 진술과 그 바닥에 깔린 참뜻 사이에 대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역설(paradox)은 반어와 아주 밀착되어 있다는 사전적인 정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설은 모순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모순어법은 우리의 일상적 지각이나 상식을 파괴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진리 표현의 수단이 되고 있다. 떠나간 임을 결코 잊지 못하고 있음을 표현한 다음의 시적 표현에서 이 같은 모순어법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먼 후일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먼 후일 그 때에 잊었노라 - 김소월 <먼 후일>
이 시의 경우처럼 시적 화자는 '잊었노라'고 표현함으로써 떠난 임을 결코 잊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표현 방식을 역설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으로 전통적으로 중요한 시적 기법으로 간주되었다. 역설은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로, 궁극적으로 독자는 이 같은 기법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역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이러니와 구분되면서도 흔히 혼동되고 있는 문학적 장치다. 둘다 모순을 통한 진리의 발견에 기여하며 서로 상반되는 모순을 내포하는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의 경우 말 자체에는 모순이 없으나 겉으로 말해진 언어와 이것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숨겨진 의미 사이사이에 모순이 생기는 반면 역설은 그 말 자체에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 생활에서도 역설은 흔히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간접화하여 뒤집어 표현하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의 속성을 효과적으로 이해하는 활동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활동에서도 활용할 수 있게 되면 일상의 언어 생활 능력도 향상된다.
9. 풍자와 패러디
풍자(諷刺, satire)는 대체적으로 사악이나 우행(愚行)을 문책하거나 악을 교정하며, 풍간(諷諫)을 목적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풍자(風刺)하는 언어적 행위(「시경」)라는 개념 범주로 설명되고 있다.
풍자는 현실을 비판하는 시적 형상화 방식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풍자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문학 형식이나 형상화 방법을 부분적으로 이용한다. 예를 들면 광의의 풍자 개념 속에서 반어나 패러디, 우화(Allegory) 등이 두루 활용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의 개념과 경계를 이루기도 한다.
풍자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패러디(parody)는 하나의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로 희화화하여 나타내는 것으로, 문학 창작의 한 방법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패러디 과정은 단순한 창작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원텍스트의 형식(양식)이나 내용(정신)에 대한 이해의 과정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창작하는 표현의 과정이라는 두 단계를 거친다. 이런 측면에서 패러디를 단순한 모방으로 한정하여 이해하기보다는 상호텍스트성이 실현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 장정일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10. 객관적 상관물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용어는 엘리어트가 「햄릿과 그의 문제들」이라는 글에서 처음 언급한 개념이다. 그는 객관적 상관물이란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떼의 사물, 정황, 사건 들로서 바로 그 정서를 곧장 환기시키도록 제시된 외부적 사건'이라 하고 있다. 즉 객관적 상관물이란 정서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 등을 지시하는 가운데 간접적으로 정서를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정서를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시적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어떤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감정을 토로하는 일이 예술일 수 없다는 반낭만주의 발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개인적인 감정은 어떻게든지 객관화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객관적 상관물이 필요하게 된다는 견해이다.
자, 그러면 가자꾸나, 그대와 나는,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놀이 하늘에 퍼뜨려지거든
가자꾸나, 인적이 드문 거리,
하룻밤 싸구려 여인숙에 들어박혀
불안한 밤을 나누는 밀어와,
굴 껍데기 흩어진 톱밥 깔린 음식점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서,
그러한 거리는
그대를 엄청난 의문의 장소로
안내하려는 음흉한 의도가 고의로
꺼내는 지리한 말들처럼 뻗친 곳…
아니, 묻질 마라, '그게 무슨 말이냐'고
가서 한 번 방문해 보자꾸나
- 엘리어트 <J. 앨프릿 프루프록의 연가(戀歌)>의 부분
이 시는 엘리어트 자신이 객관적 상관물을 설명하면서 예로 든 작품이다. 이 시에서 '수술대 위 마취된 환자'가 바로 객관적 상관물이다. 이 표현은 하늘에 퍼뜨려지는 저녁놀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즉 희미하고 몽롱한 상태를 독자에게 보다 선명히 전달하기 위하여 '수술대 위에 있는 에테르에 마취된 환자'의 상태를 객관적 상관물로 동원하고 있다.
객관적 상관물은 현대시의 대표적인 기법으로 널리 사용되면서 어떤 상황이나 정서를 나타내는 상징적 형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직접적인 사상이나 감정을 서술하기보다는 함축적이고 암시적인 시적 표현이 시의 본질로 간주되면서,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시적 기법은 현대시의 형상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嘉石,何石 朴浚珉 (贊九) (미카엘) 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