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列國志 제145회
어장인(漁丈人)은 오자서(伍子胥)를 건네주고 또 음식을 주었으며, 오자서가 주는 검을 받지 않았다. 오자서는 어장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가다가 되돌아와서, 자신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楚兵이 추격해 오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지만, 그 말은 어장인의 성의를 배신한 말이 되고 말았다. 어장인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은덕을 베풀었건만, 그대는 오히려 나를 의심하는구려. 만약 추격병이 강을 건너간다면, 내 무엇으로 결백을 밝히리오! 내가 죽음으로써 그대의 의심을 끊어 주리라!”
어옹은 줄을 풀고 배에 올라 강 가운데로 배를 저어 간 뒤, 삿대와 노를 물속에 던지고 배를 뒤집어 버려 물속에 빠져 죽었다.
사관이 시를 읊었다.
數載逃名隱釣綸 이름 감추고 은거하여 어부 된 지 몇 해던가
扁舟渡得楚亡臣 조각배로 초나라 망명객을 건네주었네.
絕君後慮甘君死 그대의 의심을 끊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렸으나
千古傳名漁丈人 천고에 전해진 이름은 오직 어장인일 뿐.
지금도 무창(武昌)의 동북쪽 통회문(通淮門) 밖에 해검정(解劍亭)이 있는데, 바로 오자서가 어장인에게 칼을 끌러 주었던 곳이다.
오자서는 어장인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 탄식하였다.
“나는 노인 때문에 살아났는데, 노인은 나 때문에 죽었구나!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오자서는 공자 승(勝)과 함께 마침내 吳나라 경계에 들어섰다. 율수(溧水) 남쪽 땅에 이르러 배가 고파 걸식을 하다가, 여울 가에서 빨래하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의 옆에 놓인 대바구니 속에는 밥이 들어 있었다. 오자서는 발을 멈추고 여인에게 물었다.
“부인! 밥 한 그릇만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응답했다.
“저는 어머니를 모시고 30년을 살면서 아직 출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 행인에게 밥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지금 몹시 빈궁하니, 밥 한 그릇을 주시어 살려주십시오. 부인께서 진휼(賑恤)의 덕을 베푸시는 데 무슨 혐의(嫌疑)가 있겠습니까?”
여인은 고개를 들어 오자서의 늠름한 풍채를 바라보았다.
“제가 군자의 용모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찌 작은 혐의로 인하여 곤경에 빠진 군자를 좌시(坐視)할 수 있겠습니까?”
여인은 무릎을 꿇고 대바구니를 오자서에게 바쳤다. 오자서와 공자 승은 밥을 한 그릇만 먹었다. 여인이 말했다.
“멀리 가시는 모양인데, 어째서 배불리 드시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남은 음식을 다 먹어치웠다. 오자서는 떠나기 전에 여인에게 말했다.
“부인께 활명지은(活命之恩)을 입었습니다. 그 은혜는 폐부에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실은 나는 망명객입니다. 혹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부인께서는 말하지 마십시오.”
[‘활명지은(活命之恩)’은 목숨을 살려준 은혜이다.]
여인은 처연(淒然)히 탄식하였다.
“오호라! 홀어머니를 모시고 30년 동안 시집도 가지 않고 정절만 지켜 왔는데, 이제 남자에게 밥을 바치고 말을 주고받아 절개를 잃었구나! 어찌 남에게 얘기하겠습니까? 군자는 그냥 가십시오.”
오자서가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여인은 큰 돌을 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후인이 시를 지어 찬탄하였다.
溧水之陽 율수의 남쪽에
擊綿之女 빨래하던 여인
惟治母餐 오로지 노모를 봉양하여
不通男語 남자와는 말 한 번 나누지 않았네.
矜此旅人 나그네를 동정하여
發其筐筥 소쿠리 밥을 내주었네.
君腹雖充 객은 비록 배를 채웠으나
吾節已窳 그녀는 이미 절개를 잃었도다.
捐此孱軀 가녀린 그 한 몸 율수에 던져
以存壺矩 부녀의 법도를 지켰도다.
瀨流不竭 흐르는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茲人千古 그녀의 절개는 천고에 전하리.
오자서는 여인이 강물에 투신하는 것을 보고, 슬픈 마음을 누를 길 없어, 손가락을 깨물고 돌 위에 혈서를 썼다.
爾浣紗 그대가 냇가에서 빨래하는데
我行乞 나는 밥을 빌었도다.
我腹飽 나는 배를 채웠건만
爾身溺 그대는 익사하였구나.
十年之後 십년 뒤에
千金報德 천금으로 보답하리라.
오자서는 쓰기를 마치자, 혹 누가 볼까 두려워 흙으로 돌을 덮었다.
율수를 떠난 오자서는 다시 3백여 리를 가서 오추(吳趨)라는 곳에 당도하였다. 오자서는 그곳에서 한 장사(壯士)를 보았는데, 이마가 튀어나오고 눈이 움푹 들어갔는데 그 형상이 마치 굶주린 호랑이 같고 목소리는 마치 우레 같았다. 그는 한 거한(巨漢)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그치지 않았다. 그때, 어느 집 대문 안에서 한 여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제(專諸)야! 그만두어라!”
그러자 그 장사는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즉시 손을 거두고 집으로 들어갔다. 오자서는 이상히 여겨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저런 장사가 어째서 여인을 두려워합니까?”
“저 사람은 우리 마을의 용사로서, 그 힘은 만 명을 당할 수 있으며 어떤 강한 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義를 존중하여 부정한 일을 보면 즉시 나아가 사력을 다합니다. 조금 전에 문 안에서 부른 사람은 그의 어머니입니다. ‘전제’란 바로 그의 이름이지요.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말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크게 노하였다가도 어머니의 말을 들으면 당장 그만둔답니다.”
오자서는 찬탄하였다.
“그야말로 진짜 열사(烈士)로다!”
다음 날, 오자서는 옷을 차려입고 전제를 방문하였다. 전제는 오자서를 영접하고서 찾아온 연유를 물었다. 오자서가 자신의 일을 소상히 얘기하자, 전제가 말했다.
“공께서 그런 큰 원한이 있으시다면, 왜 吳王을 찾아가서 군사를 빌려 원수를 갚지 않으십니까?”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찾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처럼 누추한 곳을 찾아주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대의 효성을 존경하여 교제를 맺고자 합니다.”
전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어머니에게 고하였다. 두 사람은 팔배(八拜)를 나눈 뒤 의형제를 맺었다. 오자서가 전제보다 두 살 위였기 때문에 형이 되었다. 오자서는 전제의 어머니를 뵙고, 또 전제의 처자(妻子)와 인사를 나누었다. 전제는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오자서를 환대했는데, 마치 골육을 대하듯 하였다.
전제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 날 아침, 오자서가 전제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아우와 작별하고 도성으로 가서, 기회를 포착하여 吳王에게 벼슬을 구하겠네.”
전제가 말했다.
“吳王은 용맹을 좋아하나 교만하므로, 차라리 공자 광(光)을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는 현사(賢士)를 가까이 하는 사람이니, 장차 뜻하신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제142회에, 吳王 이매(夷昧)가 죽고 그 아들 주우(州于)가 즉위하여 이름을 요(僚)라고 고쳤다. 공자 광은 제번(諸樊)의 아들인데, 용병을 잘하여 왕료가 장수로 삼았다고 하였다.]
“아우의 말을 명심하겠네. 훗날 아우의 도움이 필요할 때 물리치지 않기를 바라네.”
전제는 응낙하였다.
오자서는 공자 승과 함께 吳나라의 도읍인 매리성(梅里城)에 당도하였다. 성곽은 낮고 좁았으며 시내는 지저분하였다. 오고가는 배와 수레들이 많아 소란했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자서는 공자 승을 교외에 숨겨 두고, 자신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치광이 행세를 했다. 맨발에다 반죽(斑竹)으로 만든 퉁소를 불면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걸식했다.
[‘반죽(斑竹)’은 표피에 반점이 있는 대나무이다.]
오자서가 부르는 노래의 제1절은 다음과 같았다.
伍子胥 伍子胥 오자서여! 오자서여!
跋涉宋鄭身無依 宋·鄭을 지나 왔건만 이 한 몸 의지할 곳이 없구나.
千辛萬苦淒復悲 천신만고 겪었건만 처량하고 슬프기만 하구나
父仇不報 何以生為 아버지 원수도 갚지 못하고 살아서 무엇 하리.
제2절은 다음과 같았다.
伍子胥 伍子胥 오자서여! 오자서여!
昭關一度變鬚眉 소관을 통과하느라 수염과 눈썹이 변했구나.
千驚萬恐淒復悲 천경만공 겪었건만 처량하고 슬프기만 하구나.
兄仇不報 何以生為 형 원수 갚지도 못하고 살아서 무엇 하리.
[‘천경만공(千驚萬恐)’은 갖가지 놀랍고 두려운 일을 말한다.]
제3절은 다음과 같았다.
伍子胥 伍子胥 오자서여! 오자서여!
蘆花渡口溧陽溪 갈대밭에 숨어 강을 건너고 율양의 시냇가를 지났도다.
千生萬死及吳陲 천생만사(千生萬死) 겪고서 오나라에 왔건만
吹簫乞食淒復悲 퉁소 불며 걸식하니 처량하고 슬프기만 하구나.
身仇不報 何以生為 내 원수 갚지 못하고 살아서 무엇 하리.
[‘천생만사(千生萬死)’는 갖가지 생사의 일을 말한다.]
하지만 거리의 사람들은 아무도 오자서의 노래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때는 주경왕(周景王) 25년, 吳王 요(僚) 7년이었다.
한편, 吳나라 공자 광은 吳王 제번(諸樊)의 아들이었다. 제번이 훙거하였을 때 응당 광이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부왕인 수몽(壽夢)의 유명(遺命)에 따라 막내 계찰(季札)에게 왕위가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래서 여제(餘祭)와 이매(夷昧)가 차례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매가 훙거한 후 계찰은 왕위에 오르기를 극구 사양하였다. 그렇다면 제번의 아들인 광이 즉위해야 하는데, 이매의 아들 요가 왕위를 탐내어 사양하지 않고 즉위하였다.
공자 광은 심중으로 불복하고 요를 죽일 뜻을 품고 있었으나, 신하들이 모두 요의 편인데다 함께 모의할 동지가 없어 마음속에 묻어 두고만 있었다. 공자 광은 관상을 잘 보는 피리(被離)라는 사람을 시장 관리로 삼아, 호걸을 찾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부탁해 두었다.
어느 날, 오자서가 퉁소를 불며 길거리를 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피리가 그 애절한 가락을 듣게 되었다. 피리는 다시 한 번 귀 기울여 들어보고는 그 뜻을 알아차렸다. 피리는 밖으로 나가서 오자서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내 지금껏 많은 사람의 상(相)을 보아 왔지만, 이런 사람은 아직껏 보지 못했다!”
피리는 오자서에게 읍을 하고, 안으로 안내하여 상좌에 앉기를 권했다. 오자서가 겸양하여 앉지 않으려 하자, 피리가 말했다.
“제가 듣건대, 楚나라에서 충신 오사(伍奢)를 죽여 그 아들 오자서가 타국으로 망명했다던데, 그대가 혹시 오자서가 아닙니까?”
오자서가 주저하며 대답하지 않자, 피리가 다시 말했다.
“나는 그대를 해칠 사람이 아닙니다. 그대의 용모가 비상하여, 그대를 위해 부귀와 지위를 구해 주려는 것입니다.”
오자서는 사실대로 얘기했다. 그때 피리의 하인 하나가 이를 엿듣고, 吳王 요에게 보고하였다. 요는 피리에게 오자서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였다. 피리는 사람을 공자 광에게 보내 알리는 한편, 오자서를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혀서 함께 조정으로 가서 왕료(王僚)를 알현하였다. 왕료는 오자서의 늠름한 풍채와 현명함에 탄복하여 그 자리에서 대부 벼슬을 내렸다.
다음 날, 오자서가 입조하여 왕료에게 사은하고, 아버지와 형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였는데 교아절치(咬牙切齒)하고 목중화출(目中火出)하였다. 왕료는 그의 기상을 장하게 여겨 군사를 일으켜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허락하였다.
[‘교아절치(咬牙切齒)’는 이빨을 부드득 간다는 뜻이고, ‘목중화출(目中火出)’은 눈에서 불꽃이 튄다는 뜻이다.]
공자 광은 평소에 오자서가 지혜와 용기가 있다는 것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혹 왕료가 그를 중용할까 염려하여 궁으로 가서 왕료에게 말했다.
“楚나라의 망명객 오자서가 우리나라에 왔다던데, 왕께서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료가 말했다.
“현명하고 효성스런 사람입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는 용력과 기상이 비범한 사람입니다. 과인과 국사를 논하는데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으니 그것은 현명함이요, 부형의 원한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어 과인에게 군사를 청하였으니 그것은 효입니다.”
“왕께서는 원수를 갚아주겠노라고 허락하셨습니까?”
“과인은 그의 사정을 가련히 여겨 허락했습니다.”
“만승(萬乘)의 왕으로서 필부를 위하여 군대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 吳나라는 지금까지 楚나라와 오랫동안 싸워 왔지만, 아직 크게 이긴 적이 없습니다. 만약 오자서를 위하여 군대를 일으킨다면, 이는 필부의 원한이 나라의 치욕보다 더 중요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긴다 하더라도 그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에 불과하고, 만약 진다면 우리의 치욕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왕료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楚나라를 공격하는 일을 취소하였다.
오자서는 공자 광이 왕료에게 간했다는 것을 듣고 생각했다.
“공자 광은 뭔가 마음속에 품은 다른 뜻이 있구나! 다만 아직 발설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오자서는 대부 벼슬을 사퇴하였다.
공자 광이 다시 왕료에게 말했다.
“오자서는 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니까 벼슬을 사퇴했습니다. 그는 원망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다시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왕료는 오자서의 사퇴를 수리하기는 했지만, 양산(陽山)의 밭 백 무(畝)를 하사하였다. 오자서는 공자 승과 함께 양산에서 밭을 갈며 살았다.
어느 날, 공자 광이 많은 곡식과 비단 등을 가지고 은밀히 오자서를 찾아와 물었다.
“그대는 吳나라와 楚나라의 경계를 드나들면서 재능과 용맹을 지닌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까? 바로 그대와 같은 인물 말입니다.”
오자서가 말했다.
“제가 본 바로는 전제라는 사람이 참된 용사입니다.”
“전선생과 교제할 수 있겠습니까?”
“전제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으니, 지금 부르면 내일 아침에는 올 겁니다.”
“그는 재능과 용기를 지닌 인재인데, 내가 마땅히 찾아가야지, 어찌 감히 부를 수 있겠습니까?”
공자 광은 오자서와 함께 수레를 타고 전제의 집으로 갔다.
그때 전제는 누가 돼지를 잡아 달라고 부탁해서 길모퉁이에서 칼을 갈고 있다가, 수레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몸을 피하려고 하였다. 오자서가 수레 위에서 전제를 부르며 말했다.
“형이 왔네.”
전제는 황급히 칼을 거두고 오자서가 수레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오자서가 공자 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오나라의 장공자(長公子)이시네. 아우가 영웅임을 사모하여 이렇게 아우를 만나러 왔으니 사양하지 말게.”
전제가 말했다.
“저는 시골의 보잘 것 없는 백성인데,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귀인을 번거롭게 해드려 송구스럽습니다.”
전제는 공자 광을 집안으로 인도하였다. 전제의 집은 사립문이 달린 작은 초가였기 때문에, 공자 광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만 했다. 광이 먼저 절하면서 평소에 사모해 온 뜻을 말하자, 전제도 답례하였다. 광은 황금과 비단을 예물로 내놓았다. 전제는 극력 사양하였으나, 옆에서 오자서가 권하여 마침내 받았다.
이리하여 전제는 광의 문하에 들게 되었다. 광은 매일 곡식과 고기를 보내 주고 매달 비단을 보내 주었다. 또 때때로 찾아와 전제의 모친에게 안부를 드렸다. 전제는 감격하였다.
어느 날, 전제가 광에게 말했다.
“저는 시골의 보잘 것 없는 백성으로서, 공자의 은덕을 입고도 보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명하실 일이 있으면 따르겠습니다.”
공자 광이 좌우를 물리치고서 왕료를 죽일 뜻을 얘기하자, 전제가 말했다.
“선왕 이매가 죽고 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공자께서는 어떤 명분으로 그를 해치고자 하십니까?”
“조부께서 유명을 내리시기를, 아우에게 왕위를 차례로 전하라 하였는데, 숙부 계찰이 사양하였소. 그러면 의당히 적장자인 내가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데, 요가 왕이 되었단 말이오. 내가 대사를 도모하기에는 힘이 부족하여, 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빌리고자 하는 것이오.”
“왜 근신(近臣)을 시켜서, 왕에게 선왕의 유명을 말씀드려 퇴위하도록 종용하지 않습니까? 하필이면 검사(劍士)를 길러 선왕의 덕을 손상시키려 하십니까?”
“요는 탐욕한데다 자신의 힘만 믿고 있기 때문에, 나아갈 줄만 알았지 물러설 줄을 모르오. 내가 만약 그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할 거요. 광과 요는 양립할 수 없소.”
전제가 분연히 말했다.
“공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노모가 계시기 때문에, 목숨을 바칠 수가 없습니다.”
“그대의 어머니는 연로하시고 자식은 아직 어리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대가 아니고서는 일을 함께 도모할 사람이 없소. 그 일을 성취하기만 하면, 그대의 자식과 어머니를 곧 나의 자식과 어머니로 생각하고, 내가 진심으로 양육하고 봉양하겠소. 내 어찌 그대를 저버리겠소?”
전제가 한참 동안 생각한 다음 말했다.
“무릇 모든 일은 가벼이 움직이면 성공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반드시 만전(萬全)을 기해야 합니다. 천 길 깊은 연못의 물고기가 어부의 손에 잡히는 까닭은 향기로운 미끼가 있기 때문입니다. 왕을 죽이려면 반드시 왕이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던져야 합니다. 공자께서는 왕과 가까우시니, 왕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겠지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선구이를 가장 좋아하오.”
“그러면 잠시 공자 곁을 떠나야겠습니다.”
“장사는 어디로 가려 하오?”
“맛있는 음식을 잘 만드는 법을 배우러 가겠습니다. 그래야만 吳王에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전제는 태호(太湖)로 가서 생선 굽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3개월이 지나자 그가 구운 생선은 맛이 기가 막혔다. 전제는 광에게로 돌아왔다. 광은 그를 자신의 부중에 숨겨 두었다.
염옹(髯翁)이 시를 읊었다.
剛直人推伍子胥 사람들은 오자서를 강직하다고 말하지만
也因獻媚進專諸 그도 공자 광에게 전제를 바쳐 아첨했다네.
欲知弒械從何起 왕료를 시해할 음모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던가.
三月湖邊學炙魚 호숫가에서 석 달 동안 생선 굽는 법을 배울 때부터였네.
공자 광이 오자서를 불러 말했다.
“전제가 이미 생선 굽는 법을 다 익혔소. 이제 어떻게 왕료에게 접근할 수 있겠소?”
“기러기를 붙잡을 수 없는 까닭은 날개가 있기 때문이니, 기러기를 잡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날개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왕료의 아들 경기(慶忌)는 근육과 뼈대가 마치 강철 같은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용사로서, 나는 새도 잡고 맹수도 따라잡는다고 합니다. 왕료는 항상 경기를 데리고 다니므로 손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거기다가 왕료의 외사촌인 엄여(掩餘)와 촉용(燭庸)은 병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용을 사로잡고 범을 때려잡을 용맹이 있으며, 귀신도 예측 못할 지략이 있다 하더라도, 일을 성공하기는 어렵습니다. 공자께서 왕료를 죽이시려면 반드시 이 세 사람부터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혹 요행히 일을 성공한다 하더라도 편히 왕위에 앉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공자 광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소. 우선 그대는 돌아가 계시오. 좀 더 기회를 기다렸다가 다시 상의합시다.”
오자서는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해에, 주경왕(周景王)이 붕어하였다. 경왕에게는 적자(嫡子)가 둘 있었는데, 장자는 태자 맹(猛)이고, 차자는 개(匄)였다. 그리고 두 적자보다 나이가 많은 서자(庶子) 조(朝)가 있었다. 경왕은 조를 총애하여 대부 빈맹(賓孟)에게 부탁하여 태자를 바꾸려고 했는데, 실행하지 못하고 붕어하였다.
유헌공(劉獻公) 지(摯)도 세상을 떠나고, 아들 유권(劉卷)이 부친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유권의 字는 백분(伯蚡)인데, 평소 빈맹과 틈이 있었다. 유권은 선목공(單穆公) 기(旗)와 함께 빈맹을 죽이고 태자 맹을 옹립하였는데, 그가 주도왕(周悼王)이다.
[제140회에, 진소공(晉昭公)이 위나라 평구(平邱)에서 회맹했을 때, 유현공이 참석했었다.]
윤문공(尹文公) 고(固), 감평공(甘平公) 추(鰌), 소장공(召莊公) 환(奐)은 평소 왕자 조(朝)를 섬겼기 때문에, 삼가(三家)가 병력을 합하여 상장(上將) 남궁극(南宮極)으로 하여금 유권을 공격하게 하였다. 유권은 양(揚) 땅으로 달아나고, 선기(單旗)는 도왕(悼王) 맹을 모시고 황(皇) 땅으로 달아났다. 왕자 조는 그의 도당인 심힐(鄩肹)로 하여금 황 땅을 공격하게 했는데, 심힐은 싸움에 패하여 죽었다.
진경공(晉頃公)은 주왕실에 대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대부 적담(籍談)과 순력(荀躒)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도왕을 왕성(王城)으로 모시게 하였다. 윤고(尹固) 역시 왕자 조를 경성(京城)에서 왕으로 옹립하였다.
얼마 후, 도왕 맹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선기와 유권은 그 아우 개(匄)를 옹립했는데, 그가 주경왕(周敬王)이다. 경왕은 적천(翟泉) 땅에 머물렀다. 周나라 사람들은 개(匄)를 동왕(東王), 조(朝)를 서왕(西王)이라 불렀다. 두 왕은 서로 싸웠는데, 6년이 지나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소장공 환이 세상을 떠나고 남궁극이 벼락에 맞아 죽자, 인심이 두려워 떨었다. 晉나라 대부 순력은 다시 제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경왕을 받들어 경성으로 쳐들어가, 윤고를 사로잡았다. 왕자 조의 군대는 궤멸하였다. 소환(召奐)의 아들 소은(召嚚)이 도리어 왕자 조를 공격하자, 왕자 조는 楚나라로 달아났다.
제후들은 마침내 경성에서 경왕을 周王에 복위시켰다. 경왕은 소은과 윤고를 저자에서 참형에 처하였다. 周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한편, 주경왕(周敬王) 즉위 원년이 吳王 요(僚) 재위 8년이었다. 그때 楚나라 세자 건(建)의 모친이 운(鄖)에 살고 있었는데, 비무극(費無極)은 오자서에게 내응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초평왕(楚平王)에 그녀를 죽이라고 권하였다. 건의 모친은 그 소식을 듣고, 몰래 사람을 吳나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제142회에, 초평왕은 세자 건을 성보(城父)로 보낸 후, 맹영(孟嬴)을 부인으로 삼고 건의 모친 채희(蔡姬)는 운(鄖) 땅으로 돌려보냈었다.]
吳王 요는 공자 광으로 하여금 운 땅으로 가서 건의 모친을 데려오게 하였다. 광이 종리(鐘離) 땅에 이르렀을 때, 楚나라 장수 원월(薳越)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가로막았다. 그리고 원월은 사람을 영도(郢都)로 보내 보고하였다.
초평왕은 영윤 양개(陽匄)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진(陳)·채(蔡)·호(胡)·심(沈)·허(許)·돈(頓) 6국의 군대를 징발하게 하였다. 호자(胡子) 곤(髡)과 심자(沈子) 영(逞) 두 군후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왔다. 陳나라는 대부 하설(夏齧)을 보냈고, 채·허·돈 3국도 역시 대부를 보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양개는 호·심·진 3국의 군대는 오른쪽에 영채를 세우게 하고, 돈·허·채 3국의 군대는 왼쪽에 영채를 세우게 하였으며, 원월의 대군은 가운데 주둔하게 하였다.
[제140회에, 초평왕이 즉위하고 진혜공(陳惠公)을 채나라에 봉했을 때 하설은 진혜공과 함께 陳나라로 돌아갔었다.]
공자 광 역시 사람을 吳王에게 보내 보고하였다. 왕료는 공자 엄여(掩餘)와 함께 대군 1만과 죄수 3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계보(雞父)에 하채하였다. 양군이 교전하기 전에, 楚나라 영윤 양개가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다. 원월이 양개를 대신하여 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공자 광이 왕료에게 말했다.
“楚軍은 대장을 잃어 군사들의 사기가 꺾였습니다. 제후들이 거느리고 온 군사는 숫자는 많지만, 모두 소국으로서 楚나라가 두려워 할 수 없이 온 자들입니다. 호나라와 심나라 군후는 나이가 어려 전쟁의 경험이 없고, 陳나라 하설은 용맹하나 무모합니다. 돈·허·채 3국은 오랫동안 楚나라의 괴롭힘을 받아 왔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불복하고 있어 힘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7국이 함께 참전하였으나 마음이 같지 않고, 楚나라 장수는 지위가 낮아 위엄이 서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군사를 나누어 호·심·진의 우영을 먼저 공격하면 필시 저들은 달아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열국의 군대가 혼란해지면, 楚軍은 필시 두려워 떨다가 패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약한 군사를 내보내 적을 유인한 다음, 정예병으로 배후를 공격하게 하면 됩니다.”
왕료는 그 계책에 따르기로 하고, 吳軍을 3진(陣)으로 나누었다. 왕료 자신은 중군을 거느리고, 공자 광은 좌측, 공자 엄여는 우측을 맡게 하였다.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진영을 굳게 지키면서 대기하게 하였다. 왕료는 먼저 죄수 3천 명으로 하여금 楚軍의 우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첫댓글 드디어 초와 오가 본격적으로 대결의 장으로
들어 서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