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다니던 길을 걷는다. 항상 보던 석류나무다. 석류는 영물(靈物)스럽다. 데메테르의 엄친딸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세계로 잡혀갔다. 데메테르는 수소문 끝에 딸이 하데스에게 잡혀간 걸 알고 제우스에게 돌려달라고 애원한다. 제우스는 청을 들어주면서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에 머무는 동안 그곳 음식을 먹었다면 도와줄 수 없다’는 조건을 달았다. 제우스가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돌려주라고 하자, 하데스는 순수히 돌려준다. 그러면서 지상으로 돌아가는 페르세포네의 손에 석류를 쥐여 준다. 하데스는 이 영물로 페르세포네를 유혹한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에 석류 네 알을 덥석 먹었다. 지하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운명이다. 제우스는 페르세포네가 먹은 석류 알의 수가 네 알이니, 일 년 중 넉 달은 지하세계에서 살아야 한다고 판정한다.
우리 역시 어느 날 어느 곳에서 하데스에게 납치당할 것이다. 이왕 당할 납치라면 살아 있는 동안 지하세계를 망각하고 행복하게 살면 좋다. 물론 죽어서 가는 하데스의 세계도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는 그의 그림 〈페르세포네〉(1874)에서, 지하와 지상의 경계인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어둡게 그리고 있다. 석류를 입으로 가져가는 왼손과 그 손을 살포시 간섭하는 오른손이 교차한다. 우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언젠가는 하데스에게 납치될 그 날을 기다리며 산다.
좀 더 걸어 중구 대봉동 리안 갤러리 앞을 지난다. 자주 보던 갤러린데 오늘은 유별나다. 어제 강의한 트로이 전쟁의 내용과 겹쳐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이른 아침이라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바깥에서 보는 갤러리는 마치 트로이 성의 모형과 같다. 그리스 연합군이 성을 무너뜨릴 수 없을 만큼 튼튼한 성이다. 오디세우스의 목마전략으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목마만 남겨둔 채 그리스 연합군은 퇴각한다. 트로이군은 이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들일지 말지 혼란스럽다. 결국은 안으로 끌어들인다. 목마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에 의해 트로이는 멸망한다. 이 갤러리는 밖에서 보면 폐쇄적이다. 그래서 안이 더 궁금해진다.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혹하는 듯하다. 건축은 얼어붙은 예술이다. 이 갤러리는 건물 자체가 작품이다. 오늘 오후 퇴근하면서 한번 들러 볼 생각이다.
모교인 사대부고 앞을 지난다. 내주 주말 인터불고 호텔에서 고등학교 졸업 50주년기념행사가 있다. 아마 이번 행사는 많은 동기가 참석할 거 같다. 나이가 들어서 하는 마지막 공식행사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고향이 그리워진다. 젊은 학창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겨우 12척의 배로 참전한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 10년을 승리로 종지부를 찍은 장본인이다. 그의 목마전략이 승리의 견인차였다. 전쟁에서 이기고 부하들과 함께 고향 이타카로 돌아간다. 이타카는 트로이 바로 곁에 있다. 10년이 걸려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그 일행이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험난했다. 전쟁을 자신의 지략으로 이긴 것 때문에 오만해질 대로 오만해진 오디세우스였다. 지금의 시칠리아의 키클롭스 쪽의 우두머리 폴리페모스를 장님으로 만들고서야 부하 몇 명을 잃고 간신히 살아 나온다. 키클롭스 죽은 외눈박이 거인이다. 그 하나밖에 없는 눈마저 찔러 장인으로 만들었다. 오만의 극치다. 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의 아들이다. 바다를 관장하는 포세이돈의 노여움이 극에 달한다. 이후 오디세우스의 여정은 험난하다. 오만이 저지른 대가이다. 오만을 내려놓고서야 겨우 고향에 다다른다.
나 역시 젊을 때 쓸데없는 오만으로 고향 이타카를 바로 옆에 두고 먼길을 돌아왔다. ‘학자’로서 반듯하게 살기를 소망했지만, 키르케와 칼립소와 8년간 동거한 오디세우스처럼, 나의 전공을 벗어난 외도를 일삼았다. 이제 나의 학문의 고향인 현상학으로 다시 돌아와 다시 시작할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마음은 항상 고향으로 향해 있었다. 나 역시 젊을 때 이것저것에 혼이 팔렸을 때도 언젠가는 나의 학문의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기를 소망했었다. 이제 모든 걸 괄호 처 두고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일상의 항아리에 담아내는 일에 몰두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 하데스의 손에 납치되어 스틱스강을 건너 죽음의 세계로 기꺼이 들어갈 것이다.
오늘은 어제 계명대학에서 특강을 한 그리스 신화가 걷는 내내 소환된 하루였다. 매일 지나는 곳이지만 지날 때마다 그곳이 갖는 장소성은 매일 새롭다.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 석류, 마치 트로이 성 같은 갤러리 그리고 지날 때마다 아쉽고 그립고, 애틋한 의미로 다가오는 모교가 신화 속의 상상된 의미로 살아나 내 마음에 들어온 오늘이었다. 신이 인간에게 준 귀한 선물 중 하나는 상상력일 것이다. 현실의 매를 맞고 사는 우리가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세계로 상상의 나래를 펴 날아갈 수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첫댓글 _((()))_ _((()))_ _((()))_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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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신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오만이라지요.
저는 어제도 가족모임에서 오만스런 말로
곧 후회하고 후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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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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