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4일(오순절 후 첫 번째 주일)
요한계시록 10:9~11
이 책을 먹으라!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요한계시록은 풍부한 그림언어로 가득 찬 책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박해받는 자를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1세기 말에 밧모 섬에 유배되어 이 글을 썼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황제는 도미티안이었는데, 그때는 황제숭배와 기독교인의 박해가 한창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는 사람들이 현실보다 꿈과 환상에 더 매료되기 쉬운 시대입니다.
어느 날, 사도 요한이 일종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한 힘 센 천사가 한쪽 발은 바다를 밟고, 다른 한쪽 발로는 땅을 밟고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바다와 땅을 밟고서 설교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설교를 듣고 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사자가 부르짖는 것처럼 큰 소리로 외치며 설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도 요한에게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천사에게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요청하자 천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것을 갖다 먹어 버리라!”
우리는 이러한 명령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600년 전에 에스겔 선지자도 이와 비슷한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그 때 에스겔 앞에 한 권의 두루마리 책이 보였습니다. 에스겔이 입을 벌리자 하나님이 그 두루마리를 에스겔의 입안에 넣으셨습니다. 그것은 에스겔의 입에 매우 꿀처럼 달았습니다.
에스겔과 동시대의 사람이었던 예레미야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의 기도를 통해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입니다(렘 15:16).”라고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먹고 삽니다. 제가 왜 성경을 읽는다고 하지 않고 성경을 먹는다고 말했는지 여러분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나 에스겔, 예레미야 같은 사람들은 모두 성경을 먹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기 위해 공책과 연필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접시와 숟가락, 포크 같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성경을 잘 읽을까?’를 고민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성경을 잘 먹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성경읽기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잡담을 늘어놓은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음식이 우리의 몸에 완전히 흡수되어 새로운 에너지와 영양분이 되듯이, 우리는 성경을 대하며 새로운 에너지와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배우거나 연구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 몸과 영혼에 흡수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느냐가 그 사람의 건강을 좌우합니다. 또한 일생을 좌우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독서’(spiritual reading)를 가리켜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잘 사용하는 ‘Quite Time’ 혹은 ‘말씀 묵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인쇄된 활자를 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읽은 문장을 생각하고, 상상하며, 그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맛을 음미하는 독서를 해야 합니다. 마치 음식과 물이 우리의 온 몸에 퍼지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의미가 우리의 삶 곳곳에 퍼지고, 영향을 주어, 우리를 바꾸어야 합니다.
때로는 성경을 읽으면서 질문도 던지고, 행간 사이의 보이지 않는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행간읽기’도 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성경을 먹으며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베드로 사도는 성경을 가리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그 맛을 음미하고, 갓난아기들처럼 진리에 관해 강한 식욕을 갖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먹으며 삽니다. 그 맛을 음미하고 그것을 규칙적으로 먹어야 진리의 세계가 우리 안에 들어와 온 혈관에 퍼져 마침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거룩과 지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책을 먹으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읽기의 중요한 원리는 무엇일까요? 며칠 전에 성도 한분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중에 이 성도님께 요즘 성경을 어떻게 읽고 계신지 물어보았습니다. 이 성도님은 자신이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교회로부터 성경책을 한 권 선물로 받았노라고 저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선물로 받은 성경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처음 창세기 몇 장을 읽다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 부분에 막혀 성경을 덮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직까지 성경을 읽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길고 지루한 사람들의 이름을 읽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도,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성경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성경에서 다른 것은 읽지 않고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기록된 부분만 반복해서 읽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목사님이 할머니께 물어 보았습니다.
“할머니, 왜 성경에서 다른 부분은 읽지 않고 사람들 이름만 외우고 계세요?”
그랬더니 이 할머니가 정색을 하면서 목사님께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제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제가 이 나이에 다른 것 읽어 무엇 하겠습니까? 이제 곧 하늘나라에 갈 텐데 여기 성경에 적힌 사람들 이름만이라도 외워 두어야 천국에서 가서 아는 척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 참 재미있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 우리의 성경읽기도 이 할머니의 성경읽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는 두 가지 원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책 읽기를 통해 단순히 저자에 대한 정보와 사상만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책 읽기를 통해 저자 그 자체를 알게 됩니다. 참다운 책 읽기는 저자의 인격을 읽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책 읽기의 ‘계시적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책 읽기는 일방적인 정보전달의 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책 읽기를 통해 독자와 저자가 함께 연대하고 참여합니다. 최근 들어 책의 의미는 독자가 결정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독서는 ‘참여의 독서’입니다(유진 피터슨, 「이 책을 먹으라」, 양혜원 역. 서울: IVP, 2006, p. 59).
즉, 우리는 독서를 통해 우리를 인격적으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올바로 반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읽기에 있어서 ‘계시’와 ‘인격성’은 성경읽기의 중요한 두 가지 기둥이 됩니다.
먼저 우리는 성경읽기를 통해 계시와 만납니다. 여기서 계시는 다른 말로, ‘진리’ 혹은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분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시고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고, 참으시며, 이끄시는지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읽기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또 다른 유익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인격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 베드로를 부르시고, 삭게오를 부르시며, 사도 요한을 부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읽기를 통해 오늘날 나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나를 부르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인격적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읽기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와 인격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만 얻게 되는 큰 유익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읽기를 통해 이러한 유익을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기 전에 우리의 잘못된 동기들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통해 지적인 매력을 얻기 원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성경 읽기를 통해 이 세상에서 건강해지고, 부유해지며, 삶의 지혜와 같은 실용적인 유익을 얻기 원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경을 통해 특별한 영감과 능력을 얻기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버려져야만 합니다. 만일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성경을 수단화하고 이용하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읽기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들을 인격적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인격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성경읽기는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내면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또 다른 바벨탑을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언어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일차적인 방법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나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그대로 되니라…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시편 33:9은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요한계시록을 썼던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사도 요한은 태초에 계셨던 하나님이 말씀이셨고,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실재(實在)화 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가장 마지막 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알파와 오메가’(계22:13)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글자를 이루고 있는 자음과 모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 책을 먹으라!”고 명령하신 것은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언어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어들을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매일의 일용할 양식이 됩니다. 성경은 죽어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잠자는 우리의 영혼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요한복음 6:48-50).”
이 구절은 영어성경에서 “생명을 주는 빵”으로 번역이 되어 있고, 이 구절을 우리 한글성경에서는 ‘떡’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경을 번역한 분들이 서구의 빵의 형태를 가진 음식을 찾다보니까 가장 비슷한 것이 우리나라의 떡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둥글둥글한 빵의 형태와 떡의 형태가 형식적으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떡은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간식 정도의 의미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끔 횡재를 맞았다고 표현할 때 “이게 된 떡이냐!”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떡은 특별한 날 가끔씩 먹는 음식입니다. 오히려 매일 생명을 위해 먹는 음식은 떡이 아니라 밥입니다. 그러니까 의미상으로는 “내가 생명의 떡”이라는 표현 대신 “네가 생명의 밥이다.” 이렇게 말해야 더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며칠을 굶으면 생명에 지장이 있는, 그래서 하루도 빼놓지 말고 매일 먹어야 하는 소중한 밥처럼, 오늘 우리들에게 그렇게 소중하다는 의미입니다.
역사적으로 조선 땅에 최초로 복음을 들고 와서 순교하신 분은 1866년 스코틀랜드의 국적을 가진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한창이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는 이에 아랑곳없이 목숨을 걸고 저너럴 셔먼호를 타고 8월27일 대동강까지 올라 왔습니다.
그러나 이 배는 조선병사들에 의해 결국 9월 2일 양각도에서 좌초되었습니다. 조선병사들이 배에 올라와 유황을 뿌리고 배에 불을 질러 승선했던 24명 모두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인 토마스 선교사는 한자성경 몇 권을 가슴에 품고, 가까스로 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 병졸에 의해 대동강 변 모래사장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병졸이 칼로 토마스의 목을 치려는 순간, 토마스 선교사는 예의를 지켜 그에게 성경책을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지 않으려 하자, 토마스 선교사는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댄 채 다음과 같은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여 내 영혼 순교 제물로 받으소서. 아내는 중국 위해, 나는 조선 위해 바칩니다. 내가 갖고 온 성경, 조선인 손과 가슴에 차마 전하지 못했어도, 저 대동강 물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 풀어져 녹아 있으니, 저 강물 마시는 조선사람 누구든지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소서.”
결국 토마스 선교사는 그 병졸에 의해 27세의 아까운 나이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때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병졸이 박춘권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토마스 선교사에게서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많은 분들이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를 죽였던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홍신길은 서가교회,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립하였습니다.
받은 성경을 뜯어 벽지로 사용했던 영문주사 박영식은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아 널다리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는 1907년 평양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의 전신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진 축복받은 교회입니다.
또한 성경의 번역과 보급은 한국의 근대화와 문맹퇴치, 그리고 여성의 인권신장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신약성경이 번역된 것은 1900년이었고, 구약성경이 번역된 것은 이보다 10년 후인 1910년이었습니다.
초기 성경번역과정에서 선교사들과 한국인 조사들은 조선의 유식계층이 아닌 민중계층을 염두 해 두고 성경을 번역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성경번역을 주도했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당시 조선의 고급 유식 층이 사용하는 문체와 일반 대중들이 사용하는 문체가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고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무식한 사람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식자층의 마음에도 들도록 깔끔하고 순수한 번역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유교 중심의 봉건체제 속에서 소외당했던 한글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한글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결국 한글성경은 한국 국어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학교며, 호텔이며, 교도소며, 군대며, 우리나라 곳곳에 우리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배치되어 있고, 성경이 읽혀지며, 성경을 공부하고, 전하는 민족이 복된 민족이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과제도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삶으로 실천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두루마리를 갖다 먹자, 그것이 입에서는 꿀 같이 달았지만, 그 배에서는 쓰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성경을 읽고 진리를 깨닫는 기쁨은 꿀처럼 달지만,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문제는 배에서 쓴 것처럼 힘들고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읽기의 즐거움에 비해 그것을 실천하는 것의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대로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그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먹는 즐거움과 그것을 실천하는 어려움을 경험한 자에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나아가 다시 예언하는 사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먹어야 할 생명의 떡입니다. 우리가 매일 성경을 먹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수많은 민족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읽기에 관해 실제적인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하루에 6장씩 매일 성경을 읽다보면, 여러분은 올 연말에 신구약 성경을 일독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성경읽기 표를 활용하셔서 서로 성경읽기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일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귀한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책을 먹으라!”는 거룩한 명령에 사도 요한처럼 순종해 보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