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2. 10. 9일(주일) - 성령강림절후 열여덟째 주일- (2022년 41주)
제목; “예와 아멘의 믿음과 예배”(예배9)
성경; 고후 1:15-24 (신약 286면) (요 4:23-24, 321<351>, 549<431>, 6)
<예배의 부름> (요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와 추수의 달 10월둘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주 설교 말미에 노사연의 “바램”이란 가요를 들으면서 말씀을 마무리했는데, 하나둘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 가을이라 그런지 다들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노래의 마지막 소절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저 높은 곳에 함께 가야 할 사람, 그대뿐입니다.”하는 노랫말에, 나이 들어가는 나의 삶을 반추하면서 깊은 상념에 빠지고, 은혜받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았습니다.
기온이 많이 떨어진, 깊어가는 가을에 무엇보다 감기 조심하시길 바라며, 내 인생의 가을도 생각하면서, 항상 건강하고 평안하며 행복하고 안전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교회의 5대 사명 중 첫째인 “예배”에 관한 아홉 번째 말씀 “아멘으로 드리는 예배와 믿음”이란 제목으로 말씀 나누면서, 예배에 대한 생각을 환기시키고 은혜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II.
* 예배란 무엇입니까?
* 국어사전, “예배”: “신을 신앙하고 숭배하면서 그 대상을 경배하는 행위 및 그 양식”
* 예배학, “예배”: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 ☞ 예배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①하나님의 역사하심, ②인간의 응답입니다.
예배란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인 신자들의 만남이요 교제’라고 말합니다. 또 예배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음과 뜻과 힘과 성품을 다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사랑과 독생자 예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에 감격하여 영광을 돌리며 내 온몸을 드립니다’라고 하는 영적인 의식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는 가장 엄숙하고도 경건해야 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롬 9:4, 히 9:6, 출 3:14, 계 22:13).
1. “예배를 회복합시다!”(예배1)(레 26:1-4)
1)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고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 우상 만들고 경배하지 말라.
2) ‘나 자신’을 드리는 예배로 회복되어야 한다. :
* 번제 : 자신을 죽이고, 조각내고, 태우는 제사
3) 예배에는 반드시 ‘대속의 제물’이 있어야 하고 ‘희생제물의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 : 상한 심령
4)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의 시간과 장소가 회복되어야 한다. : 안식일(시간), 성소(장소)
2. “두 예배자의 관심”(예배2)(눅 18:9-14)
1)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 :
* 공통점 : ①둘 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갔다. ②둘 다 의에 관심이 있다. ③각각 자기를 돌아보게 된다. ☞ 내가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성찰하고 나의 의를 살피게 된다.
* 차이점 : ①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자기 의를 내세운다. ②세리는 자기 의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2) 바리새인이 예배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
* “서서”(습관적), “따로”(구별) 기도 ☞ 바리새인의 기도, 곧 예배가 그 자신을 위한 것이요, 자기 과시를 위한 것임
3) 세리가 예배에 성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
4)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는 기도와 예배, 삶의 태도는?
①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과 일대일 만나는 기도와 삶을 살아가야 한다.
②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 ‘Coram Deo’, 곧 ‘신전 의식’(神前 意識), ‘하나님 앞에서’의 삶
③솔직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기도해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사(예배3)”(예배3)(민 28:1-8)
☞ 하나님께 매일 드리는 제사인 상번제(上番祭)
1)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2). ☞ 제물을 드리는 우선적인 목적이 인간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앞서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기쁘시게 하는 점
2) 하나님께서 정한 시기에 드려야 합니다(2).
①출애굽 후 38년 지난 출애굽 2세대, 새로운 세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그 법이 주어졌을 때에는 대부분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었기 때문이다. ②전쟁 시작하려는 시기, 앞으로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기 쉬운 상태였다. 전쟁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더욱 중요하다. ③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후 풍족한 소유 때문에 하나님 섬기는 일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3) 성도는 상번제, 매일 제사(예배) 드려야 합니다(3-4).
“상번제”(올라 타미드), ‘번제’(올라)와 ‘연속성’(타미드) - ‘규칙적으로(끊임없이) 드리는 번제’라는 뜻으로, ‘매일 아침과 저녁에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드리는 소제, 전제, 번제’
①상번제는 ‘매일 드리는’ 제사(예배)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②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려지는 “어린 양”(4)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표한다.
③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려지는 희생 제사는 성도들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4. “내가 성소에서 깨달았나이다”(예배4)(시 73:1-17)
☞ 악인이 형통하는 모순된 현실에 대한 지혜자의 교훈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 악인의 형통함으로 인해 받는 시험과 박탈감을 표현하고 있는데,. 벌 받고 심판(징계) 받아야 마땅한 악인이 형통하고 복 받는 모습을 보며, 악인과 같이 악을 행할 수도 없고, 의인은 정말 괴롭고 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15-16) 그리고 악인의 형통함에 대한 해결책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 = 교회 예배,‘교회 가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므로 악인들이 망할 것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 종말” 곧 악인의 종말을 “깨달았나이다”.이 세상을 악인이 주관하는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상이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요,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심판하시고 공의로 다스리는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23-24)
5. “기쁨과 평강의 기도와 예배”(예배5)(빌 4:4-9)
‘평안(샬롬)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가?’비결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샬롬(평강, 평화)”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웃과의 화목한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진실과 평안을 얻는 자유한 관계, 또한 물질에 대하여 넉넉한 관계, 곧 물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다스릴 수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1) 항상 기뻐하며, 관용을 베풀며, 염려하지 않고 기도하므로 평강을 누립니다(4-6).
바울은 4-6절에서 5개 명령형 동사를 통해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①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카이레테)(4).- “나”와의 관계 회복, ②너희 관용(에피에이케스, 온유)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기노스데토)(5).- “이웃”과의 관계 회복, ③아무 것도 염려(메림나)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6).
2)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므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립니다(8-9).
2개 명령형 동사 “생각하라”(로기제스데, 사려 깊게 여기라, 8), “행하라”(프라스세테, 9)
3) 결 : 모든 평강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7,9).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9)
6. “예수님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예배6)(행 3:1-10)
☞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인 성전에서 생긴 사건
1) 앉은뱅이 : 구걸하러, 생계 유지를 위해 성전에 나온 사람 - 성전 제사(예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 구걸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사람
2) 앉은뱅이를 메고 온 사람들 : 구걸하도록 도와준 사람 - 앉은뱅이 거지와 같이 성전 제사(예배)에 관심이 없고, 그저 앉은뱅이 거지를 성전 미문에 데려다주어 구걸하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3) 베드로와 요한 :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 - ①앉은뱅이 거지가 이전과 다르게 간절히 ‘바라보고’(에페이켄, ἐπεῖχεν, 굳게 잡다, 주목하다, 지체하다<에페코>) 있었다. ②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의 내적 존재가 변화하였기에 인간관계도 전혀 달라졌던 것이다.
7. “참된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예배7)(요 4:23-24<13-24>)
☞ 참된 예배는 어떤 예배이며, 생명력 있는 예배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1) 예배드리는 장소 :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20-12).
우리 하나님은 모든 장소를 초월하시는 만민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면 모든 예배드리는 처소가 거룩한 것입니다.
2)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올바로 알고 예배드려야 합니다(22).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리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며 하나님께만 예배드려야 합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나 우주 만물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3)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합니다(23-24).
참된 예배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로, ‘성령과 진리로 인도되고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설교자나 설교자의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순종하려는 예배자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8. “삶으로 예배드리는 성도”(예배8)(왕상 8:22-30)
☞ 성전을 건축하고 언약궤를 안치하고 성전 봉헌식에서 드린 솔로몬의 기도 중 일부
1) 성전,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언약궤는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으로 모세와 관련된 ‘전통적인 신앙’을 대표한다.
2) 성전, 교회는 여러 사람의 헌신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완성되었습니다. 사회, 지역, 혈족 지도자 모두 참석한 것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모신 성전을 국가의 유일한 중앙 성소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 중심의 국가를 이루자는 것이다.
3) 성전,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요 예배드리는 처소입니다. 솔로몬의 봉헌 기도-일곱 가지를 탄원 : ①성전은 예배(제사)의 장소이며 기도하는 집이다. ②참된 기도와 예배는 언약의 말씀에 기초한다. ③예배와 기도는 공동체와 함께 한다. ④예배와 기도는 신앙인의 삶의 현장에서 생활화되어야 한다.
I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고후 1:15-22)은 사도 바울이 전에 자기가 고린도에 방문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형편이 여의치 못해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 방문을 연기했습니다(23). 그런데 이 고린도 방문 연기를 비난하고 중상모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 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아니오” 하게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서 한 것이지 사람의 입장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계획(뜻)에 전적으로 “예”와 “아멘”만 하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방문을 연기한 것에 대해 그의 원수들, 바울을 괴롭히려 하는 사람들이 “바울이란 사람은 경솔한 사람이요, 한 입으로 ‘예’와 ‘아니오’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다”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시적인 충동으로 경솔하게 약속했고 그의 말은 예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헐뜯었습니다.
먼저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이렇게 비난하는 말을 하게 되는 배경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신앙적으로나 사명적으로나 가장 약할 때에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마음이 약하여 담대히 나아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개인 전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자비량(自費糧, Tent-making Ministry)하고 스스로 천막 치는 업을 해가면서 겨우 전도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때입니다. 이렇게 용기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교회를 세워서 그런지 고린도 교회에는 간단없이 문제가 일어나고 분쟁이 많았습니다(고전 1:10-13). 그 점이 또한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사도의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바울의 사도권(使徒權)에 정면 도전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부 동반해서 다니는데 바울은 혼자 다니니 역시 시원치 않은 사람이다’ 하는 등 별의별 비난을 다 합니다. 게다가 분쟁하는 교회를 수습하기 위하여 방문도 하게 됩니다. 배로 가려고 했다가 조금 지연되는 경우도 있고 한 지방을 갔다가 다른 곳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랬더니 또 비난과 오해가 생깁니다. ‘먼 데서만 큰 소리쳤지 가까이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편지 쓸 때와는 딴판이다’ 하는 비난의 말도 쏟아져 나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보냄을 받아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닙니다(16). 사도행전 19-20장에 보면, 이때가 시기적으로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있을 때인데, 에베소에서 아데미를 섬기던 자들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곤경에 처해있던 시기입니다. 그러다보니 고린도에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런 바울을 향해 적대자들은 비난을 했습니다. 이 비난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17)
한 마디로 내가 너희에게 약속대로 가지 못한 것은 나 자신의 경솔함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 뜻에 따라 “예” 하고, 사람(육체)에 대해서는 “아니오” 하게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서 한 것이지 사람의 입장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예” 할 때에 사람에 대하여서는 “아니오”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앞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12)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바울은 자신의 성실성과 강직함을 거듭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실’(faithfulness, sincerity)은 ‘믿음’(faith)과 ‘단순성’(simplicity)과 통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실할 때에 단순해지고 믿음이 있고 마음이 깨끗합니다.이것은 또한 ‘고집성(固執性, insist)’과도 통합니다.‘옹고집쟁이’는 다른 사람이 볼 때에 바보스러운 사람이요, 단순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열심으로 믿는 사람을 보고는 ‘저 사람 돌았나? 꼭 저렇게 야단스레 믿어야 되나?’ 비난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사람으로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생명적인 것을 취할 때에 사망적인 것을 버리고 영원한 진리에 “예”(Yes)하는 동안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대하여 “아니오”(No)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때에 사람의 권위에 대하여는 거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의를 긍정하고 불의를 부정하며 하나님의 선(善)을 따라가느라 악(惡)한 일은 멀리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only faith)라고 하는 참된 신앙적 진리를 보수(保守)하기 위하여 로마교황청을 상대로 95개의 반박문을 냈습니다. 그는 그 일로 재판을 받고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위폐 됩니다. 감금된 것이지요.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중요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때 그가 기거했던 방의 벽에는 지금도 그때의 잉크 자국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 잉크 자국은 중요한 것을 암시해줍니다. 그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너무도 많은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아마 사탄은 이렇게 유혹했을 것입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 교황과 타협하면 쉽게 풀려날 것은 물론 좋은 자리를 얻어 일생을 편히 지낼 수 있을거야...’ 좋은게 좋다고 그냥 넘어가면 될 것을 조금 유별나게 살다보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자꾸만 유혹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나만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있는가, 지지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런데 유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움트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마침내 사탄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외치면서 벽을 향해 잉크병을 던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예” 하기 위하여 사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친 것입니다.(☞ 사진 보며)
거기서 그는 저 유명한 찬송“내 주는 강한 성이요”(585장)를 지었습니다.
1.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 내 힘만 의지할때는 패 할 수 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 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땅에 마귀들 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그냥 눈 한번 질끈 감고 넘어가 버리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 되기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타협하지 않고 거스러므로 어려움을 당하고 곤경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아 세상의 유혹, 사탄의 유혹을 끝까지 견디고 이긴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것을....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2.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얼마든지 “예”와 “아멘”만 됩니다(18-19).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가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계획(뜻)에 “예”라고 응답한 결과라고 말한 후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예”와 “아멘”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18-19)
여기서 “아멘”(אמן, ἀμήν)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원래 히브리어 “아멘”(אמן)이지만, 헬라어에서도 히브리어 음역 그대로 “아멘”(ἀμήν)으로 쓰입니다. 물론 영어 “아멘”(Amen)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아멘”은 ‘진실한’, ‘확고한’이란 뜻으로, 전적인 동의나 순복을 나타내는 말로, 성경에서는 “진실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자세요, 진실한 응답이 “아멘”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미쁘신’,곧 ‘신실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은 “예”(Yes)만 있지, “아니라”(No) 함은 결코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예’와 ‘아니오’ 사이에 동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한 ‘예’가 됩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그 귀한 약속을 모조리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우리는 구원해 주셔서 천국과 영생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사실, 이 세상에서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사실, 이 모두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그렇다. 그것은 진실이다”라고 하는 보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크거나 작거나 간에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해 그것이 모두 틀림없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증인입니다. 그러한 사랑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도 아무 의심 없이 절대적으로 믿고 의뢰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로 ‘아멘 아멘 레고 소이’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진실하고 확고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자세요, 진실한 응답이 ‘아멘’입니다.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예배드리는 자세가 이런 “예와 아멘”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묵상할 때나, 성도들이 가정에서 예배드릴 때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을 때나, 한 구절이 끝날 때마다, 혹은 성경을 다 읽은 후에 회중들이 다 함께 “아멘”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수락하며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어느 목사님이 중국 북경에 가서 교인들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가정예배 처소였는데, 그곳에서는 예배를 드릴 때, 사람은 절대로 설교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일어서서 말하면 설교요, 앉아서 말하면 좌담이 되어 외부에서 온 사람도 앉아서 말하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좌담식으로 앉아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말씀 더하라는 회중의 권유에 따라 두 시간이나 설교를 했답니다. 이야기가 끝나 경청하던 청년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칩니다. "오늘의 교양, 전적으로 접수합니다."공산당 교양할 때에 쓰는 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접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加減)을 두지 맙시다.홍해를 건넜다고 하면 건넌 줄로 알아야 합니다. 장님이 눈을 떴다고 하거든 뜬 줄로 아십시오.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하면 그대로 믿으십시오. 거기에 인간의 생각과 칼(메스, mes)을 대지 마십시오. 쓸데없는 이성적 비판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든지 주시는 대로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에 대한 수용이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전적인 수용입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이 “예”와 “아멘”만이 되는 두 가지 이유 :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예”와 “아멘”만 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20-21).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20-21)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아멘”이라고 합니다(20).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끝맺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후에도 우리는 “아멘”이란 말로 화답합니다.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아멘”이란 말로 말씀을 받습니다. “아멘”이란 말은 앞서 살펴본 대로 ‘진실한’, ‘확고한’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기도한 후, 말씀을 읽고 들은 후 “아멘” 하고 화답하는 것은 단순히 ‘진실한’이란 뜻만 아니라,‘그렇게 되어지이다’하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멘’이란 단순한 형식만이 아닙니다.내가 드린 기도, 내가 묵상하고 들은 말씀대로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별명을 아십니까? 요한계시록 3:14에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아멘”으로 시작하여 “아멘”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아멘”으로 인감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십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그 험악한 고통의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아니오’ 하지 않고 “아멘”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은 “아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를 드릴 수가 있고,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위대한 약속을 내 것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한 보증이십니다. 하나님의 깨어지지 않는 약속에 대한 “예”가 되십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그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며,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은혜와 은총, 응답을 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모든 위대한 약속은 참되다는 것을 믿는 우리의 확신이 “아멘”이란 말로 표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멘”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참으로 감격 어린 표현이요, 확신에 찬 응답인 것입니다.
2) 성령 하나님께서 인치시고 보증해 주셨습니다(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22)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예”와 “아멘”이 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두 개의 매우 중요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인치심”과 “보증”입니다.
먼저 “인치심”인데, 헬라어로 ‘스프라기사메노스’(σφραγισάμενος)이며, 그 뜻은 ‘공문서의 효력을 보장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 인(印)은 봉인된 서류가 변조되거나 수송 중에 내용들이 변경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며, 또한 소유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성령으로 인치셨다는 것은 성도들을 당신의 소유로 확인하셨다는 것이며(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NIV), 성도들의 구원의 궁극적인 확실성을 부여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다음은“보증”으로, 헬라어로 ‘아라본’(ἀρραβών)인데, 이 낱말은 히브리어 ‘에라본’(ערבון)에서 유래된 상업적 용어로,‘어떤 물건을 매입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금의 첫 번째 분납금(down payment)’을 의미합니다. 이 말에는 처음으로 얼마를 지불했지만 잔금도 반드시 지불할 것이라는 보증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그 당시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의 개념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에 대해서 말할 때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증, ‘아라본’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고있는 우리의 현재의 삶은 말하자면 천국에서 사는 것의 계약금 같은 것이고 장차 우리 앞에 전개될 삶을 완성시켜 줄 보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보다 큰 은사에 대한 하나님의 증표이며 보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히브리서 7:22에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보증이 되시고, 성령님이 또한 보증이 되시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너무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배의 시간에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담대하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아멘”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4. “예”와 “아멘”의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성도의 삶(23-24)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23-24)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교회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교회는 당파로 분열이 되었고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부인하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이런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바울이 고린도를 잠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힘든 상태의 개선은 고사하고 더 악화되어져서 바울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슴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매우 엄한 책망의 편지를 써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를 다시 방문하겠다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도리어 바울 자신이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처만 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아끼고 도우려는 바울의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바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서 여러 가지 오해가 생겼습니다.
금년에 계속해서 실제적인 예배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인 신자들의 만남이요 교제’인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은혜와 은총을 내려주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 곧 “예”와 “아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요 ‘아멘’입니다. 예배 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니요’ 하는 것은 그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예배의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 죄인인 자신을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에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 물고기를 잡으려 하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그물을 정리하고 피곤한 몸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목수요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입니다. 목수의 말을 곧이 듣고 그물을 내릴 어부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라고 대답하며 그물을 내립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물을 내려보겠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별로 신뢰는 가지 않지만, 일단 순종합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가득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끌어 올리다 말고 예수님께로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그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깊은 데에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에 순종하여 ‘이제는 되었다, 만선이다’ 하는 생각을 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기쁜 마음으로 그물을 내렸어야 했습니다. 100퍼센트 순종했어야 하는데, 그 순종 속에 ‘아니오’ 하는 부정이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불신앙,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죄입니다.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도 주님의 뜻에 억지 순종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마지못해 교회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니 아까운 것이 많고 안 따르자니 꺼림칙합니다. 이렇게 주춤거리면서 세월이 다 흘렀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내 주여 뜻대로’(549장)라는 찬송가의 3절은 부르지 않는다고 합디다. 그 이유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의 그 ‘죽든지’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늘 불안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영어로 ‘total acceptance, total discipline, total commitment’이란 말이 있습니다.‘전적으로 수락하고, 전적으로 순종하며, 전적으로 위탁하라’. 이것이 아멘의 신앙입니다. 억지로 순종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와 아멘의 믿음과 예배”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요체입니다. 제2대 UN 사무총장(193.04-1961.09)을 지낸다그 함마슐트(Dag Hammarskjold)는 1961년 9월 18일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 수도 레오폴드빌(현 킨샤샤)에서 DC6B 비행기로 이륙, 영국 보호령인 북로디지아(현 잠비아)의 은돌라 공항에 접근하던 중 숲에 추락(墜落)하는 사고로 숨졌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것보다 죽기 하루 전날인 17일 일기에 남긴 말 때문에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을 주옵소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사랑을 더하여주옵소서. 주 안에 살 수 있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나를 위하여 몸바치신 주님, 저도 주님께 예, 하고 대답하겠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전적으로 “예”와 “아멘”으로 전적으로 순종합시다. 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예”와 “아멘”으로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복을 받아누리고 나눠주는 성도가 됩시다.
IV.
지난 4일(화) 우리는 참으로 귀하고 큰 어른을 하늘나라로 보내드렸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의 유신에 항거하여 대학교수직에서 해직되고 옥살이를 하고,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의 고귀한 가치를 설파했던 故 김동길 교수님이십니다. 김동길 교수님에 관해서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므로, 오늘은 그분의 유언장을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 사진 보며)
한평생 직언(直言)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깊이 설파했던, 94세의 일기로 영원한 천국으로 이사 가신 고 김동길 교수님이 지난 2011년 원고지에 직접 써서 이철 세브란스의료원장에게 보낸 유언장이 공개되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 추모식을 일체 생략하고 내 시신은 곧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기증하여 의과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기를 바라며,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고인의 뜻에 따라 시신은 연세대에 기증됐고, 김옥길기념관을 포함한 자택은 2020년 이화여대에 기증됐습니다. 한 지인은 ‘집을 제외하고 남은 재산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정치인, 고위 관료, 경제인들이 조문을 하고 가면서 많은 말들을 남겼는데, 고인의 제자로 임종을 지켜본 김동건 전 KBS 아나운서가 한 말을 소개해 드립니다.
“지난 2월 코로나19에 걸렸다 회복하셨지만, 3월에 입원하신 뒤 최근 평소와는 아주 다르게 쇠약해진 모습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며, 고인에 대해서는 “평생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해 오시며 귀감이 되셨고, 언제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다는 사랑과 진심, 의협심과 정의감을 보여 주신 분”이라며, “사람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해지기 마련인데, 박사님은 약자에게 다정했으며 강자의 잘못 앞에서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봉사요 헌신인 예배에 관해서 계속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특별히 금년에는 교회 안에서의 경건한 예배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되어져야 하는 예배와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고 중상모략하는 사탄의 주구들인 대적자들을 향하여 내가 약속한 때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못한 것이 내 뜻과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예”하고 “아멘”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애 대해서 결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으며, 항상 “예”와 “아멘”으로 응답해야 하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께서 인치시고 보증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를 아끼고 돕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18,20)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23-24)
우리의 믿음과 예배가 이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예”하고 “아멘”하는 믿음, 우리 예배 중에 임재하셔서 친히 응답해 주시고 은혜와 복은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고 “아멘”으로 화답하고 영광돌리는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에게 예배하는 것이다”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전부가 예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온몸으로 거룩한 산 제물되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사장 소중한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말씀대로 삶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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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9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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