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의미
에베소서 2:4-10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은 교회력 상으로 사순절 다섯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곧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기간에는 사순절 및 부활절과 관련된 많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 부활, 회개, 금식, 기도, 말씀 묵상, 구제, 등등
그러나 이 모든 말과 신앙적 행위들은 모두 한 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고 구원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삶, 무엇보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이기신 부활은 궁극적으로 죄인인 인간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이것을 믿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벤츄라교회는 다른 것은 피차 용납하고, 너그러울 수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서 구원받은 공동체라는 신앙고백만은 언제나 변함없이 지켜지고, 이 신앙으로 담대한 공동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이라는 중요한 시간에 구원에 대한 말씀을 시리즈 설교로 나눠 보고자 합니다.
첫째, 구원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8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했습니다.
제가 구원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무래도 무겁게 느껴지더군요.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말씀을 들으시면서, 갑자기 받게된 선물꾸러미의 포장을 푸신다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2006년동에 벤츄라교회에서 호피 선교를 다녀오면서 그랜도 캐년을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습니다. 그랜드캐년을 처음 보았던 순간 느껴지는 마음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찬양하게 됩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워 볼 때”
이때의 감동이 있어서, 제가 가족들 특히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밴쿠버에 살 때이고 큰아이가 사춘기가 막 시작할 때쯤이니, 15년은 전쯤 일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넉넉지 않은 시절에 정말 큰마음을 먹고, 준비를 하고 가게 되었습니다. 아주 긴 여정이었습니다. 비행기도 타야하고, 차도 렌트해야하고, 차로 6시간을 갔다가 당일 돌아오는 일정인데, 네바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모릅니다. 차도 작은 차여서 에어콘도 시원찮게 작동하고 참 어렵고 고생스럽게 그랜드 캐년에 도착해서, 그 웅장한 장면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기뻐하고 놀라워할 것을 기대했는데 아이들이 아무 말도 안하는 것입니다. 속으로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돌아와서, 아이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때 왜 아무런 표현도 안했니?” 아이들이 말하기를 “너무 놀라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서야 제가 마음이 뿌듯해졌습니다.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을 선물했으니 말입니다. 아무리 고생스러웠고 힘들었던 일들도 다 추억과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왜 입니까? 제가 사랑하는 아이들이고, 그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아빠로서 갖고 있는 당연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무엇인가가 아까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무엇인가가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사랑하면 아깝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지식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생을 보내 주셨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업가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건강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사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오락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 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어 가장 좋은 것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힘들여 그랜드 캐년을 보여주었지만, 이제 아이들은 그저 다녀온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 기억이 일생을 바꾸는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님은 우리의 일생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기쁨으로 구원의 선물이신 예수님을 믿으시고, 차고 넘치는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경이 말하는 인간, 나 자신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이 필요한 존재일까요?
그 시작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3절에 이르기를 “허물로 죽은 우리를”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체'로 되어 있는데, 육체는 건강한 성인 남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 약 35리터의 물과 약 30kg의 탄소화합물, 그외 잡다한 여러 가지 성분의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정도의 물질을 돈을 주고 구입한다면 100불이면 넉넉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 본능과 욕정에 따라 동물적 삶을 산다면 그 인간의 가치는 100불 밖에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육체가 중심이 아니라 ‘영적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측면의 마음, 정신, 얼, 혼, 초자연, 신비, 거룩, 영원성, 존엄성, 무한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돈으로 환산 할 수 없는 비싼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져 가면서 인간의 "영"적인 요소는 무시되어지고 마치 기계의 부속품의 하나처럼 "육체적"인 기능이 강조되어 갑니다. 사탄은 '돈'이라는 미끼를 던져서 사람들의 관심을 '영'에서 '육'으로 완전히 돌려 놓아버린 듯합니다. 겨우 10만원 짜리 "육체"에 수천 만원 짜리 밍크코트를 두르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운다고 해서 10만원 짜리가 수천 만원 짜리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 인간의 가치는 육체가 아니라 그의 "영혼"이 깨어나느냐 아니냐로 판가름 납니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불멸의 영혼이 육체의 옷을 입고 사는 존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닮아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불멸의 존재인 것입니다. 이 불멸의 존재가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속이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큰 죄를 짓고 하나님께 쫓겨 나와 그 영혼이 죽었습니다. 타락하므로 영이 죽고 육체와 혼만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늘날 감각과 이성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그나마 인간의 감각과 이성도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어서 방향을 잃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아가지 아니하고 세상과 육체와 마귀만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무한한 가치의 인간이 고작 100불짜리 인간이 된 것입니다.
비키니라는 작고 아름다운 무인도 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섬에는 해마다 거북이들이 모래 속에 알을 낳고 바다로 돌아가는데, 그러면 뜨거운 모래의 열기로 알이 부화해서 새끼 거북이들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보통 알에서 부화한 새끼 거북이들이 바다로 가는데 어느 해에는 섬의 거북이들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바다로 가야 살 텐데 산으로 가서 고통스럽게 죽어갔습니다. 조사해 보니 얼마 전에 이 섬에서 실시했던 원폭 실험이 문제였습니다. 실험으로 방사능이 노출돼 온 섬을 덮고 있어서 거북이의 감각기관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끼 거북이들이 바다로 가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영이 타락하고 변질되어 오직 육과 혼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은 화려하고 좋아 보이는 세상이지만,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한국이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체가 강조되면 영이 죽고, 영이 죽으면 결국 육체도 죽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체 육적인 것들에 매달려 사는 것입니다.
이같은 인간의 실체를 깨닫고 인정하는 자만이 구원의 감격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깨달음은 이성적 이해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은혜로만 말미암습니다.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은 없습니다. 선한 행위는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고 성령의 사역으로 심령이 새로워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구원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대지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구원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미국의 어느 부둣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날 정기 여객선이 도착해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는 도중 그만 한 여자가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사람들은 모두 고함을 치면서 발을 동동 굴렀으나 선원들은 이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기만 했습니다.그러자 사람들은 이런 무책임한 선원들이 어디 있느냐며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선원들은 여자가 두 번이나 물 속에 떠올랐다 잠겼는데도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습니다.그런데 여자의 힘이 완전히 소진된 것을 알고서야 한 선원이 비호같이 다이빙을 해서 축 늘어진 그 여자를 구해서 올라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왜 처음부터 빨리 구해주지 않았느냐고 그 선원을 뭐라했습니다.이에 그 선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합니다.
“모르시는 말씀들 하지 마십시오.사람이 물에 빠져 자기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쓸 때는 어느 장사가 구하러 들어간다고 해도 빠진 사람의 힘에 눌려 같이 빠져 죽게 됩니다. 그래서 기다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원리도 이와 비슷합니다.역경 가운데 사는 비결은 나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김의환 목사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노력으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사람의 행위와 노력으로 마음의 평안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죄악의 바다에서 헤엄쳐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행하므로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불교는 참선이나 선행, 고행을 통해서 열반에 이른다고 주장합니다. 이슬람교 역시 매일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고 매년 한달 동안 금식을 하고 일생에 한번 메카로 성지순례를 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힌두교는 극심한 고행을 통한 구원을 주장합니다. 장기적인 단식, 걸식, 불 속으로 뛰어 들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 한쪽다리로 서있기, 가시덤불이나 오물 위에 누워 생활하기, 몸에 재를 뒤집어쓰기, 손톱과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기 등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와 노력으로 무언가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인간은 스스로 죄악의 바다에서 헤엄쳐 나오지 못합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철학적인 탐구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인 깊은 사고를 통해서 인간의 죄와 절망, 죽음과 멸망에서 건져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매해 미식축구를 하다가 20여 명이 사망하고 30여 만 명이 부상을 당한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발표되었습니다. 게다가 희생자의 40%는 15- 19세의 청소년들입니다. 미식축구는 워낙 격렬한 몸싸움을 하는 경기이기 때문에 튼튼한 헬멧과 여러 가지 부상 방지용 장비를 갖추고 경기에 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비가 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상대 선수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줄 때도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방비 도구란 이렇게 하찮은 것입니다. 율법이니 도덕이니 하는 으리으리한 장비도 인간을 죄에서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고행을 하고, 선한 의지를 갖고 있어도 죄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독생자 예수를 통한 구원의 길뿐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방법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외형만 그럴 뿐 실상을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는 잠시 덮어두거나 임시 방편으로 처리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죄 앞에서 인간은 생명이냐 사망이냐의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생명을 원한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구원은 오직 예수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 믿음이 벤츄라교회 모든 성도님들 마음과 심령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