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전라북도 "군산(群山)"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채 시간이 멈춘 듯 한 흔적을 보여주는 곳, 전라북도 군산시는 채만식의 소설 탁류와 조정래의 장편 아리랑에서 보듯
일제 강점기 온갖 수탈사의 배경이 된 곳으로, 지금도 이 도시 곳곳에는 식민지 시대에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픔의 흔적들이 생생히 남아 있다.
조선 시대 군산은 최고의 곡창지대로 호남평야의 세곡이 모이는 군산 창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군산 진이 설치되어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1896년 강화도조약 이후 군산항은 부산, 원산, 제물포, 경흥, 목포, 진남포에 이어 1899년 5월 1일 일곱 번째 개항하면서
외국인이 자유롭게 무역하고 거주할 수 있도록 조계지를 설치하였다. 군산의 역사는 개항 이후에는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게 된다.
그 이전에는 일본인들의 거주가 불가능했지만, 이미 일본상인이 77명이나 군산에서 거주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군산이 당시 일본인들의 중요한 무역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산에 처음 정착한 일본인은 ‘사또 도미지로’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지역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미곡상이었는데,
이미 군산이 전북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무역항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군산을 호남지역의 무역을 위한 거점으로 정하고 강압적인 계획을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1908년 10월 전주와 군산을 연결하는 노폭 7m 길이 46.4km 규모의 일명 '전군도로' 또는 '번영로'라고 불리는 ‘전군(全群)도로’가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 졌는데, 이 도로는 자갈로 포장된 우리나라 최초의 도로였다.
군산에 조계지를 설치한 뒤 한국인들의 가옥과 묘지는 강제로 철거되었고, 군산은 일본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성장하게 되었다.
개항 당시 500명이 채 안되었던 군산 인구는 개항을 한 후 8,000여 명의 일본인들이 건너와 북적이는 도시가 되었다.
1914년 치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서 간행한 ‘군산 안내’에 의하면 군산은 총 수출량에서 부산 다음으로 전국 2위를 기록하였고
총수입량은 전국 4위를 기록하였는데, 이 수출품은 주로 쌀이었다.
군산이 이처럼 항구도시로 급성장한 배경은 호남, 충청의 농지를 빼앗아 일본의 것으로 만들어 가난한 일본 농민들이 옮겨와 살게 한 후,
이 지역의 쌀을 일본으로 보내어 일본의 쌀부족을 메꾸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전북지역은 가장 많은 일본인 농장이 모여 있던 곳으로 가장 큰 사회적 지배세력을 형성하여 일본 식민정책의 중심이 되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기 전 전북지역에는 이미 24개의 일본인 농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후 1920년까지 다시 18개의 농장이 더 생겼고,
1926년 말에는 30정보 이상의 규모를 가진 일본인 농장수에서 전북이 1위였다. 큰 규모의 농장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소작농이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 공산품이 군산항으로 계속 들어오고 일본인 농장이 갈수록 늘어나자 농장을 잃은 농민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하는 유랑민이 되었다.
남아 있는 농민 또한 조선시대 지주에게서 보다 혹독한 수탈을 당했다.
조선시대에는 소작료가 수확량의 1/2이었는데 일본인은 2/3에 가까웠고 흉년에도 소작료를 감해주지 않았다.
* 발산초등학교에 있는 문화재들(발산리 오층석탑, 부도, 석등, 문인석 등)
유적답사여행을 위해 찾아간 군산에서 처음 들른 곳은 발산초등학교였다. 유적답사를 위해 찾아간 곳이 초등학교라면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런데, 운동장을 지나 교사 뒤편의 후원으로 돌아가자 의문이 풀렸다.
호남 곡창지역에 위치한 중요한 항구였던 군산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수탈하여 가져간 대표적인 항구였다.
일본인들은 우리의 문화재들도 불법으로 강탈해 갔는데, 군산시 발산리에 있는 발산초등학교에는 그 역사의 현장이 생생이 남아 있다.
지금도 이 학교의 후원에는 오층석탑, 석등, 부도탑, 문인석 등 총 31기의 석조 유물들이 모여 있는데, 이곳에 있던 그의 저택 정원에 장식용으로 사용하거나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빼앗아왔으나 미쳐 반출해 가지 못한 것들이다.
발산초등학교 자리는 일제강점기였던 1903년 ‘시마타니 야소야’라는 일본인이 소유한 농장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양조장을 하고 있던 '시마타니'는 원료인 쌀을 구하기 위해 조선에 왔다고 한다.
당시 우리 논의 가격은 일본에 비해 10% 저렴한데 비해, 쌀 수확량은 4배가 되었으니 많은 일본인들이 쌀을 찾아 조선으로 왔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쌀을 수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의 논을 소유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그들이 소유한 토지의 93.4%가 농지였으며,
그 중 31.6%가 군산지역에 위치했으니 우리 농민들은 비옥한 논을 빼앗기고 노예와 같은 소작농으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우리의 곡식을 일본으로 쉽고 빠르게 운반하기 위해 일본 헌병들이 지도에 연필로 선을 그으면 논밭은 물론 집까지도 아무런 보상 없이 헐렸고,
신작로 건설은 강제노역에 의한 주민들 몫이었다.
이렇게 하여 1930년대에는 한 해 우리나라 전체 쌀 생산량의 50%에 이르는 200만 섬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보내졌다.
소작농이었던 우리 농민은 생산량의 60~70%를 소작료로 빼앗기고 만주에서 들여온 콩깻묵과 값싼 동남아의 안남미로 연명하고 있었다.
한편, 점점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된 시마타니와 같은 일본인들은 많은 쌀을 수탈해 가는 데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문화재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아
일본으로 보냈는데, 발산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석조 유물들은 인근 전라도와 충청도 등에서 모아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56A44E5301F3EE2D)
전 날 내린 눈으로 군산 지역은 온통 하얀 세상으로 변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6D1A4E5301F3EE21)
하얀 눈이 쌓여 있는 발산초등학교
![](https://t1.daumcdn.net/cfile/cafe/256B964E5301F3EF23)
보물급 문화재들이 모여 있는 발산초등학교 후원
![](https://t1.daumcdn.net/cfile/cafe/24744C4E5301F3EF1F)
군산 발산초등학교 후원에 있는 석조 유물들, 일본인 농장주가 자신의 저택 정원에
장식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약탈해온 유물들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는 국보인 오층석탑과 석등을 비롯하여 육각부도, 문인석 등이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0B314E5301F3F012)
보물 제 276호인 '5층석탑'
![](https://t1.daumcdn.net/cfile/cafe/27038F4E5301F3F015)
보물 제234호 '석등(왼쪽 사진)
![](https://t1.daumcdn.net/cfile/cafe/226A234E5301F3F123)
전전라북도 문화재 제185호 '6각부도'(왼쪽 사진)
![](https://t1.daumcdn.net/cfile/cafe/2602FA475301F3F112)
문인석 등..
일제의 식민정책은 조선을 식량 및 원료생산기지로 만드는 한편, 일본 공업제품의 판매시장으로 만드는데 역점을 두었다.
일본인 지주들의 가혹한 소작료 징수로 빼앗긴 곡물은 모두 군산으로 집결되었고 정미소 10여개가 밤낮없이 가동되어 군산 부두에는 쌀이 산처럼 쌓였다.
지금도 군산 월명동과 장미동 근처에는 많은 근대 문화유산과 당시 일본인들이 살았던 건물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근대역사박물관을 중심으로 왼쪽의 구 군산세관, 오른쪽에는 구 조선은행,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이 있는데, 이 주변은 근대문화 벨트 지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서는 1930년대 군산의 역사가 담겨 있는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구 군산세관 건물은 군산항을 통해 드나들던 물품에 대해 세금을 거두었던 곳으로 1908년에 준공되었다.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군산 지역의 쌀과 곡식을 수탈하고 농민들로 부터 토지를 강제로 수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곳이다.
또한,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는 군산 구시가지인 중앙로에서 시작되는 '동국사 길'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동국사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사찰로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첫댓글 쪽바리 농장주가 석조물을 무거워서 일본으로 못 가져간게 다행이다.
그녀석들 우리 문화재들을 많이 가져갔는데,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해방될 때 모아두었던 것이기 때문에 미쳐 실어가지 못한 것이다.
날 풀리면 저 발산초등학교를 위시해서 군산세관, 조선은행, 일본식 가옥 밀집지역을 한번 다녀와야겠다. 군산회집은 아직도 푸짐하게 주겠지.
좋은 생각이다. 군산에 무슨 유적들이 있겠나 싶었는데, 가보니 하루 종일은 잡아야 대강 볼 듯하다.
회도 한접시 즐기고 오면 더욱 좋겠지.
이걸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주요일간신문지상에 발표하면 좋겠다. 제목은 (연재) 일본의 약탈문화.
일본 녀석들이 저질렀던 못된 현장이 이렇게 많이 남아 있는 도시도 없을테니, 그런 의미에서도 때려부수지 않고 잘 보존해 둔 것이 잘 된 듯하다.
요즘 군산은 새만금방조제건설로 문화 관광과 선유도 대교도 건설중이고 특히 금강하구둑주위엔 체만식문학관등 문화재 복원과 철새도래지와
주말 가족유원지로 4게절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네~``
그리고 군산 산업단지엔 현대중공업 조선공장등등 공업도 동시에 번창해서 앞으로 서해의 중심도시로 발전 중이지~~~
작년엔가 선유도를 다녀온 영목이는 군산에 대해서도 잘 아는구나.
채만식 문학관에는 옛날 잠시 들렀던 일이 있는데 그 땐 별 목적의식이 없었기 대문에, 이번에 가서 구석구석 샇펴보고 싶었는데, 시간관계로 그대로 와서 섭섭했다.
근대 지금 군산 경기가 최악으로 치 닫고 있단다, 국내 경기 여파로 관광객도 줄어들고, 자체 경기도 별로 안 좋아서
큰일이라고 한다, 한국의 디트로이드가 될까바 걱정이란다,
쉐보레 자동차가 팔리지 않아서...
@梁 榮善 Che~는 쉐~가 아니고 셰~로 발음된다. 가전회사들이 매직셰프를 매직쉐프라고 얼토당토않게 쓰면서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보편적(?)으로 벌어졌는데 밀크쉐이크도 밀크셰이크라고 써야 맞다.
군산에 게장집 하나 잘하는데 있던데.. 거긴 갔었남?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