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찹쌀~떡 메밀~묵♬>/구연식
동지섣달 그믐밤은 왜 이리 길고 날씨는 을씨년스러운지, 별들은 모두 하늘에 얼어붙어 떨고 있으며 적막은 시골집 온 동네를 억누르고 있다. 헛간채 닭장에서 대장 수탉이 취침 점호를 하는지 목청이 찢어지는 ‘꼬끼오’하는 소리는 마실을 서두르고 문단속을 경고하는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처럼 들려 시골 밤을 더더욱 까맣게 한다.
우리 집 뒤에는 작은 동산이 있어 나무들도 우거져 있고 산새들 보금자리도 많았다. 아기 단풍잎 하나가 바람에 뒹굴다 누에섶 같은 창문 살에 끼어 집을 짓는지 꼼지락거리는 소리에 선잠이 깨었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창문 살에 비쳐 아기 단풍잎은 어느 사이 벌레로 둔갑하여 나를 바라본다.
배고프고 추워서 멀리 간 엄마가 그리워 솔푸덩 아래서 청승맞게 울고 있는 새끼 부엉이 소리가 더더욱 불쌍하고 무서웠다. 아랫목 이불속으로 얼굴을 파묻고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잠들었던 유년 시절 겨울밤도 있었다.
겨울밤 좁디좁은 빙판 고샅길에서 곡마단 어릿광대의 애틋한 트럼펫 연가(戀歌)인 양 ‘찹쌀~떡 메밀~묵’ 행상의 가냘프고 긴 목소리의 외침은 겨울밤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며 울부짖는 절규(絶叫)의 진동은 온 마을 문풍지를 두드리고 등잔불 심지를 건드려서 불그림자가 갸우뚱했다.
그 시절 낮에는 버스나 기차에 탑승하여 껌이나 일용품들을 팔았으며, 밤이면 시골 겨울밤에 ‘찹쌀~떡 메밀~묵’ 행상들의 모습은 6.25 직후 부모 형제를 잃은 고아들 삶의 한 장면이었다. ‘찹쌀~떡 메밀~묵’ 행상이 지나갔던 시절은 모두 다 어려운 시기라 저녁 끼니도 대충 때우고 출출한 시간이지만, 간식을 먹고 행상의 찹쌀떡을 사 줄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어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찹쌀~떡 메밀~묵’ 장수는 찹쌀떡을 언제나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먹을 수 있어서 나는 어른이 되면 찹쌀떡 장사를 꼭 하고 싶었다. 예쁜이네 집 대문 앞에서 찹쌀떡 장수가 오래 머무는 것을 문틈으로 보니, 그 집은 우리 집보다 부자 이어서 떡도 많이 사고 실컷 먹을 것 같아 예쁜이가 부러웠다. 어쩌다가 푼돈을 모아 찹쌀떡을 사주시는 밤이면 그렇게 좋아서 어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따라 나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찹쌀떡 장수를 살펴보았다. 머리는 할머니들의 조바위 같은 솜 모자를 뒤집어썼다. 턱 아래 목도리에는 작은 고드름이 수염처럼 붙어있었고, 옷은 서너 벌 껴입어서 단추가 겹겹이 잠겨 있었으며, 고무신에 새끼줄을 여러 번 동여매어 미끄럼을 방지한 것 같았다.
나무로 만든 중국집 자장면 배달 상자 같은 것을 어깨에서 내려놓더니, 하얀 포대기를 젖히고 납작한 찹쌀떡을 꺼내어 어머니가 건넨 돈만큼 어머니 손에 올려놓는다. 나는 빨리 집에 가서 먹고 싶어서 가는 도중에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안방 등잔불에 비친 찹쌀떡은 몇 개 안 되고 작아서 나의 몫을 생각하니 많아야 두 개 정도일 것 같았다. 어머니가 주신 찹쌀떡이 아까워서 씹지도 않고 빨아먹던 어린 시절이었다. 밤이 깊었는지 이제 몇 집 남은 호롱불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구들장도 벌써 식어버렸고 화롯불도 이미 꺼져버려 한기가 느껴온다. 오늘 밤도 ‘찹쌀~떡 메밀~묵’ 장수는 언 손을 호호 불며 지나가는 것 같다. 방은 춥지만 그래도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있으니 얼마나 호강이냐 생각했다.
지금은 연령대별로 계절에 따라 놀이문화와 여가 활동도 다양하다. 그때 겨울날 낮에는 양지바른 앞 토방에서 사금파리 등으로 소꿉장난을 하였고, 밤에는 어두침침한 안방 포대기 속에 발을 모으고 오순도순 맨 날 똑같은 어머니의 옛날이야기로 밤새웠다. 가족 중심 문화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된 것이어서 겨울 공기만큼이나 차갑고 무미건조한 그야말로 삼류 극장 영화 필름 화면보다 빗줄기가 더 많았던 낡아버린 추억이 되었다.
‘찹쌀~떡 메밀~묵’ 추억도 벌써 반세기가 훨씬 넘어 지나갔다. 아파트의 겨울밤은 ‘찹쌀~떡 메밀~묵’ 장수 대신 이제는 치킨과 피자를 주문 배달하는 스쿠터 엔진 소리만 도플러 효과음처럼 이따금 요란하게 들썩이며 사라진다. 나에게는 운치도 맛도 모두 다 어설퍼서 아직은 쉽게 정이 가지 않는다.
춥고 불우한 이웃을 생각하는 세모(歲暮)를 앞둔 밤이 다가오고 있다. 선물과 너그러움, 그리고 넉넉함의 상징인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부탁하여 ‘찹쌀~떡 메밀~묵’ 장수에게 두툼한 털모자와 외투, 발이 따뜻한 방한화 그리고 사슴 썰매를 빌려주어 이번 겨울에는 따뜻하고 안전하게 ‘찹쌀~떡 메밀~묵’ 장사를 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2023 동지 밤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