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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통찰과 진실 스크랩 (27) 동대문갑 선거구에서 맞짱 뜬 ‘反이승만’ 선봉 최능진
삼대 추천 0 조회 118 15.02.01 22:5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최능진은 일제 때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부터 이승만을 잘 알고 있었다. 

경찰에서 물러난 최능진은 정치 일선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김구·김규식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론’에 깊이 공감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에 반대하는 활동에 나선 일석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최고 원로인 서재필 박사를 민족 지도자로 옹립하려는 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정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은 서재필 박사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무산되고 만다.



많은 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5·10선거 일정이 확정됐다. 

이승만이 집권하면 통일의 길도 멀어지고 독재체제가 굳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선거일이 가까워오자 이승만의 정권 장악을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 이승만에 맞서 출마하기로 했다. 



한편 이승만 세력은 선거구인 동대문 갑구에 무투표 당선을 내심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이 무투표 당선을 노리던 동대문갑구에 입후보하기로 한 것이다. 

이승만을 떨어뜨려야 친일세력 중심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민족세력이 중심이 된 정부를 세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북청년회와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지휘를 받는 경찰의 방해로 후보 추천서를 날치기당하는 등 후보 등록과정부터 시련을 겪었지만 최능진은 극적으로 후보 등록을 했다. 


최능진은 선거가 시작되자 최능진은 독립운동 경력, 친일경찰 처벌을 주장했던 사실 등이 부각되며 높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지지도는 이승만을 상회하거나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동대문경찰서에서 작성한 ‘유권자 지지 성향 조사 결과 정보보고서’를 보면 민심이 이승만보다 최능진에게 기울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이승만의 ‘정적(政敵)’으로 부각됐다.



그러자 동대문경찰서장 윤기병은 경찰을 동원하여 본인이 스스로 날인하지 않았다는 추천인들의 진술을 받아 선거관리위원장 노진설 대법관을 찾아가 등록을 무효화시킬것을 요청했고, 선거 2일전인 5월 8일 선거관리위원회는 추천인 200명 중 27명이 본인 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 취소를 통보했다.


만약 최능진이 당시 선거에 출마했다면 한국현대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 모른다. 아무튼 이 사건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최능진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승만과 대립각에 서 있던 최능진은 이승만 정권 출범 직후인 한 달 보름이 지난 1948년 10월 1일 새벽 수도경찰청 형사대가 최능진의 자택에서 그를 연행했다.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이었다. 

그에게 씌어진 혐의는 서세충(독립운동가), 오동기(광복군 출신으로 14연대장 역임) 등과 함께 국방경비대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해 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를 사주해 이승만 정부를 전복한다는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악질적인 관동군 헌병 출신인 김창룡 특무대장이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설상가상으로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이 사건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까지 보태졌다. 이 사건은 나중에 김창룡 육군특무대장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최능진 5년형을 선고받았다.


6·25가 터지고 서울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면서 서대문형무소 옥문이 열렸다. 

감옥을 나온 최능진은 피난을 가지 못한 민족주의 인사들과 함께 정전·평화운동을 벌였다. 김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서울시임시인민위원장이던 이승엽에게 즉각적인 전쟁 중지와 ‘유엔감시하의 평화통일’을 김일성에게 제안했다. 

반공주의자였지만 동족 간 전쟁은 막자는 취지였다.


당시 선거에 대한 아들의 증언이다.

▼ 부친이 이승만에 맞서 동대문갑구에 출마했을 때 회유도 많았을 텐데.


“당시 이승만 측이 문봉재(서북청년단장)를 통해 아버지를 많이 회유했어. 권총 찬 문봉재가 몇 번이나 집에 찾아와 외무장관 시켜준다, 주미대사 시켜준다고 했지만 다 거절하셨지.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걸으신 거야.”


▼ 이승만 집권 후 정치탄압을 예상했을 텐데.


“미군정에서는 아버지에게 ‘화를 당할 우려가 있으니 미국으로 가라’고 했어. 우리도 계속 권유했지. 그때 여러 명이 미국으로 피했어. 하지만 아버지는 국민과 동지들을 두고 혼자만 피할 수 없다고 거절하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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