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ude
/Tomas Transtromer
Waking up is a parachute jump from dreams.
Free of the suffocating turbulence the traveller
sinks towards the green zone of morning.
Things flare up. From the viewpoint of the quivering lark
he is aware of the huge root-systems of the trees.
their swaying underground lamps. But above ground
there's greenery--a tropical flood of it--with
lifted arms, listening
to the beat of an invisible pump. And he
sinks towards summer, is lowered
in its dazzling crater, down
through shafts of green damps ages
trembling under the sun's turbine. Then it's checked,
this straight-down joumey through the moment, and the wings spread
to the osprey's repose above rushing waters.
The bronze-age trumpet's
outlawed note
hovers above the bottomless depths.
In day's first hours consciousness can grasp the world
as the hand grips a sun-warmed stone.
The traveller is standing under the tree. After
the crash through death's turbulence, shall
a great light unfold above his head?
서곡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깨어남은 꿈으로부터의 낙하산 강하.
숨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 지도 쪽으로 하강한다.
사물들이 확 불붙는다. 퍼덕이는 종달새의 시점에서
여행자는 나무들의 거대한 뿌리 체계를,
지하의 샹들리에 가지들을 본다.
그러나 땅 위엔 녹음,
열대성 홍수를 이룬 초목들이 팔을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펌프의 박자와 귀 기울인다.
여행자는 여름 쪽으로 하강하고,
여름의 눈부신 분화구 속으로 낙하하고,
태양의 터빈 아래 떨고 있는
습기 찬 녹색 시대들의 수갱(竪坑) 속으로 낙하한다.
시간의 눈 깜빡임을 관통하는
수직 낙하 여행이 이제 멈추고,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 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청동기시대 트럼펫의
무법의 선율이
바닥 없는 심연 위에 부동(不動)으로 걸려 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지듯,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
여행자가 나무 아래 서 있다.
죽음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돌진 후,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여행자의 머리 위로 펼쳐질 것인가?
Five Stanzas to Thoreau
/Tomas Transtromer
Yet one more abandoned the heavy city's
ring of greedy stones. And the water, salt and
crystal, closes over the heads of all who
truly seek refuge.
Silence slowly spiralling up has risen
here from earth's recesses to put down roots and
grow and with its burgeoning crown to shade his
sun-heated doorstep.
Kicks a mushroom thoughtlessly. Thunder clouds are
piling on the skyline. Like copper trumpets
crooked roots of trees are resounding, foliage
scatters in terror.
Autumn's headlong flight is his weightless mantle,
flapping till again from the and ashes
peaceful days have come in their flocks and bathe their
claws in the well-spring.
Disbelief will meet him who saw a geyser
and escaped from wells filled with stones, like Thoreau
disappearing deep in his inner grenness
artful and hopeful.
소로우에 부치는 다섯 개의 연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또 한 사람이 무거운 도시를,
굶주린 돌들의 권투장을 떠났다. 소금기의
맑은 물이 모든 반역자들의
머리 위로 몰려든다.
한가로운 나선 모양을 그리며, 침묵이
땅의 배꼽에서 올라온다. 이곳에 뿌리박고
두터운 나뭇잎 관(冠)읗 만들어, 햇볕 더운
계단을 그늘 지운다.
생각 없는 발이 버섯을 발길질 한다. 천둥 구름이
지평선에 부풀어오르고, 흰 나무뿌리들이
구리 트럼펫처럼 떠는 소리를 낸다. 잎새들이
깜짝 놀라 우스스 흩어진다.
가을의 야성의 비행은 무게 없는 망토.
망토자락 나부끼고 나부껴 서리와 재로부터 마침내
평화로운 날들의 무리가 돌아온다. 돌아와 손발을
샘물 속에 담근다.
믿을 자 없으리라, 간헐천을 보고
소로우처럼 그대가 흐르지 않는 돌우물을 등진다면
믿을 자 없으리라, 솜씨 좋게 희망차서
내면 녹음 깊숙이 그대 사라진다면.
The Stones
/Tomas Transtromer
The stones we threw I hear
fall, glass-clear through the years. In the valley
the confused actions of the moment
fly screeching from
treetop to treetop , become silent
in thinner air than the persent's, glide
like swallows from hilltop
to hilltop until they've
reached the furthest plateaux
along the frontier of being. There all
our deeds fall
glass-clear
with nowhere to fall to
except ourselves.
돌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우리가 던진 돌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세월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골짜기엔
순간의 혼란된 행위들이
나무 꼭대기에서 꼭대기로
날카롭게 소리치며 날아간다. 현재보다
희박한 대기 속에서 입을 다문 돌들이
산꼭대기에서 꼭대기로
제비처럼 미끄러져,
마침내 존재의 변경지대
머나먼 고원에 이른다.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떨어진다,
바로 우리들 자신
내면의 바닥으로.
Morning Approach
/Tomas Transtromer
The black-backed gull, the sun-captain, holds his course.
Beneath him is the water.
The world is still sleeping like a
multicolpured stone in the water.
Undeciphered day. Days--
like aztec hieroglyphs.
The music. And I stand trapped
in its Gobelin weave with
raised ams--like a figure
out of folk art.
아침의 입장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태양 선장, 검은등갈매기가 항로를 잡는다.
갈매기 아래로는 넓은 물,
물 속의 다채색 돌처럼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다.
해독되지 않은 하루, 하루들.
아즈텍 상형문자 같은!
나는 음악의 고블랭 비단
덫에 걸려, 팔을 치켜들고
서 있다. 원시 예술에 나오는
인물처럼.
에필로그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십이월. 스웨덴은 해변에 정박한
삭구(索具)를 뗀 배. 황혼의 하늘을 배경으로
돛대가 날카롭다. 황혼이 낮보다
오래 지속되고, 이곳의 길은 돌투성이.
정오가 지나야 빛이 도착하고,
겨울의 콜로세움이 비현실적인 구름의
빛을 받아 솟아오른다. 즉각
흰 연기가 마을에서 구불구불
치솟는다. 구름이 높고 또 높다.
바다는 다른 무엇에 귀 기울이는 듯 흐트러진 모습으로,
하늘나무의 뿌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영혼의 어두운 면 위로
새 한 마리 날아들어, 잠든 자들을
울음으로 깨운다. 굴절 만원경이
몸을 돌려, 다른 시간을 불러들인다.
때는 여름이다. 산들이 빛으로 부풀어
포효하고, 시냇물이 투명한 손으로
태양의 광휘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영사기의 필름이 다 돌아갔을 때처럼.)
저녁별이 구름 사이로 불탄다.
집들, 나무들, 울타리들이
어둠의 소리없는 눈사태 속에 확대된다.
별 아래 또 다른 숨겨진 풍경이
자꾸자꾸 모습을 드러낸다. 밤의 엑스선에 비친
등고선의 삶을 사는 비밀의 풍경들,
그림자 하나가 집들 사이로 썰매를 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
저녁 여섯시, 바람이
일단의 기병대처럼 어둠 속 마음의 길거리를 따라
천둥처럼 질주한다. 검은 소동이 어찌나
반향하고 메아리치는지! 집들이 꿈속의 소동처럼
부동(不動)의 춤을 추며 덫에 걸려 있다. 강풍 위에
강풍이 만(灣) 위를 비틀거리면서, 어둠 속에서
머리를 까딱거리는 난바다 쪽으로 빠져나간다.
우주공간에서 별들이 필사적인 신호를 보낸다.
별들은 영혼 속을 배회하는
과거의 구름들처럼, 자신이 빛을 가릴 때에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곤두박이
구름들에 의해 명멸한다. 마구간 벽을
지나면서 나는 그 모든 소음 속에서
병든 말이 안에서 터벅터벅 걷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폭풍이 자리를 뜬다. 부서진 대문이
쾅쾅 소리를 내고, 램프가 손에서
대롱거리고, 산 위의 짐승이 겁에 질려
울부짖는다.폭풍이 퇴각하면서
외양간 지붕 위에 천둥이 구르고,
전화선들이 포효하고, 지붕 위의
타일들이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고,
나무들이 속절없이 머리를 까딱거린다.
백파이프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백파이프 소리가 길을 걷는다! 해방자들의
행렬! 숲의 행진!
활 같은 파도가 들끓고, 어둠이 꿈틀대고,
수륙(水陸)이 움직인다. 갑판 밑으로 사라져
죽은 자들, 그들이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한다.
우리와 함께 길을 걷는다. 항해는, 야성의 돌진이 아니고
고요한 안전을 가져다주는 여행.
세계가 끊임없이 텐트를 새롭게
친다. 어느 여름날 바람이 상수리 나무 장비를
움켜잡고, 지구를 앞으로 민다.
백합이 연못의 포옹 속에서, 날아가는 연못의 포옹 속에서
감추어진 물갈퀴로 헤엄친다.
표석(漂石)이 우주의 홀에서 굴러내린다.
여름날 황혼에 섬들이 수평선 위로
솟아오른다. 옛 마을들이 길을 간다.
까치소리 내는 계절의 바퀴를 타고
숲 속 깊숙한 곳으로 퇴각한다.
한 해가 자기 부츠를 벗어던지고
태양이 높이 솟아오를 때, 나무들은 잎사귀로
피어나 바람을 받고 자유의 항해를 떠난다.
산 아래 솔숲 파도가 부서지지만,
여름의 깊고 따뜻한 큰 파도가 오고,
큰 파도가 천천히 나무 꼭대기들 사이를 흐르고, 일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가라앉는다.
남는 건 잎사귀 없는 해안뿐. 결국,
성령(聖靈)은 나일강 같은 것, 여러 시대의
텍스트들이 궁리한 리듬에 따라
넘치고 가라앉는다.
하지만 신(神)은 또한 불변의 존재이고,
따라서 이곳에선 좀처럼 관찰되지 않는다. 신은
옆구리로부터 행렬의 진로를 가로지른다.
기선(氣船)이 안개 속을 통과할 때
안개가 알아채지 못하듯. 정적.
등불의 희미한 깜빡거림이 그 신호.
고독한 스웨덴의 집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뒤엉킨 검은 가문비나무와
연기 뿜는 달빛.
이곳에 나지막이 엎드린 작은 집이 있고
한 점 삶의 기미도 없다.
이윽고 아침 이슬이 웅얼거리고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열어
올빼미를 내보낼 때까지.
멀리 떨어진 곳에는 새 건물이
김을 내뿜으며 서 있고,
세탁소의 나비가
모퉁이에서 퍼드덕거린다.
죽어가는 숲의 한가운데서
퍼덕이는 나비, 그곳에서 썩어가는 것이
수액(樹液)의 안경을 통해
나무껍질 뚫는 기계의 작업을 읽는다.
짖어대는 개 위로
삼단 같은 머리결의 비 또는
한 점 고독한 천둥구름을 동반한 여름이 있고,
씨앗이 땅 속에서 발길질하고 있다.
흔들리는 목소리들, 얼굴들이
황야의 먼 거리를 가로질러
발육부진의 잽싼 날갯짓으로
전화선 속을 날아간다.
강 속에 있는 섬 위의 집이
자신의 초석(礎石)을 골똘히 생각한다.
끊이지 않는 연기, 누군가가
숲의 비밀문서를 태우고 있다.
비가 하늘을 선회하고
불빛이 강 속에서 사리를 튼다.
비탈 위의 집들이
폭포의 흰색 황소들을 감독한다.
일단의 찌르레기 무리를 거느린 가을이
새벽을 저지하고,
사람들이 불 켜진 극장에서
굳은 동작으로 움직인다.
이들이 경보(警報)없이
위장한 날개들을 느끼고,
어둠 속에 사리를 튼
신(神)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라.
기상도(氣象圖)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시월 바다가 신기루 등지느러미를 달고
차갑게 반짝인다.
아무것도 요트 경기의
백색 현기증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스푸레한 호박(琥珀) 빛이 마을 위를 비추고,
온갖 음향들이 천천히 날아다닌다.
개가 짖는 소리는 정원 위의
대기 중에 그려진 상형문자.
정원에는 노란 과일이 나무를
바보 만들며 제 멋대로 떨어진다.
낮잠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돌들의 성령강림절, 불꽃 튀기는 혀들---
한낮의 시간 동안, 무중력의 도시.
부글거리는 빛 속의 매장, 자물쇠 채워진
영원의 탕탕 주먹소리를 익사시키는 북소리.
독수리가 잠든 자들 위로 솟구치고 또 솟구친다.
물레방아 바퀴가 천둥처럼 돌아가는 곳에서의 잠.
두 눈 가린 말들의 유린.
자물쇠 채워진 영원의 탕탕 주먹소리.
잠든 자들이 폭군의 시계 속 시계추마냥 매달려 있다.
독수리가 태양의 백색 물결 흐름 속을 죽어서 떠내려간다.
라자로의 관 속에서처럼 시간 속에서,
자물쇠 채워진 영원의 탕탕 주먹소리들의 메아리.
길 위의 비밀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한낮의 빛이 잠자는 사람의 얼굴을 강타하였다.
그의 꿈이 더욱 생생해졌지만
그는 잠깨지 않았다.
어둠이 태양의 강렬한
참을성 없는 광선 속을 남들과 더불어
걷는 사람의 얼굴을 강타하였다.
갑자기 억수처럼 어둠이 내렸다.
나는 모든 순간을 담고 있는 방,
나비 박물관 속에 서 있었다.
태양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강렬하였다.
태양의 참을성 없는 붓들이 세상을 그리고 있었다.
선로(線路)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새벽 두시. 달빛. 열차가 평원 한가운데 멈추어 섰다.
멀리 시가지의 불빛들이
지평선 위에 차갑게 깜빡인다.
마치 어떤 사람이 너무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갔을 때,
자기 방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이
그 꿈속에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듯.
아니면 어떤 사람이 너무 깊은 병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의 생애 모두가 몇 개의 깜빡이는 점들, 지평선 위
작고 차가운 불씨 때가 되듯.
열차는 완전 부동(不動)으로 서 있다.
새벽 두시, 환한 달빛 속, 별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발병(發病) 이후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병이 난 소년,
뿔처럼 딱딱한 혀를 가지고
비전 속에 감금되어 있다.
소년은 밀밭 그림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턱을 둘러싼 붕대가 방부 처리를 짐작케 한다.
안경은 잠수부 안경처럼 두툼하다. 어둠 속에 울리는 전화벨처럼
만사가 대답 없이 요란하다.
하지만 소년 뒤의 그림,
그림은 밀밭이 황금 폭풍일지라도 보는 사람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한 폭의 풍경화.
청색 해초 같은 하늘과 떠다니느 구름들.
아래쪽 황색 파도 속에는
백색 셔츠가 몇몇 항해하고 있다.
추수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림자를 던지지 않는다.
밀밭 건너 멀리 한 남자가 서 있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
챙 넓은 모자가 남자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다.
도움이라도 주려는 양, 남자는 이곳 방 속의 어두운 형체를 관찰하는 모습이다.
자기 몰두의 병약한 소년 뒤에서, 모르는 사이에
그림이 차츰 확대되면서 열리기 시작한다.
그림이 불꽃을 튀기면서 탁탁 소리를 낸다.
소년을 깨우려는 듯, 밀알 하나하나 불타오른다!
밀밭 속의 남자가 사인을 보낸다.
그가 가까이 와 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여행의 공식
-1955년 발칸 반도에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쟁기꾼 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들.
쟁기꾼은 둘러보지 않는다. 빈 들판을.
쟁기꾼 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들.
하나씩 하나씩 그림자들이 풀려
여름 하늘의 심연 속으로 돌진한다.
2
하늘 아래 네 마리 황소들이 온다.
황소들에겐 자랑스런 기색이 조금도 없다. 양모처럼
두터운 흙, 곤충들의 펜이 긁어댄다.
역병의 회색 알레고리 속에서처럼 야윈,
한 떼의 말들의 소용돌이.
말들에겐 부드러운 구석이 전혀 없다. 태양의 광란.
3
깡마른 개들이 있는, 마구간 냄새 풍기는 마을.
장터 광장의 당(黨) 간부.
백색 가옥들이 있는 마구간 냄새 풍기는 마을.
당 간부의 천국이 그를 수행한다. 천국은
첨탑 내부처럼 높고 협소하다.
산허리의 날개 끄는 마을.
4
한 고가(古家)가 이마를 불쑥 내밀었다.
두 소년이 황혼 속에 공차기를 한다.
한 무리의 신속한 메아리들. 갑작스런, 별빛.
5
긴 어둠 속의 길 위, 내 손목시계가
시간의 감금된 곤충과 더불어 완고히 빛을 발한다.
붐비는 차칸 속의 정적이 조밀하다.
어둠 속에 초원들이 흘러 지나간다.
하지만 작가는 반쯤 자신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동시에 독수리 겸 두더지 되어 길을 간다.
커플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들이 불을 끄자 불빛의 흰 그림자가
어둠의 유리잔 속 알약처럼
잠시 깜빡거리다 용해된다. 다음은 상승.
호텔 벽들이 하늘의 어둠 속으로 치솟는다.
사랑의 동작이 잦아들고, 그들은 잠이 든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내밀한 생각들은 만난다.
학교 다니는 아이가 그림 그릴 때 젖은 종이 위에서
두 색채가 만나 서로서로의 속으로 흘러들 때처럼.
어둠고 조용하다. 그러나 불 꺼진 창들과 더불어
도시가 오늘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집들이 다가왔다.
집들이 무리지어 가까이 서서 기다린다.
표정 없는 얼굴의 군중들.
정오의 해빙(解氷)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아침 공기가 타오르는 우표를 붙인 자기 편지를 배달했다.
눈(雪)이 빛났고, 모든 짐들이 가벼워졌다.
일 킬로그램은 칠백 그램밖에 나가지 않았다.
태양이 빙판 위로 높이 솟아, 따뜻하면서도 추운 지점을 배회했다.
마치 유모차를 밀듯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나왔다.
가족들이 밖으로나왔고, 수세기만에 처음인 듯 탁 트인 하늘을 보았다.
우리는 마음을 아주 사로잡는 이야기의 첫 장(章)에 자리하고 있었다.
꿀벌 위의 꽃가루처럼 모피모자마다 햇살이 달라붙었고,
햇살은 겨울이라는 이름에 달라붙어,
겨울이 떠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눈 위의 통나무 정물화가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물었다.
'내 유년 시절까지 따라올래?' 통나무들은 대답했다.'응'
잡목 덤불 속에는 새로운 언어로 중얼거리는 말들이 있었다.
모음은 푸른 하늘, 자음은 검은 잔가지들,
그리고 건네는 말들은 눈 위에 부드러웠다.
하지만 소음의 스커트 자락으로 예(禮)를 갖춰 인사하는 제트기가
땅위의 정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비가(悲歌)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가 펜을 치웠다.
펜이 탁자 위에서 조용히 쉬고 있다.
펜이 텅 빈 방에서 조용히 쉬고 있다.
그가 펜을 치웠다.
쓸 수도 침묵할 수도 없는 일들이 이토록 많다니!
멋진 여행 가방이 심장처럼 고동치지만,
그의 몸은 먼 곳에서 일어나는 무슨 일로 뻣뻣해진다.
밖은 초여름.
초목에서 들려오는 휘파람소리, 사람인가,새인가?
꽃핀 벚나무가 집에 돌아온 짐차를 껴안는다.
몇 주가 지나간다.
밤이 서서히 다가온다.
나방들이 창유리에 자리잡는다.
세상이 보내온 조그만 창백한 전보들.
미완의 천국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절망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고통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독수리가 제 비행을 멈춘다.
열망의 빛이 흘러나오고,
유령들까지 한 잔 들이킨다.
빙하시대 스튜디오의 붉은 짐승들,
우리 그림들이 대낮의 빛을 바라본다.
만물이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수백씩 무리지어 햇빛 속으로 나간다.
우리들 각자는 만인을 위한 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
발밑엔 무한의 벌판.
나무들 사이로 물이 번쩍인다.
호수는 땅 속으로 통하는 창(窓).
야상곡(夜想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밤중에 차를 몰고 마을을 지난다.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집들이 일어선다. 집들이 잠 깨어 마실 것을 찾는다.
집들, 곳간들, 표지판들, 버려진 차들, 지금이 바로
이들이 생명의 옷으로 갈아입는 때이다. 사람들은 잠들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평화의 잠을 자고, 어떤 사람들은
영원을 위한 고된 훈련 중인 듯 얼글을 찡그린다.
이들은 깊은 잠 속에서도 놓여나지 못하고,
신비가 지나갈 때 아래로 내려진 건널목 차단기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마을 바깥으로는 멀리 숲 속으로 길이 뻗어 있다.
나무들, 서로서로 한마음으로 침묵을 지키는 나무들.
이들의 색깔은 불붙은 나무들처럼, 연극색!
잎사귀 하나하나가 어찌나 또렷한지! 나무들은 바로 집까지 따라온다.
잠자리에 드러눕는다. 눈꺼풀 너머로 어둠의 벽 위에
알 수 없는 그림들과 알 수 없는 기호들이 휘갈겨진다.
깨어 있음과 꿈 간의 작은 틈새로
커다란 편지가 밀고 들어오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아프리카 일기 중에서
(1963년)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콩고의 장터 예술가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곤충처럼 조그맣게 움직인다. 인간의 에너지를 빼앗긴 듯.
두 가지 생활양식 간의 힘든 길.
도달한 자는 먼길을 가야만 한다.
한 아프리카 청년이 오두막 사이에서 길 잃은 외국인을 발견했다.
청년은 친구로 여겨야 할지 협박 대상으로 여겨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이것이 청년을 당혹케 했다. 둘은 혼란 속에 헤어졌다.
유럽 사람들은 마치 엄마라도 되는 양 차 둘레에 주렁주렁 매달린다.
매미는 전기면도기만큼 강하다. 차들이 돌아간다.
머잖아 아름다운 어둠이 오고, 불결한 빨랫감을 떠맡는다.
잠.
도달한 자는 먼길을 가야만 한다.
어쩌면 철새 무리 같은 악수가 도움될지 모른다.
어쩌면 진리를 책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도움될지 모른다.
우리는 더 멀리 가야만 한다.
학생이 밤중에 책을 읽는다.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읽고 또 읽는다.
시험이 끝나면 학생은 다음 사람을 위한 계단이 된다.
힘든 길.
도달한 자는 먼길을 가야만 한다.
겨울의 공식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침대 속에서 잠들었고
용골(龍骨) 아래서 잠깨었다.
새벽 네시.
살을 깨끗이 발라낸 삶의 뼈들이
차갑게 상호 교제한다.
제비들 속에서 잠들었고
독수리들 속에서 잠깨었다.
2
램프불빛 아래 길 위의 얼음이
돼지기름처럼 빛난다.
이곳은 아프리카가 아니다.
이곳은 유럽이 아니다.
이곳은 '이곳'이외의 어느 곳도 아니다.
그리고 '나'였던 것은
십이월 어둠의 입 속에서
한 마디 말에 불과할 뿐.
3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낸
병원 가건물이
텔레비전 화면처럼 빛난다.
큰 추위 속에
감추어진 소리굽쇠가
음(音)을 내보낸다.
나는 별이 총총한
아늘 아래 서서
세계가 내 코트 안팎을
개미집처럼 들락거리는 것을 느낀다.
4
눈(雪) 밖으로 튀어나온 검은 상수리나무 세 그루.
투박한 거구지만, 민첩한 손가락을 가졌다.
넉넉한 나무 병(甁)들로부터 봄이면
초록 거품 터지리라.
5
버스가 겨울 저녁을 뚫고 기어간다.
좁고 깊은 죽은 운하 같은 가문비나무 숲길에서
버스가 배처럼 깜빡거린다.
몇 안 되는 승객, 몇 안 되는 노인, 몇은 아주 젊은이.
만일 버스가 멈추어 불을 끈다면
세계가 삭제되리라.
역사에 대하여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삼월 어느 날 바다로 내려가 귀 기울인다.
얼음이 하늘처럼 푸르다. 태양 아래 부서지고 있다.
태양이 얼음 밑의 마이크에 대고 속삭인다.
거품이 일고 부글부글 들끓는다. 멀리서 시트를 잡아채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 모든 것이 '역사'와 같다 우리들의 '지금'. 우리들은 그 속으로 내려가 귀 기울인다.
2
회담들은 불안하게 날아다니는 섬들.
나중엔, 타협의 기나긴 흔들리는 다리.
모든 차량이 그 다리 위를 지나간다. 별들 아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창백한 얼굴들 아래,
쌀알처럼 이름 없이 텅빈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얼굴들 아래.
3
1926년, 괴테는 지드로 변장하고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모든 것을 보았다.
어떤 얼굴들은 사후에 본 것으로 하여 더욱 분명해진다.
알제리 소식이 나날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큰 저택 한 채가 보이고, 저택의 창들은 하나만 빼고
모두 검었다. 그 창에서 우리는 그레퓌스의 얼굴을 보았다.
4
급진과 반동은 불행한 결혼 속에 동거한다.
서로를 갉아먹으면서, 서로에게 기대면서.
하지만 그 자식들인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모든 문제는 자신의 언어로 소리치는 법!
진실의 흔적을 따라 탐정처럼 길을 가라.
5
건물에서 멀지 않은 공터에
신문지 한 장이 몇 달째 누워 있다. 사건을 가득 담고
빗속 햇빛 속에 밤이나 낮이나 신문은 그곳에서 늙어간다.
식물이 되어가는 중이고, 배추가 머리가 되어가는 중이고, 땅과 하나 되어가는 중이다.
옛 기억이 서서히 당신 자신이 되듯.
몇 분간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늪에 웅크린 소나무가 왕관을 떠받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뿌리에 비한다면, 넓게 뻗은, 은밀히 기어가는, 죽지 않는, 혹은 반쯤 죽지 않는
뿌리 조직에 비한다면.
나 너 그 그녀 역시 가지를 뻗는다.
의지 바깥으로,
대도시 바깥으로.
우유 빛 여름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진다.
나의 다섯 감각들이 다른 생명체에 연결된 듯한 느낌이 온다.
어둠이 흘러내리는 운동장에서 밝은 옷을 입고 달리는 육상선수처럼
끈질기게 움직이는 다른 생명체에 연결된 듯한 느낌.
칠월, 숨쉬는 공간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키 큰 나무 아래 등을 대고 드러누운 사람은
또한 나무 위에 올라가 있기도 하다. 사람은 수천의 잔가지를 뻗고
앞뒤로 흔들리고,
느린 동작으로 밀려나오는 사출좌석(射出座席)에 앉는다.
부둣가에 내려가 앉은 사람은 실눈을 뜨고 물을 바라본다.
부두는 사람보다 빨리 늙는다.
부두의 말뚝들은 은회색, 뱃속에는 둥근 돌이 들어 있다.
눈부신 빛이 곧장 관통한다.
갑판 없는 작은 배를 타고 번쩍이는 해협을
온종일 돌아다니는 사람은
마침내 푸른 램프 속에서 잠들리라.
섬들이 램프 유리 너머로 거대한 나방처럼 기어다니는 동안
야간 근무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밤중에 모래자루들 사이로 내려간다.
나는 배의 전복을 막는
말없는 무게 추들 중의 하나!
흐릿한 얼굴들이 어둠 속에 돌처럼 움직인다.
그들이 전하는 소리는 다만, '손대지 마.'
2
다른 목소리들이 몰려든다. 듣는 자는,
희미한 빛을 발하는 라디오 다이얼 위로
수척한 그림자처럼 미끄러진다.
언어가 사형집행인들과 보조를 맞추어 행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만 한다.
3
늑대가 왔다!
창문에 혀를 대고 비비는 우리들의 친구!
골짜기엔 기어다니는 도끼 자루들이 가득하다!
야간 비행기가 철테 달린 휠체어처럼
밤하늘에 느릿한 굉음을 쏟아 붓는다
4
사람들이 땅을 파헤치는 중이다. 지금은 조용하다.
텅 빈 교회묘지 느릎나무 아래
빈 굴착기 한 대, 손을 땅에 내려놓고 있다.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식탁에서 잠든
사람의 모습, 교회 종이 울린다.
서곡(序曲)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진눈깨비 속에서 옆으로 질질 발을 끌며 다가오는 그 무엇에 나는 멈칫한다.
다가올 일의 단편.
허물어지는 벽. 눈 없는 그 무엇. 단단한.
이빨의 얼굴!
홀로인 벽. 아니면 집인가,
내가 볼 수 없어도?
미래. 일군(一群)의 빈집들.
눈을 맞으며 앞으로 길을 더듬어 나가는.
2
두 가지 진실이 서로 접근한다. 하나는 내부에서 하나는 외부에서.
두 진실이 만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기회를 갖는다.
일어날 일을 아는 사람이 격렬하게 외친다. '멈춰!
내 자신을 알 필요만 없다면, 무슨 일이라도!'
물가에 정박하고 싶은 배가 있다. 바로 여기서 정박을 시도한다.
앞으로도 수천 번 시도하리라.
숲의 어둠으로부터 길다란 갈고리 장대가 나타난다. 열린 창을 밀고 들어와,
춤으로 몸 덥히는 파티 손님들 사이에 섞인다.
3
내 삶의 대부분을 살아온 아파트가 철거되려 한다. 벌써 많은 것이 비었다.
닻이 풀렸다. 계속되는 슬픔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이 아파트는 도시 전체에서
가장 밝은 아파트다. 진실은 가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삶은 큰 원을 한
바퀴 그리고, 막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날아가 버린 방. 이곳에서 내가 살 비
비며 살아온 물건들이 이집트 그림들처럼, 묘지 내실(內室)의 장면들처럼, 벽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빛이 너무 강하여 그림이 점점 흐릿해진다. 창
들이 훨씬 커졌다. 빈 아파트는 하늘을 향한 커다란 망원경. 퀘이커 교도들의
예배 때처럼 사방이 조용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뒤뜰에서 비둘기들이 구구대는
소리뿐.
똑바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순간적 집중으로 닭을 잡는 데 성공했다.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기묘하게도
닭은 살아 있는 느낌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뻣뻣하고 메마른 느낌이 흡사
1912년의 진실을 외쳐댄 흰 깃털장식의 낡은 여성모자 같았다. 천둥이 허
공에 걸려 있었고, 울타리 널빤지에서 냄새가 피어올랐다.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낡아버린 사진첩을 열 때처럼.
닭을 들고 닭장 속으로 다시 데려가 놓아주었다. 갑자기 닭이 생기를 되찾
았다. 자기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규칙에 따라 쫓아다녔다. 닭장
은 금기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주변은 사랑과 끈기로 가득하다. 온통 초록 잎
새들로 뒤덮이다시피 한 나지막한 돌담. 황혼이 내릴 때면 담을 만든 손의
백 년 된 온기로 돌들은 희미한 빛을 발한다.
겨울은 힘들었지만 이제 여름이 오고, 땅은 우리가 똑바로 걷기를 원한다. 마치
작은 보트 안에 서 있을 때처럼 자유롭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아프리카의 어
느 날이 떠오른다. 샤리 강변에 수많은 보트들이 있고, 우호적인 분위가 있고, 거
의 암청색 피부의 사람들이 있다. 양 뺨에 세 개씩 평행선 상처를 새겨 사
라족임을 나타낸다. 나는 환영받으며 보트에 오른다. 숲의 검은 목재로 만든 카
누는,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도 못 믿을 정도로 흔들린다. 균형 잡기 동작, 만일 심
장이 왼쪽에 있다면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여야 하고, 호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어야
하고, 팔 동작도 크지 않아야 하고, 모든 수사(修辭)도 재쳐두어야 한다. 바로
이것, 이곳에선 수사 있을 수 없다. 카누가 물위로 미끄러져 나간다.
더 깊은 곳으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도시로 들어가는 간선도로,
해가 낮게 걸려 있다.
차들이 몰려들어 기어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느릿느릿 꿈틀대는 한 마리 번쩍이는 용.
나는 용비늘 중의 하나,
돌연 붉은 해가
바람막이 창을 불태우며
쏟아져 들어온다.
내가 투명해진다.
내 속의
글이 보인다.
투명 잉크로 쓰여진 말들,
종이를 불태우면
형체가 나타나리라!
멀리 가야겠다.
도시를 곧장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그리고 때가 되면 차를 내려
숲 속 멀리까지 걸으리라.
오소리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보면,
어둠이 내리고 앞이 보이지 않고,
저 안쪽 이끼 위에는 돌들이 놓여 있고,
그 중에 하나는 보석!
그 돌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어둠을 빛나게 할 수 있다.
그 돌은 나라 전체를 위한 스위치.
모든 것이 그 돌에 달려 있다.
들여다봐, 만져 봐.
땅을 뚫고 바라보기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흰 태양이 스모그에 젖는다.
햇빛이 뚝뚝 떨어지고, 아래쪽으로 길을 더듬어
깊숙한 내 눈에 닿는다.
도시 아래 깊은 곳에 내려가 위를 쳐다보는,
밑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눈. 길거리들, 건물 기초들,
이것은 흡사 전시(戰時)의 도시를 찍은 항공사진,
거꾸로 찍은, 말하자면 두더지 사진.
흑백의 말없는 사각형들.
그곳에서 결정이 내려진다. 죽은 자의 뼈와
산 자의 뼈를 분간할 수 없다.
햇빛의 볼륨이 높여지고,
항공기 선실 속으로, 낚싯배 속으로 범람해 들어간다.
늦은 오월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사과나무 벚나무 꽃피어 마을이 날아오른다.
하얀 구명의(求命依) 같은 아름답고 지저분한 오월 밤, 나의 생각들이 바깥을 떠돈다.
고요하고 완강하게 날갯짓하는 풀잎들 잡초들.
편지함이 침착하게 반짝인다. 쓰여진 것은 되돌릴 수 없다.
부드럽고 서늘한 바람이 셔츠 속으로 들어와 가슴을 더듬는다.
사과나무 벚나무, 그들은 말없이 솔로몬을 비웃는다.
그들은 나의 터널 속에서 꽃핀다. 나는 그들이 필요하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건널목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토록 오래 나를 따라왔던 길거리,
그린란드의 여름이 눈 웅덩이에서 빛나는 길거리를 건널 때,
얼음바람이 내 눈을 치고
두세 개의 태양이 눈물의 만화경 속에 춤춘다.
내 주변으로 길거리의 온 힘이 몰려든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힘.
차량들 아래 땅 속 깊은 곳,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숲이 조용히 천 년을 기다린디.
거리가 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의 시력은 너무 빈약하여 태양도
검은 공간의 회색 공일 뿐.
그러나 일순 내가 빛난다! 거리가 나를 본다.
늦가을 밤의 소설, 그 시작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배에서 기름 냄새가 난다. 무언가가 내내 강박관념처럼 덜거덕거린다.
스포트라이트가 켜진다. 우리는 선착장에 다가선다.
여기서 내릴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트랩 드릴까요?' 됐습니다.
나는 기우뚱 큰 걸음을 곧장 밤 속으로 내딛는다. 선착장 위에,
섬 위에 올라와 있다. 뭔가 축축하고 주체할 수 없는 느낌이 든다.
나는 고치에서 막 기어나온 한 마리 나비.
손에 든 플라스틱 옷가방은 아직 덜 생긴 날개. 몸을 돌려 창에 불을 환하게 켜고
돌아가는 배를 지켜본다. 어둠 속에 길을 더듬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집을 향한다.
오랫동안 비워둔 집. 이 부근에는 지금 집들이 모두 비어 있다---. 이곳에서
잠자는 일은 아름다운 일. 나는 등을 대고 드러눕는다.
잠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불확실하다. 방금 읽은 몇 권의 책이
버뮤다 삼각해역을 향하는 낡은 범선처럼 항해한다.
그곳에 이르면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어떤 소리가 들린다.
속이 빈, 멍한 북소리, 바람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어떤 물체를 땅이 움켜잡고 있는
다른 물체에 갖다 부딪친다. 만일 밤이 단순히 빛의 부재가 아니라면,
만일 밤이 진실로 그 무엇이라면, 바로 이소리이리라.
청진기를 통해 들려오는 느린 심장 고동소리. 고동치고, 일순 멎고, 되돌아 온다.
마치 그 존재가 지그재그를 그리며 경계를 넘어가는 듯.
어쩌면 저기에 누군가가 있는지 모른다. 벽 속에서, 자꾸 두드리는,
딴 세상에 속하는, 어떤 사정으로 이곳에 남겨진, 벽을 두드려, 돌아가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너무 늦어 여기 내려올 수도, 저기 올라갈 수도,
때맞추어 배를 탈 수도 없었다----. 딴 세상은 또한 이 세상이기도 하다.
다음날 아침, 황금 잎사귀 갈색 잎사귀를 닫고 있는
녹슨 것 같은 나뭇가지가 보인다. 하늘을 향한 일군의 뿌리들.
얼굴 가진 돌들. 숲은 배가 떠날 때에 남겨 두고 간
내가 사랑하는 괴물들로 가득하다.
슈베르트 연구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저녁 어둠 속 뉴욕을 벗어나 팔백 만이 살아가는 집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한 조망 지점.
저 거대한 도시는 희미하게 빛나는 하나의 긴 부유물, 옆구리에
서 바라본 나선형 은하수.
은하수 속에서는 커피 잔들이 카운터 위를 오가고, 숍 윈도우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흔적 남김 없이 지나가는 구두들에게 구걸한다.
화재 탈출계단이 솟아오르고, 엘리베이터 문이 미끄러져 닫히고,
삼겹 자물쇠 채운 문 뒤에서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끓어오른다.
돌진하는 카타콤*, 지하철 전동차 속에서 구부린 몸들이 꾸벅거린다.
통계가 없어도 나는 또한 알고 있다, 바로 이 순간 저쪽 어떤 방에
서는 슈베르트가 연주되고 있음을,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슈베르트 선율
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한 실재(實在)임을.
2
인간 두뇌의 광막한 평원이 접고 또 접혀 주먹 크기만하게 되었다.
사월이면 제비가 지난해의 둥지로 돌아와 바로 이 교구 바로 이 헛
간의 처마 밑을 찾아든다.
제비는 트란스트발을 출발하여 적도를 지나고, 육 주간 두 대륙 상공을
날고, 계속 항해하여 거대한 땅덩어리 끝에서 사라져 가는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향한다.
그리고 그 남자, 전 생애의 부호들을 한데 끌어모아 다섯 현악기를 위
한 꽤나 흔한 몇몇 음표로 압축시킨 사람,
바늘 귀 속으로 강을 흐르게 한 그 사람은
비엔나 출신의 몸매 풍성한 젊은 양반이었고, 친구들한테 '작은 버섯'이
라 불렸고, 안경 낀 채 잠들었고, 아침이면 정확히 제 시간에 높다란
작업대 앞에 섰다.
그렇게 했을 때, 경이의 지네들이 종이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3
현악 오중주가 연주되고 있다. 나는 탄력 있는 땅을 딛고 따뜻한
숲을 통해 집으로 걷는다.
태아처럼 웅크리고, 잠에 빠져, 중량없이 미래로 굴러 들어가,
불현듯 식물들도 생각이 있음을 깨닫는다.
4
그토록 많은 것들을 믿어야 한다. 땅 밑으로 가라앉지 않고 단지
나날의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마을 위쪽 산비탈에 달라붙은 쌓인 눈을 믿어야 한다.
침묵의 약속들과 이해의 미소를 믿어야 하고, 사고 전보가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하고, 안으로부터 돌연한 도끼의 타격이
오지 않을 것임을 믿어야 한다.
고속도로 위 삼백 배로 확대된 강철 벌떼 속에서 우리를 데리고
달리는 차축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 중 어느 것도 진실로 우리의 믿음에 값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다른 무엇을 믿을 수 있다고 다섯 현악기들이 말한다. 그
리고 무엇으로 가는 길을 얼마간 우리와 동행한다.
마치 계단에 불이 나갔을 때. 어둠 속의 길을 찾아나가는 눈먼
난간을 우리의 손이 믿고 따르듯,
5
우리는 피아노로 몰려들어 네 개의 손으로 F 단조를 연주한다. 한
마차 속의 두 마부처럼 약간은 우스꽝스럽다.
손들이 음(音)의 추를 앞뒤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행(幸)
불행(不幸)의 무게가 정확히 똑같아서
무서운 균형을 이루고 있는 큰 저울에 작은 변화를 주려고 우리가 납
의 추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애니가 말했다. '이 음악은 너무나 영웅적이예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행동의 인간들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 살인자가
되지 못해 스스로를 경멸하는 사람들.
또 사람을 사고 파는 사람들, 그리고 어떤 사람이라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은 여기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의 음악이 아닌 것이다. 그 모든 변주 속에서도 때로는 반짝이며
부드럽고 때로는 거칠고 힘찬, 저 긴 멜로디의 선, 달팽이의 흔적과
강철 철사의 모든 변주 속에서도 끝내 자기 자신으로 남는 멜로디.
완고한 멜로디가 바로 이 순간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한다.
위로 솟아 오른다.
심연 속으로.
숲 속의 집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곳으로 가는 길에 놀란 날개들이 두어 번 퍼드덕거렸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곳은 혼자 가는 곳이다. 그곳에 있는 키 큰 빌딩은 완
전히 균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 빌딩은 언제나 기우뚱거리지
만 붕괴 능력이 전혀 없다. 천 개로 변한 태양이 갈라진 틈으로
들어온다. 이 햇빛 놀이에서는 전도된 만유인력의 법칙이 지배한
다. 집이 하늘에 닿은 채 떠 있고, 떨어지는 것은 무엇이나 위로
떨어진다. 이곳에선 빙그르르 돌 수 있다. 이곳에선 울 수도 있다.
이곳에선 우리가 보통 보따리 싸서 꽁꽁 묶어두는 오래된 진실들을
볼 수도 있다. 저 아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내 역할들도 날아
올라, 머나먼 멜라네시아의 작은 섬 어떤 납골당 속의 바싹 마
른 두개골처럼 내걸린다. 어린애 같은 햇빛이 무시무시한 트로피를
감싼다. 숲은, 그렇게 온화하다.
오르간 독주회의 짧은 휴지(休止)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오르간 연주가 멈추고 교회 속은 죽음 같은 정적, 그러나 그건 잠시뿐,
덜컹거리는 희미한 소리가 더 큰 오르간, 바깥쪽 차량들로부터 뚫고 들어온다.
우리는 차량의 중얼거림에 둘러싸여 있고, 그 소리는 교회 벽을 따라 흐른다.
바깥세상이 그곳에서 투명한 필름처럼, '매우 약하게'되려 애쓰는
그림자들과 더불어 미끄러진다.
거리 소음의 일부인 양, 고요 속에 고동치는 내 맥박소리를 듣는다.
나와 함께 걸어다니는, 내 속에 숨은 작은 폭포, 내 피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내 피만큼 가까이, 네 살 때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트레일러가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소리를, 지나가며 육백 년 된
교회 벽이 떨리게 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건 어머니의 무릎보다 못할 게 없지만, 그래도 이 순간 나는 아이가 되고,
어른들 이야기 소리를 멀리서 듣고, 승자와 패자의 뒤섞인 목소리를 듣는다.
푸른색 벤취 위엔 드문드문 신자들이 앉아 있고,
교회 기둥들이 이상한 나무들처럼 솟아 있다.
뿌리도 없고 꼭대기도 없이, 다만 흔한 바닥과 흔한 지붕뿐.
하나의 꿈을 다시 산다. 교회묘지에 내가 홀로 서 있다.
사방엔 시야가 닿는 데까지
히스가 타오르고 있다. 지금 누굴 기다리는 거지?
친구, 왜 오지 않는 거지? 벌써 와 있어.
서서히 죽음이 밑으로부터, 땅으로부터 빛을 피워 올린다.
히스가 빛난다. 점점 더 강한 자줏빛으로,
아니,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어떤 색깔로---- 이윽고 아침의 창백한 빛이 흐느끼며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고
나는 깨어난다. 흔들리는 세상 속으로 나를 데려가는
저 흔들림 없는 '어쩌면'의 세계로.
추상적인 세계 그림은 어느 것이든 폭풍의 청사진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집에는 만물박사 '백과사전', 일 야드의 서가(書架)가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책 읽기를 배웠다.
그러나 우리들은 저마다 자신의 백과사전을 쓰고,
백과사전은 각자의 영혼에서 자라나오고,
백과사전은 태어날 때부터 쓰여지고, 수천수만 장의 페이지들이
서로를 압박하며 서게 된다.
그래도 그 사이엔 공기가! 숲 속의 떨리는 잎새들처럼 모순의 서(書).
거기에 있는 것은 매 시간 변하고, 그림들은 자신을 다시 만지고,
말들은 깜빡거린다.
한 파도가 전(全) 텍스트를 덮치고, 다음 파도가 뒤따르고, 또 다음---.
답장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책상 맨 밑바닥 서랍에서 26년 전에 처음 도착한 편지를 만난다.
겁에 질린 편지, 편지는 두 번째 도착한 지금도 여전히 숨쉬고 있다.
집에 다섯 개의 창이 있다 창을 통하여 낮이 청명하고 고요하게 빛
난다. 다섯 번째 창은 검은 하늘, 천둥 그리고 구름을 마주하고 있다,
나는 다섯번 째 창에 선다. 편지.
때로는 화요일 수요일 사이에 심연이 열리기도 하지만, 26년은 한순
간에 지나갈 수도 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더 미로 같은 것이어서,
만일 적절한 곳에서 벽에 바짝 붙어선다면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저 반대편에서 자기 자신이 걸어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편지에 답장을 보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래 전 일이었다. 헤
아릴 수 없는 바다의 문지방들이 이동을 계속했다. 팔월 젖은 풀 속의 두
꺼비처럼 심장이 순간순간 고동치기를 계속했다.
답장 보내지 않은 편지들이 나쁜 날씨를 약속하는 솜털 구름처럼 쌓여
간다. 편지들이 햇빛의 광택을 잃게 한다. 어느 날 답장을 보내리라.
어느 날 내가 죽어 마침내 집중할 수 있을 때 혹은 적어도 나 자신을 다
시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대도시의 125번
가에 갓 도착하여, 바람 속에 춤추는 쓰레기들의 거리를 내가 다시 걸
을 때, 가던 길을 벗어나 군중 속으로 사라지기를 사랑하는 나, 끝없는
텍스트 대중 속의 하나의 대문자 T.
불꽃 메모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암울한 몇 개월 동안, 내 삶은 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만 불타올랐다.
개똥벌레가 점화되고 꺼지고, 점화되고 꺼지듯이, 밤의 어둠 속
올리브나무 숲 속에서 눈여겨보면
개똥벌레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다.
암울한 몇 개월 동안, 영혼은 움츠러들고 망가진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육신은 당신을 향한 직선 통로를 택하였다.
밤하늘들이 울부짖었다.
우리는 우주의 젖을 훔쳐먹고 연명하였다.
꿈 세미나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땅 위의 40억
모두가 잠자고, 모두가 꿈꾼다.
얼굴들이 떼 지어, 몸들이 떼 지어, 꿈속에 나타난다.
꿈속의 사람들은 현실 속의 우리보다 수가 더
많다. 하지만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극장에서 졸 수가 있고,
극중에 눈거풀이 처질 수 있다.
일순간 이중노출이 오고, 눈앞의 무대는
꿈의 조종을 받아 마침내 제압당하고,
그러면 무대는 더 이상 없고, 오직 우리 자신뿐.
정직한 심연 속의 극장!
과도한 연출가의 신비!
새 연극 끊임없이 기억하기.
한 침실, 밤
어두워진 하늘이 방으로 흘러든다.
누군가 읽다 잠든 책이
아직도 열린 채
부상 입은 몸으로 침대 모서리에 큰 대자로 뻗어 있다.
잠자는 눈은 움직이고 있고,
또 다른 책 속의
문자 없는 텍스트를 따라가고 있다.
환히 밝혀진, 구식의 날쌘 텍스트.
눈꺼풀의 수도원 담장 속에서
쓰여지는 현란한 즉흥극.
지금 이 순간 바로 이곳의, 유일무이 본(本).
아침이면 말소(抹消).
거대한 낭비의 신비!
절멸(絶滅)! 의심 많은 제복들이
관광객을 세워
카메라를 열고, 필름을 풀고,
햇빛이 그림들을 죽게 할 때처럼.
그렇게 꿈들은 낮의 빛으로 검어진다.
절멸인가.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인가?
한 번도 끊어지는 적이 없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꿈꾸기가 있다. 빛은 남의 눈에게나 줘버리는 곳.
기어가는 생각들이 걸음마를 배우는 곳.
얼굴들과 형상들이 재편성되는 곳.
환한 대낮에 우리가 사람들 속에 섞여
어떤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동일한 수의, 어쩌면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곳 길거리 양편
어두운 건물들 속 높은 곳에 들어 있는 것이다.
때로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창가로 와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명종곡(鳴鐘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손님이 자신의 누추한 호텔에 묵기를 원하므로, 주인 여자는 손
님을 멸시한다.
나는 한 층 올라가 구석방에 자리잡는다. 형편없는 침대. 천장에
매달린 백열전구,
수십만 진드기들이 행진하고 있는 무거운 커튼.
바깥은 보행자 전용거리.
느릿느릿한 관광객들, 서두르는 학교 아이들, 덜거덕거리는 자
전거를 타고 가는 작업복의 사내들.
자기가 지구를 돌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지구의 손아귀에 사
로잡혀 자기도 속절없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우리들 모두가 걷는 거리, 그것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방의 유일한 창은 다른 무언가에 면해 있다. '야성의 장터,'
들끓는 땅, 널찍한 떨리는 지표, 때때로 붐비고 때때로 버림받
은 곳.
내가 속에 데리고 다니는 것들이 저곳에서는 물질로 화한다. 온
갖 공포들, 온갖 기대들,
생각도 할 수 없는 모든 것들, 그럼에도 언젠가 일어날 모든 것들.
나의 해변들은 나지막하다. 만일 죽음이 6인치 올라온다면 나는
범람하리라.
나는 막시밀리안**이다. 때는 1488년, 적들이 우유부단한 탓에
나는 이곳 부뤼헤***에 유폐되어 있다.
적들은 사악한 이상주의자들, 그들이 공포의 뒤뜰에서 행한 일
을 나는 묘사할 수 없다. 나는 피를 잉크로 바꿀 수 없다.
나는 또한 덜거덕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길거리를 내려가는 작업
복의 사내이기도 하다.
나는 또한 아까 본 그 사람, 그 관광객이기도 하다. 가다가 멈추
고 가다가 멈추면서,
관광객은 시선을 달에 탄 창백한 얼굴들 위로, 옛 그림들의 파도
치는 휘장들 위로 배회하게 한다.
내가 갈 곳을 결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자신은 더더욱
아니다. 매번 발걸음이 있어야 할 곳에 있긴 하지만.
모두가 죽었기에 아무도 상처받을 수 없는 화석 전쟁터 속을 돌
아다니기!
먼지 뒤집어쓴 초목들, 총안(銃眼)이 있는 성벽들, 돌처럼 굳은
눈물들이 발꿈치 아래 우지끈 부서지는 정원 통로들----.
뜻밖에, 마치 덫의 철사줄을 밟기라도 한 듯, 종 울림이 익명의
탑에서 시작된다.
명종곡! 솔기를 따라 지루가 터지고, 종소리가 플랑드르 지방을
가로질러 굴러나간다.
명종곡! 꽝꽝거리는 쇳소리, 찬송가인 동시에 유행가, 떨면서 공
중에 새겨지는!
떨리는 손의 의사가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처방전을 작성하지
만, 쓰여진 것은 알아볼 수 있으리라----.
초원과 집들 위로, 수확과 매매(賣買) 위로,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위로 명종곡이 울린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구분이 안 된다!
종들이 이윽고 우리를 날개에 실어 집으로 데려다 준다.
종소리가 멈추었다.
나는 다시 호텔 방에 돌아와 있다. 침대, 불빛, 그리고 커튼, 이상
한 소리가 들린다. 지하실이 몸을 끌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
팔을 뻗고 침대에 눕는다.
나는 하나의 닻, 저 밑으로 내려가 위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그림자를 안정시켜 주는, 나를 일부로 포괄하면서
분명 나보다 더 중요한 위대한 미지(未知)를 안정시켜 주는.
바깥은 보도, 길거리, 내 발걸음들이 죽어가는 곳, 또한 쓰여지
는 것이 죽어가는 곳, 침묵에 붙이는 나의 서문과 안팎 뒤집힌 나
의 찬송가가 죽어가는 곳.
상하이 거리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공원의 많은 나비를 사람들이 읽고 있다.
마치 팔랑이는 진실의 모퉁이라도 되는 듯, 나는 저 배추 흰나비
를 사랑한다.
새벽 군중들이 달리기로써 우리의 조용한 행성을 돌아가게 한다.
공원이 사람들로 가득 찬다. 사람들 각자에게는 모든 상황을 위
하여, 그리고 실수를 피하기 위하여, 옥처럼 반들반들하게 닦은
여덟 개의 얼굴들이 있다.
각자에게는 또한 '말하지 않는 그 무엇'을 반영하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다.
피곤한 순간에 나타나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한 입의 에더 브랜
디처럼 맛이 쓴 그 무엇을 반영하는 얼굴.
연못 속의 잉어들이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잠자는 동안에도 헤엄치
는 잉어들. 잉어들은 언제나 활동 중이므로, 충실한 신자들의 귀감이다.
2
한낮이다. 빨래가 잿빛 해풍 속에 펄럭이고, 아래쪽으로는 자전거
탄 사람들이
빽빽이 떼를 지어 몰려온다. 좌우로 미로를 조심하시오!
해석할 수 없는 문자 기호들에 둘러싸인다. 나는 완전 문맹이다.
하지만 나는 지불할 걸 모두 지불했고, 영수증을 모두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그토록 수많은 읽을 수 없는 영수증들이 쌓여 있다.
나는, 매달려 땅에 떨어질 줄 모르는 시든 잎사귀들을 달고 있는
한 그루의 고목.
한 줄기 바닷바람이 불어 영수증들을 바스락거리게 한다.
3
새벽에 군중들이 걷기로써 우리의 고요한 행성을 돌아가게 한다.
우리는 모두 이 거리에 승선하고 있다. 거리는 여객선의 갑판처
럼 빽빽하다.
어디로 가고 있지? 찻잔이 충분할까? 우리는 이 거리에 승선하게
된 걸 행운으로 여겨야 할 지경!
지금은 폐소 공포증에 태어나기 천 년 전!
이곳을 걷는 사람들 하나하나 뒤에는 십자가 하나씩 맴돌고 있다. 우
리들 뒤에서 우리를 따라잡고, 우리와 결합하고 싶어하는,
살금살금 뒤로 다가와 눈을 가리고 '누구게?'라고 속삭이고 싶어 하는.
우리는 바깥 햇빛 속에서 거의 행복해 보인다. 자기도 모르는 상처들로
우리가 치명적인 피를 흘리고 있는 동안
작은 잎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소리없는 아우성이 벽 위에 안쪽으로 휘갈긴다.
꽃핀 과일나무들과 뻐꾸기 울음소리.
이것은 봄의 마취, 하지만 소리없는 아우성은
차고에서 뒤쪽으로 슬로건을 칠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며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지하의 부끄럼 많은 승객들이 사용하는 잠망경처럼, 곧바로 본다.
이것은 순간들의 전쟁, 불타는 태양이
고통의 주차장, 병원 위에 서 있다.
우리는 망치질 당해 사회 속에 박혀 있는 살아 있는 못들.
어느 날 모든 것에서 놓여나리라.
날개 밑에 죽음의 공기를 느끼며,
이곳에서보다 더 온화해지고 더 야성적이 되리라.
19세기 여자의 초상화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그녀의 목소리가 옷 속에서 질식당한다. 눈이
검투사를 따라간다. 다음은, 그녀 자신이
경기장에 섰다. 그녀는 자유로운가? 금박 입힌 틀이
그림을 교살한다.
소곡(小曲)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좀처럼 가지 않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죽은 자와 산
자가 자리바꿈하는 날이 오리라. 숲은 움직이게 되리라. 우리게겐
희망이 없지 않다, 많은 경찰들이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심각한
범죄들은 미결로 남으리라. 마찬가지로 우리 삶 어딘가엔 미결의
위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지만 오늘은
다른 숲, 밝은 숲을 걷는다. 노래하고 꿈틀대고 꼬리 흔들고 기는 모든
생명들! 봄이 왔고 공기가 무척 강렬하다. 나는 망각의 대학을 졸
업하였고, 빨래줄 위의 셔츠처럼 빈 손이다.
밤에 쓰는 책 한 페이지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어느 오월 밤, 서늘한 달빛 속
잿빛 풀과 꽃들이
초록 향기 풍기는 기슭에서
배를 내렸다.
색맹의 밤,
나는 비탈을 미끄러져 올랐고
하얀 돌들은
달에게 신호를 보냈다.
몇 분의 길이와
58년의 폭을 가진
시간의 한 부분.
내 뒤로은 납빛 반짝이는 물결 너머
다른 기슭이 있었고,
통치하는 자들이 있었다.
얼굴 대신
미래를 가진 자들.
슬픈 곤돌라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두 늙은이, 장인과 사위 간인 리스트와 바그너가 대운하에 머물고 있다.
미다스 왕처럼 손대는 것은 무엇이나 바그너로 변형시켜버리는
남자와 결혼한 저 신경과민의 여자와 더불어.
바다의 초록 냉기가 궁전 바닥을 뚫고 밀고 올라온다.
바그너는 표가 난다, 그 유명한 펀치넬로 옆모습이 이제 기울고,
얼굴은 백기(白旗)이다.
무겁게 짐 실은 곤돌라가 그들의 삶을 싣고 간다, 두 장의 왕복표와 한 장의 편도표.
2
궁전 창 하나가 덜컹 열리고, 갑작스런 외풍에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다.
바깥 물위에는 쓰레기 곤돌라가 보이고, 두 명의 외팔 도적이 노를 젓고 있다.
리스트가 몇 개의 악보를 적었다. 너무 무거워서
파두아에 있는 광물학 연구소로 보내 분석해봐야 할 지경이다.
운석들!
지금 있는 자리에 머물기엔 너무 무거워, 악보들은 가라앉고 가라앉아
앞으로 다가올 해들을 통과하여 마침내 나치스당 시절에까지 이른다.
무겁게 짐 실은 곤돌라가 미래의 웅크리고 앉은 돌들을 싣고 간다.
3
1990년을 들여다보는 구멍.
3월 25일. 리투아니아에 대한 걱정.
큰 병원 하나를 방문한 꿈을 꾸었다.
직원이 없었다. 모두가 혼자였다.
같은 꿈속에서
한 여자 신생아가 완전한 문장으로 말을 했다.
4
자기 시대 사람인 사위에 비한다면, 리스트는 케케묵은 귀족이다.
그것은 하나의 위장.
이런저런 가면을 써보고 던져버리는 바다가 바로 이 가면을 그에게 골라주었다.
자기 얼굴을 보여줌 없이 인간사에 개입하기를 좋아하는 바다가
5
리스트 노부(老父)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옷가방 챙겨 들고 다니는 일에 익숙해서,
그가 죽음에 도착하는 날 역에 마중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
잘 숙성된 술 한 모금의 미풍이 업무 중의 그를 밀고 나가게 한다.
그는 일거리로부터 자유로울 때가 없다.
연간 이천 통의 편지들!
학교에서 잘못 쓴 단어를 백 번 써야 집에 갈 수 있는 아이처럼.
무겁게 짐 실은 곤돌라가 삶을 싣고 간다. 단순하게 검은 곤돌라.
6
다시 1990년.
차를 몰고 그냥 백 마일을 달리는 꿈을 꾸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거대해졌다. 닭만한
참새들이 귀 먹을 정도로 크게 울어냈다.
식탁 위에다 피아노 건(鍵)들을
그리는 꿈을 꾸었다. 그것으로 소리없이 피아노를 쳤다.
이웃들이 들으러 왔다.
7
'파르지팔' 전곡(全曲) 연주가 끝날 때까지 들으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건반이 마침내 한 마디 할 기회를 허락받는다.
한숨 지으며--- 아주 슬프게---
오늘 밤 연주할 때 리스트는 바다 패달을 밟아서,
바다의 초록 힘이 바닥을 뚫고 올라와 건물의 석재 하나나 속으로 스며들게 한다.
좋은 저녁 되시길, 아름다운 바다여!
무겁게 짐 실은 곤돌라가 삶을 싣고 간다, 단순하게 검은 곤돌라
8
학교 가려는 꿈을 꾸었는데. 도착해보니 지각이었다.
교실 안의 사람들이 모두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누가 선생님인지 알 수 없었다.
뻐꾸기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뻐꾸기 한 마리가 집의 정북쪽 자작나무 속에서 뻐꾹뻐꾹 소리내고
있었다. 소리가 너무 힘차서, 처음엔 오페라 가수가 뻐꾸기를 성대
묘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놀라움 속에 새를 보았다. 소릴를 낼 때
마다 우물의 펌프 손잡이처럼 꼬리털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두 발로
깡총 뛰더니만, 몸을 돌려 나침반의 모든 눈금을 향해 소리 질렸다.
다음엔 땅을 박차고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집 위로 날아 올라, 멀리
서쪽으로 사라졌다---. 여름이 늙어가고 모든것이 단일한 우수의 한숨
으로 내려앉는다. 뻐꾸기는 열대로 돌아가리라. 스웨덴 시절은 끝난
거야. 뻐꾸기의 스웨덴 시절은 길지 않았어! 사실 뻐꾸기는 자이르의
시민이지---. 나는 이전만큼 여행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즈
음은 여행이 나를 방문하지. 내가 점점 더 먼 구석으로 몰리고, 나이테
가 커지고, 독서 안경이 필요한 요즈음 우리가 운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언제나 일어나지. 놀랄 일은 아무것도 없어. 수지와 쿠
바가 아프리카를 온통 통과해 리빙스턴의 미라 시신을 충직하게 운반하
였듯, 이러한 생각들이 나를 운반해 가는 거야.
어린이 됨을 좋아하라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어린이 됨을 좋아하라. 순간 갑작스런 모욕이
자루처럼 그대 머리 위로 쏟아진다.
망사 사이로 그대는 태양을 슬쩍 보고
벚나무들이 흥얼대는 소리를 듣는다.
어쩔 수 없는 일, 거대한 모욕이
그대 머리를 그대 몸통을 그대 무릎을 덮고,
간혹 움직일 수 있으나
그대는 봄을 기대할 수 없다.
희미한 양털 모자를 얼굴 위에 뒤집어쓰라.
바늘 뜸 사이로 세상을 보라.
해협에는 물 반지들이 소리없이 몰려들고,
초록 잎새들이 땅을 어둡게 한다.
하이쿠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송전선이 뻗어 있다
서리의 왕국,
모든 음악의 북쪽에
*
해가 낮게 걸려 있다
그림자가 거인이다
머잖아 모두 그림자
*
자줏빛 난초꽃들,
유조선이 미끄러져 지난다
달이 꽉 찼다
*
잎새들이 속삭인다
멧돼지 하나 오르간을 연주한다
종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
신의 현존.
새소리의 터널 속
자물쇠 채워진 봉인이 열린다
*
상수리나무와 달.
빛. 침묵의 성좌들.
그리고 차가운 바다
1860년의 섬 생활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어느 날 그녀가 방파제에 내려가 빨래를 하였다네
깊은 바다 한기가 팔 속으로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네
얼어붙은 눈물은 안경이 되고
섬의 풀들이 섬을 위로 들어올렸다네
저 아래 발트 해 깊은 바다 위에는 청어잡이 깃발이 떠 있었다네
2
천연두 벌떼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얼굴 위에 주렁주렁 자리 잡았다네
그는 자리에 누워 천장을 쳐다본다네
침묵의 물결 위로 노젓는 일 가혹도 하지
이 순간의 얼룩이 영원으로 흘러가고
이 순간의 상처가 영원히 피 흘린다네
서명(署名)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어두운 문턱을
넘어가야 한다.
홀이 하나.
하얀 서류가 빛난다.
여러 그림자들이 움직인다.
모두 서명을 원한다.
빛이 나를 덮쳐
사간을 접어 올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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