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 420년이 지난 2012년 6월 2일 안동에서 '임진란 7주갑 기념 문화·학술대제전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오전 기념식에 앞서 하회마을 충효당에서는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전국 임진란 공신 및 의병장 후손 등 500여명이 참석해 문충공 서애 류성룡 선생에 대한 사제사를 봉행하고 있다./ 조선DB.
왜적 방어에 효과적인 戚繼光의 병법 활용
선조 27년(1594) 2월 훈련도감이 설치되고 영의정 류성룡이 그 都提調를 겸임했다. 훈련도감은 『明나라를 믿을 수 없으니 자주적으로 국방력을 강화하자는 西厓의 건의로 새로 편성된 조선의 군사기구였다.
西厓는 왜적 방비의 권위자인 明나라 戚繼光(척계광)의 저서 「紀效新書(기효신서)」에 주목하고 명장 駱尙之(낙상지)에게 이 新전술을 전수해 주도록 요청했다. 낙상지의 막료들은 西厓가 선발 파견한 우리 군사 70여 명에게 三手兵(砲手·射手·殺手)을 양성하는 조련법을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교관 요원들이 갖춰지자 훈련도감 대장 조경은 병졸 응모자들 중 강건한 사람 수천 명을 선발하여 척계광의 陣法에 따라 훈련을 시키니 수개월 안에 정예군이 되었다. 훈련도감 군사 한 사람에게 하루 쌀 두 되씩 지급되었던 만큼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훈련도감은 이들에게 밤낮으로 조총 쏘는 법을 가르쳐 숙달시켰다.
西厓는 서울에서 훈련도감 군사 1만 명을 더 모집하여 5營을 두고, 각 營에는 2000명을 배치한 다음, 해마다 반수는 성안에 남아서 연습하고, 반수는 성 밖으로 나가서 빈 땅을 골라 屯田(둔전)을 만들고 윤번으로 교대시켜 군량 공급의 터전을 삼도록 했다. 병농일치의 精兵을 양성하는 직업군인제였던 것이다.
훈련도감의 설치와 함께 지방군인 束伍軍(속오군)의 편성도 西厓의 업적이었다. 束伍軍은 지방의 민병을 鄕保 단위로 조직한 것으로, 그 방법은 척계광의 紀效新書에 의거하여 營(영: 사단)·司(사: 연대)·哨(초: 대대)·旗(기: 중대)·隊(대: 소대)·伍(오: 분대)로 편성했다.
주목할 점은 지방의 장정을 모두 속오군으로 편성했다는 것이다. 良民만으로 지방군을 편성했던 종전과는 달리 양반과 천인도 편입시켰던 점에서 일종의 국민개병제였던 것이다.
西厓는 장수의 선임을 중시했다. 다음은 「亂後雜錄」의 관련 기사다.
< 대체로 국가에서는 사변이 없을 시기에 장수를 선택하고, 사변이 있을 즈음에 장수를 임명하되, 선택은 마땅히 정밀해야 하고, 임명은 마땅히 專任해야 할 것인데, 그 당시 경상도의 水軍將은 朴泓(박홍)과 元均이고, 陸軍將은 李珏(이각)과 曺大坤(조대곤)이었으니, 이것은 장수가 될 인재의 선택이 아니었다. 사변이 발생하자 巡邊使(순변사)·防禦使(방어사)·助防將(조방장) 등은 모두 조정의 명령을 받아왔기 때문에 각기 결단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제 마음대로 호령을 행하고 제멋대로 進退하여, 서로 統屬(통속)이 되지 않았기에 「여러 사람이 주관하면 패전한다」는 경계를 범했으니 일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 또한 자기가 양성한 군사가 아니었기에, 장수와 군사가 서로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모두 兵家의 크게 꺼리는 바였다>
西厓는 文官이면서도 大전략가이며 大경세가였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필자는 西厓가 性理學뿐만 아니라 陽明學(양명학)도 받아들이는 實用主義者로서 광범위한 독서에 의해 同時代人에 비해 思考과 視角의 폭이 넓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왕조 시대를 통틀어 논리적인 문장에 가장 능한 천재가 栗谷 李珥(율곡 이이)이었다면 西厓는 經世에 관한 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존재였다.
1593년 하반기 이후 明과 倭는 전투를 중단하고 본격적인 협상국면에 들어간다. 이때 왜국의 희망은 漢江을 기점으로 삼아 남북으로 분할통치하려 했는 데 반해 明은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해 주는 것만으로 왜국과 강화를 성립시키려 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휴전을 서둘렀던 양측의 현지 협상대표인 沈惟敬과 고니시는 서로 본국 지도부의 방침을 얼버무린 채로 협상을 진행시켰다. 1596년 봄부터 왜군이 축차적으로 철군함으로써 휴전은 되었지만, 明의 사신 楊方亨(양방형)이 왜국으로 건너가 히데요시를 만나면서 심유경-고니시 간 강화협상의 僞作性(위작성)이 드러나고 말았다. 明과 倭의 협상은 1596년 11월에 결렬되었다.
모략전에 넘어간 조정의 李舜臣 파면
1597년 1월 히데요시가 다시 14만의 왜군을 보내어 再침략함으로써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 무렵, 조선 조정은 고니시의 反間策(반간책)에 넘어가 3道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하옥했다. 다음은 징비록의 관련 기록이다.
< 고니시는 要時羅(요시라)를 그동안 경상우병사 金應瑞(김응서)의 진영에 자주 왕래시켜 서로 친숙하게 되었다. 가토가 다시 조선에 나오려 할 즈음에 요시라는 김응서를 찾아와 은근히 고니시의 뜻을 전하기를 『이번에 강화가 깨진 것은 가토 때문이기에 우리 대장(고니시)도 그를 매우 미워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다시 바다를 건너옵니다. 조선 군사는 해전에 능하니 이 시기를 이용하여 바다에서 기다렸다가 들이치면 가토의 군사를 능히 쳐부술 수 있습니다.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김응서는 요시라의 전언을 곧이곧대로 믿고 조정에 보고했다. 해평부원군 尹根壽(윤근수) 등은 절호의 요격 기회로 보고 여러 차례 임금에게 아뢰었다. 조정은 이순신에게 나가 싸울 것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를 함정으로 의심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이에 진노한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 올리고 3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원균을 앉혔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1597년 8월7일 가덕도-거제도 해역 전투에서 궤멸하고 말았다. 이후 왜군은 승세를 몰아 서쪽으로 짓쳐나가 南海·順天을 휩쓸고 상륙하여, 南原城을 포위했다. 남원성을 지키던 명의 장수 楊元(양원)은 패해서 달아나고, 전라병사 李福男, 남원부사 任鉉, 조방장 金敬老를 비롯한 守城軍과 백성 수만 명은 죽음을 당했다.
이에 놀란 조정은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再기용했다. 이순신은 불과 12척의 전함을 지휘하여 서해로 진출하려던 200척에 달하는 倭의 수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세계 海戰史에 빛나는 鳴梁海戰(명량해전)이다.
한편 남원성을 함락시킨 倭의 육군은 다시 북상하여 全州城을 점령했다. 전주에서 합류한 모리(毛利輝元) 軍과 가토 軍은 공주를 거쳐 全義·鎭川에 이르렀고, 구로다(黑田長政) 軍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접경지대인 稷山까지 북상했다.
9월5일 새벽, 남진한 明의 부총병 海生·우백영·양등산 등의 부대와 구로다 軍이 직산의 소사평에서 격돌했다. 왜군은 하루 여섯 차례의 회전에서 모두 패전했다. 이로써 왜군은 북상을 포기하고 남해안으로 철수했다.
12월 明軍의 경리(최고지휘관) 楊鎬(양호)와 제독 麻貴(마귀)가 울산 西生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軍을 공격했으나 패전하고 경주 등지로 후퇴했다. 양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1597년 7월, 침략의 원흉 히데요시가 병사했다. 당시 가토는 울산에, 고니시는 순천에, 시마즈(島津義弘)는 사천에 포진하고 있었다. 왜군은 히데요시의 죽음을 철저히 숨기고 철수를 서둘렀다. 고니시의 왜성 정면에는 明將 劉綎(유정)이, 배후에는 이순신과 陳璘(진린)의 朝·明 연합함대가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퇴로가 끊긴 고니시는 사천에 주둔하던 시마즈에게 구원을 청했다. 시마즈의 함대는 조선 수군에게 대패했으나 이순신은 유탄을 가슴에 맞아 전사했다. 이런 가운데 고니시는 血路(혈로)를 뚫고 도주했다. 이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西厓의 失脚과 懲毖錄 집필
이순신이 전사한 10월18일, 西厓도 北人들의 탄핵을 받고 영의정 직책에서 파직당했다. 西厓의 파직은 宗系辨誣(종계변무)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종계변무란 명나라 태조실록과 大明會典(대명회전)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李仁任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치려는 일을 말한다. 이인임은 고려 우왕 때의 權臣으로 이성계에 의해 귀양을 갔다가 참수당한 인물이니 이성계와는 政敵관계다.
< 무술년(1598)에 宣祖는 宗系辨誣를 위해 西厓를 陳奏使(진주사)로 삼아 明 조정에 보내려 했다. 그러나 西厓는 어머니가 늙어서 가지 못한다는 말을 했더니 선조는 속으로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임금의 심기를 읽은 李爾瞻(이이첨) 등 北人들이 일제히 西厓를 공격했다. 南以恭(남이공) 등을 다음과 같이 상소하여 류성룡을 공격하기를, 다음은 「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의 관련 기사다.
< 『成龍은 본래 교묘·아첨하는 성질로서, 문필의 작은 재주를 꾸며서 오랫동안 국정을 專斷(전단)하고 조정의 권세를 마음대로 회롱하였습니다. 계사·갑오년에 賊勢가 겨우 후퇴하였고 兩湖(전라도·충청도)가 아직 온전하였으니, 만약 그때 중국에 호소하여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으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다시 회복하는 방책을 거의 볼 수 있었을 터인데, 먼저 화친하자는 말을 일으켜서 드디어 강화하는 계획을 이루어, 민심이 풀리고 국세가 부진하게 하여 오늘의 뭉크러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소위 主和誤國(주화오국), 이것이 국란 극복에 제1공을 세운 西厓에 대한 정적들의 공박이었다. 이어 西厓가 董卓(동탁: 後漢 末의 군벌)처럼 부정축재를 했다고 논박하는가 하면 西厓와 사이가 나빴던 鄭仁弘은 그의 門人 文弘道(문홍도)를 사주하여 西厓를 秦澮(진회: 南宋 때의 매국노)와 같은 자라고 몰아붙였다. 삭탈관직을 당한 西厓는 선조 32년(1599) 2월, 58세의 나이로 하회로 낙향했다. 그 후 그는 향리에서 저술과 후진 양성에만 몰두했다.
선조 33년(1600) 11월, 西厓는 풍원부원군의 직첩을 되돌려 받았지만, 上京하지 않았다. 그는 『사냥철이 지나면 토끼를 쫓던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권력세계의 메커니즘을 누구보다도 잘 터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1593년 明의 사신으로서 조선으로 들어와 초전 궤멸의 책임을 물어 宣祖를 퇴위시키고 직할통치를 기도했던 司憲(사헌)은 西厓의 설득에 의해 그 비밀공작을 포기했던 만큼 宣祖에 대한 西厓의 공로는 그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다. 그때 西厓는 『강을 건너면서 말을 바꿔 탈 수 없다』는 명쾌한 논리를 폈다.
후일 司憲은 『西厓는 山河再造之功(산하재조지공)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功이 높을수록 더욱 위험한 것이 파워 폴리틱스의 비정한 면인 것이다. 그는 조용히 물러나 징비록의 집필로 역사 앞에 자신을 소명하게 되었다.
선조 35년 4월, 그는 청백리로 뽑혀 「廉謹淸白錄(염근청백록)」에 이름이 올랐다. 권세를 잃은 西厓를 당시의 관료로서는 최상의 영예로 삼던 청백리로 올린 것은 그와 黨色을 달리하던 李恒福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당대의 문인 鄭經世는 이런 詩를 남겼다.
< 河上(西厓)이 남긴 것은 詩書뿐이니/ 자손들은 나물밥도 채우기 어려워라/ 어쩌다 10년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成都의 뽕나무 800주도 없었던가>
「成都의 뽕나무」 운운은 蜀漢(촉한)의 名宰相 諸葛亮(제갈량)이 임종 때 後主에게 『成都에 뽕나무 800그루와 거친 밭 15頃(경)이 있으니 자손의 衣食은 오히려 여유가 있다』는 유서를 쓴 데서 유래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갈 길을 묻고 싶어
西厓는 선조 40년(1607) 5월6일 향리의 3칸 草屋에서 6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西厓의 부음이 서울로 전해지자 1000여 명의 서울 백성들이 西厓의 옛 서울 집터에 모여 통곡했고, 조정에서는 사흘 동안 公休를 선포했다. 더욱이 서울 상인들은 나흘 동안 자진 철시하고 『우리를 살리신 宰相이 가셨다』고 슬퍼했다.
필자가 이번 답사에서 방문한 忠孝堂은 西厓의 별세 후 문하생과 士林들이 선생의 유덕을 받들기 위해 西厓의 손자 柳元之를 도와 지은 것이다. 충효당 취재를 마치고 나오니 종손 柳寧夏옹이 西厓를 모신 屛山書院(병산서원)과 西厓의 묘소를 안내하겠다며 필자 일행을 따라나섰다.
병산서원은 西厓가 31세 때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작은 書堂이었는데, 철종 14년(1871) 賜額書院(사액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의 누각으로 낙동강을 마주보는 晩對樓(만대루: 사적 제260호)는 200명은 넉넉히 앉을 만한 규모인데, 건축학 전공자들의 필수 순례지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필자는 西厓의 위패를 모신 병산서원의 尊德祠(존덕사)에 들러 참배했다.
이어 병산마을에서 풍산읍 쪽으로 15리 거리의 산 중턱에 있는 西厓 묘소에 올라가서 再拜(재배)를 올렸다. 國論과 가치관이 엇갈린 가운데 포퓰리즘(人氣迎合主義)만 횡행하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할지, 西厓 선생에게 그 길을 묻고 싶었다.●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 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