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일인들 매립지와 노적봉 아래 거주
밀려난 한국인 북교·목원·서산·온금동 살아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목포는 항구다. 이젠 대한민국 관광거점도시이고, 정부 인증 문화도시이다. 일제때 수탈당한 도시가 120여년이 지나, 믿고가는 국제 문화관광도시로 도약하고 있는 것이다.
유달산 최고봉 일등바위, 일명 ‘글로벌 SNS 좋아요(Like) 바위’
한국관광공사의 ‘관광 100선’에 오른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두 개이다. K-팝 가수 겸 프로듀서의 원조 이난영의 족적, 고단한 삶을 웃음으로 승화한 옥단이 거리, 19세기까지 목포를 지키던 목포진성 등 한국인의 삶터가 하나이다.
1897년 개항후 이와 대조되는 영국시스템의 세관(해관), 일제의 탄압과 수탈의 역사가 남은 120살 된 건물 등 불청객들의 흔적이 또 하나의 풍경이다.
국내 많은 근대역사 다크투어리즘이 일제흔적만 반추한 채, 한국인 흔적을 빼는데, 목포시는 두 가지 모두 조명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근대 스토리텔링하다가 자칫 일제 침략과 부역을 미화하는 우를 차단한다.
국제 퍼레이드 경연에서 큰 상을 받은 옥단이 퍼레이드팀
북교동, 목원동, 서산동, 온금동은 한국인의 거리였고, 노적봉 바로 아래 옛 유달초등학교 뒷편 부촌과 지금의 목포역~목포항 사이 매립지는 일본인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한국인들의 가게가 군데군데 있었던 곳이다.
일제시대 일인 부자들이 살던 노적봉 앞 전망좋은 곳에 50년전, 서민들이 사는 시민아파트가 들어섰다. 이 아파트는 ‘적산(敵産:적국의 재산, 해방후 버리고 튄 일본인 거주지) 밀집지역’의 조망을 가로막아 소소하게 나마 복수를 했다는 촌평도 들리는데, 친일 잔재들이 득세하던 당시 이 아파트 건립을 허가해준 1970년대 목포시 공무원의 기개가 대단하다.
옛 일본인 부자들의 마을을 확 가로막은 시민아파트
공간은 역사를 말해준다. 앞바다에서 러일전쟁 전투가 벌어졌던 온금동은 ‘다순구미(따스한 남향 구릉지)’가 한자어로 치환된 것이고, ‘조금새끼’라고도 불렸다. 물이 가장 많이 빠진 때 몇주간의 조업을 마친 어부가 돈꾸러미를 차고 귀가하자마자 부인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2세를 낳아 “내 새끼, 훌륭하게 커다오”라면 애정을 쏟았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온금동은 바로 옆 서산동과 함께, 벽화와 시(詩)가 있는 마을도 탈바꿈했다. 민족자본인 조선내화 온금동 공장은 조만간 문화예술의 메카, ‘호남의 테이트모던’으로 거듭난다.
골목 벽 마다 시(詩)판넬을 붙여놓아 시화골목으로 불리던 서산동은 한국현대사를 바꾼 사건 박종철, 이한열 사망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촬영되면서 전국의 청춘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영화 ‘1987’에서 이한열(강동원)과 연희(김태리)가 시국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장면 등이 촬영된 ‘연희네슈퍼’가 인기를 끌면서 ‘연희네 다방’, ‘연희네 커피’, ‘연희네 오빠 근희네’도 생겼다.
서산동
엄지척 1등바위, 일명 SNS ‘좋아요’ 바위가 있는 유달산을 기점으로 서산동 반대편 목포역 인근에 있는 목원동은 ‘전원일기’ 드라마 극작가 차범석과 옥단이의 무대이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흥과 문화예술을 꽃피웠던 사람들의 인정 넘치는 마을이다. 옥단이는 예쁘장한 얼굴에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동네의 대소사에 빠지지 않고 나타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췄다. 목포 생생문화재 행사때 등장하곤 했던 그의 대형 인형은 국제인형퍼레이드에서 큰 상을 받기도 했다.
반전의식 일깨운 소설 ‘불모지’, ‘산불’을 쓴 작가 차범석은 “옥단이는 만인의 벗”이었다고 평했다. 백치미 섞인 순수의 힘으로 실의에 잠긴 목포에 삶의 활력을 불어넣고, 웃음을 안겨주던 여인이었다.
목원동엔 무인카페 화가의 집, 담장 위를 달리는 자동차, 옥단이가 꿈꾸었을 꽃가마 그림, 학교가는 길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학생 동상, 인어 벽화, 이난영 전시관을 겸하는 드로잉카페, 차범석의 생가 등을 만난다.
목원동 이난영과 킴시스터즈 벽화
목포 하면 빼놓을수 없는 문화인물은 이난영이다. 원래 ‘목포의 사랑’이었는데, 애절함이 흥행에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목포의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트로트를 부른 가수이자 최초의 걸그룹 유닛 멤버, 걸그룹 창시자, 보이그룹 기획자이다.
1916년 목포 양동에서 태어난 이옥례는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 학적부에 이옥순으로 적었고, 열 여섯살때 목포에 공연 온 태양극단을 만나 가수로 합류하면서 이난영이라는 이름을 쓴다. 오케이레코드사 가수시절인 1935년 ‘목포의 눈물’을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그녀는 음악공부와 해외음악 감상에도 몰두해 칸소네 비음을 조선팝의 꺾기에 접목시켜 새로운 창법을 구사했다. 또 ‘저고리 시스터’ 걸그룹(이난영, 장세정, 박향림) 멤버가 되어 한일 무대를 석권했고, 딸과 조카딸로 킴 시스터스를 기획해 미국에서 큰 히트를 기록했다. 킴시스터스는 화제와 인기의 바로미터인 에드셜리반쇼에 비틀즈보다 많은 33회나 출연했다.
1962년 이난영은 자녀들의 부름으로 미국으로 가 1년 정도 생활했지만 곧 귀국했다. 이후 아들들로 구성된 김브라더스도 미국에 진출시켰다. 이난영은 1965년 서울 자택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했고 노래비는 유달산에, 수목장은 삼학도 난영공원에 마련됐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며느리? 요즘 드라마 여자주인공 느낌의 이난영 데뷔 초기 모습
윤심덕과 김우진도 빼놓을 수 없다. ‘사의 찬미’를 부른 가수 윤심덕과 바다에 투신 자살한 사건으로 유명해진 김우진은 목포의 모던보이 1세대이다. 부친은 장성군수를 역임하고 목포 개항장 업무를 전담했던 무안감리서의 6대 감리를 지낸 김성규로 목포의 대저택 성취원에서 살았다. 목포의 대표적인 작가인 박화성에게 일본 유학 전 5개월간 영어 과외를 해주기도 했다. 윤심덕은 도쿄 유학생들이 결성한 신극 운동단체 토월회에서 활동하면서 유부남 김우진과 사랑에 빠졌다. 둘의 동반투신 소식 이후 유럽에서 봤다는 목격담도 나와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