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선선하다 못해 조금 쌀쌀한 느낌이다. 대구 남구 대구중학교 정문을 지나 이천동 고미술 거리를 지난다. 이천동 고미술 거리는 골동품 거리이다. 고등학교 동기 박지형이 운영하는 ‘상우’라는 가게가 있다. 한자로는 相䍂이다. 서로 相과 두레박 䍂이다. 친구의 말을 빌리면 서로 두레박이 되어 상부상조하며 산다는 뜻이다. 친구는 경북대학교 지질학과를 나왔다. 산을 좋아하던 친구이다. 그 건강하던 친구가 다섯 달 전 동맥이 크게 부어서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했다고 한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이 날 뻔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서 들여온 골동품은 취급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들여온 정체성 없는 물건을 경매하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우리의 전통적인 골동품만을 취급하는 자존심이 반듯한 친구이다.
이런저런 얘기하던 중, 친구의 은사인 경북대학교 지질학과 장기홍 교수님 근황을 물었다. 예전에는 한 번씩 가게에 찾아오시곤 했었는데, 요즘은 뜸하다고 한다. 나와 장 교수님의 인연은 기묘하다. 기연(奇緣)이라고 할까. 나와 교수님은 학연이나 지연 그 밖의 어떤 인연의 고리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학교 연구실 문을 두드리고 찾아오셨다. 무척 당황했다. 선생님이 어떤 분이란 정도만 알고 있던 때였다. 선생님은 서울대 지질학과를 나와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지질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3년 당시 문리대 지질학과에 부임했다. 1934년생으로 연세가 88세이시다.
나와 선생님의 인연의 고리는 희미하지만, 그래도 굳이 찾는다면, 철학과 지질학이 전혀 이질적인 학문은 아니라는 사실일 것이다. 지질학과가 당시 문리대에 속해 있었던 것 역시 우연은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는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분석하는데, 이 발상은 지질학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를 겹겹이 쌓아 올리고 있는 지층들에 대해 분석한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 역시 ‘덕의 지질학’이란 낯선 개념을 사용한다. 물론 지질학이 철학은 아니지만, 철학의 문제를 분석하는 방법으로서 가치를 갖는다. 푸코나 들뢰즈에게 지질학, 지층화, 표층, 심층 등의 개념은 익숙하다. 선생님은 철학과 지질학의 학제적 연관성을 미리 꿰뚫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선생님은 낡은 지프를 타고 다니신다. 책이 너무 많아 달성군 가창에 집을 따로 마련했다. 첫 만남 이후, 사모님과 같이 오셔서 두 분이 한 번씩 들리는 학교 앞 식당에서 밥을 사 주셨다. 그때 경북대학 철학과 강의 교수인 성회경 박사도 동석했다. 선생님의 장인 씨알 함석헌(1901~1989) 선생님에 관해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때 연락처를 잘 챙겨 두지 못한 게 송구스럽다. 혹시나 해서 선생님의 자칭 수제자인 군위에 사는 김한우에게 물어도 근황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 김한우가 바로 어제(2023년 1월 27일) 연락을 해 왔다. 경북대학교 지질학과로 전화해 선생님 근황을 물었다고 한다. 상세하게는 모르고, 다만 요즘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2019년 6월 25일 학교 앞 식당에서 성 박사가 찍어 두었던 선생님과 사모님 모습을 보니 참 그립다. 두 분 다 참 인자하신 모습이다. 함석헌 선생의 5녀인 함은선 사모님이다. 1939년생이다. 때론 생각하지 않았던 우연이 귀한 만남으로 오래 기억되는 일이 있다. 나와 선생님의 만남이 그렇다. 짧았지만 긴 여운으로 남아 오래 기억될 것이다. 선생님과의 짧은 인연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식당에서 찍은 두 분의 사진을 블로그에 올린다. 두 분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서 올린다. 선생님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선생님이 장인에 관해 쓴 글을 찾아 읽어 보았다. ‘함석헌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글을 직접 그대로 옮긴다. 이 또한 선생님을 오래 기억하는 일이 될 것 같아서이다.
우리는 1963년 가을에 결혼했는데 그 해 봄 함선생님은 미국에서 뜻밖의 편지를 집으로 보냈다. 자기 귀국 전에 결혼을 해도 좋다는 편지였다. 물론 그 편지는 없었던 것 같이 되었으나 다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뿐이다. 결혼 후에는 대구에서 살았으므로 서울 모임에는 자주 참석을 못했고 학술관계로 외국을 드나들기에 바빠 정신 없이 지냈다.
차츰 그이는 반독재 운동에 더 많이 투신하게 되었고 나는 과학에 전념하고 박사학위를 하는 등 외국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으므로 장인과는 거리가 멀어진 것 같이 보였으리라. 그 무렵 나는 장인에게 족자용 붓글씨를 부탁했는데 그이는 萬事無求眞理外 一心不言相照中(만사무구진리외 일심불언상조중)이라 써주셨다. 1973년 봄 바보새 씀이라 적혀 있다. '진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으며 한 마음으로 말없는 가운데 서로 비추어보고 있다'는 뜻이다. 월남 이상제 선생의 문장을 조금 변형한 것이었는데 이선생의 원문은 一心相照不言中임을 후에 알았다. 一心相照不言中이나 一心不言相照中이나 뜻은 같다. 나와의 거리감이 전제되어 있는 듯한 내용이다.
내가 만일 서울에 살고 교회에 다녔더라면 시국선언이나 서명을 하는 기회에 퇴직교수가 되든지 욕을 보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내가 신문에 글을 쓰면 '당신은 그런 날카로운 글을 쓰고도 무사하냐?' 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정보부 사람들은 나를 노려보고 째려보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무사했다. 학문에 전념하여 그것이 애국이 되었겠으나 독재정권 아래 침묵하고 있었던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죄송한 일이다. 유신체재 때는 장인은 대구에 오셔도 사위의 무사를 위했든지 다른 집에서 유하시는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일부러 장인을 멀리한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았다.(2005.4.4.).
첫댓글 萬事無求眞理外 一心不言相照中~
매화향기같은 마음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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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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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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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미셸 푸코(Michel Paul Foucaut, 1926~1984)는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 철학자 가운데 두드러지는 인물.
그는 거칠고 이상하며 극도로 내성적인 젊은 촌뜨기였는데 재수한 끝에 고등 사범학교에 합격한다.
고등 사범학교는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등 프랑스 최고의 지성들이 거쳐 간 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학생들 가운데는 자부심과 젊은이 특유의 치기가 넘치는 괴짜들이 많았다. 푸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꼭 싸움닭 같았다.
미셸 푸코의 대표작은 《광기의 역사》와《감시와 처벌》이었다.
그는 당시 서구인들이 갖고 있던 지배적인 생각을 분석하고 해부했다.
인간의 지식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변화하는지 탐구하고 해답을 모색하였다.
결론은 지식은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모든 지식은 정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억압적인 권력의 구조를 예리한 통찰력으로 파헤쳤으며 정신병의 원인을 사회적 관계속에서 밝혀내려 하였다.
서양문명의 핵심인 합리적 이성에 대한 독단적 논리성을 비판하고, 비이성적 사고, 즉 광기(狂氣)의 진정한 의미와 역사적관계를 파헤쳤다.
등..
또 함석헌선생님의 이야기가 잠시 보였다. 대표적 실천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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