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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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다니엘처럼: 세속적 도시에서 선교적 소수로 살기 (2)]
뜻을 정한 삶에 부어진 은혜
단 1:8-21
제가 작년에 각 교구별로 순회하면서 지역장님들을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었는데 받은 질문들 중에 이것이 있었습니다.
“점점 세속화 되어 가는 세상 속에서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까요?”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에게는 공립학교 혹은 기독교사립학교, 많이 고민이 되실 겁니다.
한국에도 건강한 기독교사립학교들이 꽤 많이 생겨나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앞으로도 그런 좋은 기독교학교들이 생겨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기독교사립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립엘리트학교”에 선발이 되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 종교를 포함한 바벨론식 교육을 3년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교육은 바벨론의 차세대 인재들을 양성하여 바벨론 제국의 지도자들로 키우기 위한 교육과정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립엘리트학교’ 즉 공립학교 입학을 거부했을까요? 아니요. 거부하지 않습니다.
거부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적극적이었냐면 그 학교에서 최우수로 졸업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그 뒤를 잇습니다. 19절 보세요.
[단 1:18-19] 18 왕이 정하여 놓은 삼 년 동안의 교육이 끝나는 날, 환관장은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을 모두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갔다 19 ... 그들 가운데서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가장 뛰어났으므로, 그들로 왕을 모시게 하였다.
우리는 다니엘을 떠올릴 때 다니엘이 바벨론의 교육과 학문을 거절하고 저항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요. 바벨론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보다 바벨론식 교육에 더 뛰어난 이들은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식 교육에 통달했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들이 바벨론식 교육에 통달하여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17절입니다.
[단 1:17] 하나님은 이 네 젊은이들이 지식을 얻게 하시고, 문학과 학문에 능통하게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과 문학과 학문은 무슨 학문입니까? 지극히 세속적인 바벨론의 학문입니다.
우리가 알던 다니엘서에 대한 엄청난 반전 아닙니까? 이들이 바벨론 왕립/공립학교를 거절하지 않은 것도 충격인데, 최우등 졸업에다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학문에 능통하게 하셨습니다.
이들이 3년간 교육받은 이유는 바벨론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거나 혹은 바벨론식 교육을 받은 이후에 바벨론 지방의 지역 관리자로 일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공직의 자리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마지못해 하거나 거절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다니엘은 공직에 굉장히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나중에 자신도 왕을 위해 일하지만, 왕에게 나아가서 세 친구들이 지방의 관리자가 되도록 추천까지 합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지극히 세속적인 세상의 권력자를 위해 일해도 괜찮은 겁니까?
만일 아니라면 왜 그런가요? 만일 괜찮다면 왜 그런가요? 또한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지요? 특히 세속 도시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성도님들이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적극적으로 세속 도시 안에서 일정 부분 바벨론에 동화가 되었습니다. 교육을 잘 받았고 공직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바벨론식 개명을 허용합니다.
방금 2장 49절에 보면 그들의 이름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로 나옵니다.
그들은 바벨론식으로 바뀐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말은 이것이 그들의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는 뜻이고, 이들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일터가 땅 끝이 되었다
이들은 왜 바벨론식 개명을 비롯한 문화, 바벨론식 교육, 바벨론의 정치적 경력과 공직을 거부하지 아니하고 수용했을까요? 왜요? 바벨론도 하나님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참 신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세속 도시 중심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바벨론 세상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영역에 침투하여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들은 바벨론 세상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여러분의 선교지는 어디입니까? 물론 우리는 아시아, 유럽, 열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미전도 종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는 청소년, 젊은이들이 미전도 종족화 되어 갑니다.
이제는 우리의 일터가 땅 끝이 되었습니다. 왜죠? 거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 선교사로 오랫동안 헌신했다가 영국으로 돌아온 “레슬리 뉴비긴”이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이 선교지처럼 세속화 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유럽이 선교지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가정과 일터,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의료, 예술 모든 영역에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열방이 땅 끝이지만, 동시에 일터가 땅 끝입니다.
그렇기에 세상과 분리되어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속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침투해야 합니다.
만일 이들이 바벨론의 모든 삶을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벨론의 사람들이 하나님 여호와를 알 기회는 사라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세상에 동화되어 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완전히 동화되거나 순응해서도 안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개명을 허용했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벨드사살로 불리긴 하지만 주로 다니엘로 불립니다. 세 친구들도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의 이름을 잊지 않습니다. 그들은 분리도 거절하지만 완전 동화도 거절합니다.
다니엘의 조기 신앙교육: 분리와 구별됨
어떻게 이들은 이러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이전입니다.
다니엘은 약 15세 때 바벨론 포로로 끌려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15세면 이미 유대인으로서는 기초적인 신앙교육은 다 끝났을 때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13세 이전까지 계속 1년에 2-3번 정도 모세오경(창세기부터 신명기)을 들려주고 심지어 통째로 암송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13세가 넘어가면 탈무드 교육을 시키는데 탈무드는 대부분 모세오경의 주석이지요. 교육의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감리교 목회자였다가 구세군 운동을 일으킨 윌리엄 부스의 아내인 캐서린 부스 여사가 여덟 자녀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장하도록 양육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녀가 이렇게 답했다고 하지요. “언제나 사탄보다 앞서서 먼저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15세 이전에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의 세계관으로 먼저 무장되었습니다.
그는 분별력을 갖추었습니다. 바벨론 교육을 받아도 이해는 하였으나 믿거나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저도 신학교 때 비교종교를 배웁니다. 이슬람도, 힌두교도, 불교도 배웁니다. 그러나 믿지는 않습니다. 다른 종교들의 차이점을 배웁니다. 그래야만 선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지만 그 종교를 믿지는 않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바벨론을 배움으로써 세상과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은 거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8절에 나옵니다.
뜻을 정하여 선을 긋다
[단 1:8] 다니엘은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개정: 뜻을 정하여), 환관장에게 자기를 더럽히지 않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다니엘은 바벨론식 교육도 받고 공직도 받고, 개명도 수용했지만,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는 거절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더럽힌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보면 “대신 채소를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해달라는 겁니다.
아마도 왕의 음식이 바벨론의 신,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서, 그래서 레위기의 정결 음식법에 문제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벨론의 고기들은 이미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한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1장 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그릇들이 다 바벨론 신전으로 옮겨집니다.
다니엘서 5장에 가면 벨사살 왕과 신하들이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그릇들에다가 포도주를 담아 마시며 파티를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단 5:2] 벨사살 왕은 술을 마시면서 명령을 내려서,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 온 금그릇과 은그릇들을 가져 오게 하였다.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모두 그것으로 술을 마시게 할 참이었다.
성전의 그릇으로 술을 마시겠다는 말은 여호와가 정복당했다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신이 이스라엘의 신을 이겼다는 승리의 파티를 상징합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마시는 음식들과 포도주가 그런 의미를 상징함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회사에 가면 믿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경우가 있지요. 안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술을 마시게 합니다. 특히 신입사원 환영회는 꼭 술이 곁들여집니다. 대학교 오티와 엠티도 술판이지요. 만일 거부하면, 강제적으로 먹입니다. “과연 네 믿음이 어디까지 가느냐” 보자는 겁니다. 너의 그 믿음을 내가 정복하겠다는 겁니다. 술을 마시게 하여 너의 믿음을 조롱하겠다는 겁니다. 한국에서의 술은 단지 술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상징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꺾으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술을 권하시는 분들 중에는 믿는 분도 있습니다. “나도 교회 다녀... 괜찮아... 다 마셔..”
벨사살 왕이 성전 그릇으로 술을 마시게 한 이유는 그들의 신과 믿음을 조롱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술이 천국과 지옥 갈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술에 신앙적인 의미, 상징성을 부여하기에 술은
그냥 술이 아닙니다. 게다가 성령 충만과 술 충만은 방향성이 정 반대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단지 음식법을 떠나서 그는 포도주도 금했던 것입니다.
즉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 이 모든 식탁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환영하는 식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충성을 버리라는 유혹이요 순응의 요구였습니다.
다니엘은 여기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던 겁니다. 8절 말씀을 개정판으로 다시 보면,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뜻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레브,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은 사람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처소입니다. 잠언은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마음을 정했다는 겁니다.
‘정하다’는 말의 원어는 기본적으로 ‘두다, 놓다, 고정하다’는 뜻입니다. 어디에 두었을까요?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었고, 하나님께 놓았으며, 하나님께 고정했습니다.
비록 다니엘은 바벨론의 세속 도시 안에 살지만 그 도시의 문화에 휩쓸려 가지 않도록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 마음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요, “하나님께만 온전히 충성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왕이 제공하는 음식에 ‘아니오’라고 거절하며 선을 긋는 겁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바벨론에서 주도권을 갖겠다는 겁니다.
다니엘은 “이중 정체성”을 가진 자였습니다.
바벨론 세속 도시에 살고, 바벨론 교육도 받고 공직에도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의 내적 정체성은 온전히 하늘에 속한 시민권자였습니다.
바벨론 왕을 위해 일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충성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이것을 잘 설명해주는 개념이 미국의 영주권 개념입니다. 영주권자를 영어로 Resident Alien 거주하는 외계인(외국인)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 미국 영주권자들은 미국에 거주하며 미국의 법과 문화 질서에 따라갑니다. 미국에서 직장을 얻고 돈을 벌며 심지어 집도 삽니다. 게다가 미국에 세금도 내고, 교육과 복지 혜택도 누립니다. 시민권자와 다른 것이 있다면 투표권이 없습니다. 그들의 시민권은 대한민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살지만 그들의 조국은 대한민국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니엘에게 주어진 왕의 음식은 단지 음식이나 술의 의미가 아닙니다.
네가 궁극적으로 충성할 대상이 누구냐? 바벨론 왕과 신, 마르둑 아니냐?
이때에 다니엘은 No!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경계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은 세상 속에 살면서 어떠한 뜻을 정하셨습니까? 그리하여 어떠한 선을 긋고 계십니까?
다니엘 이전에, 뜻을 정한 삶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부어주신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명이 오바댜입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으로 불렸던 아합왕의 궁내대신이었습니다.
궁내대신은 왕의 최측근이면서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책임지는 고위직입니다. 아니 어떻게 악한 아합왕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왕상 18:3] ... 오바댜는 주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왜 그렇게 불렸냐면 아합왕 아내 이세벨이 주님의 예언자들을 학살할 때, 예언자 100명을 50명씩 동굴에 목숨 걸고 숨겨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먹을 것과 물을 대준 사람입니다. 북이스라엘 정치 중심부의 관직에 머물면서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잃지 않고 뜻을 정하여 선을 그은 사람입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오바댜를 통해서 세속 도시였던 북이스라엘의 도시 한복판에서 오바댜만이 할 수 있는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케 하신 겁니다.
예전 저희 둘째 아들이 미국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한번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가져오라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들고 갔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성경책은 안 된다고 거절하셨습니다. 특정종교는 공적인 학교에서 드러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이 아이가 낙심했는지 모릅니다. 학년이 바뀌었습니다. 어느 날은 학교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역사적 지도자를 발표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담임이 바뀌었습니다. 둘째가 그날 발표한 역사적 지도자는 모세였습니다. 성경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물론 다른 선생님이긴 했지만. 얘가 약간 고지식한 면이 있습니다. 자기 영어 이름이 다니엘인데 다니엘은 안하고 모세를 했어요. 어쨌든 모세를 왜 존경하고 좋아하는지 당당하게 발표하고 나서 자리에 앉았어요. 나중에 수업이 끝났는데 선생님이 쪽지를 주더래요.
“다니엘, 사실 선생님도 모세를 좋아하고 존경해.” 그 선생님도 크리스천이었던 겁니다.
보이지 않게 아이의 신앙을 응원해 준 것이지요. 뜻을 정하여 학생들의 신앙을 지지해 주기로 했던 겁니다. 이중 정체성을 가진 선생님입니다.
또 한 번은 저희가 이사를 가게 되어 학교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전 학교에서는 가을이 되면 학교 전체적으로 할로윈 파티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귀신 복장을 하고 학교에 오는 거예요. 가장 많은 복장은 마녀였습니다. 그런데 이사 가서 가게 된 초등학교는 가을에 할로윈 파티를 하지 않는 겁니다. 대신 Fall Festival 가을 축제를 하고 복장은 절대 할로윈 귀신 복장 금지. 대신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만화 캐릭터는 ok. 무엇이 다른가? 교장 선생님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할로윈을 금지할 경우 많은 공격을 받을 수 있지만, 신앙 양심상 내 학교에서는 허용할 수 없다! 뜻을 정하여 선을 그은 것입니다. 그 교장 선생님께 저는 지금도 너무 감사해요.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세상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교육, 정치계, 법조계, 문화와 예술 영역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왕의 음식과 술을 거절하고 선을 긋는 일은 다니엘에게 위기를 가져오게 합니다.
10절에 보면 환관장이 말하기를 너희가 얼굴이 상해 있으면 너희 때문에 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상 다니엘의 요청은 거절당한 겁니다. 그 말은 다니엘이 끝까지 거부하게 되면 다니엘도 죽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일에는 많은 경우에 역경을 초래합니다. 관계의 어려움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경우 뜻을 정하는 일을 포기하거나 선 긋기를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을 정한 이들을 결코 모르는 체하시지 않습니다. 9절을 보세요.
[단 1:9] 하나님은 다니엘이 환관장에게서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주셨다.
마음을 정하여 하나님께 둔 다니엘을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세속 도시의 한복판에서 믿음을 지키고자 한 그 중심을 보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호의’는 원어로 헤세드חֶסֶד 입니다. “자신의 언약에 신실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 다니엘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호의과 긍휼(동정)을 받게 하셨다는 겁니다. 어떻게 받게 하셨는가?
환관장이 사실상 거절하자 다니엘은 그 결정에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지혜가 있었어요. 환관장이 임명한 감독관을 찾아갑니다. 12절입니다.
[단 1:12]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 다니엘의 태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례하지 않습니다. 감독관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다니엘은 최대한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요청을 합니다. 환관장에게 요청이 거절당하자,
다니엘은 우회하는 전략을 씁니다. 강대강으로 대결구도로 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 묻는 이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베드로전서 3장 15절을 메시지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벧전 3:15 (메시지) 여러분의 삶의 방식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할 말을 준비하되, 최대한 예의를 갖춰 답변하십시오 오히려 그들이야 말로 깨끗함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다니엘은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뜻을 정하여 선을 긋되,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 묻는 이들에 대하여 온유함으로,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대하고 답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태도였습니다.
삶으로 검증하는 진리 대결
그리고 딱 열흘간만 시험해 보라는 겁니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과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직접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나은지 비교해 달라는 겁니다. 단지 말로만 무엇이 진리인가를 논하지 말고, 실제로 무엇이 진짜인지를 비교해 보자는 거예요.
스탠리 존스라는 감리교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20 세기 초중반, 인도 선교사로서 간디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입니다.
그 선교사님의 집에서 가정살림을 돕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이전에는 무슬림 주인의 집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의 집에서 살면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이 아이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왜 이 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대화를 하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이슬람과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도대체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소년이 선택한 것은 몇 년은 이슬람을 믿는 주인 밑에서 일을 해보고, 몇 년은 기독교를 믿는 주인 밑에서 일하면서
그 주인의 삶을 보고 판단해야겠다고 한 것입니다. 말만이 아니라 삶에서 누가 진리를 가진 자인지를 보겠다는 것이죠.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말로만 진리를 전하고자 했던 자기 자신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의 진리 대결은 말뿐만이 아니라 삶으로 대결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문제는 단지 세상이 술을 강제적으로 마시게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물론 술은 큰 문제이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술은 중독성이 있기에 파괴적입니다. 그러므로 술을 강제적으로 마시게 하는 일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단지 술 문제를 넘어서서 다니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세상 속에서 과연 무엇이 다른가?
술을 마시고 마시지 않는 것이 신앙의 척도라면, 술을 마시지 않는 삶의 방식이 술을 마시는 세상의 삶의 방식과 어떠한 차이를 내고 그것이 회사와 일터에 어떠한 선한 영향을 미치는가?
동성애 커플과, 이성애 커플 중에 이성애 가정이 자녀를 양육하기에 월등하게 낫다, 사랑이 풍성하고, 행복이 넘친다는 것을 진리를 넘어서서 삶으로 증명하고 있는가? 우리는 당당하게 시험해 보라고 하며 이것이 훨씬 더 좋고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그리하여 자녀들도 아 나도 부모님처럼 그런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열흘”이 지나자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왕의 음식을 먹은 이들보다 이들이 더 건강해 보였습니다.
[단 1:15] 열흘이 지났을 때에 보니, 그들의 얼굴빛이 왕이 내린 음식을 먹은 젊은이들의 얼굴빛보다 좋고 건강하여 보였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정하여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고정한 자들에게 주신 헤세드, 은혜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세속 도시로부터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세속 도시에 완전히 순응하거나 동일화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뜻을 정하여, 마음을 정하여 경계를 그었습니다.
세상 안에서 구별된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를 부르신 곳에서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을 “신실한 현존”이라고 부릅니다.
거센 물살로 비유하면 세상에 순응하여 물살에 휩쓸려가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분리되어 거센 물살에 들어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서 바벨론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실한 현존, 즉 거센 물살의 중심에 들어가 신실하게 서 있는 것.
이것이 뜻을 정한 다니엘이었습니다.
거센 물살 중심에 신실하게 버티며 현존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영향력이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이중 정체성입니다. 세속 도시에 살지만 궁극적인 충성의 대상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신실하게 부르신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바로 뜻을 정한 삶에 부어지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목회자 모임에 갔다가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컴퓨터 과학 교수님과 줌 미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AI가 발전하고 있는데 반기독교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AI는 빅데이터 중에 가장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답변을 내놓기 때문에 반기독교적인 세상 가르침이 많기에 답변이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위기라는 겁니다. 앞으로 교육계에 AI가 5-6년 내에 대세가 된다고 합니다. 이때 반기독교적인 답변으로 무장된 AI가 보급이 되면 어떡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그분의 발표를 들으며 참 감사했습니다. 세상의 학문의 중심지인 곳에서 모든 학문을 배우고 습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기독교 정체성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서 신앙교육을 잘 받으시고 고등부 회장까지 섬기고 미국으로 간 거예요. 그리고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추었고 대안까지 제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셨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완전히 동화되지도 않습니다. 만일 그분이 세상과 기술이 악하다고 하여 대학을 떠나거나 거부했다면? 이런 문제 제기를 누가 할 것이며 누가 대안을 내놓겠습니까? 세상 안에 있지만 동화되지 않으며 신실한 현존을 드러내주신 교수님께 참 감사했습니다.
오늘 마지막 구절 21절을 보세요.
(단 1:21) 다니엘은 고레스 왕 일년까지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
고레스왕은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왕입니다.
다니엘이 그 때까지 왕궁에 있었다면 포로로 잡힌 이후 70년 이상을 있었다는 것이고 수많은 왕들은 사라지고 제국도 바뀌었지만, 하나님은 다니엘을 끝까지 살아남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뜻을 정한 삶에 부어진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신실하게 의존한 이들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세속 도시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왕이시고 여전히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들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찬양: 모든 상황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