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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읽으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96회는 본고와 동일한 수정원고로 교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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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결심
간신히 추돌위기를 모면한 도치씨는 도암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입구 주차장에 차를 넣고 곧장 도암의 철학관사무실로 올라가지 않았다.
입구의 고객전용 테마공원 벤치에 잠시 앉아 혼란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미, 도암에게 아내문제를 자문 받고 자신의 살인계획을 의논하리라 마음은 굳혔지만 자신의 이 계획이 정당한 것인지 한 번 더 차근차근 점검했다.
우선 아내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는 없는가?
이 문제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단정했다. 또 그렇게 허약한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고 한 번 더 마음을 다졌다.
신랑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번듯하게 살아 있는데, 결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백주대낮에 관광지모텔로 돌아다닌 것은 바람 정도가 아니고 간이 뒤집어져 미쳤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여자가 나이 들어 외간남자를 알게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다는 말이 아내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더욱이 근거리도 아닌 원거리 모텔을 전전할 정도면 이 방면에 아내는 이미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다. 알거 다 알고 볼 거 다 봤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지난 행동들이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어떤 여자가 남편이 사흘 멀다하고 낚시 다닌다면 좋아할까? 그런 여자가 있을까? 없다! 낚시회원들 중 대다수 아내들이 남편 낚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간신히 아내를 설득해도 한번 낚시가려면 이 눈치 저 눈치 다보며 설거지는 물론, 빨래며 청소까지 다하는 것은 기본. 밤낮을 가리지 않는 특별서비스의 업그레이드가 이만저만 고통스럽고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던데 내 아내는 뭐야? 오히려 권장했잖아? 아하! 알았어. 그래 맞아. 함정이었어! 이 죽일 년! 그렇게 함정을 파놓고 내겐 낚시 갔다 오라고 닦달했어? 자유분방하게 바람피우러 돌아다니기 위한 이 죽일 년의 함정에 걸려 내 청춘 다 보냈구나! 아이고 하나님! 부처님! 그리고 그 뭐냐? 알라시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낚시가면 스탠다드 13시간. 좀 했다하면 2박3일. 프리미엄 15일인데. 아! 이럴 수가? 그 오랜 시간 저년은 마음 놓고 놀았겠지? 그래서 저 미친년이 근래에 기력이 없다 허리가 아프다 팔다리가 쑤신다, 별 용천수작 다 떨었구나.
도치씨는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며 정신나간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 열길 물속은 알아도 여자의 내숭은 짐작할 수도 없다더니 사실이었구나. 스트레스 받으며 오로지 죽어라 낚시한 그 시간이 저 망할 년에겐 거리낌 없는 행복시간이었다니! 돼지 같은 체구의 피를 모조리 다 빨아 먹어도 시원찮은 년! 머리털을 다 뽑아 불에 거슬려 죽여도 시원찮은 년! 나 같은 남자를 속이고 뒹구니까 기분이 째졌지? 이년아! 이제 네 운명도 끝이다. 허지만 나는 어떻게 무엇으로 보상받지? 속고 살아 온 내 세월은 어떡해?”
도치씨는 뿌드득 소리가 날정도로 어금니를 질근 깨물었다.
“저년은 죽어야 해! 죽어 마땅한 년이야! 죽여도 죄 될 건 하나도 없어! 옛날이면 서방본년 사지를 찢어 죽여도 되는 정당한 칠거지악도 있었어!”
도치씨는 아내를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살인결심을 했다.
도치씨가 살인을 이렇게 간단히 생각하고 결심한데는 그러만한 이유가 있었다.
도암이 자신 있게 했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우연히 드라마속의 살인교사 사극을 보며 도치씨가 철학자의 견해를 떠보기 위해 도암에게 물었다.
“나는 저런 황당한 장면이 나오면 무지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도암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도암이 말했다.
“뭐가요?”
“저거 보세요. 허수아비에 바늘을 찔러 사람을 죽였다니 너무 2차원적이라 우습잖아요? 질투로 인한 텔레파시라 해도 저런 장면이 나오면 밥맛없어요.”
도암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요즘사람들은 저런 일들을 허구나 미신이라 여기지만 실제 있어요.”
“네에?”
“놀라긴 왜 그렇게 놀라요? 도치씨 말 안 듣는 여자 있으면 부탁하시오. 내가 석 달 안에 죽여 드릴 테니까. 하하하.”
도암이 농처럼 말하며 컬컬하게 웃었다.
“네에?”
도치씨는 도암의 말에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도암의 지난 행적이나 이력을 볼 때 농담처럼 말하는 도암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비한 초능력을 도암은 감추어 놓고 있는 것 같았다. 범접할 수 없는 선견지명과 초능력이 있으니까 청와대만찬에서 역대 대통령들과 기념사진도 찍었지? 그래서 갑자기 도암이 두려워졌다.
도치씨가 놀라자 도암이 사람을 비방으로 죽이는 절차를 찬찬히 설명했고, 도치씨는 도암의 이야기에 흥미와 긴장감이 진득하게 묻어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허지만 완전히 도암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도암은 그런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지만 인정했다.
도치씨가 이렇게 가닥을 잡지 못하고 도암의 말에 왔다 갔다 혼란했던 것은 도암의 비방설명 끝에 덧붙인 끝맺음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한을 품은 여자에게 한을 풀게 해주는 처방이 있었던 건 사실이오. 한두 가지가 아니고 여러 방법이 있지만, 천기누설로 다스려져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않았다오. 왜냐면 비방을 쓰면 그 화가 비방을 쓴 본인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라오.”
“그럼 도암선생은 어떻게 그런 비법을 알게 됐어요?”
“직접 전수받을 수는 없었지요. 세상 어느 스승이 제자에게 살인비기를 물려주겠소?”
수행하던 중 도암은 우연히 스승의 비법을 알게 됐지만 전수는 받을 수 없었다. 스승은 도암의 주역 깨우침은 인정했지만 자신의 비법까지 넘보는 도암을 결국 수행 중이던 암자에서 쫒아냈고, 갈 곳 없던 도암은 허름한 여관방에서 쫒겨 날 때 스승으로부터 받은 노잣돈으로 근근이 연명하다 결국 속세에 안착하고 말았다고 했다. 허지만 다행히 도암은 스승에게서 내침을 받기 전 네댓 가지의 비법을 스승 몰래 눈도둑으로 깨우쳤다며 비방에 대한 말을 마쳤다.
도암의 말에 도치씨는 경악했다. 그러나 묘하게 사람을 비방으로 죽일 수 있는 초능력자와 알게 됐다는 것에 도치씨는 흥분했다. 물론 살인할 상대나 계획이 있어서는 절대 아니었다.
도치씨는 그때의 도암을 되살려 놓고 테마공원의 의자에 등을 뒤로 주욱 젖히며 의미 있게 입가에 웃음기를 묻혔다.
그러나 막상 아내를 죽이겠다고 결심하자 다른 한 무리의 마음속에서 심한 갈등이 솟았다. 도치씨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리사처럼 재점검했다.
“혹시 속 좁은 내가 질투에 눈이 먼 건 아닐까? 그래서 아내를 용서하지 못하고 오로지 복수의 일념에 사로잡힌 건 아닐까?”
도치씨는 이런 생각을 즉시 털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를 죽이려는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찢긴 깃발처럼 자신의 중년을 초라하게 만든 것은 아내의 불륜 때문이라 생각했다.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아니 혜림누나와 그 모텔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자신의 처지를 잊고 그런대로 인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순간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표독한 성깔을 가졌을지라도 세상에 아름답고 날씬하고 키 큰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아내 같은 똥돼지를 만났을까?
스치기만 해도 최음 향기 나는 여자.
눈길만 스쳐도 말초신경에 전기가 흐르는 여자.
그런 여자를 선별하지도 않고 너무 성급하게 결정해버린 20년 전의 선택이 후회스러웠다.
자나 깨나 오로지 자식교육과 일밖에 모르는 여자.
잠자리에 들어도 아내의 머리카락에서 느끼하게 배어나오는 냄새 때문에 몸서리친 자신의 처지가 개탄스러웠다.
아내의 향기는 체향이나 향수가 아니고 어묵공장에서 묻어 온 기름과 생선비린내였다.
도치씨는 비로소 아내에 대한 불만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게으르고 무식하고 투박하고 우둔한 여자.
도치씨가 아내를 게으르다고 말하는 것은 행동이 게으르다는 뜻이 아니다.
결혼식 날 이후 한 번도 아내의 화장한 모습을 본 적이 도치씨의 기억엔 없었다. 허지만 이런 것이 아내의 게으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기 전까진 이 게으름은 화장품 값 하나라도 아끼려는 아내의 알뜰함 때문이라고 믿었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이후.
아내가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즐겨보는 낚시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또는 뉴스 같은 시사프로그램은 젖혀두고, 연예 혹은 드라마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며, 아내가 투박하다고 느끼는 것은 요염한 포즈로 등장하는 여주인공에 정신을 놓고 있노라면 텔레비전채널을 확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언젠가 외식하러가는 길옆의 쇼윈도에 걸린 야리끼리한 의상을 보고 ‘저런 옷을 사는 년들은 도대체 어떤 년들일까? 신랑은 등골 빠지게 일해서 돈 벌 텐데’ 쇼윈도유리에 비친 자신의 옷과 비교하며 ‘이런 옷이 얼마나 좋아? 싸고 편하고’ 그리고 미련 없이 도치씨의 팔을 잡아끌어 쇼윈도를 벗어나던 아내.
그때 도치씨는 그런 아내가 참으로 고마웠다. 장난삼아 확인한 옷값에 도치씨는 체력이 되면 아내를 업어 주고 싶었다. 허지만 아내를 업고 한 발짝도 갈 자신이 없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지금 심정과는 판이하게 그때는 달랐다.
아내가 우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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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편한 밤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