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회 한림원탁토론회 개최
기정학 시대, 한국의 과학기술혁신정책 방향과 대응전략은?
지정학(geo-politics)의 국제질서가 기정학(tech-politics)의 국제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합종연횡(合從連衡)에서 미·중 천하양분(天下兩分)으로, 세계화에서 대분열의 시대로 글로벌 경제·사회가 전환되고 있다. 이에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지난 3월 22일 ‘기정학(技政學) 시대의 새로운 과학기술혁신정책 방향’을 주제로 제208회 한림원탁토론회를 열었다.
유욱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은 개회사에서 “기술이 국제 정치를 좌우하는 기정학 시대에 기술패권과 기술주권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이라며 “우리나라도 변화하고 있는 세계 동향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과학기술 주권 확보뿐만 아니라 외교, 안보를 위한 전략적 혁신정책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오늘,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과학기술혁신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세계질서의 미래와 한국의 대응 방안은?
토론회 발표 첫 순서로 이승주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가 ‘세계질서의 미래와 한국’을 주제로 발제했다. 이 교수는 “현재 변화하고 있는 미·중 전략경쟁은 복합성 내지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서로에게 대한 존재적 위협으로 대응이 시급하기 때문에 패권 경쟁은 불가피하다. 다만, 그들은 패권을 다투는 관계 속에서도 고도로 상호 의존된 관계를 동시에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과거와 다른 특이점”이라며 “중국의 첨단기술 굴기에 대한 미국의 위협인식이 높아지면서 그것에 대한 우려가 과장, 과잉 안보화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 이유는 패권을 다투는 두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첨단기술은 현재의 경쟁력을 담보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미래의 경쟁력을 다투는 핵심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대중국 전략은 4가지 목표 아래 진행되고 있다. 첫째, 중국에 대한 취약성 줄이기, 둘째, 대중국 기술격차 유지, 셋째, 중국의 거대한 내수시장에 대한 접근성 유지, 넷째, 중국을 적절하게 다루기 위한 초크 포인트 확보 등이다. 이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국제협력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중 전략경쟁은 2018년 무역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결과 미국이 중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로부터의 수입 증가율이 빨라졌고, 만약 미·중 무역전쟁이 없었다면 미국은 지금의 중국 무역 규모보다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중국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좀 더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중국에 대해 강력하고 광범위한 견제 전략을 쓰는 시점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 상황에서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국제 정치 분야에서 한국의 대응 전략은 ‘경제적 통치술’이었다. 이는 경제와 안보를 연계하는 데 있어서 첨단기술을 전략적으로 활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 관점에서 한국이 추구했던 전략은 공급망의 복원력 강화와 한국 산업 전반의 다변화, 그리고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자급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이 교수는 “지금처럼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이익의 극대화보다는 리스크 관리가 중요하다”며 “하나의 기술과 정책, 국가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 균형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고 다양한 수단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신산업기술 정책 동향과 한국에의 시사점은?
토론회 발표 두 번째 순서로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가 ‘주요국의 신산업기술 정책 동향과 한국에 대한 시사’를 주제로 발제했다. 이 교수는 “IMF에서 나온 경제 전망 데이터를 보면, GDP 사이즈 면에서 올해 중국이 미국 대비 81%였고, 내년엔 85%가 예상되고 있다. 즉 지난 7년간 중국이 미국과의 격차를 매년 2.5포인트씩 줄여가고 있다는 것”이라며 “미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들과 비슷한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를 대면하게 됐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뿐만 아니라 글로벌공급망 면에서도 두 개의 다른 공급망 구조가 분화하는 식으로 천하양분이 됐는데 이것은 통상으로 성장한 한국에게는 굉장히 엄중한 상황이라는 것. 특히 미·중 갈등 이후 선진국 중심으로 경제 안보와 공급망 강화를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미국은 경제 안보를 중시하면서 그 일환으로 공급망 안정성도 고려하기 시작했다, 중국도 미국의 견제에 따른 공급망 안정과 경제 안보에 비중을 두고 있고, 독일은 인더스트리4.0 등을 통해서 기존산업 경쟁력 강화와 지속가능성을 중시해 왔으나 최근에는 기술 주권 논의와 공급망 안정도 중시함에 따라 3대 분야에 비슷한 비중을 두고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경제적, 비경제적 수단을 총동원하는 안보를 추구하는 미·중과 달리 한국은 독일처럼 국가 간 연대와 협력에 기반한 ‘공급망 확보’와 ‘기술 주권 확보’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이 교수는 “선진국들과의 기술 격차를 줄이기 위한 미래 성장산업과 기술 육성에는 여전히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며 “기존산업과 미래산업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산업정책을 지속하는 가운데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공급망 안정성 확보에 일단 단기적으로 가중치를 둘 필요가 있다. 즉 한국은 전략적 가치가 있는 기술 제품을 제조하는 역량이 핵심이기에 이를 최대한 잘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제조업에서의 공급망 안정성과 내재화”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기정학’에 대한 한국의 준비전략은?
토론회 세 번째 순서로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부&반도체공학과 교수가 ‘반도체 기정학’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권 교수는 “기정학이라는 개념이 설정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반도체 산업이다. 이는 자율주행차나 군사, 항공, 해양탐사 등 다양한 분야의 첨단산업은 물론 각종 제조업 분야에서 반도체가 전반적으로 필수재가 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러·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쓰이는 다양한 무기들에서도 첨단 반도체 사용 여부에 따라 전략적인 승수가 무려 100배의 차이를 내기 때문에 전쟁 발발 후 미국이 대러 제재로 제일 먼저 한 조치가 바로 첨단 반도체의 수출 통제였다. 즉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글로벌 반도체 산업 개편 이면에는 결국 산업 자체에 대한 개혁뿐만 아니라 기정학적인 고려가 들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반도체 산업 관련 문제에 대해 권 교수는 “지금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변동으로 인해 앞으로는 대중국 의존도를 점차 줄여나갈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갑자기 디커플링(탈동조화)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한국의 강점인 메모리 반도체와 일부 패키징쪽 제조에 있어서 필수적인 공정 장비들이 대부분 미국이나 일본, 네덜란드에 있는 소수의 회사들로부터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막힐 경우에 한국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라며 “미국의 반도체법에 따라서 보조금을 받으면서 미국 본토에 리쇼어링할 경우에 가드레일 조항에 따라서 생길 수 있는 불확실성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또 차세대 반도체에서의 기술 표준, 그리고 나아갈 방향들을 주도하길 원해 민관협의체를 중심으로 모든 표준의 지형을 바꾸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에 어떤 식으로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준비해야 할 전략은 무엇일까. 권 교수는 “반도체 산업을 중심으로 보면, 강점인 메모리반도체를 기반으로 하이테크 밸류칩을 만드는 전략으로 가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나 기정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일본의 소재, 부품, 장비업체들이 한국의 반도체 생태계로 편입되게끔 전략을 짜는 것도 사고의 전환 과정 중 하나라고 본다”며 “그동안 한국이 약점으로 생각했던 로직 반도체 공정, 칩설계, 장비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이 홀로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한국이 믿을 수 있는 파트너 기업이나 국가들과 로드맵을 그리면서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연구 안보 정책에 대해서도 조금 더 내밀성 있게 살펴봐야 한다. 단순히 기초과학뿐만 아니라 산업정책 관련해서도 이런 안보전략에 대해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피력했다.
기정학 시대, 한국의 과학기술정책 방향 토론
주제발표 후에는 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좌장으로 하고, 유준구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교수와 차정미 국회미래연구원 국제전략연구센터 센터장, KISTEP 미래기술전략본부 본부장, 유용하 서울신문 과학전문기자(한국과학기자협회 회장), 안준모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등이 패널로 참여한 가운데 △현재의 과학기술 정책 △기정학 시대를 대비하는 바람직한 거버넌스 방향 △외교적 협력 채널 강화 방안 등에 대해 토론했다.
유준구 교수는 “최근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각국은 과학기술혁신 전략과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역시 국가전략 차원에서 과학기술정책 방향을 설정해 이를 이행할 로드맵 수립, 법제도 보완, 추진체계 정비가 시급한 상황”이라며 “특히 외교안보 영역에서 기술패권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역량 강화가 절실하다. 즉 민간의 역량 강화를 바탕으로 민관협력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양자간 TTC 등 협력 플랫폼을 구축하여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해야 한다. 아울러 포괄적이고 융합적인 대응을 위해 국내적 역량을 강화하는 경우에, 전문가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네트워크 구축과 연구기관 간 컨소시엄 구축도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차정미 센터장은 “오늘날 국제질서의 특징은 과학기술과 연계된 정치가 현실이고 환경이다. 과학기술을 위한 안보·외교가 어떻게하면 선제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며 “과학기술 혁신과 첨단기술 기업들에 대한 안보와 외교적 환경을 조금 더 우호적으로 만드는 역할은 전적으로 국가의 몫이다. 기업보다 국가가 가지고 있는 외교나 정보 역량, 여러 가지 네트워크가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 더 적극적이고 선제적으로 과학기술과 관련된 글로벌 질서, 정세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이것들을 민간기업이든 과학기술 분야든 같이 소통할 뿐만 아니라 국가는 필요한 분야에서 외교적 역량과 여러 상업적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이처럼 다양한 측면에서 좀 더 혁신적인 국가의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피력했다.
유용하 기자는 “기정학이 강조되면서 과학기술정책의 예측 불가능성이 더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재작년 요소수 대란이 일어났던 때를 생각하면 기술 수준이 높은 분야가 아닌, 요소수 같은 단순한 기술 분야의 공급망 문제에도 나라 전체가 어수선했다. 따라서 국제경쟁력을 가진 부품과 기술뿐만 아니라 단순한 기술 분야에 대해서도 글로벌 공급망 체계에서 안정적이고 효과적으로 공급될 수 있도록 고민해야 된다”며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들에서 보면 과학기술과 정치가 같이 밀고 끌고 가는 분위기다. 밀월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과학은 정치 쪽에 좋은 대안을 제시하면서 자문에 적극적인 논리를 제공하고 정치는 과학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부분이 좀 부족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안준모 교수는 “기정학은 굉장히 풀기 어려운 이슈라서 다층 위에 체계적인 대응전략이 필요하다. 또 민간이 주도할 부분과 안보 이슈로써 전략체계에서 대응해야될 부분도 구분해야 한다”며 “외교적 협력 채널 강화가 필요하다. 현재 외교 채널에 기정학적 이슈를 잘 아는 과학기술전문가가 부족하다. 지금이 외교 채널과 전문가를 정비하고 보강할 타이밍이다. 또 과학 가치사슬을 구축해서 상품에 관한 관세 이슈가 원천기술 같은 업스트림으로 전이되도록 기초-원천기술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한된 분야에서라도 초격차를 유지해야 한다. DARPA식 임무 중심형 R&D 기관과 조직이 필요하고 퍼스트 무버형 R&D 사업과 평가도 필요하다. 민간 전문가 중심의 적극적인 기술 표준 주도는 물론, 부처 간 이해관계를 극복하는 임무 중심의 혁신정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