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초 어느 날 인천 용현동에서 두산 베어스 구단 사무실이 있는 서울 잠실야구장으로 향하는 길은 꽤 낯설었다. 원정 경기가 있는 날이면 자주 오가던 길이었는데 그날만큼은 모든 것들이 익숙지 않았다.
“연습생 신분이었던 제가 1990년 정식 선수 계약을 맺기 위해 구단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처럼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했던 것 같아요.”
선수 시절의 금테(별명이 ‘배트맨’이었다)가 아닌 검은테 안경을 쓰고 나타난 그는 잠실야구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30년 전의 신인 선수 김상진을 떠올렸다고 말한다.
14일 밤, 인천에서 김상진(50) 코치를 만났다. 이날 두산은 올시즌부터 공필성, 배영수 외에 김상진 코치를 새로 영입했다고 공식 발표한 터였다.
1998년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 후 다시 친정팀으로 돌아오기 까지 22년의 시간이 걸렸다. 선수 생활이 ‘OB-삼성-SK’순이었다면 지도자 생활은 ‘SK-삼성-두산’ 순서라는 점이 흥미롭다.
김태형 감독과의 만남, 배려
“2019 정규시즌 마치고 두산의 한국시리즈 진출이 확정됐을 때 김태형 감독님께 전화를 드렸어요. 인사차 드린 전화였는데 감독님은 다른 그림을 생각하셨더라고요.”
OB 베어스 시절 배터리를 이뤘던 투수와 포수는 돌고 돌아 감독과 코치로 다시 만났다. 친정팀으로의 복귀가 ‘22년 만’이라는 기억은 김상진 코치에게 남다른 감회를 안겨줄 수밖에 없다.
“감독님께 전화드릴 때만 해도 잠시 갈등했어요. 안부 전화라고 해도 행여 부담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1월 초 구단으로부터 연락이 온 거예요. 사무실로 나와 달라고요.”
1990년 OB 베어스 구단 사무실은 종로5가에 위치한 연강빌딩이었다. 김 코치는 지난 1월 초 잠실야구장을 방문하면서 연습생이 아닌 정식 선수로 구단과 계약 맺었던 1990년도를 떠올렸다고 말한다.
“잠실 사무실에서 김태룡 단장님을 먼저 뵈었는데 단장님이 ‘친정팀에 왔으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 달라’라며 제 손을 잡으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듣는데 큰 책임감이 느껴졌습니다. 두산으로 복귀하는 것 자체가 지도자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제가 처음 OB에 입사(입단)했을 때만 해도 김태룡 단장님은 선수단 매니저이셨거든요. 큰 형님처럼 선수들을 잘 챙겨주셨는데 단장님과 코치로 다시 만난 점도 묘한 감정을 갖게 했습니다.”
김 코치는 1989년 연습생 신분으로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었다. 배팅볼 투수로 시작한 베어스와의 인연은 1990년 2차 3라운드에 지명되면서 운명이 되었다.
“아마 제가 ‘화수분 야구’의 1호 멤버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이천에서 2군 생활하다 잠실로 올라가는 첫 번째 케이스였거든요. 2군 생활을 하며 선수들의 애로 사항을 구단에 전달하며 ‘꼴통’ 짓도 많이 했습니다. 구단을 상당히 괴롭혔어요.”
<사진=두산 베어스>
이상훈과의 맞대결, 열등감으로 자멸
김 코치는 1991년부터 OB 베어스 선발 로테이션을 이루며 그 해 10승, 1992년과 1993년 각각 11승, 1994년 14승을 기록했고, 1995년에는 17승7패 평균자책점 2.11, 3경기 연속 완봉승 포함 8차례 완봉승을 거두며 OB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통산 122승100패 14세이브 5홀드 평균자책점 3.54).
김 코치는 당시 잠실 라이벌을 이루며 팬들의 엄청난 관심을 이끌어냈던 ‘야생마’ 이상훈(LG)과의 맞대결을 떠올렸다. 상대 전적은 이상훈의 압승이었는데 김 코치는 열등감으로 인해 좋은 공을 던지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돌이켜보면 제가 (이)상훈이 한테 열등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상훈이도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탄탄한 기본기로 실력을 쌓은 선수였고, 저는 밑바닥에서부터 성장해 올라갔던 터라 그 자체에 대한 열등감이 내재돼 있었어요.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고요. 주변에서 우리를 라이벌로 보니까 꼭 이겨야겠다는 의식이 지배했던 것 같아요. 그로 인해 과욕을 부린 나머지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상훈이와의 맞대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다른 경기들처럼 상대 타자한테만 집중했더라면 조금은 다른 결과가 나왔을 거예요.”
야구장에서는 서로를 넘어서야 하는 에이스들이었지만 유니폼을 벗고 외부에서 만날 때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절친이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상훈이는 다양한 매력을 가진 선수였어요. 겉으로는 굉장히 강한 이미지를 풍기지만 속은 여리고 섬세한 면이 있었습니다. 투수하면서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안고 산 덕분에 변명, 핑계대는 걸 굉장히 싫어했고요. 참으로 멋있는 남자였습니다.”
최다탈삼진 기록, 류현진의 존재감
1995년 5월 23일 잠실 한화전에서 김 코치는 시즌 최다탈삼진 기록을 세웠다. 12이닝 동안 17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2010년 5월 11일 청주 LG전 선발로 나선 류현진에 의해 깨졌다. 류현진이 정규 이닝 최다탈삼진 신기록을 세웠기 때문(9이닝 17개). 연장전 포함한 최다탈삼진은 선동열 전 감독이 1991년 13회 연장에서 잡아낸 18개였다.
“제가 17개의 탈삼진을 기록할 때 던진 투구수가 178개였어요. 9회까지 던지고 내려오니까 김인식 감독님이 투수 교체를 하시려고 해서 제가 더 던지겠다고 버텼습니다. 결국 12회 끝내기로 완봉승을 이루며 3경기 연속 완봉승도 기록했었죠. 그런데 저보다는 류현진이 더 대단합니다. 현진이는 9이닝 동안 124개의 공으로 17개의 탈삼진을 잡았으니까요. 멘탈, 투구 매카닉, 경기 운영 등 흠 잡을 곳이 없는 선수였어요. 메이저리그로 넘어가서는 더 완성도 있는 투구를 선보이고 있고요.”
류현진 이야기가 나온 김에 SK 코치 시절 함께 했던 김광현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갔다. 김 코치는 김광현의 투구 형태가 자신의 전성기 때와 흡사하다고 말한다.
“저도 투 피치였거든요. 다양한 구종을 던지려고 노력했지만 매카닉적인 부분이 떨어지면서 완성도가 낮은 공을 선보이기도 했었죠. 투수한테 필요한 건 파워와 유연성인데 김광현은 유연성만 보완하면 훨씬 좋은 공을 던질 수 있는 선수입니다. 무엇보다 팔꿈치 수술 후 힘든 재활 프로그램을 소화했고, 재기해서 이전보다 더 좋은 공을 던지고 있는 모습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재활 과정은 선수들한테 육체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인 부분도 흔들어대는데 광현이는 그걸 이겨냈고,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재활을 이겨낸 선수는 존경할 수밖에 없어요.”
김 코치는 선수 생활 동안 단 한 차례의 수술도 받지 않았다. 부상으로 쉰 것은 1996년 후반기가 유일했다고. 그가 큰 부상 없이 선수 생활을 마칠 수 있었던 건 남다른 유연성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선수들에게 유연성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선배들처럼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받는 은퇴식을 꿈꿨지만 방출로 끝을 맺었던 선수 생활. 아쉬움이 컸지만 반성과 함께 깨달음도 컸다고 말하는 김상진 코치.(사진=이영미)>
야구 선수들의 로망, 은퇴식
1998년 12월 6억5000만 원에 삼성으로 현금 트레이드 됐던 김 코치는 2002년 SK로 다시 트레이드됐다가 2003시즌을 마치고 유니폼을 벗었다. 그는 구단과 재계약을 못하고 팀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 무렵 (김)태한이 형이 SK 2군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어요. 형을 위로하려고 태한이 형 집이 있는 대구에서 형을 만나 소주를 마시고 있는데 구단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거예요. ‘안타깝게도 구단은 내년 시즌 김상진 선수와 계약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용히 전화를 끊고 나서 형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형, 나도 위로 좀 해줘’라고(웃음). 위로하러 갔다가 위로받고 왔던 일이 기억납니다.”
누구나 선수 생활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싶어 한다. 김 코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선배 윤동균, 박철순의 은퇴식을 보며 감동했고, 자신도 선배들처럼 박수받으면서 물러나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공의 위력이 떨어질수록 그런 박수와 축하는 아무나 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타인이 아닌 제 스스로 은퇴를 결정하고 싶었는데 그걸 이루지 못했어요. 은퇴식은 선수들의 로망이나 마찬가지에요. 아무나 그런 기회를 갖는 게 아니니까. 가장 아쉬운 건 제가 2004년에도 SK에 남아 있었다면 (이)상훈이와 짧게라도 같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상훈이가 LG에서 SK로 트레이드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유니폼을 벗었지만 그 짧은 순간이라도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면 또 하나의 추억을 갖지 않았을까 싶어요.”
만약 OB 베어스와 LG 트윈스의 레전드 매치가 만들어진다면 김 코치는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상대팀 선발로 나오는 이상훈 해설위원과 맞대결을 펼칠 수 있을까? 일부 팬들의 궁금증을 보태 김 코치에게 질문을 건넸다.
“이벤트 차원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가 되기는 할 것 같아요. 선수 때처럼 승부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마음 편히 던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 제 몸 상태로는 마운드에서 포수한테까지 공이 안 갈 것 같은데요?(웃음) 그럼에도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차원이라면 재미있는 승부가 되긴 할 것 같습니다.”
슈퍼스타와 스타의 차이란
2005년 SK 와이번스 투수코치로 지도자 생활에 접어든 김상진 코치. 줄곧 SK에서 코치 생활을 이어가다 2017년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긴 후 2018년 삼성 육성군 코치로 활약했다. 15년 코치 생활의 다음이 감독이길 바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이런 말로 자신의 상황을 정리한다.
“저는 그 위치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대한민국에서 10명만 가질 수 있는 직업인데 제가 어떻게 그 자리에 닿을 수 있겠어요. 감독이 되는 건 모든 부분이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저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젊은 날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었던 부분도 있었고요. 잘 나갈 때, 팔이 건강할 때는 아쉬운 것도 무서운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나고 보면 그때 더 주변 사람들을 돌아봤어야 했더라고요. 사람인지라 그런 깨달음이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게 문제인 것이죠.”
김 코치는 기자에게 “슈퍼스타와 스타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 답을 이렇게 풀어냈다.
“스타는 실력만 있으면 인정받을 수 있지만 슈퍼스타는 실력에다 상대를 존중하고 때로는 고개를 숙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슈퍼스타가 될 수 없었어요.”
김 코치의 아들인 김웅(인천고 3학년)은 투수로 활약 중이다. 프로 선수를 꿈꾸는 아들이 얼마 전 자신의 롤 모델로 이정후를 꼽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들한테 이정후를 롤 모델로 꼽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이종범 대선배님이란 사실을 극복해낸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고 말하더라고요.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아들의 말에 저도 한 마디 보탰습니다. ‘야구인 김상진은 크게 두려울 게 없는데 김웅 아버지 김상진은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다’라고요(웃음).”
다시 베어스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다음날(15일) 있을 시무식에 대한 기대를 부풀렸다. 아직은 실감나지 않은 상태라 베어스 코치 유니폼을 받고 입어봐야 그 감회를 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제 마음 속의 두산 베어스는 언젠가는 가야하고, 가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요. 긴 시간을 돌았지만 어쩌면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몰라요. 두산보다는 제가 더 베어스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니까요. 두산에서의 지도자 생활을 코치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삼고 싶습니다. 선수로서는 이 팀에서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지도자의 마무리는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했으면 좋겠어요(웃음).”
<15일 두산 베어스 창단 38주년 기념식에서 정식 인사를 한 신임 코치들. 왼쪽부터 김상진, 배영수, 공필성 코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