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
윤정혁
나는 오랜 기간 한 직장에서 일했다. 일을 그만 둘 때까지 한정된 울타리 안에서 거의 매일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줄곧 성이나 이름에 직위를 붙인 호칭으로 불렸다. 직장 밖에서는 가끔 ‘씨’ ‘님’ ‘선생’이 붙긴 했다.
호칭은 신분이나 직위에 따라 바뀌기도 하지만 같은 신분이더라도 시대적 환경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인권의 향상으로 호칭이 변한 경우도 많다. 식모에서 가정부 가사도우미로 달라지더니 요즘은 홈 매니저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때밀이에서 목욕 도우미로 운전수는 운전사로 바뀌었다.
호칭에는 부르는 쪽의 계산이 얼마간 엿보인다. 대학의 강사나 겸임교수나 부교수를 학생들은 모두 ‘교수님’으로 부른다. 부르는 쪽이 듣는 쪽의 기분을 슬쩍 맞춰주는 듯하다. 강사님, 겸임교수님, 부교수님 꼬박꼬박 지위를 따져 부른다면 그게 옳기는 해도 좀 자연스럽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은행처럼 서비스를 파는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은 고객님이란 호칭을 입에 달고 산다. 요즘은 달라졌지만 새파란 젊은 검사에게 영감님이라 부르던 시절도 있었다. 술집에 가면 손님은 사장이나 회장이 되기도 하고, 식당을 찾아간 사람은 일하는 사람을 아가씨, 아줌마, 이모라 부른다. 의사의 ‘師’ 자는 스승 사자다. 의사는 의사님이라 부르지 않고 의사 선생님이라 부른다. 대게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가 그렇게 부른다. 우리 어릴 적엔 대통령을 각하라 불렀다. 호칭이 당사자를 기분 좋게도, 불쾌하게도 한다. 대체로 관계와 소통이 호칭에서 시작되는데 이름은 안보이고 호칭이 두드러질 때가 많다.
직장을 그만둔 뒤에 글쓰기 공부를 하러 다녔다. 그곳에선 모두가 상대를 선생으로 불렀다. 가르치는 이를 배우는 이가 선생으로 불렀고 배우는 이도 가르치는 이를 선생이라 불렀다. 내 어릴 적 꿈이 선생이었으므로 내가 선생으로 불릴 때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약간 당혹스러웠다. 선생다운 선생을 보기가 힘들어졌다고 개탄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의 많은 직업 가운데 나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한다.
처음 내가 선생으로 불렸을 때는 마치 남의 옷을 걸친 것처럼 그 호칭이 낯설고 어색했다. ‘김구 선생’ ‘안창호 선생’ ‘장준하 선생’ ‘남경순 선생님’( 내가 좋아했던 초등학교 삼학년 때 담임선생님) 존경의 대상이었던 그분들 사이에 끼는 것은 왠지 과분하고 외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곳에선 딱히 달리 부를 마땅한 호칭도 없기는 했다.
‘선생’은 일반적으로 남을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지만 존경받을 만한 사람에게도 쓴다. 어떤 특정인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써야 한다는 사회적 약속이 허물어진 지도 오래되었다. 행색이 반듯하고 나이가 있으면 그가 가르치는 이가 아니더라도 후하게 선생으로 불러준다. 내 집에 세 든 이들은 나를 주인아저씨나 사장이라 부를 법도 한데 선생이라 부른다. 눈치로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나는 사장보다 선생이라 불러 주는 그 눈치를 싫어하지 않는다. 매달 전기사용량이나 수도계량기 검침을 오는 분들도 내 아내를 사모님이라 부른다. 선생님이나 사모님이나 호칭의 값이 헐해진 건 그게 그거다.
내가 아는 이들 중에 전 현직 교수가 몇 있다. 그들 중에는 퇴임 후에도 교수로 불리기를 원하는 이가 있다. 사석에서 자신을 교수라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 불렀다고 화를 내는 것을 본 적도 있다.
그 일로 교수가 아니었던 몇이 대학에서 가르치느냐 초중고교에서 가르치느냐를 떠나 단순히 호칭만으로 선생이 위인가 교수가 위인가를 따져 본 적이 있다. 사회적 통념은 단연 교수가 위다. 어디서 가르치느냐로 위아래를 매기는 것은 옳지 않다. 교수가 대학에서 가르치거나 가르친 일이 있는 이에게 붙는 한정된 호칭이라면, 선생은 범위가 좀 넓다.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하며 갑론을박 끝에 얻은 결론은 선생이 위라는 거였다. 두 호칭에 위아래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논쟁에 참여한 네 사람은 모두가 ‘군사부일체’라든가 ‘학생은 선생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다. 그들의 결론에 의미를 부여할 것까지는 없다. 사실 이런 논란은 무의미하다. 선생다운 선생, 교수다운 교수가 어떤 사람이며 얼마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차라리 의미 있겠다.
내가 직장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요즘 내가 선생이라 불리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내가 선생이라 불려도 괜찮은가 따위의 의심은 아예 하지 않는다. 그사이 내가 선생이라 불릴 만큼 인격이 성장했는가? 그렇지 않다. 살아보니 장삼이사 모두가 선생인 세상이 되어 있어 뻔뻔해진 데다 어느덧 그 호칭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희한한 일이다.
내가 아는 어떤 비영리 교육집단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분들의 호칭을 선생에서 교수로 바꿔 부른다고 한다. 호칭 변경의 당위성이나 가르치는 분 모두의 동의가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다. 나로서는 선생이라는 호칭이 더 다감하고 따뜻하다. 나는 내가 선생이라 불러 달라고 요구한 적은 없다. 어느 날 선생에서 교수로 호칭이 바뀐 이들도 스스로 호칭을 바꿔 달라고 요구하진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내가 선생이란 호칭에 익숙해 졌듯이 그들도 그 호칭에 익숙해지고 그렇게 부르고 불리는 것을 당연시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선생이라 불리는 것은 현상에 불과하다. 틀림없이 선생은 아니다. 허상일 텐데도 나는 그걸 믿으려 않는다. 놀라운 일이자 경계해야 할 일이다.
첫댓글 수문대 1기 생으로, 수문대에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분입니다.
그림도 잘 그리시어서 여러 번의 개인전도 가졌습니다.
선생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