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역사를 걸러내지 못하고 여전히 굴욕적 언사(言辭)를 배설하는 한국 정치의 참을 수 없는 비릿함을 덜어내기 위해 오늘도 걷는다. 나에겐 걷는 게 치유다. 단순한 물리적 운동 그 이상이다. 일찍 나선다. 오전 7시 20분이다. 건들바위와 향교 사이를 걷다 보니 적산가옥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보병80연대 관사 옛터다. 걸으면서 산란한 마음을 덜어내려 하지만, 오히려 마음은 더 무겁다. 대구 남구와 중구는 일제강점기를 거처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남긴 역사적 상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장소이다. 일부 지역은 지금 아파트 공사 중이다. 많은 흔적이 지워지고 있다. 하지만 이곳을 걷다 보면 여기저기 적의 잔재가 눈에 띈다. 〈국어사전〉에는 ‘적산’(敵産)을 “1945년 8ㆍ15광복 이전까지 한국 내에 있던 일제(日帝)나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광복 후에 이르는 말”로 정의한다. 우리에겐 적산(敵産)이지만 당시 일본인에게는 부를 축적한 적산(積産)의 공간이었다.
향교를 지나 제일여중(지금은 제일중학교) 뒤쪽 골목길에도 적산의 흔적이 눈에 띈다. 이 지역은 일부가 훼손되거나 개축을 해 원형이 보존되는 곳이 거의 없다. 대구의 대표적인 적산가옥 거리로 보존할 만하다. 하지만 여기도 개발의 칼날은 여지없이 작동된다. 골목길 곳곳에 일제의 기운이 아직도 꿈틀하는 듯하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흔을 아직도 다 치유하지 못한 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집은 옷이다. 우리의 영토를 남에게 내어 주고, 적이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살아야 하는 형편이 애잔하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왔다. ‘근대유산’이란 이름으로.
적산가옥의 특징은 우선 지붕이 짧다. 우리의 지붕은 길어서 처마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적산가옥은 지붕이 짧아서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하는 파이프가 따로 붙어 있다. 마치 일본군의 짧은 머리처럼 지붕도 단발이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쉽게 적산가옥을 알 수 있다. 처마를 길게 늘어트려 자연스럽게 비를 피하는 우산의 역할을 하는 우리의 지붕과는 다르다.
대구는 항구 도시에 비하면 적산가옥이 적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건물이 없기 때문에 남아 있는 건물은 꽤 있다. 대구 중구 삼덕동에 1916년 일본인 승려가 지은 관음사와 1914년 일본성공회 니시다 선교사가 세운 성공회 대구교회가 대표적인 적산가옥이다. 이 교회는 지금은 성 프란시스 성당으로 개명이 되었다. 대구 중구 경상감영길 234(동문동)에 그대로 남아 있다. 중국 북성로 일대 적산가옥의 몇몇은 레트로 감성의 카페로 변신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외지에서 대구에 오면 우선 근대골목투어로 조성된 길을 따라 옛 대구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한다. 현재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으로 건립된 것이다. 전형적인 일식 가옥에 서양 건축을 덧입혀 놓은 건물이다.
나치를 아무리 미화해도 아우슈비츠의 역사는 진실이다. 독일 거리에는 걷는 데 방해가 되는 작은 동판이 박여 있다. 슈톨퍼슈타인, Stolperstein이다. 독일어로 stolper(걸려 넘어지다)와 Stein(돌)의 합성어이다. 영어로는 stumbling stone이다. ‘걸림돌’이란 의미다. 이 동판은 나치 시대 희생되거나 핍박을 받은 유대인을 기억하기 위한 돌이다. 내가 전공한 유대계 독일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을 위한 걸림돌이 그가 재직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서 있다. 그의 제자 하이데거가 나치 당원이 되면서 총장으로 취임한 후, 유대인 스승을 차별한다. 하이데거는 후설 때문에 프라이부르크 교수가 되었다.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1927)은 스승 후설에게 헌정하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후 헌정한다는 글을 삭제해버린다. 제자에 의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스승은 학문 활동에 제한을 받는다.
일제강점의 역사를 근대화의 시각에서 아무리 미화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진실이 바뀔 수 없다. 자유분방한 해석이 마치 세포 증식하듯 덧붙여질수록 사실에서 멀어진다. 역사 해석은 될 수 있으면 경제적이어야 한다. 사태 자체에 대한 낭만적 해석은 자칫 사태로부터 멀어질 위험이 크다. 사태는 관념의 옷을 입기 이전 이미 일어난 사건이다. 역사적 사실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적산은 관념으로 추상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적산은 일제가 남기고 간 근대화의 유물이 아니다. 치욕의 역사를 다시 새김질하게 하는 달갑지 않은 근대유산일 뿐이다. 우리가 근대의 유물로 기억하기 전에, 가해자 일본이 용서를 구해야 할 걸림돌이다.
2011년 12월 추운 겨울, 다음날 중국 지린성 옌지(연길)로 돌아가기 위해, 창춘역 인근 호텔에 묵은 적이 있다. 밤에 창으로 보이는 창춘역사(驛舍)는, 유럽 어느 도시에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화려하다. 창춘은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세운 위(僞)만주국의 수도이다, 곳곳에 일본식 관공서가 아직도 남아 있다. 2014년에 개축된 이 역사 건물 꼭대기에 만주국 당시의 일본 잔재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곳 역시 가해자 일본이 그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 할 걸림돌이다. 아직도 그들에
첫댓글 적산가옥이 대구에도 곳곳에 있네요.
지붕이 짧은 것은 일본에 비해서 비가 적게 내리는 한국의 기후에 맞추어서?
독일 곳곳에 걸림돌이 있군요.
우리나라는 아직도 먼먼 훗날 그리될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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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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