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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齋府君의 墓所와 竹林堂
죽림당은 吾(오) 선조 익재부군이 거주하시던 곳으로, 그 유허지가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개성)의 숭양서원과 나란히 있으나 그 앞을 지나가면서도 모르는 종친들이 있다.
남북협정으로 개성관광의 길이 열려 있으니 죽림당을 꼭 살펴보고 돌아오시기 바라며 묘소는 휴전선부근이라 가 볼 수는 없지만 근처이니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一. 高麗와 開城
王建(왕건)은 918년에 泰封(태봉) 왕인 弓裔(궁예)를 추방하고 연호를 天授(천수)라 하여 건국하여 太祖(태조)가 되니 34대 恭讓王(공양왕)까지 475년간 개성은 정치, 경제, 문화중심지로 존속하였는데, 고구려 때 扶蘇岬(부소갑), 신라 때 松嶽(송악)인 이곳을 開州(개주), 開京(개경), 개성부라 불리다가 조선에 멸국되어 太祖(태조)가 漢陽(한양)으로 천도하여 유후사, 유수, 부윤, 군수를 두다 松都面(송도면)에서 개성부로 환원되고, 근대 개성시로 개풍군, 장풍군, 판문군을 포함하여 직할시가 되었고, 현재는 공업지구로 1시 3군으로 되어 있다.
馬息嶺山脈(마식령산맥)의 끝으로 天摩山(천마산), 松嶽山(송악산), 龍岫山(용수산), 進鳳山(진봉산)의 분지를 이루고, 漢江(한강)과 禮成江(예성강), 臨津江(임진강)의 지루인 砂川(사천)이 시내를 흐른다.
문화유적과 관광지로 남대문, 연복사 종, 만월대, 첨성대, 선죽교, 숭양서원, 고려성균관, 顯陵(현릉-高麗太祖), 恭愍王陵(공민왕릉), 齊陵(제릉), 厚陵(후릉-조선 定宗과 定安王后金氏), 두문동, 채하동, 박연폭포 등이 있다.
一. 文忠公의 表忠
1) 鄭夢周
호는 圃隱(포은), 감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 도평의사사 병조상서시판사 경영전영사 우문관대제학으로 익양군, 충의백에 봉작되었으며 성리학과 시문에 능통하였고, 義倉(의창)과 新律(신율)로 백성복리와 국운회복을 강구하다 李芳遠(이방원)의 부하인 趙英珪(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격살되었으며, 시호는 文忠(문충)이며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文廟(문묘)에 배향되고 숭양서원 등에 제향 되었고 포은집이 있다.
2) 善竹橋와 表忠碑
善地橋(선지교)를 피살되던 날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 개칭하였다 하며, 고려 태조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난간은 조선정조 때 후손들이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하며, 북한 국보급문화재 제36호에서 국보문화유물 제159호로 변경되었으며, 다리 옆에는 표충비 2기가 있는데 북한의 국보문화유물 제138호로 조선의 英祖(영조)와 高宗(고종)이 어필로 충의와 절개를 찬양하고 있으며 마당에는 수령 3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해동악부에 전하는 단심가를 살펴보면 충심이 묻어난다.
此身死了死了(차신사료사료) 一百番更死了(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백골위진토) 魂魄有也無(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향주일편단심) 寧有改理與之(영유개리여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3) 崇陽書院
숭양서원은 자남산 아래에 있는데 宣祖(선조-1573년) 때 개성유수 南應雲(남응운-菊窓,공조참판)이 선생의 충절과 徐敬德(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선생의 집터에 서원을 세우고 文忠堂(문충당)이라 하였으며, 1575년에 숭양이라 사액되었고, 1668년 이후 金尙鉉(김상현-經臺,이조판서,文獻), 金堉(김육-潛谷,영의정), 趙翼(조익-浦渚,좌의정,文簡), 禹玄寶(우현보-忠靖,좌시중,단산부원군)를 추배하였으며, 북한의 사적 제51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8호로 변경되었다.
서경덕선생은 송도삼절(황진이,박연폭포)로 호는 花潭(화담)과 復齋(복재), 시호는 文康(문강)으로 해동이적과 화담집이 있다.
一. 益齋 齊賢
선생의 휘는 제현, 자는 仲思(중사), 호는 익재와 櫟翁(역옹), 초명은 之公(지공), 문하시중으로 鷄林府院君(계림부원군)으로 봉작, 諡號(시호)는 文忠(문충)으로 16세인 검교정승 東菴瑱(동암진)의 아들로 15세에 등과하여 덕망으로 忠諫濟民(충간제민)한 재상이며 대정치인이고, 시문에 능통한 대학자로 筆鋒鎭撫(필봉진무)한 대외교관으로 공민왕 묘정과 원사당에 배향하여 숭모하고 있으며 影幀(영정)은 국보 제 110호로 지정되었고 익재난고, 역옹패설 등이 있다.
중조로 17세이며 대종조로 이암 가락군을 백씨로, 대호군을 아우로 두고, 슬하에 3형제를 두었으며, 중흥조로 추앙되고 있다.
익재공의 가계를 살펴보면
♠시조 謁平(알평)--중시조 居明(거명)--14세 得堅(득견)--------------15세 翮(핵) 열헌
표암 1세 소판 동정 -翩--直幹(장수)
-강(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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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世基(세기)송암 瑱(진)동암 仁挺(인정)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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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蓨(수) 簻(과) 邁(매) 蒨(천) 之正(지정) 齊賢(제현) 琯(관) 樛(규) 榑(부)
사인 상서 부정 국당 호군 익재 이암 헌납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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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彰路(창로)밀직 達尊(달존)운와 瑞種(서종)부령
1) 墓所
세보에서 牛峰桃李村(우봉도이촌)이라 밝혔으니 장단군 소남면 지금리인데, 현재 장풍군 십탄리로 敬順王陵(경순왕릉)이 있는 고랑포리 북쪽이며 임진강의 지천인 사미천이 흐르는 곳이라 한다.
동암공의 묘갈문에서 묘소는 실전하였다가 경술(1910년)에 도적이 굴총하여 文良趙簡(문량조간-悅軒,찬성사)이 찬한 지석이 발견되어 鍾弼(종필), 鍾震(종진), 鍾翊(종우), 鍾億(종억), 鍾璇(종선), 相慶(상경), 相益(상익)과 함께하여 휘와 호, 선대와 배위를 알게 되어 세보에 등재하였으나 외조의 휘와 초배 성씨는 망가져 알 수가 없었고 묘소를 개수하니 3월 22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묘산도는 道天서원(경산)에서 발간한 별지로 왼쪽능선에 익재공과 상부 미상 2기, 중앙에 동암공과 밀직공의 묘소이고, 우측이 인천공 부자의 묘소로 그 가계는 익재공파로 운와공, 德林(덕림) 군수공, 伸(신) 안무사공, 繼蕃(계번) 락안공, 尹仁(윤인) 감사공, 公麟(공린) 창평공, 鼉(타) 생원공, 渤(발) 좌승지공, 憬胤(경윤) 이조판서공, 大健(대건) 오촌공, 時發(시발) 벽오공, 慶徽(경휘) 춘전공, 寅烒(인식) 처사공의 장자인 成坤(성곤)이 인천지사로 宗城(종성)이 묘지를 찬하였는데 아들 錫祉(석지)와 상하분이고, 그 옆이 道川(도천)서원이고 교리공은 알 수가 없다.
인식처사공도 익재공의 외록 건좌이며 비갈이 있다하였고, 차자 元坤(원곤) 현감공도 익재공 남록자좌라 하였고 아들 錫宗(석종)도 신좌에 있다 하였으며, 석지처사공의 아들 百源(백원)도 익재공 안산 자좌라 하였고, 송암공과 아들 부정공과 상서공도 우봉촌이라 하였으며, 기타 선조들도 이곳으로 기록됨이 많고 덕봉집 묘산도에서 6기의
미상묘소가 표시되어 있고 재사 아래엔 진천종인들의 세를 이은 묘소 10여기가 있다, 라는 齋舍其下麓鎭川宗人繼葬者十餘墳(재사기하록진천종인계장자십여분)것으로 보아 당시 세장지인 듯하다.
묘소가 이북이라 참배나 시향하지 못함으로 1986년 익재공파 대종회에서 용인외사에 설단하여 숭모하고 있다.
종성의 호는 梧川(오천), 시호는 文忠(문충)이며 영의정으로 莊祖(장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오천집이 있으며 白沙恒福(백사항복)의 6세로 鵝谷台佐(아곡태좌) 충정공의 아들이며, 송암은 세기의 호이고 시호는 文僖(문희)로 검교정승이며, 슬하에 국당, 부정, 상서, 사인을 두었다.
2) 遺墟碑(短碣)
덕봉집에 선조 익재선생묘산도를 알게(識-식)한다는 것으로 황해 우봉 도이촌은 지금 금천 知古味理(지고미리)이다. 라고 기록한 후, 千里外昩孫限無拜審之路(천리외말손한무배심지로)歲丁未鎭宅以齊陵令(세정미진택이제릉령)乃於十月十三日(내어10월13일)始克展省墓前有碑刻(시극전성묘전유비각)高麗門下侍中鷄林府院君益齋先生李齊賢之墓(고려문하시중계림부원군익재선생이제현지묘)라 하였으니 즉, 후손 진택이 정미(1787년)에 齊陵令(제릉령)으로 와서 10월 13일 종친들과 더불어 성묘하고 묘갈을 세우고, 1798년에 지주사를 따라와서 유허비를 남기고 아픈 가슴을 이기지 못하여 시를 읊고 머무르며 묘역을 개수하고 성배한 감격으로 돌아오면서 시를 읊었다는 것으로, 益齋先祖遺墟碑在滿月洞世稱文忠洞(익재선조유허비재만월동세칭문충동)無片石記功者殆四百有餘年(무편석기공자태사백유여년)以是慨恨歲戊午不肖孫適知州事謀立短碣(이시개한세무오불초손적지주사모립단갈)不勝感愴遂吟一絶(불승감창수음일절)以寓羹墻之慕云爾省拜(이우갱장지모운이성배)先祖益齋先生墓有感回路又吟一絶(선조익재선생묘유감회로우음일절).
제릉은 조선태조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의 릉으로 개풍에 있으며, 령은 종5품의 능직으로 종7품의 직장과 종9품의 참봉을 거느린다.
3) 碑碣과 神道碑
익재공 묘소 앞에 비석을 세웠다는 墓前有碑刻(묘전유비각)과 청룡 쪽에 밀직의 묘소와 비갈이 있다는 靑龍有碣乃先生三子密直使上護軍諱彰路之墓(청룡유갈내선생삼자밀직사상호군휘창로지묘)와 외백호엔 재사가 있고 묘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外白虎內有齋舍墓直韓贊徵(외백호내유재사묘직한찬징)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 실존하였음이 입증되고 있다,
송암공추모비명에서 밀직의 묘위에 큰 무덤 둘이 있으며 하나는 송암공의 묘소임이 자명하여 덕봉공이 수갈한 70년이 지난 1868년에 후손 裕元(유원)이 굴험하였으나 확인 못하였다 하였는데, 42년 후인 1910년에 우연히 동암공 묘소를 확인,개수하였고 1921년에 후손 鍾瀅(종형)이 짓고 鄭寅杓(정인표-學山,비서승)선생이 쓴 묘갈을 세웠고, 익재공의 신도비는 李穡(이색-牧隱,한산군)선생이 찬한 묘지명을 1924년에 후손 鍾弼(종필)이 찬하고 식문은 후손 鍾瀅(종형)이 써 세웠다 하였다 하였는데, 묘산도에선 중앙능선엔 2기뿐이나 귤산집과 덕봉집엔 3기로 되어 동일한 입장을 보이며, 덕봉공도 익재공과 밀직공 사이 능선을 굴험하였다는 것으로 局內側東邊支麓有二陳墳亦吾家先塋故掘驗以無表誌石(국내측동변지록유이진분역오가선영고굴험이무표지석)으로 1726년(부친)과 1719년(아들)에 졸한 인천지사 부자의 묘역인 듯 하나 당시에도 오천공이 찬한 지석이 보이지 않았으며, 귤산공의 굴험에도 아무런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가 후일 발견되었으니 행운이라 아니할 수가 없겠으나 자세한 내용은 통일이 되고 나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墓誌(묘지)는 돌(石)이나 陶板(도판)에 글을 새겨서 무덤 옆에 파묻는 것으로 壙誌(광지)라고도 하며, 墓碣(묘갈)은 무덤 앞에 세우는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로 5품관 이하에서 주로 세웠으며, 墓碑(묘지)는 상석 우측에 세우는 비로 籠臺(농대) 또는 盤石(반석) 위에 碑身(비신)을, 그 위에 加檐石(가첨석)을 얹었으며, 神道碑(신도비)는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종2품 이상만 허용하였으며, 묘비와 더불어 특별한 경우에는 龜趺(귀부) 위에 비신을 얹고 螭首(이수)를 얹는 것도 있으며, 모두 묻힌 사람의 성명, 사적, 직계존비속의 성명 등과 銘文(명문)을 새긴다.
유원은 호가 橘山(귤산), 시호는 文忠(문충), 영의정으로 가오고략, 임하필기, 금석록 등이 있고 恒福(항복) 백사공의 10세손이며 啓朝(계조) 동천공의 아들이며, 종형은 참판공으로 생원공 鼉(타)의 후손이며 圭哲(규철)의 아들로 진천초평의 종가이며, 종필의 호는 紀堂(기당), 공조참의, 궁내부특진관으로 생원공 鼉(타)의 후손으로 군수공 集星(집성)의 증손이며 도정 圭昌(규창)의 아들이다.
一. 竹林堂
익재공의 생졸년은 1287년과 1367년이고, 포은선생은 1337년과 1392년으로 50년의 연차가 난다.
포은선생은 1360년 문과에 장원하여 검열 등을 거쳐 1364년 판관이 되나 익재공은 71세인 1357년 문하시중을 사퇴한 시기임으로 조정에서 함께하지는 못한 것 같으나, 문집이나 사적 편에서 포은선생 댁과는 이웃하였다 하였는데 묘산도에도 나란히
보이는데, 울산청년회 석우종친이 사진으로 증명하였으며, 북한 보존유적 제1541호로 북한에서 빨강색으로 리제현유허비라 표시한 비석과 오랜 세월 풍우에 시달린 유지비가 대조적이다.
1) 遺墟碑銘
전면에 高麗侍中益齋李先生遺址(고려시중익재이선생유지)라 써고, 뒷면에 先生(선생)諱齊賢(휘제현)字中思(자중사)仕高麗歷事五朝(사고려역사오조)官至門下侍中(관지문하시중)鷄林府院君(계림부원군)諡文忠公(시문충공)嗚呼(오호)先生德業文章煊炳一世(선생덕업문장훤병일세)而八年攝國(이섭국팔년)上下賴安昭載國乘播(상하뢰안소재국승파)人耳目宜其百世之下人之不能忘也(인이목의기백세지하인지불능망야)遺址在松京子男山東(유지재송경자남산동)世所稱竹林堂舊基是也(세소칭죽림당구기시야)迄今四百餘年(흘금사백여년)村人野老猶爲指點況在後昆安得無桑梓之感乎(촌인야노유위지점황재후곤안득무상재지감호)不肖適尹玆土謹竪石以標之府南水鐵洞(불초적윤자토근수석이표지부남수철동)又有遺址見於地誌(우유유지견어지지)而今無以的知其處玆庸附識于此云(이금무이적지기처자용부식우차운)崇禎紀元後三戊午六月 日(숭정기원후삼무오육월 일)行經歷鎭宅謹記(행경력진택근기)後學生員淸州韓宗樂謹書(후학생원청주한종락근서).
숭정기원 후 세 번째 무오라 하였으니 숭정은 명나라 毅宗(예종)의 연호로 조선에선 仁祖(인조) 7년으로 1629년이며 첫 번째 무오년은 1678년이 되니 세 번째는 1798년이 된다.
1797년 개성 경력으로 부임하여 다음해 6월 15일 생가인 이곳에 죽림당이란 유지비를 세웠다.
개성부는 종2품의 유수가 책임자이고 경력은 종4품으로 실제 사무를 관장하였으며, 한종락선생은 서화로 송도인물전에 오른 명필이다.
2) 德峰 鎭宅
휘는 진택, 자는 養重(양중), 덕봉은 호로 익재공의 15세손으로 之帶(지대) 판윤공, 夢星(몽성) 판관공의 7세손으로 聲翁 雲培(성옹 운배)를 부친으로 1738년 경주외동방어에서 출생하여 南厓李晉遠(남애이진원) 문하에서 수학하여 178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제릉령, 예조정랑, 사헌부장령, 개성경력 등을 역임하고 덕봉정사를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묘갈은 대사간 琴坡李鼎秉(금파이정병)이 찬하고 南鴻陽(남홍양)이 섰으며, 1899년 승정원 승지로 증직되고 증직묘지명을 李裕元(이유원)과 판윤 李裕寅(이유인)이 짓고, 증직 묘갈문은 李裕承(이유승)이 찬술하였고 정사는 경북지정문화재 제 313호이며 불국역에서 불국사로 올라가다 우측에 묘소와 이웃하여 있다.
사헌부는 백관을 감찰하여 기강과 풍속을 바르게 하고 범법행위를 단속하던 관청이고 장령은 종4품의 벼슬이고, 승정원은 왕의 비서업무를 맡아보는 관청이며 승지는 정3품 당상관의 벼슬이다.
덕봉선생의 가계와 후계는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제현--서종--원익--선---지회(소경) -몽용(통정)
익재 부령 대사성 판서 -지대--점--------석림(참군) -몽기(수문장)
-달존(직제학) 판윤 부사 -원림---광증-----승형--몽성--후근--지훈--
-창로(밀직) -묵(진사) 군수 찰방 병사 공참 훈도 통덕랑
-연(참봉) -형림(선락장군) -진형 -몽걸(주부)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진-----윤석--운배----상택(장자),시현(차자),홍택(3자),익동(4자)
부호군 -만석 성옹 -진택--복한--의발--우영--규일--종문--복우--상걸--원형
덕봉 통덕랑 도정 역하 하담 문초 소호당
(4형제)(3형제)
이유승의 호는 東梧(동오), 이조판서와 좌찬성에 이르렀고 오천공의 5세손으로 이판 啓善(계선)의 아들이며 아들로 省齋時榮(성재시영)을 두니 초대부통령이다.
덕봉선생은 종친을 위한 돈목사업으로 1791년 3월 7일 求忠堂(구충당) 행장을 찬술하고 그의 실적을 시로 칭송하였고, 1797년 2월23일 판윤공 묘소를 개수하였고, 1803년 6월에 龜岡(구강)서원에 서책을 기증하고 효경을 雲谷祠(운곡사)로 보내고, 8월 20일엔 구강서원 원장과 향례헌관으로 활동하였고, 1804년 11월에 시조께서 탄강한 표암에 敬一(경일)이 찬술하고 集斗(집두)가 쓴 유허비를 세우는데 일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충당은 義立(의립)의 호로 철광의 재발견과 제련법을 자득하여 북벌정책에 기여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存斯(존사) 교감공의 후손으로 觀瀾承曾(관란승증)의 6세손이며 동지중추부사인 榮富(영부)의 아들이고, 판윤공은 之帶(지대)로 호가 竹隱(죽은)이며 검교한성판윤으로 익재공의 현손이며 병조판서공 瑄(선)의 아들로 판윤공파조이며, 구강서원은 경주 양월에 소재하고 1686년 창건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데 영정은 경북문화재 제 90호, 건물은 제 188호, 문집판각은 제 23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운곡사는 청주 백운에 소재하여 국당공과 雪汀 忔(설정 흘)을 배향한 곳인지 확실치 않으며, 경일은 호가 聽軒(청헌), 좌의정과 봉조하로 오은군을 봉작, 시호는 孝定(효정)이며 백사공의 7세손으로 영의정 오풍군 宗岳(종악)의 계자로 청헌집이 있고, 집두는 호가 琶西(파서), 예조판서로 좌의정 경억의 6세손으로 증 좌찬성 進源(진원)의 아들이다.
덕봉선생이 1791년 正祖(정조)를 비롯하여 영의정 李福源(이복원-文靖), 좌의정 蔡濟恭(채제공-樊巖,文肅)이조판서 洪良浩(홍양호-耳溪,文憲)과 인왕산 세심대에 올라 暄(따뜻할 훤)과 園(동산 원)과 尊(높을 존)과 樽(술통 준)을 운자로 하여 賞花(상화)의 시를 짓는데
정조대왕이,
暇日芳草節(가일방초절) 心臺洗俗喧(심대세속훤)
兩山眞一戶(양산진일호) 千樹亦同園(천수역동원)
艶艶天光視(염염천광시) 登登地勢尊(등등지세존)
坐間多白髮(좌간다백발) 來歲又今樽(래세우금준)
따사로운 햇볕에 방초는 피어나고 속된 마음 씻으려 세심대에 왔네
남산과 북악은 원래가 한산이듯 우거진 숲 역시 정원과 하나였네
맑게 갠 하늘은 아름답게 비치고 높이 솟은 지세가 존귀 하구나
여기 사람들 백발이 성성하나 내년에도 여기서 이 술잔 마주하세.
사헌부 장령 덕봉공이,
星駕當春發(성가당춘발) 雲韶鎭日喧(운소진일훤)
八方開化域(팔방개화역) 千樹擁名園(천수옹명원)
地接南山逈(지법남산형) 天臨北極尊(천림북극존)
掬來臺下水(국래대하수) 添得洗心樽(첨득세심준)
성가는 봄에 이르렀고 하늘의 봄은 평화로이 지끌이니
온 세상은 봄으로 화하였고 명원에는 수목이 우거 졌네
남산은 먼 땅 끝에 붙어있고 북악의 봉우리는 하늘만큼 높은데
세심대 아래 맑은 물 길러다가 술잔에 가득 채워 이 마음 씻으리라.
참고문헌 : 경주이씨 세보, 인명대사전, 보학편람, 덕봉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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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은 안보이네요
사진은 글을 옮길때 복사를해서 옮긴 경우 이런 경우(엑스모양) 이 나타 납니다. 언본만 있으면 작업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