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처럼 고요하고 봄볕처럼 따사롭고 삭풍처럼 맵고 파도처럼 줄기차다. 때로는 패엽(貝葉) 굴려 법유(法乳)를 천지 가득 채우고, 때로는 사통가두(四通街頭)에 장광설(長廣舌)을 베풀어 혼진(昏塵)을 끊으며, 때로는 주장자 휘둘러 야간(野干, 여우와 같이 간사하고 교활함을 일컫는 말)의 뇌간(腦肝)을 찢는다. 왕사성 달빛은 거듭 빛나고 조계청풍(曺溪淸風)은 천지를 쓸고 간다. 이것이 무불선사(無佛禪師)의 일용(日用)이다”
광덕스님(전 불광사 법주)이 도반인 무불스님을 먼저 보내고 비문 첫 머리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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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무불스님 모습.불교신문 자료사진 |
박한영 등 대강백 문하서
경전 연찬, 참선 정진
독립운동가 돕다가
왜경에게 구타당하기도…
시주 은혜 중히 여기라며
근검절약 생활 몸소 실천
“부산 금정산 금용암(金蓉庵)에 주석하신 무불스님은 근세에 보기 드문 선지식이시다. 15세의 동진으로 입산하여 우금(于今) 73세에 이르기까지 교와 선에 자재하시고 율과 행에 정결하시며 권(權)과 실(實)에 무애하시니 실로 종문의 거성이라 하겠다. 더구나 선적의 가(暇)에 필묵을 들어 격외의 묘(妙)를 지면에 농현하시면 그 해직(楷直)한 자획은 보는 이들의 심성을 차분히 밝혀주는 힘마저 있으셨으니 이 또한 스님의 방편문의 하나인가 한다.”
운허스님(조계종 초대 역경원장)이 불기2524년(서기 1970년) ‘무불선묵집(無佛禪墨集)’의 서문에 쓴 글이다. 운허스님은 이 서문에서 “나 이제 90의 언덕에서 눈 어둡고 손 떨려 사양함이 마땅하겠으나 평소 스님의 근엄하신 가상사(家常事)를 흔앙(欣仰)하고 덕윤선사(德潤禪師, 무불스님의 은법상좌)의 효심에 감동하여 생각나는대로 이렇게 간추려서 좌우로 하여금 정서케 한다”고 했다.
무불스님에 대한 글은 광덕 운허 두 스님의 말씀으로 충분하다. 필자가 무불스님의 행적을 좇아쓰는 글은 사족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불스님의 법향에 젖어 살아가면서 스님을 잊지 못하는 몇 분의 말씀을 곁들이는 것 또한 무불스님의 본지풍광을 되새기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무불스님은 1907년 서울 중구 오장동에서 아버지 남영철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남 의령이며 어릴 때 이름은 점룡(點龍)이다. 15세 되던 해인 1921년 계룡산 동학사에서 김월암(金月庵)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법명은 성관(性觀)이다.
그 해 동학사에서 방해안(方海眼)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계하고 1931년 동학사에서 백초월(白初月) 강백 문하에서 사집과를 이수, 강원도 표훈사에서 김동선(金東宣)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대계를 받았다. 이후 1936년 금강산 유점사 변설호(卞雪湖) 강백 문하에서 사교과를, 1938년 서울 개운사 박한영 강백 문하에서 대교과를 이수했다. 1939년 스님은 사교입선으로 나아가 금강산 마하연에서 송만공선사의 회상에 들어 참선수행한 이후 유점사 표훈사 범어사 등 유명 선원에서 20하안거를 성만했다. 1940년에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박대륜(朴大輪) 스님을 법사로 건당하고 무불 법호를 받았다.
경전에 해박하고 깊은 선리를 참구한 스님은 1940~43년 1월 동학사 강사, 1943년2월~44년1월 유점사 강사를 역임했다. 6·25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온 스님은 1951년 부산 동래 금정산 금정선원 원장을 맡아 1952년 4월까지 운수납자를 지도했다. 1956~57년 범어사 동래 포교당 주지를 맡은 후 1970년 부산 동래구 거제동에 연화사를 창건, 조실로 있었으며 1973년 거제동 금용암 주지로 주석하다가 1984년 3월23일(음력 2월21일) 세수 78세, 법랍 64세로 금용암에서 입적했다. 무불스님의 비는 금용암 입구에 1984년 9월 세워졌다.
무불스님을 추모하는 불자들은 한결같이 스님에 대해 이렇듯 말을 한다. 스님께서는 법상에서 법문을 하시지는 않았으나 평소 당신의 일상언행이 곧 법문이었다고. 경학과 참선수행에 깊은 경지를 지녔으며 사경을 수행으로 삼아 부처님 은혜와 시주의 은혜에 보답했다고.
스님은 늘 시주의 은혜를 중히 여기라며 근검절약의 생활을 몸소 실천했다. 또한 사찰의 물건 하나하나도 개인 소유라고 여겨 맘대로 써서는 안된다고 경책했다. 어릴 때부터 무불스님을 모신 지허스님(김해 황룡사 주지)은 “스님께서는 자립을 늘 말씀하셨다”고 한다. 농사짓고 초막지어 살고 양말과 옷도 해지면 기워서 썼다고 한다. 중이 배불리 먹고 호화롭게 살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고. 무불스님의 근검절약 정신은 철저했고 상좌들에게도 엄격히 따졌다. 스님은 일기를 꼼꼼하게 썼다. 연말이면 상좌들을 앉혀놓고 “너는 올해 얼마를 썼다. 내년에는 더 절약해야 한다”라고 일러주었다. 반찬으로 나온 두부나 전이 남으면 간장에 담가 두었다가 다음 공양 때 도로 내오게 했다.
스님은 평생 대중공양에 빠지지 않았다. “어린 사람도 대중공양을 통해 절집 규범과 살림을 배워 놓아야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살림을 제대로 살 수 있다”고 깨우쳤다.
무불스님이 사경을 수행방편으로 쓴 연유가 있다. 스님이 유점사 강사시절인 1943년은 일본제국주의가 극에 이르러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던 때였다. 스님은 강제징집을 피해 금강산으로 숨어 든 청년들을 숨겨주었다고 한다. 스님에게는 독립투사와 학병을 피해 숨어다니는 청년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에게 ‘요시찰인물’의 낙인이 찍혔다.
이 때문에 스님은 왜경에게 붙들려 가서 곤욕을 치르기를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유점사 강사를 내놓고 전국을 만행하던 시절, 어느 날 대전역에서 일이다. 일본 경찰이 스님을 보고 “이 봐, 거기 서” 했다. 스님은 못 들은 척 발걸음을 옮겼다. 일경은 더 큰 소리로 스님을 불렀고 스님은 여전히 묵묵부답했다. 화가 난 일경은 스님 뒤에 바짝 쫓아와 스님의 장삼을 잡고서는 “잠깐 같이 갑시다” 했다. 완력으로 드잡이하는 일경에 끌려 스님은 역전 파출소에 연행됐다. 스님은 일경의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척추를 다치고 말았다. 스님은 그 일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고 그 이후부터 좌선을 하는 대신 사경에 몰두하게 됐다.
무불스님이 평생 사경한 작품은 법화경 7질, 금강경 18질, 아미타경 60여질이며 반야심경은 그 수를 세기 어렵다. 또한 선구나 법구도 참 많이 썼다. 상좌 덕윤스님은 스님 생전 <무불선묵집>(4,6배판 170여 쪽)에 스님의 묵적 정수를 엮어냈다. 무불스님의 필적은 금강산 마하연 제3차 중건 비문(1932), 금강산 마하연헌답기념비문(1932), 금정사 방생비문(부산 동래), 미타암 신혜월선사 비문(경남 양산), 운수사 사적비문(부산 북구 모라동), 금용암 사적비문, 삼십삼 조사 전법게(박대륜화상 회갑기념)에서 볼 수 있다.
사경으로 삼매의 경지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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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금용암에 주석할 당시 무불스님. |
“사경할 때 정자로 써라 흘림체나 초서 안된다”
무불스님이 사경할 때는 선승이 삼매에 든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남이 볼 때는 분명히 쓰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모릅니다. 마음을 두고 쓰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무불스님의 사경삼매라 하겠다.
스님은 돈을 받고 글 써주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 어느 때인가 재력있는 신도가 찾아와 “스님께서 사경하신 글을 간직하려면 얼마를 드리면 됩니까?” 했다. 스님은 “돈으로 글씨를 사려면 돈 받고 글씨 써주는 사람에게 가시오. 나는 돈 때문에 사경하는 것이 아니니 돈 갖고 글 달라 소리 마시오” 했다. 스님의 이러한 사경정신을 이어받은 종학스님(부산 북구 주례동 불광사 주지)은 “40여년 사경을 해오면서 늘 은사 스님의 이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런 무불스님이지만 시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당신의 사경 작품을 시주에게 주었다고 한다. 무불스님은 또한 당신의 소장품과 사경작을 부산박물관에 흔연히 기증했다. 이 일로 스님은 1981년 부산시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무불스님은 또한 금니금강경 4질을 써서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그리고 범어사에 기증했다. 부처님 은혜를 갚기 위해 삼보사찰과 선찰대본산인 범어사에 보존토록 한 것이다. 또 한 당신이 소장한 책들은 범어사에 보냈다. “내가 갖고 있으면 내 욕심이다”라고 하면서 상좌들에게도 모두 나누어 주셨다고 한다. 스님의 공심과 제자사랑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종학스님은 불광사에 무불기념관을 지어놓고 은사를 기리고 자신의 금니화엄경 사경도 함께 보관하고 있다. 무불스님은 늘 “게으름 피우지 마라, 조석예불에 빠지면 안된다. 사경할 때는 정자로 해야 한다. 흘림체나 초서는 안된다. 이는 부처님께 불경(不敬)이다”라고 했다.
도움말: 종학스님, 지허스님
자료: 무불선묵집,무불스님 비문(碑文)
[불교신문3197호/2016년4월27일자]
첫댓글 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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