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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리이다(최예섬)
성경에서 나아만과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 성경의 "열왕기 상(2 Kings)"에 나타나 있습니다. 나아만은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엘리사 선지자와의 상호 작용에 관한 것입니다.
나아만의 피부질환 (열왕기 상 5장):
나아만은 스리아의 군대장관으로, 그의 몸에 문둥병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아내는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사에게 나아마를 치유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알려주기 위해 그에게 복종을 요구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처음에는 엘리사의 말을 놀라워하지만, 그의 하인들의 설득 덕분에 복종하고 요단 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러 가서 깨끗해졌습니다. 나아만의 신앙 (열왕기 상 5장):
나아만은 엘리사의 치유로 회복된 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진실되고 유일한 하나님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제 다른 신들에게는 숭배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한편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엘리사에게 약속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 또한 사람들이 겸손하고 순종할 때 어떻게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처음에는 엘리사의 지시에 대해 불만을 표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순종하여 치유를 받았습니다.
나아만의 이야기는 선지자와 통하면서 믿음과 복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자신의 생각이나 자긍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구약 성경에서 여러 인물로 등장하며, 그들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중 몇몇은 특별한 사건이나 교훈적인 이야기를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래에서는 몇몇 중요한 이스라엘 선지자들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겠습니다.
1. 엘리야 (Elijah):
엘리야는 9세기 경 이스라엘 북부 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로, 이세벨과 아합 왕의 시대에 등장했습니다.
그의 주된 업적 중 하나는 갈멜산에서 바알 신의 제사장들과의 대결로 유명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불을 내려 엘리야의 제사를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갈멜산 이후에는 기아와 가난 속에서 살던 과부에게 신으로부터의 기적을 행했습니다.
2. 엘리사 (Elisha):
엘리야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엘리사는 또 다른 두각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의 이야기 중 하나는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유한 이야기로 유명합니다(앞서 언급한 나아만의 이야기).
또한, 고레신의 기둥에 물을 뿌려 살려낸 사건 등을 포함하여 여러 기적을 행했습니다.
3. 아미야(아미티야)의 아미(Amos):
아미야는 남부 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 중 하나로,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보다 나중에 나타났습니다.
가난한 목자 출신으로, 여러 윤리적 메시지와 예언을 전하며 백성을 부르짖었습니다.
불의와 탐욕에 대한 비판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강조를 통해 유다의 도덕적 부흥을 촉구했습니다.
4. 이사야 (Isaiah):
이사야는 8세기 경에 활동한 대표적인 선지자로, 예루살렘에서 왕국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예언을 전했습니다.
그의 예언은 주로 그리스도의 나중 온 것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사야는 또한 평화와 공의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권능을 설명하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습니다.
5. 예레미야 (Jeremiah):
예레미야는 7세기 경에 활동한 선지자로, 유다의 멸망과 포로되는 것에 대한 예언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전하며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경고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또한 "새 언약"에 대한 예언으로 통해 창조적이고 소망찬 면도 보여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각자의 시대와 맥락에서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도덕적, 영적인 가르침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인간의 죄와 회개에 대한 주제가 다뤄지며, 이는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과 하나님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선지자들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백성에게 도덕적, 영적인 가르침을 제공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특정 시대와 상황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아래는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주요 역할과 기능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 전하기:
선지자들은 주로 하나님의 목소리를 받아 백성에게 전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종종 예언, 경고, 축복, 혹은 지침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덕적 가르침과 책망: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권고하고, 죄악과 부정을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종종 백성이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나면 불행과 심판이 닥칠 것임을 경고했습니다.
신앙의 강화와 회개 촉구: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갖도록 권고하며, 종종 회개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사회적 정의 강조:
많은 선지자들은 사회적 불의와 탐욕, 억압에 대해 책망하고 사회적 정의를 강조했습니다.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등을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였습니다.
미래의 축복과 예언:
선지자들은 종종 미래에 대한 예언을 통해 백성에게 희망을 전했습니다. 이는 종종 그리스도의 나타남, 복음의 전파 등과 관련된 것들을 포함했습니다.
왕과 국가에 대한 충고:
선지자들은 때로는 국가의 지도자나 왕에게 조언하거나 경고를 전해왔습니다. 이는 종종 국가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백성을 선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포함했습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종종 어려운 임무를 맡았지만, 그들의 역할은 백성을 하나님과의 교류로 이끄는 것과 함께,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도록 백성을 도우며 가르치는 데 중점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선지자들은 성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래와 관련하여 이후의 성서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선지자라는 개념이 종종 종교적 맥락을 넘어서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예언자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 환경 등 다양한 영역에서 예언이나 경고의 역할을 하는 인물을 나타낼 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아래는 현대사회에서의 선지자적 역할에 대한 몇 가지 관점과 예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사회적 예언자:
현대사회에서 선지자는 종종 사회의 문제, 부정, 불평등에 대해 진단하고, 미래에 대한 경고를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사회적 활동가, 인권운동가, 환경운동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문화적 선지자:
예술가, 작가, 음악가 등은 종종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회적, 문화적 메시지를 전하며 선지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술이 사회적 변화와 개선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환경 선지자:
환경 문제가 급속하게 증가함에 따라, 환경운동가들은 지구의 지속 가능성과 자원 보호에 대한 경고와 예언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고 지구의 미래를 책임질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기술과 윤리:
기술의 발전과 함께 윤리적인 고민과 문제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부 기술 선지자들은 인공지능, 개인정보 보호, 인간의 역량과 책임 등에 대한 고찰을 통해 기술의 영향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권과 정의 선지자:
인권 문제, 정의, 평등에 대한 선지자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차별과 억압에 대항하며, 모든 사람들의 권리와 존엄을 존중하고 옹호합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전문가:
경제, 기술,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래를 예측하고 경고하는 전문가들도 선지자적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현재의 흐름과 동향을 토대로 미래의 문제와 도전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현대사회에서의 선지자들은 종종 새로운 시각, 도전, 희망,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사회를 발전시키고 성숙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들은 종교나 신앙이라는 한정된 맥락을 벗어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사회의 가치와 윤리, 인간의 존엄성을
(50) 여호와의 복병 (역대하 20:20-23)
여호사밧이 통치하는 유대나라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모압자손과 암몬자손과 마온 사람 연합군대가 침공해 왔습니다. 그 군대가 바다저쪽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엔게디에 있고 사해바다 건너편에서 연합군이 침략해 와서 바다를 돌아 이미 건너와서 이스라엘 영토에 들어와 사해바닷가 엔게디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자손들이고, 세일산 사람들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후손인 형제들 간의 전쟁입니다. 세 나라가 한꺼번에 쳐들어오니 감당하기 어려워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6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바로 되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는 하늘의 하나님이시고,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도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는 분임을 고백했습니다.
7절에서.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거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영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9절에서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에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다 이루어주시겠노라고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왕인 제가 솔로몬의 기도를 기억하고 이렇게 주님 전에 나와서 기도를 합니다. 솔로몬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호소합니다. 아브라함과의 약속, 솔로몬과의 약속, 이렇게 약속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나와 암몬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의 땅을 지나려 할 때에 그들이 자기들의 땅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모세는 그들과 전쟁하여 진멸시키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용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도 너희의 형제가 아니냐? 왜 형제간에 싸우려고 하느냐? 그들이 길을 가로막으면 다른 길로 돌아서 가면 될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어가면서 먼 길로 돌고 돌아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적반하장이라고 이제 저들이 오히려 유대 나라를 삼키겠다고 쳐들어왔으니, 이 일을 과연 누가 책임져 주어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11-12절에 여호사밧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저희가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저희가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12절에서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고백함으로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유다의 모든 사람들이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들과 함께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야하시엘을 통해 응답하셨습니다.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마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아라. ⋯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리라.”
이에 여호사밧 왕과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이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튿날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갔습니다. 그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의 복병이 일어나 유다를 치러 온 적들을 치게 하셨더니, 저희가 피차에 살륙하여,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복병이란 적군들 몰래 숨겨둔 군사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후, 아이 성을 공략할 때에 처음에는 얕보고 쳐들어갔다가 무참히 패배하였습니다. 아간이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에 재물에 욕심이 들어서 명령을 어기고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쭝의 금덩이 하나를 취하였기 때문”(수 7:21)이었습니다. 아간을 처형한 후에 다시 아이 성을 공격하는데 이번에는 복병 전술을 써서 승리하였습니다.
골리앗이 쳐들어왔을 때에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숨은 용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바로의 압제 밑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모세라는 인물을 일으키셨습니다. 이런 섭리 가운데 위대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마귀의 허를 찌른 작전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험해도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기쁨으로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이렇게 복병들을 숨겨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그 복병들이 일어나서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큰일들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사람들이 상상도 못했던 인물들 요셉, 기드온이나 입다, 사무엘을 비롯한 구약의 참 선지자들이 모두 복병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상을 진동시키고 세상을 구원하는 숨은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2,000년 역사상에 혜성같이 나타났던 많은 인물들이 모두 하나님의 복병들이었습니다
고린도에 선교하러 간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10).
해외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복병들입니다. 공산국가나 이슬람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제자를 양육하고 교회를 세우는 선교사들은 험지와 최전방에서 아름다운 주님의 계획을 실천하는 여호와의 복병들입니다.
특히 북한의 지하에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이 숨겨놓은 복병들입니다.
이들은 복음통일의 그날 매복한 곳에서 떨쳐일어나 사탄마귀들의 처소들을 기습하고 복음의 깃발을 휘날릴 용사들입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에 쳐들어와서 성을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심지어 자기의 자식을 삶아먹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곧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고, 그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새벽녘에 급히 일어나서 장막과 말과 나귀와 모든 양식과 병기들을 내버리고 정신없이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본문에서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셔서 적군을 물리치셨다.” 고 되어있습니다 찬송과 기도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복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철저히 감추어진 분이었습니다. 유대인들도 부정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에 사형을 집행하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외쳤습니다. 아리마데 요셉은 자기를 위해 예비해 두었던 자기의 새 무덤을 주님께 선뜻 내놓았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드디어 눈이 열려서 주님을 밝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을 위해 목숨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만을 위한 복병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삶에 항상 같이하시는 복병이십니다.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신실하신 복병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살펴보시며,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병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마귀가 지배하는 이 악한 세상에서 악에 물들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감추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에 성령의 지혜와 능력이 임합니다.
복병은 찬송할 때에 일어났습니다. 본문 22절에서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다.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야하시엘이라는 선지자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셨고,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순종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구원은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일어납니다. 믿음의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주님의 말씀인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
여호사밧 왕이 백성들에게 한 말 20절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선지자를 신뢰해야 함을 잊어버리고 살지만 거짓 선지자가 아닌, 하나님의 참 선지자를 찾아 신뢰하면 형통합니다. .
(51) 참 이스라엘 사람(최예섬)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자기의 친구 나다나엘을 데리고 왔을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냐고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따르며 여호와께 성별하는 길을 버리고, 이방의 풍습을 받아들여 이방과 하나가 된 사마리아 땅... 그 사마리아의 나사렛이란 작은 동네는 '선한 것'이 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잠시 내려두고, 예수님 앞에 나아간 자리에서 그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놀라운 평가를 받습니다
이런 나다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건 아픈 마음과 눈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께 나아가는 데에 가장 큰 장벽 중 대표적인 것은 '내 생각과 판단'이다. 나사렛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과 권세가 예수의 이름에 있기에,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세례를 베풀기도, 기적과 표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영혼의 곤고함을 주님께 호소하며, 나의 생각과 판단은 잠시 내려두고, 우리 주님께로 나아가는 우리들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나다나엘은 친구의 권유로 예수님께 나왔지만 결국 그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었고 자기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고 새롭게 된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참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인격이나 생활이 당장 성자처럼 바뀌어 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참 이스라엘의 요건은 먼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있는 자입니다. 본래 이방인이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의롭다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로마서 3:23-24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소욕을 좇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성령을 좇는 신령한 사람으로 다시 나는 변화의 체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리고 성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재산 절반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으며 남의 것을 토색한 것에 대하여는 4배나 변상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선언하셨습니다(눅 19:8-9).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 2:28-29).
삭개오의 세리요 부자였지만 한 번도 자기가 돈만 아는 구두쇠이거나 또 남의 재산을 토색한 자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스스로 남의 재산을 착취한 것에 대하여 4배나 변상하겠다고 실토하는 것은 진실한 양심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를 가리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눅 19:9).
나다나엘은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 받았고. 빌립은 나다나엘과 같은 고향인 벳세다 출신으로서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하며 첫말에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강권에 못 이겨 나다나엘은 예수님께로 나아갔고 결국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자녀 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고 그 사실을 입으로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실천하고. 곧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마 18:4).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며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고전 10:23-24).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 하는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50절).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내려오는 환상과 함께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축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창 2:14). 성경은 하늘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하였습니다(시 11:4).
이삭은 밧단 아람으로 떠나는 야곱에게 축복하면서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창 27:28). 이것은 신령한 복과 육신의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도 하늘에서 내려준 양식입니다. 시편 78:24에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신실한 그의 백성들에게 하늘 문을 여시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말 4:10).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고 새롭게 된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52)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사도신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당시 대제사장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은 가룟 유다였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고난의 실제 원흉입니다. 빌라도는 다만 금요일 새벽에 밀려든 군중들의 압력 때문에 십자가형에 사인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몇 차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노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모든 책임을 자기 혼자 진다는 것이 억울해 보이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께서 죄인이라고 최종 판결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결정적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지금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려고 피고의 자리에 서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총독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로마 황제를 대신해서 식민지인 유대지역을 통치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법,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절대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법적 측면을 보면, 빌라도는 사법의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사법권은 산헤드린 공회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산헤드린 공회의 사법적 결정을 얼마든지 뒤바꿀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 결과 사형이 결정될 경우 반드시 이 사건은 총독 빌라도가 최종 재판을 통해 확정을 해야만 사형이 집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일차 재판을 통해 예수님의 사형 결정을 내린 후에 총독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해 달라고 청했고, 빌라도는 최종 재판을 위해 예수님을 재판정에 세운 것입니다. 이제 총독인 빌라도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예수님을 재판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재판을 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재판관이요 예수님은 죄인으로 세상 법정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재판장이 재판을 받아야 할 자에게 재판을 받으셨다는 점 이 장면은 재판하는 이와 재판 받는 이가 뒤바뀐 것입니다. 본문 24절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빌라도가 재판 결과를 선고하면서 보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물로 손을 씻었다는 것은 이 재판은 불의한 재판이었다는 것입니다. 요 18-19장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장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첫 번째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나와서 고발한 유대인들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18:38) 그래서 빌라도는 타협안으로 유월절 전례를 따라 바라바라는 흉악범과 예수님 중 하나를 택하면 그를 놓아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저들이 예수님을 놓아달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자 죄 없는 예수님을 방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끌고 가서 예수님을 채찍질했습니다. 군인들로 하여금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희롱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고발한 유대인들에게 채찍질 당한 예수님을 끌고 나와 보여주면서 또 말했습니다.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19:4) 그냥 채찍질 정도로 예수님을 방면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자 저들이 소리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19:6) 빌라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직접 예수를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19:6) 이번에는 저들이 빌라도에게 자기들의 법으로는 예수님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을 심층 심문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석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놓아주면 황제에게 반역하는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를 풀어준다면 황제에게 반역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풀어준다면 자기들이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빌라도의 죄를 고발하겠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심문을 해 봐도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풀어주면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웠습니다. 저들이 자기를 황제에게 직접 고발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원대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분으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토록 불의한 재판 과정을 지켜보시면서 한 마디 말씀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무죄를 항변하지 않으셨으며 불의한 재판 과정에 대해 한 마디 문제 제기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당해야 할 그 참담한 꼴을 주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고안한 처형 방법 가운데 가장 잔인한 것으로 원래 페르시아 지역에서 자행되던 처형 방법인데 로마가 식민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받아들여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로마시민들은 사형수라 할지라도 이 십자가 처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식민지의 노예나 반역자들에게만 이 십자가 처형을 강행했습니다. 이 십자가 처형이 잔인한 것은 우선 처형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재판으로 형 집행이 결정되면 먼저 심한 매질을 당합니다. 그리고는 처형 장소까지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이 때 길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이 죄인을 모욕하고 저주합니다. 처형 달릴 곳에 도착하면 발가벗기게 됩니다. 간단히 가릴 곳만 가린 채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는 이 사람의 죄명이 붙어있습니다. 처형 당시 모여든 군중들이 침을 뱉고 돌을 던지고 모욕을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있는 동안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계속 저주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 끔찍한 수치와 모욕으로 정신이 황폐화되고 결국 스스로도 자신을 저주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인격 말살 처형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위해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수치와 모욕을 대신 다 당해 주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십자가형이 잔인한 것은 육체적 고통이 극심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심한 채찍질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로마 군인들이 사용했던 채찍은 가죽을 꼬아서 만들었고 안에는 쇠구슬을 박아 넣었고 밖에는 양 뼛조각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채찍 하나는 이런 가죽 끈 39가닥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채찍을 한 번 내려치면 살가죽이 찢어지고 살점이 뜯어져서 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십자가 처형의 선고를 받으신 직후 로마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지난 밤 꼬박새우며 이리저리 끌려다니시며 심문을 받으셨고,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한 상태에서 끔찍한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이미 그 몸은 기진맥진하신 상태에서 견디기 힘든 육체적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은 양손과 발이 못 박힌 채 공중에 내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체중 때문에 몸이 아래로 쳐집니다. 그 때 양손바닥은 찢어서 피가 흐르고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보다 횡경막이 눌려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온 몸은 산소부족으로 경련이 일어나서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숨을 쉬기 위해 발로 몸을 치켜세우면 숨은 쉴 수 있게 되지만, 이 때 더 큰 고통이 발에 집중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고통을 무려 6시간을 견디셨습니다. 온 몸으로 이 모든 고통을 다 겪으시다가 죽음을 맞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원하시면 얼마든지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으셨습니다. 가해자들을 물리치실 수도 있으시고 빌라도를 간단히 제압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진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끔찍한 고통을 다 당하셨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5-6에서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것은 우리가 당할 고통과 저주를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된 장면을 구약의 레위기와 잘 연관시켜 볼 수가 있습니다. 레위기 1장 - 번제의 규정(대제사장을 위함) 이 장에서는 번제의 종류와 예물을 제물로 가져오는 방법에 대한 규정이 설명됩니다. 번제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 제물로 가져오는 의식적인 헌신의 표시입니다. 레위기 2장 - 소제의 규정 (평민들을 위함) 소제는 가루나 기름 등의 식물물질로 만들어진 제물로, 감사와 헌신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장에서는 소제에 대한 세부적인 규정이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3장 - 화목제의 규정 화목제는 감사와 약속의 의미를 담고 있는 제물로, 가축의 특정 부분을 제물로 가져옵니다. 이 장에서는 화목제에 대한 규정이 다루어집니다. 레위기 4장 - 속죄제의 규정(온회중을 위함) 속죄제는 죄를 속죄하고 회복하는 데 사용되는 제물입니다. 이 장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속죄제와 그에 따른 규정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의미에서 4장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감당하고 돌아가심을 뜻하는 제사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온 인류의 죄를 지심에 해당함 레위기 4장은 속죄제에 관한 규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속죄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에 대한 속죄를 구하는 데 사용되는 제도입니다. 죄의 의식과 회개 (Leviticus 4:1-4): 레위기 4장에서는 만일 이스라엘 중 한 사람이 죄를 저질렀다면, 그 사람은 죄의 의식을 가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의 의식을 일깨우고 회개하도록 격려합니다. 죄의 속죄와 희생 (Leviticus 4:27-35): 속죄제는 특정 죄에 대한 속죄를 위해 동물을 제물로 가져오는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으로 드리셨습니다. 그의 피는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고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는 역할을 합니다. 무결하고 완전한 희생 (Hebrews 9:13-14): 레위기 4장에서는 희생물이 무결하고 완전해야 한다는 원칙이 강조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자로서 무결하고 완전한 희생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로써 우리는 완전한 속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속죄와 은혜 (Hebrews 10:10-14): 레위기에서의 속죄제는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희생은 영원한 속죄를 가져왔습니다. 그의 희생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으로 간주되며,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요약적으로, 레위기 4장의 속죄제 규정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이나 그림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희생은 우리의 죄로부터의 속죄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가져왔습니다. 레위기 5장 - 헌신제의 규정 헌신제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의지를 나타내기 위한 제물로, 가축이나 물건으로 헌납됩니다. 이 장에서는 헌신제에 대한 규정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집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소나 양을 가지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을 때 우리의 죄는 동물에게 전가됩니다. 속죄함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죄없는 동물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 동물들이 비참하게 죽어갈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큰 지를 깨달아야 했고 그를 통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나균용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구약에서의 제사에 대하여 잘 알게 되었으며 이는 호상 연관속에서 이루어졌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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