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제국. 그 이름만으로도 세상을 떨게 하는 나라.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는 대 일본이 패망했을 때에 크나큰 반란을 일으켜 하나의 대륙을 통일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새로이 이름이 붙여진 것이 한제국이었다. 그 후로 수십년이 지난 21
세기의 지금 바야흐로 한제국의 대 파란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제국의 중앙, 서울에 위치한 거대한 조직. 청룡회에 의해서...
"날씨 좋다."
우중충하고 어두운데다 먹구름이 가득끼어있는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은 하늘을 바라
보며 무슨 생각인지 그녀의 붉은 입에서는 이 상황과 상당히 아이러니한 말이 흘러나왔다.
"여기서 비까지 쏟아지면 정말 좋을텐데..."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진심으로 그러했으면 좋겠다는 듯한 투로 그녀는 말했고, 그런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웬 남정네가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내려다 보며 한심하다는 듯
이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쯧쯧하고 혀를 찼다.
"넌 지금 이 날씨가 좋아보이냐?"
"응."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는 그녀의 말에 남자는 다 포기했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며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다.
"언제까지 병신짓 할래?"
"병신짓?"
"모른 척하지마, 재수없어."
"음, 내가 좀 재수가 없긴 하지."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말 하지마."
"...그치만 병신짓이라는 말, 정말로 모르겠는 걸."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진지하게 물어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남자는 "또 속을 뻔했
어, 더이상 속아줄 순 없다구." 라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애써 그녀를 외면한 채로 말을
이어갔다.
"니가 말을 안하니까 벙어리로 보이고, 시험을 항상 틀린 답만 골라내니까 0점을 맞고, 언제
나 혼자서 음침하게 니 할 일만 하니까 자폐아로 보이고- 더 말해줘?"
"........"
아무것도 안들린다는 듯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그녀, 그런 그녀의 곁에서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가슴만 쿵쿵 치고 있는 남자.
"어느 누가 감히! 이게 한제국 최고의 조직 청룡회의 회주라고 생각하겠어. 안그래?"
"시끄러워."
"거기다 한제국의 황제 후계자 후보였다는 것도- 그렇지?"
"신민형."
"동생을 위하는 것도 좋지만, 널 생각해. 그 사람들이 뒤에서 널 어떤 식으로 말했는 줄 알
아? "겉모습은 지 애미를 쏙 빼닮아 예쁘게 생겼는데, 하는 짓은 영딴판이야. 쌍둥이인 환영
인 벌써부터 황제 수업을 받으며 나라를 이어갈 준비를 하는 데- 저녀석은 왜 저모양인지.
황족의 유일한 혹덩어리라니까- 밥만 축내는 벌레만도 못한 녀석" 이란다. 하하, 웃기지 않
냐? 그럼 지들은 뭐, 벌레 아닌가?"
"........"
"환희야. 그만하자. 너 이런 일하는 거, 나 썩 달갑지 않다."
"한제국- 이 이름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거야. 이 집안의 첫째딸로 태어나서, 내가 얼마나 고
통스러울지. 그 운명도 알고 있었고. 나 말이야- 그래서 좀 더 편하게 살기로 마음먹었어. 귀
찮고 어려운 일. 미안하지만- 환영이 놈한테 다 떠넘겨주고. 난 아무것도 모른채로 살길 바
랬어. 편하게- 이렇게 여유롭게."
시원한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이환영, 이환희. 둘의 운명은 내가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뒤바뀐거야. 아니, 이환희가 좀더
비참해 졌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난 지금이 행복하다. 만약- "그 일" 만 없었더라도... 난
청룡회주라는 이름도 없었을거다. 조금 특이하지만 존재감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을 뿐이었
겠지."
옛일을 회상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작은 아픔이 묻어나왔다.
"그만두자. 민형아, 비 올 것 같다."
"웃지마. 바보같아."
"응."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
가 온다면 비가 오는 거다. 매일 하늘만 보며 살아온 이 바보같은 여자가 하는 말이니 99%
확실하지.
"민형아, 난- 난 말이지. 지금, 행복하다."
화련 고교. 이 학교는 한제국의 문무관을 양성하는 최고의 학교였기에 이 곳에는 한제국 최
고의 귀족집안 자제들이 다니고 있었다. 물론, 그것에 예외란 없기에 눈엣가시인 황족 역시
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이 환희, 집에 갈 시간이다."
"......"
"이환희!!!!!"
........자고 있었다.
그녀가 학교에서 하는 일은 단 두가지. 자거나, 혹은 하늘을 보거나.
"이제 그만 학급 친구들하고도 어울리고 그래. 매일 그게 뭐야? 잠은 궁에서도 충분히 자잖
아."
"....응."
아직도 잠에 취해있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민형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환희가 궁에서는
도저히 마음을 놓지 못한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지만, 누가뭐래도 환희는 황족이었고 궁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에 궁을 두려워 하다니- 이건 말도 안되었다.
"어서 타십시오."
교문에 주둔하고 있는 고급스러운 리무진을 보며 별 감흥없이 열린문을 통해 차에 올라타는
환희를 확인한 뒤, 민형 역시 차에 올라탔다. 누가 뭐래도 민형은 환희의 보좌관이었으니까.
민형의 작은 꿈이라고 한다면 이 못난 여자가 제발 정신을 차리는 것이었지만 환희는 전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게다가 그렇게 하기를 귀찮아 하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황태자 전하께오서 전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우뚱한 환희는 특유의 느릿한 걸음으로 천천히 자신의
궁으로 들어섰다. 재촉하고 싶어하는 시종들의 애절한 눈빛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화려하지 않은 수수한 실내에서 그와는 정 반대로 화려하기 짝이없는 옷을 입은 환영은 환희
가 들어오자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무슨...일이야?"
"무슨 일이긴, 보고 싶어서."
"...응."
"앉아."
"...응."
"또 자다 온거야?"
"조금.."
"학교에서- 아직도 그러고 다녀?"
"응."
여전히 웃음지은 그 표정 그 대로 환영은 환희를 살짝 끌어안았다. 안심이라는 듯,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오늘 작은 아버지 생일 파티가 있어. 참가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얼굴은
비추는 게 좋지 않을까? 그 분은 널 아끼셨잖아."
"...원한다면."
"그래, 그럼 저녁에 보자. 난 일이 또 있어서."
"응."
빙긋 웃음지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뒤에 거느린 채 유유히 사라지는 환영을 보며 환희는 처음
그대로 그저 무표정하게, 무감각하게 그를 한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넌 도대체!! 어쩔거냐, 그렇게도 싫어하는 작은아버지 앞에 서야 한다니!"
"청룡회를 소집해줘."
"...설마."
"그렇게 아 껴 주 셨 는 데- 모처럼 하는 파티에서 감사의 표시정돈 해야 하지 않을까?"
언제나 모든것에 무관심하게, 졸린듯한 눈빛만을 하던 환희의 눈에서 빛이 났다.
"호호, 환영오빠. 이거 어때요? 저 오늘 신경 좀 썼는데-"
"이런! 유영이 너! 황태자 전하께 말버릇이 그게 뭐냐!"
"뭐 어때요, 오빠도 괜찮다고 했는 걸요- 안 그래요, 오빠?"
"네. 괜찮습니다. 아, 그나저나 작은 아버지께선 언제쯤..."
귀에 거슬리는 소리들을 무시한 채로 파티장에 들어섰다. 반기는 사람은 비록 단 한 사람이
지만, 뭐- 그따위 것들은 무시하기로 한 지 오래였다.
"환희야!"
"......"
환하게 웃는 환영이를 보며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제일
구석진 자리를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눈에 띄어서 괜히 욕먹지 말고 차라리 처음부터 조용
히 있는 것이 나았다.
"왔구나, 안 올 줄알았어."
"...약속."
"응, 알아. 너 약속 잘 지킨다는 거."
약속이니까 왔어- 라는 것에서 쓸모없는 말을 다 빼고 주어만을 말해도 용케 알아듣는 환영
이. 어린시절부터 잘 알아왔기에 그런 것일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녀석은 유독 내 속을
잘 아는 아이였다. 물론, 내 속이 이중으로 싸여있다는 것은 알리가 없었지만.
"조금 후에 아바마마가 오시면 아바마마께도 인사드려."
"......"
"너무 그러지 말고 인사드려. 아바마마도 너에게- 정말로 미안해 하고 계시니까. 환희가 먼
저 말을 걸어준다면 아마 굉장히 기뻐하실 거야."
"....응."
이라고 말했지만, 인사할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다구. 너무 그러지마, 아마- 인사할 틈도 없
을테니까. 틀림없이.
"황제 폐하 드십니다."
"나디르 공작 각하 드십니다."
황족, 혹은 귀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두개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하나는 조선식 이름, 또 하
나는 대외적인 호칭을 위한 영어이름. 나의 작은 아버지 역시 나디르라는 영어이름이 있고,
본명은 따로 있었다. 물론 나도 있기야 하지만, 나같은 경우는 거의 불릴 일이 드무니까 나
조차도 그 이름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런 영국식의 호칭을 따라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놈의 영국식 이름 때문에 귀족들은 이름을 두개나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아예 영어이름만을 지어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
아무튼, 그들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물론 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일어선 것이지만.
황제는 천천히 걸어서 자신의 자리에 앉았고, 나디르 공작 각하라고 불리우는 나의 작은 아
버지는 황제보다 약간 아래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황제가 작게 손짓을 하
자 일어섰던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고, 수다를 떨던 사람들도 다시금 떠들기 시작했다.
뭐, 그럼 파티를- 시작해 볼까?
"와장창!!"
화려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를 보호하려는
듯, 환영이 역시 일어서서 내 앞을 가로막았고- 그런 환영이를 보호하기 위해 수십명의 사람
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인의 장벽을 쌓았다. 뭐, 그럴 필요가 전혀 없을텐데 말이지.
"누구냐!!!"
화려하던 조명은 어느새 모두 꺼져 파티장은 온통 어둠으로 물들었고 그 속에서 날카로운 비
명들이 흘러나왔다.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달빛이 비추어 지고 있는 창가에서 여섯명의 어
두운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런 이런, 벌써 우리를 잊었다면 섭섭하지-"
장난기가 묻어나오는 목소리. 그가 엄지와 검지를 마주쳐 딱 소리가 나게 하자 약한 조명들
이 켜지며 어렴풋이 그들의 모습을 보이게 했다.
하얀 복면, 그리고 이마에 둘러진 푸른 용이 그려진 두건과 역시 푸른 용이 새겨진 검은 장
갑. 청룡회였다. 모두들 그들의 등장에 몸서리를 쳤지만, 단 한사람. 바로 나만은 이마를 집
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정체를 드러내지 말라고 경고를 줬는데!
"환희야, 여기서 꼼작도 하지말고 가만히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지켜줄테니까."
"......"
누가 누굴 지켜준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켜주겠다는데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아서 잠자코 있었더니 환영이 녀석은 아예 내 앞에 떡하니 서서 호위병들을 황제에게로 보
내기 시작했다.
"황제폐하가 더 급하다! 나는 걱정하지 말고 황제폐하를 돌보도록 하라!"
"전하, 전하께서 강하신 것은 충분히 알고 있사오나- 황녀님도 계신마당에 혼자는 어려울 듯
합니다. 그러니 최소한의 인원은 남겠습니다. 이정도는 괜찮으시겠죠?"
"...알았으니, 빨리 움직여라. 절대로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된다. 청룡회는- 막강하니까."
"예, 전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군인들을 보며 역시 훈련이 잘되어있다니까- 하는 쓸데없는 감탄을
하며 간크게도 황궁에 침입한 악당들을 바라보았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원하는 것? 글쎄- 있다면 당신의 목숨 정도?"
황제의 물음에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제일 선두에 선 남자. 그러나 그 대답을 듣는 황제측은
전혀 태연할 수 없었는지, 작은 동요가 일었다.
"아아- 이런, 진심으로 받아들인거야? 걱정마. 당신같은 늙은이의 목숨을 가져가고픈 마음
은 없거든. 그리고 정말로 죽이려 했다면 어젯밤 당신이 끼고 잤던 여자와 함께 죽여버렸을
거야, 늙어서 주책이야- 당신보다 적어도 20살은 어려보이던데."
"이 놈!"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져서는 그에게 삿대질을 하는 황제, 그리고 친절하게도 그런 황제
대신에 소리를 질러주는 작은아버지. 아아, 이거 가련한 우애아닌가.
"걱정마, 우리가 원하는 건 딱 하나! 정말로 딱 하나밖에 없었다구. 우리 주인님이- 황족들이
이런 식으로 돈쓰는 것을 너무 너무 싫어해서 단단히 망쳐놓고 오라고 했다구. 우리도 명령
에 따를 뿐이니까 너무 그런 반응을 보이지마. 그러니, 당신들이 애초에 우리 주인님에게 잘
보였음 됐잖아?"
그 주인님이 누군줄 알고 잘 보이냐!!! 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치는 듯한 모든 사람들을 쳐다보
며 그는 과장된 액션으로 크게 웃으며 테이블에 놓여진 붉은 와인이 담겨진 와인잔 하나를
들었다.
"이 것은 모두 백성들의 피다. 너희가 이렇게 물 먹듯 먹을 수 있을만한게 아니란 말이다. 알
아들었나."
"......"
"오늘은 단지 이것을 위해 온 것이니 그만 물러나겠지만- 그분의 명령만 있었다면 우린 너희
들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Bye, Bye!"
그리고 그들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그리고 화려하게 사라졌다. 그들이 모두 사라
지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조명이 다시 환하게 빛났고 파티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런 이런, 황제가 충격을 많이 먹었는 걸. 하긴- 설마 자신의 사생활이 모두 감시 되고 있으
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앞으로 황제궁의 경비병이 늘겠군.
"환희야, 괜찮아? 어디 다친덴 없지?"
"...응. 네가 곁에 있었잖아."
내 말에 갑자기 화악 얼굴을 붉힌 환영이가 임시로 꺼냈던 총을 집어 넣으며 고개를 휙 돌리
며 날 외면하더니 다짜고짜 내 팔을 잡아 끌었다.
"가자, 궁까지 데려다 줄께. 위험하니까-"
"...응."
미안하지만- 글쎄. 청룡회로부터 날 지키겠다니... 웃기지 않아? 그들은 날 절대로 해칠 수
없는데.
나는 앞서가고 있는 환영이 녀석은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조소를 흘리며 녀석을 비웃었다.
더불어 파티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 역시.
02.
"아, 글쎄- 잘못했다니까요."
"그만 징징거려. 듣기 싫어."
"흑, 미워-"
"그 많던 카리스마는 어디 팔아먹었냐, 너."
"회주...정 귀찮으면 저녀석 파묻어버릴까요?"
"응. 어디 뒷산에다 잘 묻어줘라. 비석 세우는 것 잊지말고."
"크아아악!! 회주!!"
배신감에 사무친 괴음을 지르는 그, 그러니까 어제 황궁의 중앙홀에서 온갖 폼을 다 잡으며
난리 블루스를 춘 단(丹)이라 불리우는 이 남자. 사실은 그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이 남자
의 일면이었을 뿐이고, 바로 이 모습이 이 남자의 본 모습이었다.
"단! 시끄럽게 굴지말고 얌전히 좀 있어. 너 잘못한거잖아. 감히 주인의 말씀을 어기다니, 안
그래?"
"쳇. 민형 형도 너무해. 폼나게 살아야 한다고 알려준 건 형이잖아."
"시끄러워!"
"쳇."
"그런건 언제 가르쳤어?"
"아, 그. 그게 아니라- 하하... 단, 우리 사랑의 대화를 나눠볼까?"
"그 전에 나랑 너랑 먼저 나눠야 할 것 같지?"
빙긋 웃으며 꺼낸 내 말에 민형은 사색이 되어서는 옆에 있던 단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내가 너때문에 못살아, 진짜!"
"이게 왜 나때문인데!"
"비밀이라고 했잖아, 비밀!"
"...아, 그랬지!"
딱하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고, 왼손은 편채로 마주 친 단은 힐끔 민형을 쳐다보더니, 해맑게
웃으며...
"형! 명복을 빌어!"
36계 줄행랑을 쳤다. 원래 저런 놈이기는 하지만... 그러고도 민형이에게서 살아 남을 수 있
을지는 미지수. 이녀석의 직념이란 때때로 나까지 놀라게 만드니까...
"......단, 이녀석!!"
"응. 응. 괜찮아. 세상을 등지게 만들진 않을테니까. 복수할 정도의 힘은 남겨줄게."
".......살려줘."
"회주, 민형이에 대한 처벌은 나중에 하고- 일단 이거부터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음?"
청룡회 내 제일의 정보통인 수진이 나에게 묵직한 서류뭉치를 건네었다.
"새로운 조직이 일어났습니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주동세력을 봤을때, 우리와 같은 뜻을 가
진 것 같지는 않아요. 오히려- 우리에게 반발하기 위해 일어났다면 모를까."
"화룡파? 무슨 이름이 이래?"
"그러니까- 그 이름도 걸려. 청룡과 화룡. 정반대이잖아."
"반발세력이라... 우리... 꽤 유명해 졌는걸?"
"거기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예요, 회주."
"음. 그런가."
서류를 슬쩍 들여다 보며 나는 별 감흥없이 넘겨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내 손을
멈추고 서류를 자세히 들여다 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아까 말했던 그 "주동세력"의 중심인물이예요."
...비극도 이런 비극이 따로없군. 재미없어. 재미없어.
"황제가 왜 이런걸 만들었을까. 한제국으론 충분하지 않은 걸까."
"청룡회가 하도 쉽게 궁을 침범하고 협박하니까 나름대로 두려웠던 거지."
"그럼 군인들은 어쩌고?"
"군인은 군인이고 조직은 조직이고."
"황제의 사병집단을 만들겠다는 건가? 아니지, 따지고 보면 군대도 황제의 사병집단이 아니
었어? 이상해. 이상해."
내가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하면서 계속 고민을 하고 있자 수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 회주는 착각하고 있어요. 한장을 더 넘겨보세요."
수진의 말에 따라 나는 한장을 더 넘겼고, 웃었다. 너무도 밝게.
"이환영, 이녀석. 끝까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 군."
"황제는 단지, 황태자를 밀어주고만 있는 거죠. 화룡파의 실질적인 주인은 이환영. 현 제 1황
자이며 황태자로 불리고 있는 남자이죠. 회주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너무도 절실한- 이 가련
한 남자가 말이죠."
진심으로 웃기다는 듯한 목소리. 그래, 웃길만도 했다. 그랬기에 나도 웃었던 것이고.
이환영. 그는 웃기지도 않게 날 지키겠답시고 여러모로 이상한 짓을 많이 했었다. 사실 내가
순순히 당해줄 인물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그가 나를 지키고자 하는 곳은 바로 청룡회. 내가
그들의 주인인데, 그는 나를 그곳에서 구하고자 한다. 그런 이유때문에 화룡파라는 시덥지도
않은 조직을 만들다니... 정말로 그는 나를 웃기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황태자는 진심이야. 너도 알잖아, 이환희."
"이름-"
"아아, 알겠어. 알겠다구. 회주."
"그래. 알고있어. 그렇지만."
다만, 알고 싶지 않을 뿐이야.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 바보같은 녀석이 날 진
심으로 대한다는 것! 그것을!!! 난... 녀석을 증오할 수 밖에 없는데... 싫어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녀석은 오히려 나에게 진심으로 대해주니까... 그게 싫을 뿐이야... 다른 것은 없
어. 아니, 오히려 그 일만 아니라면 나도 그녀석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어. 이러니 저러니 해
도 날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었고, 더군다나 하나뿐인 내 핏줄이었으니까!!
그... 일만... 적어도 그 일만 없었어도!!! 난 그렇게도 그가 나를 지키려고 하는 청룡회따위
일으키지 않았을 거고. 회주따위 자처하지도 않았을거야.
"그는 널 사랑해."
"우린 남매야. 그것도 쌍둥이."
"그래도 그가 널 사랑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
".......하늘이... 맑구나."
우중충하지만, 먹구름이 잔뜩 끼어서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지만... 나에겐 이런 하늘은 매우
맑고 반가운 존재였다. 민형이의 작은 한숨소리가 - 너무도 크게 들려왔다.
"황녀님, 황녀님. 이제 일어나세요. 학교에 가셔야 합니다."
"음... 응."
일말의 투정없이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어제 밤, 몰래 청룡회의 모임에 다녀왔기 때문에 더
자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지만. 어차피 학교가서 잘거- 여기서 오래 버티고 있을 필요도 없었
다. 나에게 궁이란, 불편하고 무서운 존재일 뿐이니까. 더 잔다해도 악몽만 거듭해서 꿀 뿐이
다.
"어서와."
"응."
"피곤해 보인다."
"잠을 설쳤어."
이런 내 대답에 피식 웃은 건 민형이. 이 자식은 다 알면서 뭘 물어- 라고 속으로는 소리쳤지
만, 분명히 내가 이렇게 말하면 황녀님에 대한 예의야, 예의. 이렇게 대답할 것이 뻔하기 때
문에 그냥 넘겼다. 아침부터 힘도 없는데 녀석과 다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근데, 잠 설친 것 치고는 더 피곤해 보이는 걸. 눈 좀 붙여. 나중에 깨워줄게."
"음, 그래주면 고맙고."
차에 타자마자 그렇게 말하는 민형이의 말을 들으며 그대로 골아떨어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차가 학교에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그만 들어가자. 어차피 잘거겠지만, 앞으로는 조금 노력해봐. 어울리기 싫어하는 것도 알겠
지만- 어울리는 것도 생각보다는 괜찮으니까."
있는대로 풀려있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검은 내 머리를 약간 헝클어트린 민형이는 웃으
며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 학교에서는 아직 나에 대한 것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한제국
의 최고의 문관을 배출한 신씨 가문의 장남과는 같이 다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조금은 씁
쓸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눈엣가시 황족이었고, 더더군다나 눈엣가시인 주제에 가진 능력도
하나 없으니... 물론 대.외.적.으.로... 정말로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다! 절.대!
"......"
내가 들어서자 언제그랬냐는 듯, 소란스러움이 딱 그치는 교실... 그러나 이내 나는 무시하고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기에 바빴다. 그들은 귀족가의 자제들이었으니까... 소재는 충분
했다. 여자들이라면 이것 저것 명품에 관련된 이야기나- 아니면 황태자 환영이에 관한 이야
기들... 남자들은 대부분 운동이나 싸움, 혹은 기사 시험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했다.
그런 가운데 나는 구석에 처박혀있는 내 자리를 유유히 찾아 가서 아무것도 들지 않은 가방
을 책상 위에 대충 던지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 하늘은 기분나쁘도록 햇빛이 내리쬐
는 날이다. 비라도 오면 좋으련만...
"그런데, 그거 들었니? 어제- 나디르 공작 각하의 생신 파티가 있었는 데, 청룡회가 또 나타
났대."
"청룡회가?!"
"쉿, 이거 비밀이란 말이야. 사실은 어제 그 자리에 우리 아버지가 계셨거든. 입조심하라고
했는데, 너희들이니까 말해주는 거야. 아버지 말씀으로는 한달전에 나타났던 그 사람이 또
나타난 것 같대. 더 대단한 소식은... 여지껏 우리는 입을 연 남자가 우두머리라고 생각했는
데, 그 사람도 오직 주인님의 명령을 따를 뿐이라고 했다는 거야. 그럼 위에 명령을 내리는
머리가 또 있다는 소리지! 대단하지 않니?"
문득 들려오는 익숙한 대화에 슬쩍 고개를 들고 심각한 얼굴을 한 그녀들에게로 시선을 주었
다. 비밀은 무슨... 이미 넌 전교생에게 다 말한 거나 다름없다구... 이수정. 무관집안의 자제
였지만 기사가 될 수 없는 여자라는 이유로 가문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그 자리는 다섯살
바기 막둥이에게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저 여자가 그 집안의 후계자가 되지 않은 것을 모두
들 내심 반가워 하고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가문을 다 말아먹고, 나라도 말아먹을게 분명했
으니까.
말을 마친듯한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옮겨 나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는 자세로 책상에 엎드렸
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나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황제가 싫
은 것은 여전했다.
이렇게 내가 한숨을 포옥 내쉬며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온 담임 선생의 입에
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전학생이 있어요!"
전학생이라는게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이 화련고교에... 전학생이라니... 이것은 충분히 이상
할만 했다.
"이름은 한신우. 너희보다 한살 많은 복학생이예요. 인사해요, 신우군."
"....한신우다. 잘 부탁한다."
왜 복학했는지 알려주기라도 하듯, 큰 키에 단단한 몸을 가진 한신우라는 남자... 그러나, 전
학사실보다 더 웃기는 건 선생이 나가고 이수정이 그에게 복학이유를 묻고 난 다음이었다.
"왜 복학한거예요, 오빠?"
"......아파서."
"에? 어디가?"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거든."
할 말이 없어지게 하는 말이었다. 감히 누가 180의 건장한 남성이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서 1
년이나 지나 복학 했으리라고 생각했겠는 가... 아마 지금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어디서 패싸움이라도 하다가 사시미에 피라도 본것일 거라고.
".........."
빈 자리가 내 옆자리 밖에 없어서 내 옆자리에 자리잡은 그는, 한동안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
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막 시작하는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
시에 나는 자리에 엎드려 꿈나라로 빠져들기 시작했고...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벌어
질 일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었다.
"오빠! 저희랑 식사 같이해요!"
"오빠, 아직 학교 지리 잘 모르시죠? 저희가 밥 먹고 소개 시켜드릴께요!"
어느 귀족가인진 몰라도 꽤나 귀족적으로 생긴 그는 첫날부터 반 여학생들에게 러브콜을 받
았다. 답지않게 수줍은 듯(?) 가만히 있기는 했지만... 난 차라리 그런 그가 빨리 아무나 붙잡
고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으니까!
그 때였다! 누군가가 잠을 자지 못해 속으로 열심히 욕을 해대는 나를 쿡쿡 찌른 것은.
".......?"
부스스 일어나서 나를 찌른듯한 정체모를 것을 향해 멍한 시선을 주자, 나를 찌른듯한 ... 그
한신우라는 남자는 앞에 서있는 다른 여자아이들을 모두 무시한 채 나에게 물었다.
"식사 안해?"
"......."
이 남자... 뭐지?
"안 했음, 나랑 같이 먹자."
싫다.... 라는 의사를 마땅히 밝힐 새도 없이 그는 내 손목을 잡고 다짜고짜 어디론가 향했다.
복학했다고 했으니... 지리정돈 다 알겠지...?
"...아이씨! 야!! 여기 어디냐?!"
.....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음을 깨달았다. 이정도 보수공사를 했다고... 겨우 1년만에 지
리를 잊어버리다니... 얼마 되지도 않는 학교 건물에서... 이녀석, 생각보다 멍청한 놈이 틀림
없었다.
"뭐야, 말 못해? 식당!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정말, 식당으로 가려고 했던건가... 이런... 귀찮은데... 식당에는 날 싫어하는 인물들이 너무
많이 있다. 몇 안되는 나를 아는 인물... 자칭 황태자비라는 녀석과 그녀를 추종하는 재수없
는 무리들... 또... 황태자를 지지하는 세력들. 후우, 그냥 이녀석을 거기다 버리고(?) 오면 되
겠지... 끌고 다니긴 싫으니까.
이런 생각에 나는 뒤로 휙 돌아 두 걸음을 간 다음 그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잠시 멍하니
서있던 그는 조용히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 입을 다무니 그래도 좀 마음에 드는 군.
"......"
5분도 안되어서 도착한 식당 앞에서 손가락으로 "여기야" 하고 가르키니 그는 뚜벅 뚜벅 문을
열고 들어갔다. 흐음, 이제 난 가도 되겠지?
"가긴 어딜가-"
휙 뒤돌아 교실로 가려고 했는데....... 어느새 들어가다 말고 나온 그가 내 어깨를 집고 낮게
말했다. 물었으니, 대답을 해야하는건가?
"식사, 같이 하자고 했잖아."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식당에서라면 더욱더! .........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미 그의
손에 의해 끌려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거, 이거, 이남자도 나 못지않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잖아? 교실에선 그렇게나 바른사람처럼 굴더니.
어쨌거나, 이렇게 우리 둘이 함께 식당에 들어서자 식당은 마법에 걸린 듯 조용해 졌다. 서로
다른 의미에서...
"...뭐야, 저거-?"
"오랜만에 쓸만하게 생긴 놈이네. 전학생인가?"
"아아, 오늘 복학생이 한 명 있다고 했어. 아마 그 일거야."
"근데 옆에 있는 건... 뭐냐?"
"....음. 2학년 3반의 이...환희라고 했던것..."
"아아,, 그... 병신- 말하는 거지? 우리 주니가 싫어하는..."
....후우, 역시나... 자칭 황태자비 김주니 패거리가 식당에 떡하니 자리하고 앉아 담배를 피
고 있었다. 저녀석들은 만날 때마다 나날이 재수없음이 업그레이드를 한다니까.
"쟤네, 알아?"
"......"
말 없이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모른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아닌지 그는 더이상 묻지 않
았다. 뭐 나야 좋지만... 후우, 이녀석... 알고보면 괜찮은 놈인걸까.?
"식사 좀 받아와라- 나 힘들다."
.........역시 같이온 것을 후회한다. 괜찮은 놈일리가 없지. 괜찮은 놈일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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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또와-유나연재
※※ 이중인격 황녀, 그의 수렁에 빠지다! ※※ [01-02] -수정
비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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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0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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