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3회 화산산악회 안내
일시 : 2005 년 1월 15일 셋째토요일 오후 1시
장소 : 안양 수리산역
등반예정 : 수리산 전철역 → 철쭉동산 → 군포
환경관리소 위 → 용진사 위 → 임간
교실 → 만남의 광장 → 슬기봉
<인문적 환경>
수리산은 군포시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 군포市의 진산이다. 수리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수리산 줄기 주변은 농토가 비옥하고 어디서나 맑은 샘물이 솟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안양시가 되었지만, 안양5동에 우물자리인 '찬 우물' 이 바로 그것이다. 옛적에 이 우물 근처에 가난한 농부 내외가 살고 있었습니다. 집 뒤 산등성이에 밭 몇 마지기와 논 몇 마지기에 거두는 곡식이 생계수단의 전부인 이 가난한 농부는 일년 내내 고생을 해도 살아가기가 고달프기만 했다. 이들은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도 시련을 겪게 되었다 여러 해를 두고 가뭄이 든 것이다. 폐농리 경에 이르러 끼니마저 이어갈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생각 다 못한 이들 부부는 남은 몇 알의 곡식을 털어 가지고, 음식을 마련 수리산 제일 놀은 봉우리에 올라가 산신령께 치성을 드렸던 것이다. 일신령이 이들 치성에 감동했던지, 오랜 피곤에 부부가 잠깐 조는 사이 꿈에 신령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대들 정성이 갸륵하여 물을 주겠노라. 지금 곧 내려가서 너희들 논.밭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우물을 파라. 그리하면 물이 나올 것 이니라" 깜짝 놀라 잠에서 깬 농부 내외는 그 길로 산을 내려와 밭으로가 제일 높은 곳을 찾았다. 밭 둔덕을 헤멘 끝에 제일 높은 곳을 찾아 꿈에서 들은 대로 파보니 맑은 물이 솟아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너무나 이쁘고 감사해서 수리산정을 바라보며, "산신령님 감사합니다"를 외치면서 꾸벅꾸벅 절을 하되 아픈줄도 모르고 수 없이 했다는 것이다. 이들 부부는 산신령이 생물을 주신 것은 적으나마 정성을 드렸고 또 평소 생활이 착하고 근검했던 것을 가상히 살피신 영험이 아니겠느냐며 우물을 잘 손질, 항상 보살피며 이용 농사의 어려움을 면하고 잘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무는 때라도 물이 마르지 않았고 여름철에는 물이 몹시 차 목이 마른 사람들에게 시원하게 목을 추겨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우물은 이용되고 있다. 수리산 지형이 호랑이가 누워있는 모양이고 이 찬 우물은 호랑이의 가슴부위에 해당, 그 샘이 사철 끊이지 않은데, 이는 호랑이의 젖줄이 끊이지 않음과 같다고들 말하고 있다.
자연적환경
수리산은 시흥군과 안양시 화성군을 가르는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조 후기 사람인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에서 수리산(수이로 쓰였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충주의 서쪽은 경기도의 죽실 여주와 경계한다. 죽산의 칠장산은 기호 경계에 우뚝 솟았고 서쪽으로 뻗치어 수유현 (지금의 용인 처인산성에서 크게 끊어져 평지가 된다. 그리고 또다시 일어나 용인의 부아신이 되고, 또 석성단 광고실을 일으킨다. 광교산 서북에서 관악이 되고 똑바로 서쪽에서 수리산이 되어 서해로 들어간다.」고 하여 이 산이 광주산맥의 맨끝에서 산자락을 흐트러뜨리고 있음을 잘 묘사하고 있다. 또 택리지는 「언천.부평.금퐁.통진을 지난 다음에는 산이 무너져서 된 석맥만이 강을 건너 다시 일어나 마니산이 되었는데.....」 높이 474m 밖에 안돼 비록 높지 않은 수리산 이기는 하지만 그둘레와 산줄기는 넓고 긴 것임을 알만하다. 따라서 이 산은 옛 안산군의 종산이기도 했다. 산 정산에서는 소래와 ..자의 염전지대와 멀리로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인천시와 수원의 7가지 까지도 조망이 된다. 옛 기록에는 또 수리산을 견불산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원당사와 정수암이라는 사찰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수리사라는 이름의 절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안양 박달동에서 남쪽으로 길게 종단하는 것과 군포시 산본동에서 서쪽으로 오르는 짧은 코스가 있으며, 시흥 수암면 장상리에서 오른는 길도 있다. 또 군포시 속달동에서 반원저수지를 끼고 오르는 길도 있으나 가장 많이 이용하기는 군포시 산본동에서 오르는 등산로가 6~7군데로 군포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로 사계절내 남녀노소 산악인으로 북적이고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져 잇다. <군 동쪽 1리 되는 곳에 있으며 일명 견불산이라 한다> 수리산의 산세는 서북쪽으로는 매봉재, 쓰레봉, 고깔봉, 수암봉(원취암), 문봉에 연하였고, 동북쪽으로는 관모봉, 태을봉, 거량봉, 명학봉, 노적봉에 이어졌다. 수리산은 군포시의 산본동, 부곡동,당동, 당정동, 금정동과 안산시 부곡동, 안산시 성포동, 장상리, 수암리, 조남 1리, 목감리, 안양시 안양1~8동, 안양시 박달동, 안양시 호계동에 이르는 여러 지역이다.
<수리산의 유래>
수리산은 안산시 부곡동과 군포시 산본동 및 안산시 반월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해발 474m이다. 수리산에 명칭 유래는 빼어난 산봉의 바위가 마치 독수리와 같아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이 잇고, 또 신라 진흥왕 때 창건한 절이 신심을 닦는 성지라 하여 수리사라 하였는데, 그 후 산명을 수리산이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조선조 때 어느 왕손이 수도하였다 하여 수이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수리사 회보의 겉 표지를 보면 <창건주는 미상이고 신라 진흥왕(540-576)때 창건되어 왕손인 운산대사가 뼈를 깎는 기동정진으로 마침내 부처님을 친견하였다 하여 산이름을 견불산 이라 하였습니다. 지금의 산이름인 수리산은 약 60년 전 사찰 이름을 따서 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현신 하신 영험 있는 도량이 본 수리사인 것입니다.> 와 같은 내용의 글을 볼 수 있다.
<수리사 산신제>
수리사 산신제는 수리산 최고봉인 태을봉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현 군포시 산본동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이다. 산신제를 올리는 군포시 산본동은 본래 수리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산저리라 했다가 조선 말엽에 이르러 수리산을 산본리라 하였다. 이렇듯 수리산과 산본동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수리산을 고대로부터 신성시 하여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고 산신제를 지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