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은 봄날에 진도의 명승 운림산방에 취해서 놀다.
책을 읽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풍경이 있고, 그래서 바람처럼 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일까? 병일까? 그런 곳 중의 한 곳이 진도에 있는 운림산방이다.
진도의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에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 선생(1808~1893)이 말년에 거처하며 여생을 보냈던 화실이다.
허련의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痴)·노치(老痴)·석치(石痴). 이명은 허유(許維)로 중국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 산수화(水墨山水畫)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라서 ‘허유(許維)’라고 개명(改名)하였으며, 마힐은 왕유의 자를 따른 것이다.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손인 그는 해남의 윤선도(尹善道)고택에서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을 통하여 전통 화풍을 익혔으며, 30대 초반에 대흥사의 승려 초의(草衣)의 소개로 추사를 알게 된 그는 1839년 상경하여 김정희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를 수업하였다.
그림으로 유명해진 이후 헌종의 배려로 1848년 고부(古阜)의 감시監試)를 거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서, 관직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김정희로부터 중국 북송(北宋)의 미불(米芾)과 원나라 말의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 청나라의 석도(石濤) 등의 서풍(書風)도 전수받으면서 남종 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한 허련은 김정희를 통하여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였으며, 1846년에는 권돈인(權敦仁)의 집에 머무르면서 헌종에게 그림을 바쳐 궁중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임금과 여러 차례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아들 정학연(丁學淵), 민승호(閔升鎬)·김흥근(金興根)·정원용(鄭元容)·신관호(申觀浩).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등과 교류하였고, 1856년에는 진도에 귀향하여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였다.
여러 방면의 그림에 능통하였지만 산수화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그의 산수화는 붓끝이 갈라진 거친 독필(禿筆)의 자유분방한 필치와 담채(淡彩: 엷은 채색)의 색감에서 독특하고 개성이 두드러진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서울대락교 박물관에 소장 중인 선면산수도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그 외에도 진한 먹을 대담하고 능란하게 구사한 사군자·모란·파초·괴석·노송·연화 그림도 특징적인 개성미를 지녔다.
추사 김정희는 <신위당 관호에게 주다(與申威堂 觀浩)에게 주다> 라는 편지에서 그의 제자인 허련을 두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허련은 아직도 그곳에 있습니까? 그는 매우 좋은 사람입니다. 그의 화법畫法은 종래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루한 기습을 떨어버렸으니,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다행히 권문세가에 의탁하여 후하신 비호를 받고 있으니, 영감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사람을 알아주겠습니까? 그 또한 제자리를 얻은 것입니다.”
추사는 사람들에게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허련의 독특하면서도 토착화된 화풍은 아들 형(灐)에게 전수되었고, 손자 건(楗), 방계인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계승되어 호남 화단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의 대표작은 1866년에 그려서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가 있고, 1867년에 그린「몽연록(夢緣錄)」과 저술로는 『소치실록(小痴實錄)』 이 있다.
소치 허련의 자취가 서린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찰산을 지붕으로 하여 사방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485m의 첨찰산 봉우리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운림산방은 조선후기 남화의 대가로 불리는 소치 허련(小痴 許鍊)이 허련이 말년에 서울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 곳에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당호다.
자연유산과 역사문화유산이 어우러져서 1981년 국가 명승으로 지정된 운림산방은 첨찰산 서쪽, 쌍계사와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운림산방은 "ㄷ"자 기와집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뒤편의 초가로 된 살림채가 있으며 새로 지어진 기념관들로 이루어져 있다.
운림산방 앞에 오각으로 조성된 연못에는 흰 수련이 피고 연못 가운데 직경 6m 크기의 원형으로 된 섬에는 여름을 빨갛게 수놓는 배롱나무가 있다.
소치 허련은 1809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그의 나이 28세부터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기거하던 초의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허련은 30대 초반 초의선사의 소개를 받아 서울로 가서 추사 김정희에게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으면서 남화의 대가로 성장했다.
허련은 왕실의 그림을 그리고 여러 관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스승 김정희가 죽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진도에 내려와 운림산방을 마련하고서 그림에 전념하였다. 그때가 철종 8년인 1857년이고, 허련의 나이 49세였다.
그 뒤 허련의 셋째 아들인 미산 허형과 손자인 남농 허건이 남종화의 대를 이은 곳이기도 하고, 한집안 사람인 의재 허백련이 그림을 익힌 곳이라서 한국 남화의 성지로 불린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운림산방은 1982년 손자 허건에 의해 지금과 같이 복원되었으며, 화실 안에는 허씨 집안 3대의 그림이 복제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다.
새로 지어진 소치기념관에는 운림산방 3대의 작품과 수석,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이다. 사랑채, 화실, 1586.78m²(480평)의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 직경 6m 크기의 원형으로 된 섬이 있다. 입구의 암벽과 가까운 거리에 쌍계사가 있고, 뒤 첨찰산 서쪽 기슭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이 있다.
후손들이 진도를 떠나면서 오랫동안 원형을 잃고 방치되었던 운림산방은 1982년에 손자 허건에 의해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이곳 운림산방에는 연못과 정원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초가집과 소치기념관, 진도 역사관 등이 있고, 영화 “스캔들 조선남여상열지사”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한 폭의 산수화같이 펼쳐져 있고, 연못 가운데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으며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의연한 자세로 서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넘겨주면서 단서를 덧붙이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만약 어떤 순간에 ‘멈춰라 순간이여,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 라고 말하게 된다면 그때는 네가 나의 영혼을 잡아가도 좋다”
파우스트가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살아가면서 그토록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순간, 그 순간이 과연 존재할까?
존재 한다면 나 역시 그 순간에 목숨을 버려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풍수에서 말하는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 즉 온전히 아름다운 땅이란 없다“.라는 말처럼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내 마음, 그 믿지 못하는 마음이 어쩌면 슬픔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다.” 라고 키츠가 말했다. 하지만 그러한 아름다움이 언제까지나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데 인생의 묘미가 있을 것이지만 운림산방과 같은 아름다운 명승을 바라보면 ’지금’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다.
봄이 무르익은 운림산방, 어서 가고 싶지 않은가?
2024년 5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